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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8일 목요일

[자유] 링컨의 정치적 조작: 말의 향연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7/05, 원 제목: 링컨의 정치적 조작: 말의 향연 (3)]

(제가 링컨 이야기 제목을 잘못 붙였습니다. ㅜ.ㅜ 부제를 "말의 향연"으로 했더니 제 말만 많아지고 있습니다. 교수님 돌아오시면 말을 너무 많이 했다고 야단맞을 것 같습니다. 조금 겁납니다.^^ 부제를 붙이지 않았다면 벌써 끝났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아무튼 오늘은 기!필!코! 끝내겠습니다. 링컨 아니라 그 할아버님이 오셔도 끝내겠습니다. ㅋ)

(1) 마키아벨리(Nicolo Machiavelli)와 홉스(Thomas Hobbes)

마키아벨리가 정치와 도덕을 나눠서 근대 정치학의 팡파르를 울렸고, 그 바톤을 이어받은 사상가는 영국의 홉스입니다. 두 사람의 대중적 이미지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권모술수”(설명드렸듯이 마키아벨리를 나타내는 주제어로 부적절하지만, 대중의 뜻에 한번 따라봅니다.) 그리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왠지 으스스하시죠. 마키아벨리나 홉스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 그것도 어두운 쪽에 초점을 맞춰서 정치를 설명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국제정치학에서는 이런 부류를 현실주의(Realpolitik, Realism)라고 부릅니다.

(긴장되시죠? 제가 홉스 이야기로 또 옆으로 샐까 봐요. ㅎㅎㅎ 홉스는 이미 다뤘습니다. “국가와 사회적 약자”라는 제 졸 포스팅(http://tinyurl.com/hobbes-ahn)에서 데카르트(Rene Descartes)의 방법론과 연결하면서 홉스를 설명했습니다.)

(2) 국제정치의 현실주의와 자유주의

투키디데스(Thucydides)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적으면서 속에 몰래 용의자의 딜레마 게임을 그 오래전에 숨겨 놓았다는 강호의 전설이 있습니다. 존 내쉬(John Nash)가 태어나기 거의 2,500 년 전 일인데 말입니다. 대단한 예지력입니다. 하지만, 그 역사서에 균형분석은 없습니다.^^ 후대에 책을 읽다 보니 복잡해서, 요약하면 어떻게 될까? 궁리를 해보니,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군비경쟁의 용의자의 딜레마에 빠졌다는 초절정 요약판을 내놓은 것이죠. 용의자의 딜레마도 어두운 쪽이죠. 밝은 쪽의 파레토 최적 상호협력(군비경쟁 안 함)이 있음에도, 두 도시국가의 이기심과 전략적 상호작용 때문에 파레토 열등한 결과에 도달합니다. 그것이 딜레마라는 것이고요. 따라서 투키디데스도 현실주의 쪽으로 분류합니다.

국제정치가 전쟁과 평화에 관한 것인데, 전쟁과 분쟁에 관한 연구는 현실주의에 입각한 것이 많습니다. 궁합이 잘 맞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반면 칸트(Immanuel Kant) 선생을 대표주자로 하는, 현실주의에 분연히 맞서는 사조가 있으니, 이름하여 이상주의(Idealism) 혹은 자유주의(Liberalism)라고 합니다. 이쪽 동네는 평화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국제법의 아버지 그로티우스(Hugo Grotius), <영구평화론> 칸트, 이 교수님께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프린스턴대 총장을 역임한 윌슨(Woodrow Wilson, 국제연맹) 등이 대표주자가 되겠습니다. 현대에서는 현실주의의 대표 주자로 니버(Reinold Niebur), 모겐쏘(Hans J. Morgenthau, 교과서 저자로 유명), 왈츠(Kenneth Waltz, 신현실주의) 등이 있고, 자유주의의 대표 주자로 코헤인(Robert Keohane), 나이(Joseph Nye, Jr.) 같은 학자들이 있습니다. 국제정치학의 현실주의, 자유주의 이야기입니다. 혼동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현실주의와 자유주의를 구분하는 기준이 여럿 있는데, 그중에 국내정치와 국제정치의 연관관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견해 차이가 중요합니다. 현실주의는 역시 전쟁/분쟁 쪽이라서 ‘안’ 보다는 ‘밖’을 더 신경 쓰죠. 내부는 결속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를 당구공으로 본다는 의미에서 당구공 모형이라고도 합니다. 반면에 자유주의는 한 국가의 외교의 연원이 국내 메커니즘의 영향을 제법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평화와 경제 쪽에 관심이 더 많은 사조라서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속성상 국내가 하나로 뭉쳐 있을 가능성이 별로 크지 않죠. 그것을 활용하는 외교를 “양날 외교”라고 합니다. 푸트남(Robert Putnam)의 “Double-Edged Diplomacy”인데, 간단하게 설명드리면, 미국이 협상 테이블에 나와서 상대방에게, 나는 100을 주고 싶은데 우리 의회가 70만 주라고 그런다. 그러니까 깍아주어라, 이런 식입니다.

(3) 칸트 <영구평화론>과 쌍방 자유 명제

칸트 <영구평화론>은 일종의 희망사항 선언문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되면 영구평화가 올 수 있으니 그렇게 되면 좋겠다는 식입니다. 영구평화의 가장 중요한 조건을 왕창 요약하자면, 지구 상의 모든(어렵겠죠?) 나라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칸트는 공화국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가 되고, 자유로운 경제교역이 활성화되면 영구평화가 이뤄질 텐데...라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미국이 자유의 첨병을 자처하고 중동에서 생고생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칸트의 입장을 현대적인, 모던한 표현으로 바꾼 것이 "쌍방 자유 명제(Double-Freedom Proposition)”입니다.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전쟁이 1815년에 끝납니다. 나폴레옹 전쟁이 군사적인 측면에서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이정표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 이전은 중세 전쟁이라고 하고 그 이후를 근대 전쟁 시기라고 합니다. 중세에는 용병을 많이 썼죠. 전쟁을 해도 사람이 잘 죽지 않습니다. 이것도 합리적 선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용병이 프로들 아닙니까. 직업군인들이죠. 일단 살아남아야 다음 전장으로 가서 돈을 벌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서로 봐주는 것이죠. 마, 나도 그렇고 너희도 그렇고 집에 처자식 있는 몸들이니 서로 살살하자, 이렇게 되죠. 야심 많은 나폴레옹은 유럽을 통째로 삼키고 싶은데 중세 용병으로는 도저히 안될 것 같았나 봅니다. 그래서 국민개병제라는 통탄하고 가공할만한 군대 제도를 도입합니다. 그리고 알프스 산맥을 넘죠. 제도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성능 좋은 제도가 한번 선보이면 급속도로 퍼집니다. 프랑스가 그렇게 나오니 영국도 전 국민 동원력을 내릴 수밖에 없죠. 그런 식으로 폭력의 상승작용(escalation)이 일어나고, 급기야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게 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 아, 1815년! 국민개병제가 선을 보인 그 즈음에 자유민주주의도 확산됩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그전에 일어났죠. 그리고 1815년 이후의 전쟁 데이타는 제법 반듯하게 잘 수집되어 있습니다. 그 데이타가 미시간 대학교(U of M)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을 것입니다.^^ “소(COW)^^” 프로젝트라고 있습니다. 풀어쓰면 “전쟁 상관관계(Correlates of War^^)”라고 하는데, 국제정치학자들이 1815년 이후의 전쟁관련 데이타를 SPSS, STATA 등으로 열심히 돌려보니, 아! 칸트가 맞았잖아...라는 탄성을 내뱉습니다. 그것이 “쌍방 자유 명제”를 귀납적으로 확인한 것입니다. 두 자유민주주의 국가 사이에는 전쟁이 없었다!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 국가 수만 자꾸 늘려나가면 평화는 확산한다는 제법 그럴듯한 논리가 섭니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의 명분이 이쪽에도 걸치고 있죠. 속내야 어떻든, 겉으로는 그럴 듯하지 않습니까? 칸트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서 영구평화를 위하여 불철주야 미국이 이렇게 고생한다는 식이죠. 조금 위험한 발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원래 자유주의가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인데, 가상의 기준을 미리 세워놓고 그쪽에 맞춰서 상대방을 침략한다는 것이 어째 머쓱합니다. 그래서 미국으로서는 완전히 그것이다는 말도 못 합니다. 정치라는 것이 그렇게 애매모호한 측면이 많습니다.

(4) 자유주의와 폭력, 그리고 투쟁

쌍방이 자유주의면 괜찮은데 일방이 자유주의가 아니면 자유주의 국가도 폭력적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을 쌍방 자유 명제가 보여줍니다. 우리가 보통 자유라고 하면 좋은 것, 평화, 포근함, 이런 것들만 떠올리는데, 전혀 아닙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 알량한 자유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습니까. 미국도, 보스턴에서 일어난 차(Tea)세 반란을 그 당시 돈으로만 바라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영국 사람이 내는 세금보다도 훨씬 적은데, 그 정도야 내버리고 말지 왜 독립전쟁을 했느냐는 영특한 논리 전개가 가능하죠. 그때 사람이 많이 죽었습니다. 사람 목숨 값 계산하고, 차세 전부 합치면, 당연히 목숨 값이 더 많죠. 그러나 자유라는 것의 소중함 그 자체도 있고, 먼 훗날 후손들이 그 자유를 이용하여 돈을 벌어 들이는 것까지 계산해야 제대로 된 계산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즉, 합리성이라는 것이 시공에 갇혀 있기 마련인데, 그 시공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설명이 달라진다는 것이죠. 단기간으로는 비합리적인 것도 장기간으로는 합리적인 것으로 될 수 있죠.

자유민주주의는 전형적으로 장기 합리성을 추구합니다. 우리나라도 장기적으로는 잘 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잘 되려면 이 교수님께서 매우 적절하게 지적하셨듯이, 국민이 스스로 자유와 권리를 지키려는, 투쟁하는 정신자세를 갖춰야 합니다. 자신의 권리가 침해되면 그만두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여줘야 자유주의에서는 평화가 옵니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우리 국민은 쓸데없는 곳에서 너무 관용을 베풀고, 귀차니즘에 빠진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을 쓰레기통에 갖다 버려야 자유민주주의가 발전합니다.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자유는 포근한 엄마 가슴이라는 안일한 마음을 고쳐잡아야 합니다.

미국의 예를 한번 보시죠. 오바마(Barack Obama)가 최초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는데, 오바마 혼자 힘으로 그렇게 된 것은 분명히 아니죠. 아프리카에서 잘 지내고 있는데 노예 사냥꾼들에 의해서 잡혀와서 고생한 미국 흑인 조상의 자유와 권리를 위한 피땀 어린 투쟁의 토대 위에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물론 오바마의 어머니는 백인이고 아버지는 아프리카에서 유학 온 경우라서 전형적인 흑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미국 정치의 현주소를 살피면, 흑인으로 볼 수밖에 없고, 지난 대선에 당선된 것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죠. “I have a dream”을 외치다 적의 흉탄에 서거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의 자유민주주의 운동이 없었다면 오바마는 없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물론 미국의 흑인 노예와 같은 눈에 보이는 그런 폭압은 없지만, 자유민주주의 운동이 필요 없을 만큼 자유민주주의가 성숙하였습니까? 우리나라에도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같은 그런 큰 인물이 나온다면 우리 자유민주주의 발전이 한층 더 가속화될 것입니다. 그 토대는 이미 있습니다. 민주화 운동 때 산화된 생명이 그 기반입니다.

(제가 이거 분명히 오버죠??? 왜 이럴까요... 오늘은 약속을 했으니 계속 합니다.)

(5) 드디어 링컨

그리 하야, 마키아벨리가 정치와 도덕을 구분한 것을 참조해서 링컨을 바라보면 그 사람도 정치인이라는 데 착안하게 됩니다. 정치인의 합리성이 있죠. 자유민주주의에서 정치인은 표를 바라보고 삽니다. 링컨도 그 점에서 다른 정치인과 다를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씨 질문에 제가 예스도 되고 노도 된다고 일단 답했던 것입니다. 거시는 이창용 교수에게 잘 배우셨을 테니 제가 미시 부분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이준구 교수님이 계시면 미시를 저보다 훨씬 더 잘 가르쳐 주시겠지만, 지금 부재중이라서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성에 차지 않으시더라도, 사이비가 그 정도면 됐다는 평가를 해주시면 대단한 영광이겠습니다.

(6) 의제 설정

이곳에 법을 전공하시는 분들도 오시니까, 제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법을 다루는 곳입니까, 정치를 하는 곳입니까? 저는 그것이 알고 싶었습니다. 아래에 고정논객 OO씨가 정성껏 정보를 줘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링컨이 법률가 변호사 출신이죠.

위의 제 질문은 어설픈 의제 설정(agenda setting)입니다. 왜냐구요? 제가 정치학 쪽 아닙니까. 당연히 정치도 하는 곳이다는 답을 기대한다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죠. 우리 정치사에서 최근의 대표적인 의제 설정으로 저는 “잃어버린 10년”을 듭니다. 잃어 버렸는지, 아닌지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제법 많은 국민은 뭔가 상실했다고 느꼈죠. 마찬가지로 헌재의 관습헌법 논리 채택은 정치학으로 분석하면 일종의 의제 설정입니다. 저는 어설픈 의제 설정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헌재 결정 소수 의견으로 나온 전효숙 재판관의 의견서를 찾아서 한번 읽어 보십시오. 다수 의견보다 훨씬 논리적이고 이치에 맞습니다. 세상에 연성헌법도 아니고, 경성헌법을 채택하는 나라에서 공화국도 아닌 왕조 시대 서울을 갖고 헌법 운운하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느냐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정치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의제 설정이죠.

(7) 링컨의 의제 설정

링컨이 대통령이 된 것이 1860년인데, 그 언저리 링컨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의제 설정을 잘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공화당 쪽은 이합집산을 거듭합니다. 당명도 여러 번 바뀌었죠.

Federalist ==> National Republican ==> Whig ==> Republican

어떤 의제설정을 해야 선거에서 이길 것인지 공화당은 심각하게 고민을 했습니다. 노예해방이라는 좋은 쟁점이 있기는 한데 전국 이슈로 만들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 즈음에야 농업 위주였으니까 남부의 입김이 셌고, 그 여파로 공화당 쪽 일부도 표심을 잡기 위해서 갈대같이 흔들렸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때 링컨이 공화당의 구세주 역할을 합니다.

미국이 서부로 팽창하면서 주들이 늘어났죠. 땅을 확보하면 모두 곧바로 주가 되는 것이 아니고, 많은 경우 테러토리(Territory)라는 임시정부 형태를 거쳐서 주가 되었습니다. 그 테러토리에 노예제를 허용하느냐 마느냐가 그 당시 초미의 관심이었습니다. 그 문제를 일리노이주 연방 상원의원인 더글라스(Stephen A. Douglas)가 해결했습니다. 그것이 1854년 캔사스-네브래스카 법(Kansa-Nebraska Act)입니다. 내용은 테러토리 의회가 노예제를 허용하든 안 하든 알아서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당이 바라고 있었던 대로 노예해방 이슈를 로컬에 묶어놓는 데 성공했습니다. 민주당 상원의원 더글라스의 공으로 칩니다.

그런데 캔사스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캔사스는 해방구(Free Soils)가 되었는데, 연방 대법원의 판결에 의하여 흑인은 연방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지 못한다고 결정해버린 것입니다. 1857년 드레드 스캇(Dred Scott) 판례입니다. 그 당시 연방 대법원을 남부 출신 판사들이 장악하고 있었거든요. 모순이 생겼습니다. 해방구를 연방정부가 인정하지 않은 셈이니, 캔사스-네브래스카 법의 연원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 점을 링컨이 파고들어서 노예해방 이슈를 전국화시키죠.

그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858년에 연방 상원의원을 선출하는 선거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간선이라서 일리노이주 의회에서 선출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민주당 대표는 현역 더글라스, 공화당 대표에는 삐쩍 마른 링컨이 나왔습니다. 두 후보가 일리노이 전역을 돌면서 8차례 토론회를 했습니다. 그 중 프리포트(Freeport)라는 조그만 도시에서 열렸던 토론회에서 링컨은 더글라스에게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Can the people of a United States Territory, in any lawful way, against the wish of any citizen of the United States, exclude slavery from its limits prior to the formation of a state constitution?”
음... 영어가 조금 고풍스럽습니다. 요체는 더글라스 당신은 테러토리가 정식 주가 되기 전에, 연방정부가 반대해도, 노예제를 폐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정도가 되겠습니다. 정확하게 위에서 설명드린 모순을 지적한 것입니다. 2년 뒤인 1860년 대통령 선거에 대해서 더글라스는 관심이 많았습니다. 민주당 후보가 되려면 남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죠. 그런데 일리노이주는 북부에 있습니다.

그 당시 이미 민주당은 북부와 남부로 분열의 조짐이 있었습니다. 저 질문에 예스(Yes)로 대답하면 더글라스는 상원의원직을 쉽게 유지할 수 있지만, 남부 쪽의 외면을 받게 되는 것이었죠. 링컨이 설정한 의제는 상원의원을 쉽게 계속 유지할래, 아니면 대통령에 도전해볼래, 둘 중 하나만 골라 보라고 압박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더글라스 자신이 주도한 캔사스-네브래스카 법도 걸려 있죠. 결국, 더글라스는 쉽게 상원의원직을 유지하는 쪽으로 결정합니다. 링컨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2년 뒤를 기약합니다.


1860년에 민주당은 쪼개집니다. 북부민주당은 더글라스를 후보로 내고, 남부민주당은 자체로 다른 후보를 냅니다. 링컨의 의제 설정이 성공적으로 좋은 결과를 얻었죠.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노예해방을 이끌어 냈고, 그 이후로 미국 정치의 주도권은 당분간 공화당으로 기울게 됩니다. 링컨이 사용한 의제 설정은 의제 추가(Issue Addition)입니다. 공화당의 고민이 노예해방을 전국 이슈로 끌어들여야 하는데 여의치 않았죠. 그런데 링컨이 프리포트에서 토론 한번 잘해서 전국화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TV나 라디오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서, 정당이 유권자에게 정책을 호소할 때 종이 홍보에 의존했습니다. 링컨이 논리를 제공했고, 홍보는 공화당 조직이 맡았습니다. 프리포트 토론 내용의 핵심을 잘 요약해서 신문이나 당 홍보지를 통해서 열심히 뿌렸다고 합니다. 일반인은 링컨의 정치적 조작을 말 그대로 읽으면 무슨 뜻인지 모를 수 있기 때문에, 공화당 조직이 친절하게 해설을 해서, 시민이 드시기 좋게 메뉴를 개발한 것이죠. 대선까지 2년의 기한이 있었기 때문에 시간도 충분했습니다. 링컨은 1860년 대선 때 선거 유세도 별로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남부는 아예 포기했죠. 링컨이 아이디어 토스를 잘했고, 그것을 받아서 공화당 조직이 잘 움직여서 노예해방 쟁점을 전국화했습니다.

(8) 정치적 조작

라이커 교수님은 이것을 Political Manipulation(PM)의 대표적 사례로 꼽습니다. 그래서 그 책의 첫 번째 이야기가 된 것이죠. 이야기가 모두 12개입니다.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 많아서, 생각하면서 읽어야 문리가 들어옵니다. 작은 고추가 매운 셈이죠.^^ PM을 어떻게 번역할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정치공작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부정적 의미는 없고, 정당한 방법으로, 힘이 아닌 “말”로 자신에게 유리한 전략적 상황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공작은 힘이 조금 들어가죠. 조작도 우리에게는 조금 부정적 의미가 있어서, 정치공학이라고 한번 써봤습니다. 그러니까 이공계 일부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더러운 정치에 신성한 공학을 갖다 붙이지 말라는 이야기였죠.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치공학이 두 가지 의미로 쓰이더군요. 우리나라 정치학자들도 정치공학이란 용어를 많이 씁니다. 이때는 PM에 따라서 객관적 의미로 씁니다. 그런데 정치인들이 또 그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정치공작에 따라서 나쁜 의미로 쓰더군요. 이공계 사람이 정치학 논문을 읽을 필요는 없죠. 그래서 정치공학이라는 용어를 꺼리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냥 정치적 조작이라고 하겠습니다.^^ 원래 제목으로 돌아왔습니다. ㅋ

결론적으로, 노예해방과 관련하여 링컨의 도덕성은 부풀려졌지만, 거시적으로 남북통합을 이끌어낸 위대한 대통령이고, 미시적으로는 정치적 조작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능력 있는 정치인이었습니다. 미국 사람의 추앙을 받을 만 합니다.

여러분도 주위에 잘 보십시오. 정치는 공기와 같은 것이라서, 사람 사는 곳에는 정치가 있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사람이 어떤 정치적 조작을 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오려고 하는지 잘 관찰해보십시오. 재미있을 것입니다. 정치학자의 임무 중 하나로 정치인을 견제하는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문적으로 공부를 많이 했으니, 정치인들이 어떤 정치적 조작을 해서 (정당한 방법으로) 결과를 왜곡시킬 수 있는지 집어낼 수 있겠죠. 그런 것을 지적해야겠죠. 일반인들에게 알리기도 하고요.

긴 글 읽으시느라 너무 수고 많았습니다. 링컨 이야기 끝입니다. 만세!

2009년 8월 2일 일요일

[자유, 공개서한] 교육과학기술부 장관님께

교육과학기술부 장관님께,

우리나라 교육에 불철주야 고생하시는 장관님께 안부 인사드립니다. 저는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대한민국 국민 안병길입니다. 우리나라 도덕/윤리 교육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리고자 이렇게 공개서한을 띄웁니다.

저는 현재 <자유민주주의 바로 알기: 인터넷 자유민주주의 선언>이라는 잠정제목으로 책을 적고 있습니다. 지금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서 이번 주말이면 전체 초고가 나올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우리나라 지인에게 부탁한 초등, 중등, 고등학교 도덕과 윤리 교과서를 받았습니다. 그 내용을 확인한 결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개념 설명이 우리 교과서에 매우 부족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초등학교 6학년 도덕 교과서(지학사 출판)에 자유와 권리라는 단어가 딱 두 번 나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똑같이 존중받아야 할 자유와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마다 자기의 자유와 권리만을 주장하면, 사회는 무질서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무질서를 바로잡고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법과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

이 부분을 제외하고,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은 초등학교 6학년 도덕 교과서에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를 인용하는데,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원리나 개념 설명이 아니고, 애국심과 준법정신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다른 내용 대부분은 "공동체 의식"을 부추기는 설명이었습니다.

위에 인용한 부분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대한민국 헌법에 대못을 박아놓은 자유민주주의 이념에서 자유와 권리는 가장 중요한 기초인 핵심 개념입니다. 따라서 자유와 권리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때 자유는 방종이 아니며, 권리는 남용 혹은 오용된 권리가 아닌 정당한 권리입니다. 헌법에 명시한 그 자유와 권리입니다. 역사상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미국 독립전쟁,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인권운동, 3.1 운동, 4.19 민주혁명, 한국전쟁, 그리고 우리 민주화 투쟁 등입니다.

이런 기초를 먼저 설명하고, 방종과 적절치 않은 권리 주장을 설명해야 하는데, 초등학교 6학년 도덕 교과서는 마치 자유와 권리 주장이 사회불안의 요인인 것처럼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유와 방종을 어떻게 구분하는지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국가를 위해서 악법도 지키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헌법에는 국가의 주인이 국민임을 명기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게 해로운 법이 자신에게 이롭고, 또 그것을 지키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이율배반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분위기는 중등학교 3학년 도덕 교과서(지학사 출판)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자유와 민주의 근본 원리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고, 공동체 혹은 유교적 질서 개념을 원용한 도덕 설명이 대부분입니다. 심지어 196쪽부터 3쪽에 걸쳐서 루소(Rousseau)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많은 정치학자는 과거 소련이나 현재 북한과 같은 집체주의(Populism)의 연원을 제공한 사상가로 루소를 평가합니다. 자유민주주의 사상가로 더 중요한 위치를 인정받는 홉스, 로크, 죤 스튜어트 밀, 벤자민 프랭클린도 있는데 말입니다. 조금 심하게 평가하자면, 도가 지나쳐서 북한의 주체사상을 교과서에서 가르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고등학교 시민 윤리 교과서(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정도서 편찬 위원회)는 그래도 조금 낫습니다.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 인간의 존엄성을 설명하고, 로크를 인용하고,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 독립전쟁을 소개했습니다. 136쪽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자유 민주주의 질서는 권위주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실현되었다."라고 제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유와 권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로크와 밀도 적절하게 인용했습니다. "국가의 가치는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의 가치에 있으며, 개인을 경시하는 국가는 존립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137쪽)"

그러나 시민 윤리 교과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어는 공동선, 시민 공동체, 국가 공동체, 운명 공동체, 민족 공동체 등으로 "공동체"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칼 포퍼나 윌리엄 라이커 등 많은 정치학자가 집체주의(Populism, 전체주의와 공산주의)로 연결될 수 있는 위험한 개념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들이 루소를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교과서에는 공동선이나 공동체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없습니다. 그냥 좋은 것으로 대충 상정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허상이면, 교과서 전체의 맥락이 무너집니다. 경제학과 정치학에서 자유민주주의 공동체는 허상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명제가 논리적으로 증명되어 있습니다. 애로우 교수의 불가능성 정리입니다. 그 정리를 증명하여 애로우 교수는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대로, 우리 국가의 대국민 자유민주주의 교육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고, 내용도 매우 부실하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이기적 개인주의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과서는 이타주의와 공동체를 강조합니다. 건전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자유민주주의를 활성화하는 데 매우 중요한 토양이라는 설명을 교과서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애매모호한 공동체 잣대를 들이밀면서, 착하게, 바르게, 관용하면서, 전체를 위해서 살 것을 가르칩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려면, "공동체를 위해서!"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사회 집단이 일정 범위를 넘어서면, 루소가 주장하는 그런 공동체는 흔히 볼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이 아닙니다. 종교에는 있습니다. 가족도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그만 시나 읍 정도만 되어도 그것을 공동체로 보기 어려울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교과서는 공동체와 공동선을 줄기차게 가르칩니다.

교과서가 주장한 윤리적 내용은 건전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에서 출발한 자유민주주의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매우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자유와 방종은 저항 개념으로 구분할 수 있고, 자유와 자유가 맞부딪히면 권리에 대한 제한이 생긴다는 식으로 매우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애매모호한 가상의 공동체는 필요 없는 개념입니다. 오히려 권위주의 분위기를 조장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 선진국이 되려면, 우리 국가는 자유민주주의 대국민 교육 내용을 반드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된 교육으로, 시민이 자율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더 성숙시키는 쪽으로 교육 방향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관님은 우리 도덕/윤리 교과서가 권위주의 내용을 버리고, 자유민주주의 내용을 더 포함하도록 고치실 의향은 없습니까? 이 공개질의에 장관님이 공개 답변해주실 것을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장관님의 건승과 우리 자유민주주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09년 8월 2일
안병길 드림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국민

(이 공개서한은 출처를 http://ahnabc.blogspot.com으로 밝히시고 마음껏 퍼가실 수 있습니다.)

2009년 7월 30일 목요일

[자유] 국가와 사회적 약자

[설명] 아래 글은 영국 정치사상가 홉스(Thomas Hobbes)를 원용하여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평등 개념이 어떻게 도출되는지를 보여준다. 국가는 당연히 여자나 장애인과 같은 헌법에 규정된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해야 한다. 그것은 국가의 책무이다. 이것을 지키지 않는 국가에 대해서는 국민이 그 시정을 강력하게 요청해야 한다. 아울러서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더라도 사회적 약자라는 공감대가 생기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그들을 돕고 보호해야 한다.

(1) 홉스와 데카르트(Rene Descartes)

국가의 역할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능은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국가기능이 역할을 제대로 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약자를 보호한다는 측면에서는 아쉬움을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국가가 왜 약자를 보호해야 하느냐를 설명하려면 홉스의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참조하는 것이 한 방법일 것입니다. 홉스는 마키아벨리(Nicolo Machiavelli)와 함께 근대 정치학의 한 획을 긋는 영국의 정치사상가로서 자연상태와 사회계약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켰습니다. 우리의 귀에 익숙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란 유명한 말을 남겼죠.

홉스의 방법론을 이해하려면 프랑스의 데카르트를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합니다. 데카르트는 <방법 서설>에서 지식을 어떻게 축적할 것인가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연역적 방법론을 체계화시켰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Je pense, donc je suis. Cogito ergo sum.)”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설명하면 “생각은 존재의 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면 생각을 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해보면 됩니다. 이 명제는 (생각 => 존재)의 관계를 설파하는 것으로 대우명제는 (존재X =>생각X)이 되겠습니다. 참인 명제입니다.

이 명제가 사회과학 방법론에 미친 영향은 큽니다. 지식이 어떻게 축적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데카르트는 분석대상을 쪼개서 연구할 것을 제시했습니다. 인간만큼 중요한 분석대상도 없습니다. 인간을 인간 전체로 분석하자면 너무 복잡해서 인간에 대해서 잘 알 수 없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입장이었습니다. 군인으로 막사에 앉아서 화롯불을 쬐면서 데카르트는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결국 쪼개서 연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머리 즉 생각은 분리해버리면 인간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명제가 나온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데카르트는 이 모든 것을 생각으로 해결했습니다. 연역적 방법론입니다. (생각 => 존재)의 논리를 사회과학 전반에 적용시켜서 전체는 부분으로 쪼개서 분석하자는 주장이지요. 이것이 근대 실증과학 철학의 근간을 형성합니다. 어려운 것보다는 쉬운 것부터,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부터 분석해서 하나하나 쌓아 올리는 지식축적론을 주창한 것입니다. 이 방법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서구문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2) 자연상태와 국가 형성의 사회계약: 평등 구현

홉스와 데카르트의 연관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홉스는 아주 간단한 모형에서 시작하여 국가의 형성을 설명하려고 하였습니다. 즉, 통치기구도 없고 아무런 질서도 없는 가장 단순한 자연상태를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도 아주 단순하게 보았습니다. 홉스는 흔히 두려움(fear)과 쌍생아 관계라고 얘기합니다. 어릴 때부터 유약했던 홉스에게 인간의 존재, 즉 생존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는 해석이지요. 자연상태에서는 경찰도, 어떤 형태의 도와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자기 자신만을 믿을 수 있을 뿐이지요. 자구(self-help)가 유일한 생존법칙인 세계입니다.

이런 자연상태의 세상에서는 일단 힘이 있어야 합니다. 홉스의 원초적 인간관은 아시다시피 매우 부정적입니다. 자연상태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폭력과 지능밖에 없습니다. 남을 순수한 폭력으로 제압하든지, 돌멩이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지능을 동원) 물리칠 수 있어야 자신의 안전에 대한 약간의 안심을 할 수 있는 지경이니까요.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약자는 강자에게 당해야 되는 세상이고, 틈만 나면 남을 제거해야(궁극적으로는 자신만 남아야) 안전이 더 많이 확보되는 아주 불편한 인간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이런 자연상태였는지 홉스가, 또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홉스도 연역적 방법을 동원하여 일단 이론적으로 그런 모형을 만들어서 국가 형성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인간은 역시 생각하는 동물이라 위와 같은 불편함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시작합니다. 홉스에 따르면 자신이 가진 물리적 폭력을 대부분 포기할 것을 서로 약속하게 됩니다. “사회계약”을 이루어서, 국가라는 “괴물(성서의 리바이어던)”에게 남을 해칠 수 있는 능력을 포기하는 “각서”를 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국가는 관리자가 되고 사회계약 속의 인간들은 남의 생명을 해치지 못하도록 규정된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평등을 이룩합니다. 즉, 약자나 강자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왜 강자가 그런 계약을 맺게 되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절대적인 강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약한 인간들도 연합해서(혹은 머리를 써서) 힘센 사람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시민 혹은 국민은 누구나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된다는 당위성이 생깁니다.

(3) 룻쏘(J. J. Rousseau)와 사토리(Giovanni Sartori)의 평등 개념

홉스 이후의 룻쏘나 사토리 같은 정치사상가들의 주장을 같이 참조하면, 우리 헌법에도 명문화되어 있듯이 장애인과 여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는 국가가 더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이 제시됩니다. 그런 논의들의 출발점이 바로 홉스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즉, 자연상태에서 불평등한 인간들이 국가를 만들어서 일종의 “평등” 상태를 구현한다는 아이디어입니다.

그런데 룻쏘가 볼 때, 인간 사회가 평등하지 않은 것입니다. 룻쏘는 불평등을 자연적(육체적) 불평등과 정신적(moral) 불평등으로 나눴습니다. 다른 사회계약론자인 로크(John Locke)가 인간들이 사회계약을 자발적으로 맺는 것으로 파악했지만, 룻쏘는 특히 정신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들에게 강제적으로 사회계약을 맺게 하는 측면을 강조하게 됩니다. 룻쏘가 정치사상사에서 권위주의(authoritarianism)나 사회주의/공산주의 주춧돌을 놓은 것으로 평가되는 것은 이때문입니다.

그다음에 사토리는 평등 개념을 더 체계화시켜서 정치적 평등, 사회적 평등, 기회균등을 민주주의의 기본 평등 개념으로 제시합니다.

“완전한 정치적 평등(보통 선거권), 사회적 평등(계급 및 재산과 상관없는 동등한 지위와 배려), 그리고 기회의 균등(동등한 출발점과 진입)”
“Full political equality (as equal universal suffrage), social equality (as equal status and consideration regardless of class or wealth), and equality of opportunity (as equal access and equal start)”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홉스의 평등 개념에서 시작하여 룻쏘를 거쳐서 사토리까지 참조하면 국가는 사회적 약자를 더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