(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8/05/27)
프랑스 얘기가 나오니 오래전 옆집에 살았던 독일 가족이 생각나는군요. 고등학생 시절 옆집에 독일인 가족이 이사를 왔었습니다. 기술 고문으로 독일 함부르그에서 파견된 아빠와 엄마, 그리고 딸과 두 아들로 구성된 "파란 눈"의 가족이었습니다. 단독 주택을 더 좋아해서 아파트를 임대하지 않고 평범한 중산층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동네로 이사를 왔던 것입니다.
외국인 가족을 구경하기 어려웠던 시절에 "파란 눈" 이웃사촌이 생겨서 호기심이 대단히 발동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용기를 내어 혈혈단신으로 옆집 문을 두들겼습니다. 그 당시 감정을 나타내자면, (예쁜 독일 소녀에 대한 끌림 + 독일 문화에 대한 궁금증 + 영어 회화 실전연습) 정도가 되겠습니다. ^^ 가끔 찾아가면 그 집 부부는 우유를 섞은 맛있는 홍차와 독일 비스킷을 내놓고, 영어가 미숙한 저에게 독일에 대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한 시간 정도 친절하게 그리고 "천천히" 해주셨죠.
그 독일인 집과 급속도로 가까워질 수 있는 희한한 일이 생겼습니다. 제 공부방이 이 층에 있었는데 하루는 우연히 옆집 마당을 쳐다보니, 수상한 아저씨가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서성이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는데 그 아저씨가 사라졌습니다. 그 집으로 들어간 것이었죠. 그 가족을 아는 사람인지, 혹시 도둑인지 고민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그 집으로 전화했습니다. 지인이라면 전화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죠. 전화를 안 받더군요. 조금 지나서 그 아저씨가 마당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을 걸었습니다.
"아저씨, 독일인 가족 아시는 분이세요?"
당황하는 기색이 완연했던 그 아저씨는 어버버 하면서 재빨리 그 집을 떠났습니다. 조금 뒤, 독일인 가족이 귀가했고, 또 조금 뒤 경찰차가 등장했습니다. 도둑이 들었던 것이죠. 옆집을 방문해서 자초지종도 설명하고, 경찰에게 서투른 통역 서비스도 제공했답니다. 독일인 엄마가 패물 함을 보여주면서 자기들도 이상하게 생각했다더군요. 일부 분실한 것이 있는데, 가장 값비싼 패물들은 온전해서 의아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도둑의 행보에 브레이크를 걸어서 피해를 최소화시켰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하더군요.
그날 저녁에 고맙다고 저를 초청해서 귀한 술을 한 잔 권하더군요. 고등학생은 술 마시면 안 된다고 극구 거절했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는 100년 된 술이라고 딱 한 잔만 마시라고 해서 꿀꺽했는데 독해서 식도가 타는 줄 알았습니다.^^ 그 술에서 난 화장품 향기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나중에 부모님께 부탁해서 그 독일인 가족을 초청하여 저희 집에서 잔치를 벌인 적도 있었습니다. 한 상 가득 차려내니 신기한 듯이 계속 사진을 찍고 난리였습니다.
도둑 해프닝이 벌어진 다음에는 그 집을 무단 방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습니다. 저는 예쁜 외국인 소녀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그렇게는 잘 안되더군요. 제 영어가 짧아서 그런 고도의 "작업"을 하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목표는 그 독일 소녀였는데, 중후한 외국인 아저씨, 아줌마 친구를 사귀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년이 지나서 그 가족이 독일로 돌아가야 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자리에서 후일 외교관이 되면 독일로 가서 다시 찾아뵙겠다는 인사를 했는데,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이런 에피소드로는 TV의 사람 찾기 소재는 안 되겠죠? ㅎㅎㅎ
(대문에 건 그림과 글 내용이 일치하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ㅠ.ㅠ)
제자*오
답글삭제(2008/05/27 20:02) 그 소녀에게 박사님은 아빠, 엄마의 친구일뿐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하신 건 아닌지? ^^ 특파원 분위기의 사진으로 추측하건대 아저씨, 아줌마와 열심히 인터뷰하시는 모습만 상상됩니다.ㅎ
ps.박사님, 제목 앞에 '90.' 은 무슨 뜻이 담겨 있나요?
안병길
(2008/05/28 00:18) ㅎㅎㅎ 다시 생각해보니 문화부 특파원 비스무리했던 것도 같습니다. 게시판에서 선배님께 처음 인사드리고 벌써 100일이 훌쩍 지났습니다. 이 글은 90 번째 포스팅입니다. ^^
이준구
(2008/05/28 09:56) 아, 그래서 90이란 숫자가 붙었군요. 난 무슨 연도와 관련 있는 숫자인 줄 알았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아무 것도 깜새를 차리지 못하겠더군요. 안박사, 그 짧은 시간에 90번이나 글 올려 주셨다니 너무나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올려 주시구요.
ps. 안박사 같은 분이 몇 분만 더 계셨더라면 하는 욕심을 부려 봅니다.
안병길
(2008/05/28 10:28) 처음에 선배님께서 매일 하나씩 사흘 동안 글 올리기를 요청하셨을 때, 마음 속으로는 100 개 정도 올려야 제대로 신고식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이제 신고식 목표량에 거의 도달했습니다. ^^ 일전에 말씀 드렸듯이 여기서 대화를 하면서 저도 얻는 것이 많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선배님과 이곳의 친구들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고맙습니다.
윤준현
(2008/05/28 12:39) 가르쳐 주시는 게 매우 많으신 박사님~~ 예전에 공주가 있는 게임만 하셨다고 하셨는데... 삼국지 시리즈에도 공주 요소 있어요~~ 초선, 그야말로 드라마 같은 비극적인 삶을 산 견부인 등... 해보세요~~ 만일 보내주시길 원하신다면 버쳐 씨디를 엠에센으로 전송해 드릴 용의도 매우 많습니다~~ 어느 서울대 조교수님께서도 수업시간에 "아 그거 중독성 있네... 내가 지금 그거 밤 새고 하고 왔어"라고 하셨다는 말이 있던데... 제자*오 선배님도 해보세요~~~ 근데... 제가 왜 이러고 있죠?? 뭔가 공통점을 만들려는 발악을 하는 거 같다는.. 하향평준화;;; 쿨럭;;;; 뭐 삼국지 11 쯤 되니까 한 번 통일하고 나니 공부하기보다 싫어지긴 합니다만;;;
재미있는 건 이 삼국지 시리즈가 한국의 천재적 네티즌들에 의해 무단 복제되어 배제 가능성이 허물어지면서 공공재처럼 되어 버려 삼국지 11 파워업 키트 한국어판이 공급이 중단이 되어버린 현상이 나타난 겁니다... 삼국지 6 이후로는 정품을 쓴 적이 없는 저도 이에 상당한 공헌을 하긴 했습니다만;;; 지난 번 1차 끝나고 역시 복제 씨디 받으려고 했다가 삼국지 11 파워업 키트 한국어판이 아예 안 나와서 해보지도 못했어죠... -_-
안병길
(2008/05/28 13:04) ㅎㅎㅎ 준현님 제안은 고마운데,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하죠. 요즘은 게임에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아요. 아직 청춘이신 선배님 앞에서 할 얘기는 아니지만, 늙는다는 증거인 것 같아서 조금 처량합니다. 어릴 때부터 어깨너머로 배워서 바둑을 두었는데요, 인터넷 7 단제에서 2~3단 정도 둡니다. 그런데 이것도 재미가 없어진지 오래 됐네요. 삼국지 받아서 통일 몇 번 시킨 것으로 해주세요. ^^
아, 그 독일 소녀 이름이 Gudrun이었습니다. 북구 신화에 나오는 공주 이름이죠. 바그너의 장편 악극 "니벨룽겐의 반지"가 북구 신화를 기반으로 작곡되었다고 합니다.
조석우
(2008/05/28 15:13) 저 그림이.. 젤다의 전설 맞죠?? ㅎㅎ 저는 훼미리 시절(정확한지 모르겠는데. 여하튼 16비트..) 해봤어요..^^
안병길
(2008/05/28 22:00) 맞아요, 오카리나를 불고 있는 링크와 젤다 공주님이 보이죠. ^^ 저는 64비트 3D 버전만 해봤습니다. 슈퍼마리오와 마찬가지로 이야기 전개, 그래픽과 배경 음악이 마음에 딱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