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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9일 금요일

[자유] 룻쏘 일병 구하기

(올해 7월 초에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이 부재중이셔서 제가 임시로 운영보조를 맡고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 제 활동에 대한 자평과 함께 게시판의 상황을 자유주의 꽃밭으로 평가했습니다. 룻쏘를 활용하여 게시판 개선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를 살펴보았지만,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평등을 보충하는 데 룻쏘를 활용했음을 설명했습니다. 또한, 집체주의에서는 정치적 조작으로 새로운 세상을 고안하는데 룻쏘를 원용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간략하게 설명했습니다. 2009/07/08, 원 제목: 게시판 평가 및 룻쏘 일병 구하기)

(1) 게시판 운영자의 권한은?

주어진 권한을 행사하지 않는 것도 어쩌면 “방종”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지금 임시 “대빵?”^^인 데요, 그렇다면 어떤 권한을 제가 갖고 있을까요? 무소불위의 권한일까요? 하루에 글을 10개나 올려서 도배해도 괜찮은 권한일까요? 이 점을 알아내려면 지금까지 교수님께서 어떻게 이 게시판을 운영하셨는지 참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제가 이 게시판에 처음 등장했던 작년 2월에는 회원제가 아니었죠. 실명이든, 필명이든 마음대로(자유) 골라서 써넣은 다음, 글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아주 이상적인 자유 세상의 틀이었습니다. 그렇게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회원 가입의 귀찮은 과정도 없이, 우연히 들렀다가 필이 팍 꽂혀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올리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좋은” 글은 많으면 많을수록 이 게시판의 효용이 올라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평화로운 세상이 어느 순간 깨어졌단 말씀입니다. 따라서 교수님께서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하시고, 전격적으로 회원제를 도입하셨습니다.

(2) 룻쏘 살리기 (병 주고 약 주기?)

룻쏘가 억울할 수도 있기 때문에 룻쏘를 약간 구명하고자 합니다.^^ 사상가들은 말을 많이 쏟아 놓기 때문에 발췌 신공을 적절히 활용하면 친구가 되었다, 적이 되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회원제 이전과 이후를 나눠보시죠. 보는 시각에 따라서 이전이 더 아름다워 보일 수 있고, 그 이후가 더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지금 상태가 좋지만, 자유주의자인지 방종주의자인지는 몰라도 과거가 더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회원제 이전으로 돌아가라!”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죠?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룻쏘의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현재 상황이 옛날 자연 상태보다 여러 면에서 열등하다면, 그렇게 주장할 수 있죠.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자연 상태로 돌아가면, 홉스가 등장합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될 가능성을 홉스가 제기할 것입니다. 그래서 홉스의 주장을 따라서 이번에는 사회 계약으로 국가를 만들면, 큰 칼을 든 괴물이 한 명 등장하는 것이죠. 그 괴물이 플라톤의 철인 왕이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네로나 히틀러라면, 어머나, 어머나, 어쩌나, 어쩌나가 됩니다.

(3) 룻쏘의 재해석 및 활용

따라서 룻쏘의 “돌아가라!”라는 이야기를 잘 해석해야 합니다. 룻쏘가 관찰하기에 자신이 살고 있었던 세상이 너무 불평등한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기분이 아주 안 좋아졌죠, 그래서 일종의 강조법을 사용합니다. 이럴 바에야 그 옛날 자연 상태가 더 좋으니 그 정신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입니다. 더욱 평등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었죠.

룻쏘의 이런 피맺힌 고언은 후대 사람의 입장에서는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사람이 냉정하고 (경제학적으로) 합리적이라서, 그 주장을 이기적으로, 자기 입맛대로 갖다 붙입니다. 크게 두 진영이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집체주의 진영입니다. 민주주의 진영에서는 자본주의를 수정, 보완하는 데 룻쏘를 끌어다 활용합니다. 복지도 강화하고, 부자들에게 세금도 더 때리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명시적 보호도 보충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이죠. 그 결과가 현재의 북유럽 나라들의 모습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것도 무슨 이타적인 행위의 결과가 아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수를 이루는 민중들이(1인 1표로) 갈아엎을 가능성이 농후하니까, 힘에 밀려서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룻쏘가 이 부분에서는 공을 크게 세웠습니다. 인정합니다. 고마워요, 룻쏘!

(4) 한편 다른 진영에서는...

집체주의 진영은 룻쏘를 활용하여 가공의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크게 보면 파시즘 쪽이 있고, 처음에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적으로 집체주의에 빠지게 된 사회주의/공산주의 쪽이 있습니다. 라이커 교수님이 룻쏘를 비판하는 것은 이 부분이라는 것은 금방 눈치채시겠죠?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의 끝을 단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그 정치 이념의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인간들에 의해서 정치 질서는 바뀔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반면에 공산주의는 역사의 끝을 상정합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완성되어서 인간 소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상태가 공산주의가 말하는 역사의 종착점입니다. 이 포인트가 바로 칼 포퍼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핵심입니다. 역사의 끝이 어디 있노?라고 되묻는 것입니다. 아주 적절한 문제제기입니다. 공산주의 비판을 하려면 포퍼식으로 하는 것이 제대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공산주의를 무슨 피 빨아 먹는 요괴로 그리면, 권위주의 때문에 생각이 굳은 상태에서는 머리에 쏙쏙 들어가지만, 나중에 자아를 다시 깨닫고, 자유를 제대로 고민하게 되면, “빨갱이?” 그것 조금 이상하네... 이렇게 됩니다. 실상을 알고 나서는 반작용으로 오히려 자발적 공산주의자가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그런 것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죠. 머릿속에서만 공산주의자라면, 태클을 걸 수도 없고, 걸 필요도 없죠.

(5) 그래도 지구는 돈다?

어떤 사람은 역사의 끝이 있다!라고 외칠 수도 있겠습니다. 핼리인지 섈리인지 혜성처럼 큰 덩어리가 지구를 꽝 치면, 그것이 역사의 끝이다!라고 그 증거를 갖다댑니다.^^ 누가 그것을 모릅니까?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죠.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정치 질서를 따지고 있죠. 이 말도 어디서 많이 들어봤네요.

(6) 히레스쎄티션과 정치적 조작

링컨이 말 하나는 참 잘했습니다. 그래서 라이커 교수님이 링컨을 Heresthetician 최고봉 중 한 명으로 칭찬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히레스쎄티션... 저도 이 괴이한 단어를 정학하게 발음할 자신이 없습니다. 라이커 교수님이 직접 발음하시는 것을 강의 시간에 들어봤지만, 들어서 모두 따라 할 수 있다면 세상에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의제 설정을 통하여 정치적 조작을 잘하는 사람을 히레스쎄티션(?)이라고 라이커 교수님이 정의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수사(설득)에 능한 사람이 아니고요, 무슨 말을 해서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는(유리한 전략적 상황을 도출) 일종의 전략가입니다. 영어 사전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교수님이 그리스 어를 참조하여 만드셨거든요. 히레스쎄티션이 보여주는 정치적 조작술을 Heresthetic이라고 합니다. 발음 한번 시도해보시길... 저는 싫네요. 이 단어 한번 발음하고 나면 제 영어실력에 대해서 회의가 왕창 듭니다.^^

마르크스는 나름대로 훌륭한 수사를 구사했지만, 정치 조작가는 아니었죠. 마르크스를 활용하여 정치 조작가로 성공한 대표적인 사람이 레닌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7) 원위치!

또 삼천포로 빠졌습니다. (저는 삼천포와 어떤 감정 관계도 없습니다. 사람이 쓰기에 그냥 따라서 썼습니다. 삼천포 출신들의 양해 바랍니다.^^) 제가 하려던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기억이 어렴풋해서 방금 스크롤 하여 위에 올라갔다 다시 왔습니다.^^

(8) 자유주의 꽃밭, 이 교수님 게시판

따라서 룻쏘를 이 교수님 게시판 개선에 긍정적으로 활용하려고 해도, 이전의 비회원제 상태로 돌아가서, 다시 홉스가 등장하는 순환을 거듭하면 당연히 안 되겠죠. 제가 보기에 별로 개선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 현재 상태가 이상형은 아니지만(현실에 이상형은 구현 불가능에 가깝죠), 매우 바람직한 상태로 운영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의 제도로 최대한의 자유주의적 자율이 이뤄지고 있다고 봅니다. 준 익명도 허용되고 있죠.

교수님께서 홈피 주인으로서 권한을 과하게, 아니죠, 보통 이상으로 행사하시는 것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일전에 방종의 느낌을 진하게 주는 어느 회원의 글을 삭제하실 때도 노심초사에 노심초사를 거듭하셨죠. 그리고 최종결정을 하시기 전에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이상적인 것은 아니지만(자진 삭제가 아니므로), 개인 홈피 주인으로서 당연히 그런 권한을 갖고 계시고, 그렇게 하셔야 되는 시점이라고 의견을 드렸습니다. 또 다른 분들의 의견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다음에 다른 수단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시고, 그 회원에게 제재를 가하신 것이죠. 결과는 평화였습니다.

자유주의, 어디 멀리서 찾으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있는 이 공간이 자유주의를 제대로 하는, 교수님께서 공들여 가꾸고 계시는 사회대 옆 화초 텃밭과 같은 곳입니다. 게시판 모든 분의 자율적인 “참여”와 교수님의 탁월한 감각으로 이런 행복을 이뤄냈다고 생각합니다.

(9) 스스로 평가

제가 운영자를 임시로 맡은 약 열흘 동안의 행보를 교수님의 평소 운영과 스스로 비교해볼 때, 약간의 방종 기미가 있다는 자책인지, 자학인지가 조금 들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열흘 동안 매일 이런 장문을 올리신 적은 없잖아요.^^ 교수님께서 일일이 댓글에 코멘트를 해주시는 것은 제가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들의 홍수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ㅜ.ㅜ 이 점에서 저는 약간의 방종을 저질렀다는 의혹을 스스로 생각해볼 수가 있겠습니다. 아직 어느 회원분도 명시적으로 제 행보를 방종끼(?)가 있는데...라고 제기하신 분이 없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격려를 많이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종 판정은 교수님께서 내려주실 것 같습니다.^^

(10) 드리고 싶은 질문

제가 서울에 들어가서(빨리 들어가고 싶어서 짬만 나면 열공 중입니다^^) OO 씨와 약속한 집담회에 서게 되면, 간단한 인사를 드리고 다음과 같은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저도 자유인이고, 여러분도 자유인입니다.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제가 커밍아웃하는 것으로, 보는 시각에 따라서 제 사생활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저에게 들으신 이야기는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제가 드린 말씀을 옮기는 자유를 만끽한다면, 그 사람의 행위는 방종인가요, 자유인가요? 그것이 오늘의 질문입니다. 정답이 없습니다. 각자 입장대로 주장하면 그것이 정답입니다. 자유민주주의에는 절대적 잣대는 없습니다. 상대적 줄자만 있습니다.^^ 단, 적절한 근거는 있어야겠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이틀 정도 이 문제를 갖고 고민을 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의견을 참조하면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기적인 마음에, 이렇게 장문의 글도 적고 끝에 부탁도 드리고 있습니다. 공짜는 없으니까요. 도와주세요. 꾸벅~ (부탁할 때는 비굴 모드라고 있습니다. 굴비 사촌이죠.^^) //

2009년 10월 6일 화요일

[자유] 라이커 교수님과 자유주의 전통

(2009년 7월 3일부터 5일까지 사흘에 걸쳐서 작성하여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에 올린 시리즈의 첫 글입니다. 게시판의 한 회원이 링컨을 평가해달라고 요청해서 준비했습니다. 정치학이나 국제정치학에 대해서 기본 지식이 없는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참조할만한 정치학 상식에 대해서도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원 제목: 링컨의 정치적 조작: 말의 향연 (1), 2009/07/03)

(1) 자유주의자 라이커(William H. Riker) 교수님

일전에 말씀드린 제 사부 중에 라이커 대 사부께서 합리적 선택을 정치학에 접목시킨 태두로 평가받는다는 이야기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또한 이 교수님과 같은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자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어설프게 자유라고 하면 폭주족과 같은 마음대로 하는 사람을 연상하기 쉬운데, 그 사람도 자유를 즐길 권리가 있기는 하죠.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렇습니다. 남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다른 사람의 태클이 들어와서, 혹시 방종은 아닐까?라는 경계선 문제가 제기됩니다. 심하면 경찰서에 잡혀가서 조사받고, 모종의 처벌을 받아서 방종으로 최종 판정을 받습니다. 그런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그들의 행위는 자유가 아닌 것으로 사후적으로 확인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와 방종의 구분은 어떤 경계선 이전에는(사전적으로는, ex ante) 뒤섞여 있고, 그 이후의 적절한 조치에 의해서(사후적으로는, ex post) 정확한 판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폭주족 같은 경우 애매모호할 때는 자유주의자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자유족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그런데 애매모호하지 않은 자유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라이커 교수님 같은 경우죠.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분 같았습니다. 조용히 연구와 강의만 하시고, 복도에서 마주 지나칠 때도 잔잔히 미소와 함께 목례를 나누는 분이셨죠. 저와 마주칠 정도가 되면 오히려 노교수님께서 먼저 벽 옆으로 서시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경우와는 좀 다르죠. 우리는 학생들이 벽에 착 붙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미국의 거리를 걸으면 서로 몸을 접촉하는 것을 심하게 꺼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반면에 우리는 너무 정이 많아서 그런지 접촉하는 것을 예사롭지 않게 생각하죠. 미국 사람이 왜 그렇게 조심하겠습니까? 자유가 방종으로 변할까 걱정해서 그러는 것이죠. 신체 접촉이 일어나면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항의하게 되죠. 혹시 너 방종 아냐?라고 문제 제기를 하는 것입니다. 옛날 유럽 같으면 결투를 벌여야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될 수 있죠. 그 사람이 조심하는 것은 착해서 그렇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문화적인 현상이지만 근저에 깔린 합리성은, 상호 간의 자유가 부딪힐 때 자신에게 큰 화가 닥칠까 봐 우려해서 그런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라이커 교수님이 학생들을 잘 챙겨주셨다는 것은 이미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이 교수님과 이미지가 비슷한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자유를 그냥 마음대로 하는 것으로 쉽게 생각해서 거친 사람을 자유주의자에 가까운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정반대의 분들이 자유주의자에 가깝습니다. 마음대로 하는 사람은 권위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크죠. 이것이 왜 그러냐면 내가 마음대로 하는 자유가 상대방에게 피해를 준다면, 상대방은 그것을 마음대로 응징할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런 보복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줄이려면 오히려 자신의 자유를 절제해야 합니다. 또한, 상대방에게 더 잘해주려고 해야 합니다. 교수님들이 무슨 행복을 최고로 치겠습니까? 교수님마다 다르겠지만 제자들이 잘되는 것을 보는 행복도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라이커 교수님도 그런 행복을 추구할 자유를 갖고 계셨죠. 제자들이 잘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교수님들이 제자들에게 잘해줘야죠...^^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이타적인 행위를 이기적인 자유행위로 설명하는 것이 로체스터 학파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경제학을 빼다 박았습니다.^^ 학생들에게 잘 대해주는 교수님들이 합리적이십니다.

그런데 저는 왜 만날 이 모양 이 꼴일까요? 하라는 링컨 이야기는 하지 않고 뜬금없이 다시 자유, 방종, 이타적, 이기적, 이런 잡설을 늘어놓는 것일까요? 그것은 링컨의 정치적 행보를 이기적인 자유주의자 관점에서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2) 라이커 교수님의 저서: Liberalism against Populism

라이커 교수님이 중요한 저서를 여러 권 남기셨는데, 그중에 저는 특히 두 권의 책을 사랑합니다. 한 권은 이미 아래에서 소개되었죠. Liberalism against Populism이라는 책인데 전통적인 정치학 관점에서 보면 이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주류 정치학의 일파로 인정받고 있죠. 처음 서론 몇 장을 제외하고는 전체가 투표 이야기입니다. 애로우(Kenneth Arrow) 교수님의 불가능성 정리를 정치학적으로 해석하고 확인한 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간단한 민주주의 원칙들을 제시하고, 그 원칙들을 여러 투표 방식들이 어떤 면에서 어기는지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례들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돌고 도는 세상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정치적 선택에서 절대적으로 옳은 것을 일반적으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또 다른 버전의 불가능성 주장이 제기되고, 애로우 교수님의 연구 결과가 더 확고해집니다. 콩도르세(Nicolas Marquis de Condorcet)의 “투표의 역설(Paradox of Voting)” 연장선에 있는 연구입니다. 공공선택에 관심이 있는 분은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책 제목에서 암시하는 것은 집체주의는 경계해야 하고, 자유주의를 잘 운영해야 된다는 그런 뜻이겠죠. 그러면 라이커 교수님이 말씀하신 자유주의의 요체는 무엇일까요? “돌고 도는 세상”이라는 말씀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에는 절대적인 정답이 없다.”로 저는 표현하겠습니다. 상대적으로 더 옳은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지 모든 잣대를 꿰뚫는 만병통치약 같은 정치 제도는 이 세상에 없고, 그런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엉터리”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주장하셨다고 저는 나름대로 해석합니다. 그런 “엉터리”가 좋아하는 이념이 집체주의(Populism)라는 것이죠.

(3) 룻쏘 (J. J. Rousseau)에 대한 해석

룻쏘가 라이커 교수님께 야단을 좀 맞습니다. 너는 왜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반의지(General Will, Volonté Générale)”라는 녀석을 제시하여 “혹세무민”했느냐고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룻쏘가 누구입니까?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그 룻쏘, 아닙니까? 룻쏘는 그러겠죠.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아니었는데라고요. 사상가들은 억울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후대에 어느 시각에서 들여다보느냐에 따라서 “엉터리”가 되었다, “황금 열쇠”가 되었다 하니까요.^^

그런데 적어도 경제학자들은 라이커 교수님의 룻쏘 해석에 동의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애로우 교수님의 주장도 라이커 교수님 주장과 같거든요. 노벨상 받으셨죠?^^ 정치학 쪽에서는 룻쏘에 대한 평가가 엇갈립니다. 자유주의 학자인 칼 포퍼(Karl Popper, <열린 사회와 그 적들>)나 라이커 교수님은 강하게 비판하죠. 포퍼는 룻쏘를 공산주의자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죠. 포퍼도 비판을 받기는 받습니다. 너무 자신의 프레임에 정치철학자들을 맞췄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포퍼에게 걸리면 플라톤도 별수 없는 유사 공산주의자가 되는 정도이니까요. 그 반면 정치 공동체를 선으로 보는 사조에서는 룻쏘가 제대로 된 사상가로 평가됩니다. 어느 쪽으로 가실 것인지는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저는 저에게 그렇게 친절하게 해주신 라이커 교수님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4) 공동체 자유주의?

최근에 어떤 학자께서 공동체 자유주의라는 개념을 설파하고 계신다는데, 저 같은 교육을 받은 사람은 그 말을 딱 듣자마자, 혹시 룻쏘? 이런 생각이 팍 듭니다. 자유와 공동체를 엮어 놓으면 매우 어색한 개념이 됩니다. 자유주의면 자유주의이고, 공동체면 공동체이지 그것을 묶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책을 읽어보니 비판을 할 수가 없더군요.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주장을 해놓으니 무엇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아, 예~하고 말았죠.^^

공동체라는 상위 개념을 두는 것 자체가 진정한 자유주의에 어긋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공동체에 의해서 자유가 구속된다면 그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유는 자유에 의해서 구속되는 것이 자유주의의 핵심입니다. 개인주의 사상이라는 것이죠. 사람을 공동체로 묶어서 한 덩어리로 만드는 순간, 개인의 자유는 적어도 조금이라도 더 훼손될 수밖에 없죠. 그럼 국가는? 국가가 어떻게 일반적인 정치 공동체입니까? 여러 이익이 상충하는 큰 정치 집단일 뿐이죠. 통일도 반대하는 사람이 있죠. 평화 시 국가를 정치 공동체로 간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무엇을 제시하여 하나로 모을 수 있는지 저에게 예를 보여주시면 경품을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경우가 월드컵 4강 신화의 축구 정도가 될 텐데, 그것은 정치 이벤트가 아니죠. 또한, 더 엄밀히 따지자면, 축구 때문에 열광하는 사람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 정도인데 정치에서 무슨 국가 공동체 타령인지 모르겠습니다. 종교에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국가 운명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지구가 멸망하면 모두 끝입니다. 그런 의미라면 공동체 아닌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유는 자유이지,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을 하고 자시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열심히 사는 것이 자유주의의 모습입니다. 이기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 조화를 이루는 것이 자유주의의 정답입니다. 만약 그것을 공동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언어의 유희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십시오. 그렇게 해도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정답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자유주의입니다. 어설프게 국가 공동체를 위한다든지,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든지, 국가이익을 위한다든지, 우리는 운명 공동체 등의 주장으로 무장하여 가스통을 들고 설치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긍정적이고 건설적입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정치사에서 국가 전체적으로 평화 시에 정치적 공동체에 근접한 사례가 딱 한 번 나옵니다. 1980년 광주에서 나왔다고 저는 봅니다. 그런 것이 유사 공동체입니다. 그 부분에서는 룻쏘가 일정 부분 맞는다고 제가 인정해줄 용의가 있습니다. 그 이외에는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물론 북한에서는 룻쏘를 아주 사랑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 전체가 주체사상에 입각한 유사 공동체 아닙니까? 주체사상을 일종의 일반의지로 간주해도 큰 무리는 없겠습니다.

서설이 끝이 나지 않네요. 자유주의 전통이 그렇습니다. 여기에다 홉스, 로크(John Locke), 밀(John Stuart Mill),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기타 등등까지 언급하자면 여러분이 저를 방종으로 밀어붙일 것 같아서 자제하렵니다. (사실은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빠져나갈 때 저는 이런 못된 수법을 씁니다. ㅋ)

(5) 라이커 교수님의 다른 저서: The Art of Political Manipulation

두 번째 책이 오늘 주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휴~ The Art of Political Manipulation이라는 쪽 수가 별로 많지 않은 명저입니다. 이 책의 첫 번째 장이 링컨 이야기입니다. 반가우시죠, 링컨 이름이 나오니까. 음, 책 제목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어떻게 번역할까요? 정치적 조작의 기술(혹은 술수)? 정치조작술? 정치적 조작의 예술? 정치공학? 정치공학술? 정치공작? 정치공작술? 골라 골라 골라서 댓글로 올려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부담은 가지지 마십시오. 그냥 재미로 해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글 제목은 정치적 조작으로 되어 있는데 구애받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후다닥~

(왜 여기서 멈추는지 궁금하시죠? 다음이 설명하기가 매우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시간 벌기 작전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그 책의 제 1장을 읽어 보시오.”라고 하면서 끝내고 싶지만, 너무 무성의하겠죠. 제가 쉽게 설명드리도록 짱구를 굴려 보겠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방학을 즐기십시오. 찜통더위에 시원한 수박을 찾으셔야지, 웬 링컨 컨티넨탈 자동차를 찾으십니까. 아, 8기통이니까 강력한 에어컨이 있겠군요. ㅋ) //

2009년 9월 3일 목요일

[자유] 우리나라 정당의 공동체 지향 (3)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공동체 자유주의에 대해서 저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http://tinyurl.com/ahn-lincoln1)

"최근에 어떤 학자께서 공동체 자유주의라는 개념을 설파하고 계신다는데, 저 같은 교육을 받은 사람은 그 말을 딱 듣자마자, 혹시 룻쏘? 이런 생각이 팍 듭니다. 자유와 공동체를 엮어 놓으면 매우 어색한 개념이 됩니다. 자유주의면 자유주의이고, 공동체면 공동체이지 그것을 묶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책을 읽어보니 비판을 할 수가 없더군요.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주장을 해놓으니 무엇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아, 예~하고 말았죠.^^

공동체라는 상위 개념을 두는 것 자체가 진정한 자유주의에 어긋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공동체에 의해서 자유가 구속된다면 그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유는 자유에 의해서 구속되는 것이 자유주의의 핵심입니다. 개인주의 사상이라는 것이죠. 사람을 공동체로 묶어서 한 덩어리로 만드는 순간, 개인의 자유는 적어도 조금이라도 더 훼손될 수밖에 없죠. 그럼 국가는? 국가가 어떻게 일반적인 정치 공동체입니까? 여러 이익이 상충하는 큰 정치 집단일 뿐이죠. 통일도 반대하는 사람이 있죠. 평화 시 국가를 정치 공동체로 간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무엇을 제시하여 하나로 모을 수 있는지 저에게 예를 보여주시면 경품을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경우가 월드컵 4강 신화의 축구 정도가 될 텐데, 그것은 정치 이벤트가 아니죠. 또한, 더 엄밀히 따지자면, 축구 때문에 열광하는 사람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 정도인데 정치에서 무슨 국가 공동체 타령인지 모르겠습니다. 종교에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국가 운명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지구가 멸망하면 모두 끝입니다. 그런 의미라면 공동체 아닌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유는 자유이지,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을 하고 자시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열심히 사는 것이 자유주의의 모습입니다. 이기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 조화를 이루는 것이 자유주의의 정답입니다. 만약 그것을 공동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언어의 유희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십시오. 그렇게 해도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정답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자유주의입니다. 어설프게 국가 공동체를 위한다든지,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든지, 국가이익을 위한다든지, 우리는 운명 공동체 등의 주장으로 무장하여 가스통을 들고 설치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긍정적이고 건설적입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정치사에서 국가 전체적으로 평화 시에 정치적 공동체에 근접한 사례가 딱 한 번 나옵니다. 1980년 광주에서 나왔다고 저는 봅니다. 그런 것이 유사 공동체입니다. 그 부분에서는 룻쏘가 일정 부분 맞는다고 제가 인정해줄 용의가 있습니다. 그 이외에는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물론 북한에서는 룻쏘를 아주 사랑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 전체가 주체사상에 입각한 유사 공동체 아닙니까? 주체사상을 일종의 일반의지로 간주해도 큰 무리는 없겠습니다."

한나라당의 정강 전문과 강령에는 "나눔의 공동체"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상류층이 도덕적 책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나눔의 공동체를 지향한다."

"제 14 조 (더불어 살아가는 나눔의 공동체)
집단이기주의와 배타적 공동체의식을 억제하고 상부상조의 미풍양속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실현한다."

언뜻 보기에는 정말 훌륭한 정당으로 보입니다. 이기적이 아닌 이타적 인간을 지향하는 바람직한 도덕을 추구하는 선언입니다. 정강이나 강령이 희망사항도 당연히 포함하기 때문에 그런 이타적 도덕성 지향을 궁극적으로 나무랄 수는 없겠습니다. 그런데 말은 번지르르 하지만, 실제는 어떨까요? 정당이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인지 게젤샤프트(Gesellschaft)인지 생각해보시죠. 저는 게젤샤프트로 봅니다. 게젤샤프트로 정당을 파악하면 집단이기주의로 정당을 바라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한나라당이 "상류층의 도덕적 책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서 온갖 힘을 다 기울였을까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까요? 글쎄요... 왠지 조금 간지럽습니다. 이타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개념을 활용할 것이 아니라, 건설적인 이기심으로 잘 먹고 잘 살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개념을 원용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뭔가 켕기는 것이 있는지, 다음과 같은 표현도 있습니다.

"깨끗한 정치를 구현하는 선진정치공동체를 지향한다."

차떼기 정당이라는 별명이 심히 걸리는 모양입니다. "선진정치를 지향한다."라고 간단하게 선언해도 될 것을 왜 굳이 공동체를 집어넣었는지 의문입니다. 앞에서 공동체라는 표현을 여러 번 썼으니 관성으로 들어간 것 같기도 합니다.

공동체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경제공동체, 남북공동체까지 갑니다.

"북한의 개혁ㆍ개방을 촉진하여 한반도경제공동체를 구현한다."

경제적 이익을 기반으로 하는 남북한 경제공동체라고요? 글쎄요...

2009년 7월 30일 목요일

[자유] 국가와 사회적 약자

[설명] 아래 글은 영국 정치사상가 홉스(Thomas Hobbes)를 원용하여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평등 개념이 어떻게 도출되는지를 보여준다. 국가는 당연히 여자나 장애인과 같은 헌법에 규정된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해야 한다. 그것은 국가의 책무이다. 이것을 지키지 않는 국가에 대해서는 국민이 그 시정을 강력하게 요청해야 한다. 아울러서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더라도 사회적 약자라는 공감대가 생기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그들을 돕고 보호해야 한다.

(1) 홉스와 데카르트(Rene Descartes)

국가의 역할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능은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국가기능이 역할을 제대로 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약자를 보호한다는 측면에서는 아쉬움을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국가가 왜 약자를 보호해야 하느냐를 설명하려면 홉스의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참조하는 것이 한 방법일 것입니다. 홉스는 마키아벨리(Nicolo Machiavelli)와 함께 근대 정치학의 한 획을 긋는 영국의 정치사상가로서 자연상태와 사회계약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켰습니다. 우리의 귀에 익숙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란 유명한 말을 남겼죠.

홉스의 방법론을 이해하려면 프랑스의 데카르트를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합니다. 데카르트는 <방법 서설>에서 지식을 어떻게 축적할 것인가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연역적 방법론을 체계화시켰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Je pense, donc je suis. Cogito ergo sum.)”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설명하면 “생각은 존재의 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면 생각을 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해보면 됩니다. 이 명제는 (생각 => 존재)의 관계를 설파하는 것으로 대우명제는 (존재X =>생각X)이 되겠습니다. 참인 명제입니다.

이 명제가 사회과학 방법론에 미친 영향은 큽니다. 지식이 어떻게 축적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데카르트는 분석대상을 쪼개서 연구할 것을 제시했습니다. 인간만큼 중요한 분석대상도 없습니다. 인간을 인간 전체로 분석하자면 너무 복잡해서 인간에 대해서 잘 알 수 없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입장이었습니다. 군인으로 막사에 앉아서 화롯불을 쬐면서 데카르트는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결국 쪼개서 연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머리 즉 생각은 분리해버리면 인간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명제가 나온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데카르트는 이 모든 것을 생각으로 해결했습니다. 연역적 방법론입니다. (생각 => 존재)의 논리를 사회과학 전반에 적용시켜서 전체는 부분으로 쪼개서 분석하자는 주장이지요. 이것이 근대 실증과학 철학의 근간을 형성합니다. 어려운 것보다는 쉬운 것부터,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부터 분석해서 하나하나 쌓아 올리는 지식축적론을 주창한 것입니다. 이 방법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서구문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2) 자연상태와 국가 형성의 사회계약: 평등 구현

홉스와 데카르트의 연관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홉스는 아주 간단한 모형에서 시작하여 국가의 형성을 설명하려고 하였습니다. 즉, 통치기구도 없고 아무런 질서도 없는 가장 단순한 자연상태를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도 아주 단순하게 보았습니다. 홉스는 흔히 두려움(fear)과 쌍생아 관계라고 얘기합니다. 어릴 때부터 유약했던 홉스에게 인간의 존재, 즉 생존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는 해석이지요. 자연상태에서는 경찰도, 어떤 형태의 도와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자기 자신만을 믿을 수 있을 뿐이지요. 자구(self-help)가 유일한 생존법칙인 세계입니다.

이런 자연상태의 세상에서는 일단 힘이 있어야 합니다. 홉스의 원초적 인간관은 아시다시피 매우 부정적입니다. 자연상태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폭력과 지능밖에 없습니다. 남을 순수한 폭력으로 제압하든지, 돌멩이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지능을 동원) 물리칠 수 있어야 자신의 안전에 대한 약간의 안심을 할 수 있는 지경이니까요.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약자는 강자에게 당해야 되는 세상이고, 틈만 나면 남을 제거해야(궁극적으로는 자신만 남아야) 안전이 더 많이 확보되는 아주 불편한 인간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이런 자연상태였는지 홉스가, 또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홉스도 연역적 방법을 동원하여 일단 이론적으로 그런 모형을 만들어서 국가 형성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인간은 역시 생각하는 동물이라 위와 같은 불편함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시작합니다. 홉스에 따르면 자신이 가진 물리적 폭력을 대부분 포기할 것을 서로 약속하게 됩니다. “사회계약”을 이루어서, 국가라는 “괴물(성서의 리바이어던)”에게 남을 해칠 수 있는 능력을 포기하는 “각서”를 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국가는 관리자가 되고 사회계약 속의 인간들은 남의 생명을 해치지 못하도록 규정된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평등을 이룩합니다. 즉, 약자나 강자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왜 강자가 그런 계약을 맺게 되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절대적인 강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약한 인간들도 연합해서(혹은 머리를 써서) 힘센 사람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시민 혹은 국민은 누구나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된다는 당위성이 생깁니다.

(3) 룻쏘(J. J. Rousseau)와 사토리(Giovanni Sartori)의 평등 개념

홉스 이후의 룻쏘나 사토리 같은 정치사상가들의 주장을 같이 참조하면, 우리 헌법에도 명문화되어 있듯이 장애인과 여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는 국가가 더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이 제시됩니다. 그런 논의들의 출발점이 바로 홉스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즉, 자연상태에서 불평등한 인간들이 국가를 만들어서 일종의 “평등” 상태를 구현한다는 아이디어입니다.

그런데 룻쏘가 볼 때, 인간 사회가 평등하지 않은 것입니다. 룻쏘는 불평등을 자연적(육체적) 불평등과 정신적(moral) 불평등으로 나눴습니다. 다른 사회계약론자인 로크(John Locke)가 인간들이 사회계약을 자발적으로 맺는 것으로 파악했지만, 룻쏘는 특히 정신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들에게 강제적으로 사회계약을 맺게 하는 측면을 강조하게 됩니다. 룻쏘가 정치사상사에서 권위주의(authoritarianism)나 사회주의/공산주의 주춧돌을 놓은 것으로 평가되는 것은 이때문입니다.

그다음에 사토리는 평등 개념을 더 체계화시켜서 정치적 평등, 사회적 평등, 기회균등을 민주주의의 기본 평등 개념으로 제시합니다.

“완전한 정치적 평등(보통 선거권), 사회적 평등(계급 및 재산과 상관없는 동등한 지위와 배려), 그리고 기회의 균등(동등한 출발점과 진입)”
“Full political equality (as equal universal suffrage), social equality (as equal status and consideration regardless of class or wealth), and equality of opportunity (as equal access and equal start)”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홉스의 평등 개념에서 시작하여 룻쏘를 거쳐서 사토리까지 참조하면 국가는 사회적 약자를 더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