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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17일 목요일

[정치] 합리적 행위자와 남북한 관계 2009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에서 한 회원이 김정일과 남북한 관계에 대해서 질문하여 올린 답글입니다, 2009/04/08, 원 질문글: http://tinyurl.com/jhy-nsk)

예언으로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나 우리나라의 용하다는 점쟁이들을 우리는 사회과학자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원용한 방법론을 다른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재현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여러 속성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일반화된 지식의 축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점쟁이들의 "척 보면 압니다." 식의 방법론은 개별적인 특정 사안에 있어서는 "족집게"라는 감탄을 간혹(우연히) 자아낼지는 몰라도 일반화된 지식을 제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게임 이론에서 행위자(플레이어)를 합리적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과학적 방법론의 추구라고 보면 됩니다. 비합리적이라고 가정하는 것보다는 합리적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일반화된 지식의 축적"에 당연히 더 큰 도움을 줍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OO씨는 사과보다는 배를 좋아하고, 바나나보다는 사과를 좋아합니다. 세 과일이 앞에 있다면 OO씨가 어떤 과일을 먹을 것인지 예측해봅시다. 합리적 행위자라면 배를 선택할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만약 비합리적 행위자라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예컨대, (배 > 사과 > 바나나 > 배)라는 선호도를 갖고 있다면 OO씨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오리무중이 되죠.

게임 이론 자체는 비합리적 행위자를 분석하지 않습니다. 게임 이론을 응용하여 분석이나 예측을 했는데 잘 맞지 않으면 그 가능성 중 하나로 행위자가 비합리적일 수도 있다는 추정을 할 수는 있겠죠. 만약 비합리적 행위자로 설명이 더 잘 된다면 게임 이론 모형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서울의 제 은사께서 오래전 어떤 사석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안박, 사랑은 게임 이론으로 어떻게 설명하나?"라는 질문을 던지셨을 때, 제 대답은 그 사랑이 합리적 선택과 연관되어 있으면 설명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답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게임 이론으로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죠. 그런 사랑에 게임을 갖다대는 것은 일종의 모독이죠. 반면에 "혹시 내가 낚시에 걸려든 것일까?"라는 전략적 사고를 하는 애정은 게임 모형을 적용할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

김정일을 비합리적 행위자로 간주한다면 게임 이론을 적용하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김정일이 합리적 "미친" 행위자이면 적절한 게임 모형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비합리적 "미친" 행위자이면 게임 이론을 적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OO씨가 "미친"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정의했는지 불분명한데, 저는 "미친" 합리적 행위자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치킨 게임을 한번 살펴봅시다. 치킨 게임에서 순수전략 내쉬균형은 한쪽이 돌진하고 다른 쪽은 피하는 것입니다. 2x2 행렬에서 순수전략 균형이 두 개 생기죠. 그런데 치킨 게임에 혼합전략 균형도 있습니다. 혼합전략 균형을 적용하면 모든 결과가 균형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양쪽이 돌진하는 것도 균형 결과가 되죠. 따라서 양쪽이 돌진하여 함께 망하는 결과가 생겼다고 해서 행위자들이 비합리적이라고 일방적으로 추정할 수는 없습니다. 용의자의 딜레마 게임 상황에서 배신하지 않고 협력하는 행위자는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전쟁을 일으킨다고 해서 비합리적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작년에 제가 싸움보다 평화를 더 선호하는 두 행위자 사이에서도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순차게임 모형을 포스팅한 적이 있죠. (http://tinyurl.com/ahn-wargame) 전쟁을 일으켜서 더 나쁜 결과를 피할 수 있다면 합리적 행위자가 선제공격을 합니다. 가능성도 크지 않고 또한 그렇게 되면 안 되겠지만 경우에 따라서 김정일도 그런 결정을 내릴 수도 있겠죠. 물론 비합리적 행위자라서 그런 결정을 내리는 시나리오도 가능할 것입니다.

북한 지도자로서 김정일이 합리적 행위자이냐 아니냐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비합리적 행위자로 가정하기보다는 합리적 행위자로 가정하는 것이 일반화된 지식을 축적하는 데 장점이 더 많다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자명합니다. "김정일은 비합리적인 미친놈이라서 어디로 튈지 모른다."고 가정하면 점쟁이가 점괘 뽑듯이 김정일을 설명해야겠죠. 또한, 그동안 북한이 보여준 행태를 참조하면 합리적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이 점은 작년에 올렸던 남북한 관계 포스팅에서 설명했습니다. (http://tinyurl.com/ahn-nsk2)

이번에 발사한 로켓은 이미 예견되었던 것입니다. 북한이 대포동 1호인지 광명성인지를 쏘아 올렸다고 몇 년 전에 자랑했는데, 그 로켓을 더 향상시키려고 당연히 노력했겠죠. 합리적 행위자라면 핵무기에서 재미를 봤듯이 장거리 운반수단 기술개발에서도 재미를 보려고 했겠죠. 그 돈으로 죽어가는 인민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논평 보도를 봤습니다만, 북한으로서는 안전보장용 군사기술(핵무기+장거리 운반수단) 및 앞으로 협상카드로 유용한 것이죠. 이전 로켓 발사로 만족하고 업그레이드시키지 않았다면 오히려 비합리적 행위자인지 의심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미국, 일본은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습니다. 위성을 운반할 수 있는 기술이 가진 군사적 의미는 불문가지이니까요. 또한, 앞으로 있을 협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위치를 잡으려고 노력해야 하니까요. 저는 북핵 위기와 비슷한 경로를 밟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즉, 처음에는 치킨 게임 양상을 보이다 상호 커뮤니케이션에 의해서 협상 테이블로 나아가는 것이죠. 김정일이 합리적 행위자라서 그럴 것 같습니다.

이번 경우는 안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Tit-for-Tat을 해야 하는데, 외교적인 비판 분위기 조성은 시간이 지나면 잦아들 것이고, 결국 고흥 나로도에서 위성을 쏘아 올리는 식이 되겠죠. 이미 예정되어 있기도 하고요.

히틀러와 비교하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 같아요. 북한이 핵무기를 초보 수준에서 갖고 있지만, 북한을 둘러싸고 있는 미국(+일본+한국), 중국, 러시아 모두 초대형 핵무기 보유 강대국들이죠.

일단 이 정도로 답변을 드립니다.

2009년 9월 15일 화요일

[자유] 토론 사례: 과학이란? (상)

토론을 할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이 여럿 있지만, 제가 보기에 가장 유의해야 하는 것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저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완전하지 않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공부를 많이 했더라도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혹시 있을지도 모른다는 개방적인 사고를 하는 것이 지식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일 것입니다.

십수 년 동안 인터넷 소통을 하면서 자신의 지식을 과신한다든지, 과도한 일반화의 실수를 범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례를 많이 접했습니다. 지난주에도 제가 활동하는 동호회에서 과학에 대해 토론하면서 그 점을 또 느꼈습니다. 초등학생과 토론해도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지식의 바다가 한없이 넓고, 학력이 낮아도, 전문 분야가 아니더라도, 논리적으로 맞는 의견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현재 학자가 아닙니다. 이전에 한 사회과학분야의 학자였던, 인터넷 토론을 즐기는 아마추어가 현재 저를 객관적으로 평가한 것입니다. 더구나 저는 자연과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닙니다. 따라서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구체적 연구 내용을 잘 알지 못합니다. 천동설, 지동설, 플로지스톤, 산소, 다윈, DNA, 뉴턴, 아인슈타인 등에 대해서 저보다 훨씬 잘 아는 이공계 분들이 많죠. 그런 분들에게 제가 자연과학 운운했다면 조금 오버스럽게 보일 수도 있겠죠.

그러나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이나 과학입니다. 과학적 연구방법론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죠.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연구방법론이 매우 세부적으로는 다를 수 있겠지만(연구 대상이 다르므로), 전체적인 틀로서 둘 다 과학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것은 객관적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주관적으로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기는 있을 것입니다. 특히 자유주의에서는 완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생각은 자유이고, 표현의 자유도 있으니까요.

인간사를 다루는 사회과학은 과학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제 짐작에는 이공계 공부를 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이는 자신의 과학에 대한 주관적 견해나 과학에 대한 특정 시각을 맹신한 사례라고 저는 봅니다. 다음 의견을 보시죠. (http://kids.kornet.net/cgi-bin/Boardlist?Article=Politics&Num=42281)

"... 인간을 비롯하여 인간들로 구성된 조직 등 사회과학의 대상들에 관한 이론들은 자연과학의 이론들처럼 보편타당성을 추구하는 이론이라기보다는 개별성과 특수성에 기반한 상대적인 이론이라고 보는 게 현실적인 시각입니다. ... 경제학 이론들도 역사적인 관점에서 17세기 이후부터 지금까지 당대에 어떠한 경제학 사조들이 유행했나를 보면 절대적으로 옳은 경제학이론이라는 게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
저는 이 의견을 읽고 제가 아는 과학과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질문했습니다.

"자연과학에는 절대적으로 옳은 이론이 있나요? 제가 잘 몰라서 질문합니다."
경제학에는 절대적으로 옳은 이론이 없다는 것은 제가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과학이 "개별성과 특수성에 기반한" 것이라는 견해에는 동의할 수 없었고, 자연과학에서 "절대적으로 옳은" 과학 이론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생겨서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이어진 토론에서 자연과학에 절대적으로 옳은 이론이 있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대세는 자연과학에도 절대적으로 옳은 이론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추측을 뒷받침하는 의견이 대세라서 저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다음에 제가 관련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http://kids.kornet.net/cgi-bin/Boardlist?Article=Politics&Num=42292)

"산소가 발견되기 전에는 산화를 플로지스톤 이론으로 설명했다고 들었습니다. 플로지스톤 이론은 산소가 발견되기 전에는 과학 이론으로 인정받기도 했겠죠?"
이것은 질문입니다. 제가 어떤 주장을 한 것도 아니고, 그때까지는 플로지스톤(Phlogiston) 이론을 과학 이론이라고 설명한 것도 아닙니다. 이공계 회원이 많으므로 플로지스톤 이론에 대해서 어떻게 보느냐를 문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 회원의 답이 제 예상을 넘어섰습니다. (http://kids.kornet.net/cgi-bin/Boardlist?Article=Politics&Num=42293)

"청해님(제 인터넷 필명)은 과학이라는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가설을 세우고 실험 또는 논리로 가설을 검증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따라서 예로 드신 연금술이나 종교 이런 분야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과학이라 칭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저는 이 의견을 읽고, 이 글 서두에서 말씀드린, 토론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매우 모자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제가 과학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듯이 단정한 다음, 플로지스톤 이론을 연금술로 주장하는 강변을 늘어놓았습니다. 플로지스톤 이론은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defunct(폐기된) 과학 이론이고,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에는 그 이론의 대표적인 물리학자/화학자가 연금술을 공격한 것이라고 버젓이 설명합니다.

참조 1: http://en.wikipedia.org/wiki/Phlogiston_theory
The phlogiston theory (from the Ancient Greek φλογιστόν phlŏgistón "burning up", from φλόξ phlóx "fire"), first stated in 1667 by Johann Joachim Becher, is a defunct scientific theory that posited the existence of a fire-like element called "phlogiston" that was contained within combustible bodies, and released during combustion.
참조 2: http://www.britannica.com/EBchecked/topic/108987/chemistry/259704/Phlogiston-theory
This shift was partly simple self-promotion by chemists in the new environment of the Enlightenment, whose vanguard glorified rationalism, experiment, and progress while demonizing the mystical. However, it was also becoming ever clearer that certain central ideas of alchemy (especially metallic transmutation) had never been demonstrated. One of the leaders in this regard was the German physician and chemist Georg Ernst Stahl, who vigorously attacked alchemy (after dabbling in it himself) and proposed an expansive new chemical theory. Stahl noted parallels between the burning of combustible materials and the calcination of metalsthe conversion of a metal into its calx, or oxide. He suggested that both processes consisted of the loss of a material fluid, contained within all combustibles, called phlogiston.
그런데 그 회원은 막무가내로 설사 위키피디아가 플로지스톤 이론을 과학 이론이라고 불러도, 연금술의 연장임에 틀림이 없다는 엄청난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과학에 대해서 오해한 것이 명백하다고 본다는 선언을 하더군요. 뭐, 그렇게 생각할 자유가 있기는 하죠. 표현은 방종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회원이 과학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맞대응을 해줬습니다. 제 맞대응에 대한 응답은 아직 없습니다.

이 토론과 관련해서 또 다른 문제제기를 제가 했습니다.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2009년 9월 11일 금요일

[수필] 합리성 가정과 사회과학으로서 경제학

(며칠 전에 서울대 경제학부 이준구 선생님께서 행태경제학 저서 <36.5도C 인간의 경제학>을 선보였습니다. 아래 글은 이 선생님 게시판에서 있었던 관련 토론의 제 의견을 정리한 것입니다. 댓글 두 개를 합치고 일부 표현을 약간 수정했습니다. 원 글: http://tinyurl.com/ljk-rational)

경제학이나 정치학의 합리적 선택이론의 특징 중 하나가 선호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말이 있죠. Preferences are given. 이것은 허점이 될 수도 있지만, 방법론적으로 장점이 있어서 그렇게 가정한 측면도 있습니다. 선호가 사람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서 자칫 잘못하면 환원론에 빠질 수 있습니다. 즉, 선호만 갖고 모든 현상을 설명해버리는 것이죠. 선호를 그냥 주어진 것으로 하면 그런 환원론에 빠지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모형을 설정할 때 결과를 참작하지 않고, 선호부터 가정해서 모형을 분석하면 환원론이 될 가능성은 매우 적어지니까요.

경제학, 특히 미시경제학 발전에 합리성 가정이 유용했던 것은 인간이 합리적임을 보여줘서, 혹은 대부분 합리적이라서 그랬던 것이라기보다, 그 가정을 채택해서 유익한 분석, 설명, 예측을 보여줬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미국 로체스터 대학교 고 Riker 교수님은 정치학도 미시경제학에서 배워와야 한다고 항상 강조하셨죠. 그래야 정치학에서도 과학적 지식을 축적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라이커 교수님은 18세기 화학, 경제학, 정치학을 비교하면서 산소가 발견되기 전에 플로지스톤이라는 개념이 일세를 풍미했던 그 당시 자연과학보다 경제학과 정치학이 더 과학적이었을 수도 있다는 해석까지 제시한 바 있습니다. 또한, 경제학과 정치학이 엇비슷한 과학적 지위를 갖고 있었는데, 경제학은 합리성 가정을 도입하여 괄목상대했지만, 정치학은 그렇게 하지 않아서 뒤처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점은 곰곰이 생각해볼 만합니다. 참조: http://tinyurl.com/riker-phlogiston

문제는 인간이 항상 합리적이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전이적이고(transitive) 완전한(complete) 선호순서를 갖고 있어야 경제학의 합리적 플레이어가 되는데, 현실에서 따져보면 그렇지 않은 사례가 많이 나온다는 것이죠. 아울러서 경제학 모형에서 상정했던 완전 정보(complete information) 상황에 플레이어가 처하지 않는 사례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두 문제를 해결하는 한 시도가 행태경제학인 것 같습니다. 행태경제학은 심리학, 인류학, 사회학, 정치학, 역사학 등 다른 인문사회 분야의 연구결과를 참조해서 주류 경제학이 설명하지 못한 anormaly를 분석할 수 있겠습니다.

기존 경제학에서 완전 정보 가정을 보완하는 연구는 제법 했습니다. 예컨대 게임이론에서 불완전(incomplete) 정보 게임을 분석하죠. 그런데 합리성 가정은 근본적으로 폐기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행태경제학 연구가 앞으로 충분히 축적되더라도 경제학의 기본 가정으로 플레이어의 합리성은 살아남을 것으로 봅니다. 비합리적 플레이어를 가정하면 특정 사례를 설명하는 데는 비교우위가 있겠지만, 일반화된 지식을 축적하고 미래에 발생할 일을 예측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조건에서 전이적 선호순서를 갖는 플레이어가 효용을 극대화한다는 것은 그 범위를 매우 좁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정을 채택하지 않으면 극단적으로는 무한대의 가능성이 생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례연구로 비합리성을 활용하는 것은 장점이 있지만, 일반화된 과학적 지식을 축적하려면 비합리성 가정은 매우 비효율적입니다.

인간이 (경제학에서 가정한) 합리적인 것이 맞는지(옳은지)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 철학을 참조해서 조금 더 생각해보니 그 질문이 별로 유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잠정 결론을 얻었습니다. 저도 합리적일 때가 있고, 합리적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합리적이라고 가정해도 문제가 생기고, 그렇지 않다고 가정해도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결국, 합리성 가정은 연구 결과를 검토하여 타당한지 아닌지를 평가하는 것이 적절한 것 같습니다. 흔히 가정은 증명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증명할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옳은지 틀린지 따지는 것은 헛수고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만약 경제학의 어떤 새로운 패러다임이 뉴턴을 포괄한 아인슈타인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경제학에서 현재 합리성 가정을 포괄하면서 비합리적 행태를 제대로 분석하는 아인슈타인이 등장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봅니다. 인간의 문제라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따라서 제 견해로는 이준구 선생님처럼 주류 경제학도 섭렵하면서, 행태경제학적 관심도 함께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습니다. 서로 보완해주는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죠.

우리가 일상용어로서 합리적이라고 하면, 바람직한 혹은 좋은 (감정에 대하는 개념으로) 이성을 뜻하는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예컨대 정치적 지역주의로 투표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했을 때, 경제학적으로 합리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고 비이성적인 감정 투표를 표현한 것이죠. 그 유권자들이 완전하면서 전이적인 선호순서를 갖고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그런 투표를 했다면, 그것은 경제학적으로 합리적 선택입니다. 합리성 정의가 그러니까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있죠. 이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면 그레샴이 귀납적으로 발견한 사실을 분석하는 연역적 사고가 들어가야 합니다. 합리성 가정이 대표적인 연역적 방법론입니다.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어떤 법칙을 쫓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인간을 관찰한 결과 인간 행동 대부분은 비합리적이라고 정리하는 것이 한 예입니다. 이에 대한 제 생각은, 경제학이 주로 분석하고자 하는 대상인 예컨대 돈에 대해서는 인간이 합리적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돈의 양이 많을수록 합리적일 가능성이 더 커진다고 저는 봅니다. 어떤 사람이 1억 원과 만 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과 만 원과 만 오백 원 중에 선택하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경제학 이론에서는 두 경우 모두 더 큰 액수를 선택하는 것을 예측합니다. 현실에서는 전자에 대한 예측이 후자보다 더 잘 맞을 것입니다.

경제학이 분석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행동으로서 아침에 일어날 때 왼쪽으로 일어나는지, 오른쪽으로 일어나는지를 경제학이 분석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까지 모두 포함하면 인간이 비합리적으로 혹은 선호를 의식하지 않고 행동할 가능성이 더 클 수도 있겠죠.

경제학은 합리성을 매우 엄정하게 정의합니다. 그 정의는 어느 경제원론을 보더라도 나와 있습니다. 합리성 혹은 비합리성이라는 절대적 진리 혹은 엄연한 사실이 존재하는데, 경제학은 합리성을 대충 가정한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인간이 합리적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그런 절대적 진리나 엄연한 사실을 미리 인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이론적으로도(연역) 그렇고, 현실 사례에서도(귀납) 그렇다고 봅니다.

과학에서 연역을 매우 중시하는 이유가 바로 예측력 때문입니다. 합리성 가정을 버리고 여러 학문의 융합적 연구를 채택해서 비합리적 개별 사례를 하나씩 하나씩 잘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 방법론에서 핵심 부품이 빠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은 일반화된 지식(generalized knowledge)을 추구합니다. 합리성 가정이 유효했던 것은 경제에 관한 일반화된 지식을 축적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역사학을 역사과학이라고 부르는 사례가 별로 없는 것을 염두에 뒀습니다. 당연히 융합적 연구가 더 과학적인 연구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류 경제학과 비주류 경제학이 서로 보완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어느 연구 방법론이 "틀렸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인식론으로도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009년 9월 8일 화요일

[자유] 어떤 누리꾼의 사회과학 비난

다음은 제가 활동하는 인터넷 동호회의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의견입니다. 제가 올린 "우리나라 정당의 공동체 지향" 시리즈를 읽고 사회과학에 대해서 비난했습니다.

"제 목: 병신 사회과학
모 보드의 모 유저의 글을 보고 있으니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과학의 용어들은 대개 일상적인 생활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쓰던 용어로부터 규정되었거나 파생된 경우가 많은데, 그 때문에 모든 사람이 공감할 만한 명확한 역사적 맥락이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보니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는데, 실상 그 여러 가지 가능한 의미들 사이에 그리 큰 차이가 있지도 않다. 이 차이를 과장하고 심각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들은 주로 대학의 사회대/인문대에서 먹물을 먹고 글을 써서 먹고 사는 놈팽이들이다. 그래야 글을 쓸 수가 있고 자기가 씨부렁대는 잡설들이 무의미해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근원적으로 전문성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전문성을 (자칭) 주장하는 자들의 인생은 그리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애초에 전문성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대학 외부의 세계에서는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주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내용이 권위주의가 되지 않으려면, 글쓴이가 사회과학의 대가 수준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이는데, 글 내용 어디에서도 그런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전문성 운운하지만 정작 글쓴이의 사회과학에 대한 전문성이나 깊은 이해는 없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사회과학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자신이 권위가 있다는 착각에 빠진 권위주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익명의 글쓴이가 "모든 사람이 공감할 만한 명확한 역사적 맥락이 있을 수가 없다."라는 잣대를 들이민 것만 봐도 과학적 지식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부족한지 잘 알 수 있다고 봅니다.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는 것은 일반화된 지식을 추구하느냐, 또 그것을 어떻게 추구하느냐에 달린 것이지, 모든 혹은 대부분 사람이 공감하는 것이 잣대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과학을 바라보면 일세를 풍미했던, 예컨대 중세의 마녀사냥도 과학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과학의 용어는 일반인이 사용하는 용어와 그 의미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일반 용어에서 사회과학의 전문용어가 파생되었다 하더라도, 연구자가 특정 용어를 엄정하게 정의하고 과학적 분석에 활용하여 유용한 연구결과를 내놓았다면, 과학적 연구로 인정하는 것이 맞습니다.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용어들이 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정치학에서도 예컨대 힘(power)을 활용하여 세력균형, 세력전이 등의 과학적 연구결과를 보여줬습니다. 이런 노력을 모두 "놈팽이들"의 지적 유희로 욕하는 이 누리꾼의 주장이 권위주의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평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이 아니기는 하지만, 우리 인터넷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반자유주의적인 표현 사례라서 비판해봤습니다. 이 익명 의견을 코미디로 만든 댓글을 보시죠. 재미있습니다. ^^

"저런 정치 경제 하는 사람들은 참모 역할을 하게 하고 모든 정보를 종합 판단 결정하는 자리에는 과학자를 쓰는 건 어떨까? 다른 나라에서 그런 경우가 있었는지, 그 결과는 어땠는지 궁금."

과학을 하는 사람이 모두 과학이 뭔지 잘 알고 있을 수는 없겠죠...

2009년 8월 1일 토요일

[단상] 月山 (Mountains of the Moon)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8/03/20)

일전에 이 교수님께서 경제학 응용 부문을 더 연구했더라면 하는 마음을 피력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정확하지 않으면 정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이론에 치중한 공부를 했기 때문에 항상 이론과 응용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한 편입니다. 사회과학은 자연과학과 달리 특정 이론의 현실 설명력이나 예측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어서 이런 고민은 더 심각한 것 같습니다.

영국 탐험가들이 나일 강의 원천을 찾는 내용을 소재로 한 Mountains of the Moon(1990)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나일 강의 원천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많은 호사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세기경 그리스 상인인 디오게네스가 나일 강의 원천을 찾았다고 주장했고, 프톨레마이오스(Ptolemy)와 고대 그리스-로마 지리학자들이 그것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디오게네스는 중앙아프리카의 동쪽 해안으로 가서 내륙으로 들어가 눈 덮인 산들과 큰 호수들을 발견했는데 그들이 나일 강의 원천이라고 했답니다. 원정 기간은 25일이었으며, 원주민들이 그 산들을 Mountains of the Moon으로 불렀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이후로 나일 강의 원천은 月山으로 알려졌습니다.

영화는 1862년에 있었던 영국 왕립 지리학회의 나일 강 원천 찾기 원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원정대도 디오게네스와 마찬가지로 중앙아프리카 동쪽 해안으로 가서 내륙으로 들어갑니다. 원정대가 발견한 것은 빅토리아 호수와 탕가니카 호수 등으로 구성된 Greater Lakes였으며, 그 호수들을 나일강의 원천으로 학회에 보고하고 그것이 정설이 됩니다. (영화에서는 원정대 대장들의 갈등 등을 포함하여 보다 극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후일 인공위성 탐사를 통해서 빅토리아 호수로 흘러들어오는 사소한 지류의 원천까지 모두 밝히게 됩니다. 나일 강의 원천을 찾기 위해서 강의 하구부터 시작한 원정도 많았다고 합니다. 모두 실패했답니다. 그런 면에서 디오게네스나 영국 원정대가 선택한 아프리카 동부 해안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죠. 아마도 그들은 나일 강의 풍부한 수량을 참작하여 나일 강이 일정한 거리는 흘러야 된다는 이론적 추정에 따라서 그런 결정을 내렸을 것입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나일 강의 원천을 찾기 위하여 원정대가 이집트에서 출발하지 않는 것을 신선한 충격으로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론의 힘이 아닌가라고 생각해봤습니다.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기회 되면 한번 보실 것을 권합니다.

2009년 7월 31일 금요일

[수필] 사회과학의 재미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는 2학년에 올라가면서 문과와 이과를 나눴습니다. 한 학년에 반이 10개였는데, 이과가 7반, 문과가 3반이었습니다. 저는 주저 없이 문과를 선택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과를 택해서 의사가 되거나, 컴퓨터 관련 공학자가 되는 것이 더 적성에 맞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가끔 듭니다만, 그때는 외교관이 되고 싶어서 문과를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경로가 서울대 사회과학계열, 외교학과, 외무고시, 그리고 외교관으로 활동하는 것이었죠.

아버지는 제 선택에 전혀 조언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 자유를 존중해주신 것이고, 다르게 보면 구체적으로 조언하실 만한 정보가 없어서 그냥 방임하신 면도 있습니다. 제가 서울대 사회계열에 합격하고 외교학과로 들어간 후에서야 아버지는 제 진로에 대해서 회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길이는 법대로 갔어도 좋았을 텐데..."

미리 말씀하셨다면 제가 법대에 원서를 냈을지도 모르죠. 지금은 듣보잡(그 듣보잡은 아닙니다!)이지만, 고등학생일 때 제가 공부를 조금 했습니다.^^ 그때는 예비고사 제도였죠. 예비고사 전국수석이 부산 출신이었습니다. 그것도 집이 광안리였습니다. 제 고향이 광안리 아닙니까. 집에 확인전화가 오기도 했습니다. 혹시 수석 한 것 아니냐고... ㅋㅋㅋ 전국수석은 차치하고, 학교에서 수석도 못했습니다. 그래도 재수는 안 했습니다. 본고사 수학문제가 매우 어렵게 출제되었는데, 저는 운 좋게도 몇 문제를 풀 수 있어서 그럴 듯한 성적으로 사회계열에 합격했습니다.

유치원 때부터 친구인 의사가 있습니다. 의대로 진학하여 꿈을 이뤘죠. 서울에 가면 그 친구 병원에 꼭 놀러 갑니다.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수술 한 건 하고 나면 대부분은, 행복이 증가하는 사람이 한 명 탄생하거든요. 자신도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매우 뿌듯하게 생각합니다. 자칭 예술가죠. ^^

사회과학을 공부하면 그런 뿌듯함을 느끼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공부하면 할 수록 이것도 맞는 것 갖고, 저것도 옳은 것 같아서 뭐가 뭔지 헷갈릴 때가 흔히 있습니다. 인간사가 그렇지 않습니까.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해서도 보는 시각에 따라서, 서거가 되기도 하고, 사망도 되고, 자살이 되기도 하죠. 각자 마음과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까요.

사회과학 교수가 되면 교육과 연구에서 보람을 찾으면 됩니다. 사실, 직업 한도 내에서는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행복 찾기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연구는 반드시 어려운 전문 논문용 연구가 아니더라도, 예컨대 일반인을 위한 해설서라든지, 학생교육을 위한 훌륭한 교과서를 집필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도 있죠. 교육, 연구에 덤으로 자신의 아이디어가 정책에 반영되어 사회가 더 발전하면 더 좋은 것이죠. 그런 욕심이 없는 학자를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나라 출신 이공계 학자들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활동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회과학자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학위를 하고 최종 종착지는 우리나라 직장을 선택하죠. 저도 그랬습니다. 첫 직장은 미국 대학교였지만, 영 재미가 없었습니다. 영어로 교육하려니 기본은 가르치겠는데, 강의만 마치고 돌아서면 뭔가 허전한 것입니다. 우리말로 가르쳤으면 더 잘 설명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정년을 보장받으려면 허접한 논문 여러 개보다 똑똑한 자식 한둘이 더 위력을 발휘합니다.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설을 매우 잘 풀면, 미국 정치학 학술지 랭킹 1위인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에 논문을 게재할 수 있겠죠. 그런데 학술지 제목을 보십시오. American으로 시작합니다. 물론 미국 정치학회 학술지라서 그렇지만, 내용도 USA 위주입니다. 지금까지 그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우리나라 출신 학자는 한 손에 꼽습니다.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 학술지에 한 편 실으면 가문의 큰 영광이 됩니다. 신촌 모 대학의 제 친구가 오래전에 한 편 실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무조건 실력을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부러비~라고 말했습니다. ^^

미시간 촌구석에서 저 같은 듣보잡이 아무리 떠들어봐야, 워싱턴 DC에서는 들은 척도 안 합니다. 당연하죠. 미국에 학자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중에서 실력이 뛰어나고, 또 정책 입안자들이 고르고 골라서 학자들의 주장을 듣습니다. 극동 아시아에서 온 촌놈이 워싱턴 쪽에 먹히는 한 소리를 내놓는 것은, 저로서는 고양이가 쥐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수가 되면 상황은 급반전합니다. 왜일까요? 실력이 갑자기 좋아져서일까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학자 숫자가 적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인구가 4천 5백만 정도죠. 미국은 약 3억입니다. 대충 7배라고 합시다. 미국 학자수는 7배보다 훨~씬~ 많습니다. 대학교 수만 비교해도 뻔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게다가 소위 일류 대학교라는 학교로 범위를 좁히면, 큰 방 하나면 해당 정치학자 모두 모을 수 있습니다. (물론, 소위 일류대학 교수라고 해서 더 실력이 좋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지금은 이전보다 경쟁이 제법 생겼다고 하지만, 학자 숫자 자체가 적으면 제대로 된 경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대학교 교수 숫자는 더 늘어나야 합니다. 대운하니, 4대강이니, 그런 데 돈을 쓸 것이 아니라, 일부라도 비정규직 대학교원을 정규직으로 바꾸는 데 돈을 쓰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학자들 사이에 경쟁도 생기고, 지식의 축적이 일어나서, 장기적으로 우리나라 발전에 도움이 됩니다. 돈 쓰고 환경 파괴하는 것과 비교해 보십시오. 얼마나 좋습니까.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는 주로 연구와 강의를 통해서 자신의 철학과 주장을 관철합니다. 그렇지만 때에 따라서 신문에 시론을 쓰든지, 일반인을 대상으로 책을 내서 사회를 상대로 홍보하기도 하죠. 이럴 때,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해주면 더 행복해지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맥이 탁 풀릴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장은 올곧은데 비주류가 될 때입니다. 많은 사람이 참 옳은 말이라고 칭찬을 해주는데, 현실 정책으로는 반영이 되지 않을 때입니다. 이럴 때도 신이 난다면, 무골호인이죠. 성인의 반열에 올라도 됩니다. 그런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바람직한 사회는 그런 분이 비주류가 되지 않는 사회일 것입니다. 그래야 사회과학을 제대로 하는 재미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두서없이 주저리주저리 했습니다. ^^

(사진 출처: 서울대 경제학부 이준구 교수님께서 직접 촬영하신 것입니다. 서울대 사회과학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