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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11일 화요일

[수필] 90. 독일 소녀에 대한 회상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8/05/27)

프랑스 얘기가 나오니 오래전 옆집에 살았던 독일 가족이 생각나는군요. 고등학생 시절 옆집에 독일인 가족이 이사를 왔었습니다. 기술 고문으로 독일 함부르그에서 파견된 아빠와 엄마, 그리고 딸과 두 아들로 구성된 "파란 눈"의 가족이었습니다. 단독 주택을 더 좋아해서 아파트를 임대하지 않고 평범한 중산층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동네로 이사를 왔던 것입니다.

외국인 가족을 구경하기 어려웠던 시절에 "파란 눈" 이웃사촌이 생겨서 호기심이 대단히 발동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용기를 내어 혈혈단신으로 옆집 문을 두들겼습니다. 그 당시 감정을 나타내자면, (예쁜 독일 소녀에 대한 끌림 + 독일 문화에 대한 궁금증 + 영어 회화 실전연습) 정도가 되겠습니다. ^^ 가끔 찾아가면 그 집 부부는 우유를 섞은 맛있는 홍차와 독일 비스킷을 내놓고, 영어가 미숙한 저에게 독일에 대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한 시간 정도 친절하게 그리고 "천천히" 해주셨죠.

그 독일인 집과 급속도로 가까워질 수 있는 희한한 일이 생겼습니다. 제 공부방이 이 층에 있었는데 하루는 우연히 옆집 마당을 쳐다보니, 수상한 아저씨가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서성이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는데 그 아저씨가 사라졌습니다. 그 집으로 들어간 것이었죠. 그 가족을 아는 사람인지, 혹시 도둑인지 고민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그 집으로 전화했습니다. 지인이라면 전화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죠. 전화를 안 받더군요. 조금 지나서 그 아저씨가 마당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을 걸었습니다.

"아저씨, 독일인 가족 아시는 분이세요?"

당황하는 기색이 완연했던 그 아저씨는 어버버 하면서 재빨리 그 집을 떠났습니다. 조금 뒤, 독일인 가족이 귀가했고, 또 조금 뒤 경찰차가 등장했습니다. 도둑이 들었던 것이죠. 옆집을 방문해서 자초지종도 설명하고, 경찰에게 서투른 통역 서비스도 제공했답니다. 독일인 엄마가 패물 함을 보여주면서 자기들도 이상하게 생각했다더군요. 일부 분실한 것이 있는데, 가장 값비싼 패물들은 온전해서 의아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도둑의 행보에 브레이크를 걸어서 피해를 최소화시켰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하더군요.

그날 저녁에 고맙다고 저를 초청해서 귀한 술을 한 잔 권하더군요. 고등학생은 술 마시면 안 된다고 극구 거절했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는 100년 된 술이라고 딱 한 잔만 마시라고 해서 꿀꺽했는데 독해서 식도가 타는 줄 알았습니다.^^ 그 술에서 난 화장품 향기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나중에 부모님께 부탁해서 그 독일인 가족을 초청하여 저희 집에서 잔치를 벌인 적도 있었습니다. 한 상 가득 차려내니 신기한 듯이 계속 사진을 찍고 난리였습니다.

도둑 해프닝이 벌어진 다음에는 그 집을 무단 방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습니다. 저는 예쁜 외국인 소녀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그렇게는 잘 안되더군요. 제 영어가 짧아서 그런 고도의 "작업"을 하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목표는 그 독일 소녀였는데, 중후한 외국인 아저씨, 아줌마 친구를 사귀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년이 지나서 그 가족이 독일로 돌아가야 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자리에서 후일 외교관이 되면 독일로 가서 다시 찾아뵙겠다는 인사를 했는데,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이런 에피소드로는 TV의 사람 찾기 소재는 안 되겠죠? ㅎㅎㅎ

(대문에 건 그림과 글 내용이 일치하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