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Notice) | 방 명 록 (GuestBoard)

2009년 8월 21일 금요일

[자유] 현 정치판에서 "공룡" 정당 쪼개기 전략이란? (중)

1. 의제 설정의 미학

어제 글에서 지역주의를 지역주의로 쪼개는 것은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서 자신이 괴물이 되는 어리석음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특정 지역에서 선출직을 얻는 것의 반작용으로 다른 지역에서 표가 분산되면, 그 역효과는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라이커 교수님은 <정치적 조작술(The Art of Political Manipulation)>이라는 책에서 적절한 의제 설정을 통하여 원하는 정치적 결과를 정당하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링컨이 노예해방이라는 의제를 세워서 당시 민주당을 남부와 북부로 쪼개고 대통령이 된 사례를 대표적인 것으로 소개했습니다. 그렇다면 공룡 정당을 쪼개는 쓸 만한 의제는 무엇이 있을까요?

2.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선의 정치

최근 8.15 경축사에서 이 대통령은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선을 제안했습니다. 행정구역 개편과 묶어서 정치권에 던졌기 때문에 의제 설정의 빛이 약간 바랬다는 해석을 이전 글에서 제가 주장했죠. 이 대통령으로서는 여러 현안을 헤쳐나가는 의제로 제법 그럴 듯한 것을 골랐습니다.

그런데 제1 야당인 민주당의 대응이 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대통령의 제안에 중대선거구제를 들고 나왔는데, 이것이 명분도 시원찮고, 여야합의를 이룰 가능성도 적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치 협상을 하려면 제대로 된 협상카드를 골라야 합니다. 녹슨 과도를 들고 나와서 딱딱한 무를 썰자고 하면 상대방이 웃습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정부/여당은 권역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에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권역 비례대표를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에 대한 협상이 걸릴 수 있겠죠. 독일식과 일본식이 있습니다. 독일식은 아래 제 글 "공공선택으로서 국회의원 선거제도(http://ahnabc.blogspot.com/2009/07/blog-post_29.html)"에서 설명했습니다. 우리 실정에 도입하기 어려운 복잡한 제도입니다. 일본식은 권역 비례대표를 배분할 때 권역 내 정당득표율을 적용합니다. 따라서 지역주의 완화 효과가 미미합니다. 호남에서는 민주당이, 영남에서는 한나라당이 대부분의 비례대표 의석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죠.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면서 지역주의 완화 효과를 노릴 수 있는 유력한 방법은 이미 설명했듯이 전국 정당득표율로 권역 비례대표 의석을 일률배분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각각 40% 정당 득표를 했다면, 각 권역에서 권역 비례대표 정원의 약 40%씩 의석을 갖는 제도입니다. 이렇게 하면 영남에서 민주당 의원이, 호남에서 한나라당 의원이 상당수 탄생합니다. 영남의 인구가 더 많으므로 영남 민주당 비례대표 의원이 호남 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민주당이 손해 볼 것이 없고, 지역주의 완화 대의명분도 살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보기에 민주당의 적절한 대응은 짐짓 모른 척하면서 정부/여당의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협상에 임하는 것입니다. 모르죠, 민주당이 고도의 작전을 짜서, 처음에는 중대선거구제를 슬쩍 흘린 다음, 협상에 들어가서는 일률배분을 주장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일률배분은 별 협상 거리도 안 됩니다. 다른 유력한 방안이 없으니까요. 또한, 제 경험에 의하면 정치인들이 중대선거구제에 집착하는 것은 일종의 관성과 같습니다. 이것저것 따져보지도 않고, 막연히 나눠 먹기라서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참조: "중대선거구제 집착증?" http://ahnabc.blogspot.com/2009/08/blog-post_18.html )

3. 결선투표제와 쪼개기 의제 설정

이 부분에서 야당이 머리를 잘 굴리면 쪼개기 의제 설정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만약 여당이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제안하면,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결선투표제를 제안하는 것입니다. 결선투표제가 왜 공룡 정당을 쪼개는 의제 설정이 될 수 있을까요? 국회의원 선거에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면, 분열된 야당 후보가 많은 지역구에서 단일화되는 효과가 생기죠. 후보 단일화를 위해서 여론조사를 하는 등 난리법석을 떨지 않아도 됩니다. 아울러서 공룡 정당에서는 일부 지역에서 2등을 노리는 정치인들이 딴살림을 차려서 나갈 가능성이 생깁니다. 결선을 노리는 것이죠.

결선투표제 도입의 필요성은 바로 아래 글 "현행 대통령 선거제도 개선"에서 설명했습니다. 단순 다득표제보다 결선투표가 민주주의 기본 원리인 단순과반수 원칙을 더 잘 지킬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만약 대통령 선거에 결선투표가 도입되면, 이것도 공룡 여당을 쪼갤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습니다. 박근혜 씨가 차기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기고, 야권의 후보가 지리멸렬이면 한나라당 일부가 뛰쳐나가서 결선을 노리는 시나리오가 충분히 가능하죠.

그런데 정치인들은 선거를 한 번 더 하는 것을 별로 환영하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거라고 하면 일단 돈(특히 검은돈) 문제가 떠오르기 때문에 국민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실 민주주의에서는 투표(선거, 주민 발안, 주민 소환 등)를 밥 먹듯이 하는 것이 정상인데, 우리나라는 투표에 헛돈을 쓴다는 인식이 강합니다. 그동안 정치자금이 투명하지 않았고, 선거가 끝나면 부정 시비로 얼룩진 적이 많아서 그럴 것입니다. 따라서 야당이 결선투표를 제안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제안해도 여당이 받아줄 가능성도 크지 않겠죠. 매우 어려운 협상이 되겠습니다.

4. 선거제도 변경이라는 정치적 조작

선거제도 변경은 대표적인 정치적 조작입니다. 애로우(Kenneth Arrow) 교수님의 불가능성 정리(The Impossibility Theorem)와 라이커 교수님의 투표 제도 연구를 참조하면, 민주주의가 돌고 도는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시민의 선호순서는 합리적이라도, 전체 사회의 선호순서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비합리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죠. A보다 B를 더 좋아하고, B보다 C를 더 좋아하고, C보다 A를 더 좋아하는 돌고 도는 세상에서는 선거제도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이런 속성이 있기 때문에 뚜렷한 명분이 없으면 특정 선거제도를 관철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여러 다른 잣대를 들이댈 수 있기 때문에, 야당이 갑이라는 기준을 제시해서 특정 제도를 관철하려면 여당은 을이라는 기준으로 적당히 거부할 수 있죠.

국회의원 선거제도 변경에서 이런 정치적 조작의 구조적 문제를 벗어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잣대가 정치적 지역주의 극복입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조금 샜는데, 이 글에서 드리고 싶었던 말씀은 결선투표제를 도입해서 공룡 정당 쪼개기 의제 설정이 가능하지만, 현실화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방안은 없을까요? 다음 글로 넘어갑니다.^^

댓글 3개:

  1. 사실 민주주의에서는 투표(선거, 주민 발안, 주민 소환 등)를 밥 먹듯이 하는 것이 정상인데, 우리나라는 투표에 헛돈을 쓴다는 인식이 강합니다.

    이 말씀에 동의합니다. 직접 들은 게 아니라 언론을 통해 확인한 거라서 인용하긴 좀 조심스럽지만.. 이번 8.15 경축사에서도 선거에 너무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는 대통령의 발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엔 좀 적절치 않았던 것 같은데...

    현재도 선거비용을 일정비율이상 득표하면 보전해주는 제도가 있지 않습니까? 그걸 결선투표를 도입함과 동시에 조금 더 잘 보완하면 될 것 같은데.. 잠시 옆으로 빠지면 '오세훈법'을 보고 심상정씨는 원외에 있는 정치인이 자금 모금하기가 너무 힘들어졌기 떄문에 비주류 정치인은 더 힘들어졌다고 하더군요. 정말 '불가능성 정리'처럼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제도는 없다는 것이 실감나는 것 같습니다..^^;;;

    답글삭제
  2. 선거나 투표를 하지 않으면 발생하는 기회비용도 고려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그런 인식이 뿌리내리지 못했죠.

    정치자금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현역 의원에게 매우 유리하고, 신인이나 낙선 정치인에게는 불리한 제도를 고쳐야 합니다. 아울러서 정치자금이 아직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양성화할 것은 양지로 내보내고, 대신 위법 행위가 적발되면 엄벌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답글삭제
  3. 결선투표제는 여러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을 듯 합니다. 결선투표제였다면.... 민노당의 '비판적지지론'같은 문제는 없었겠죠.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