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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11일 금요일

[자유] 합리적 개인과 비합리적 사회

(2009년 7월 10일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에 올린 글을 정리했습니다.)
 [설명] 사회과학의 합리성 개념에 대해서 설명하는 글이다. 주류 경제학과 정치학의 합리적 선택이론의 토대를 이루는 합리성 개념은 논란이 될 때도 있지만, 매우 유용한 개념인 것은 틀림없다. 어떤 사회가 합리적 인간이 주로 모여 있다고 해도, 전체 사회의 결정은 비합리적으로 내려질 수 있다. 대운하나 4대 강 사업이 그 예이다. //

(1) 엄정한 합리성 개념

오늘은 경제학의 전가보도, 합리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교수님께서 미시경제학 5판, 68 쪽에서 72 쪽까지 상세히 설명하고 계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미시경제학은 합리적 행위자를 다룬다는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일상 용어로 합리성은 이성적인 좋은 것이라는 조금 애매모호한 뜻을 내포하고 있지만, 경제학이나 정치학의 합리적 선택이론에서 말하는 합리성은 그와 같이 엄정하게 정의합니다. 그 함의는 행위자가 이기적인 개인주의자라는 뜻입니다.

(2) 현실과 모형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그런 합리적인 인간이 아닌 것은 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면 자유주의에 어긋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펜실베니아 주 산골에 가면 외부와 접촉을 꺼리면서 매우 청빈하게 살아가는 종교 공동체가 있는데(영화 위트니스에 나오는 그런 마을이죠), 그런 사회에서도 마을 주민들이 모두 이타적이라든지, 이기적이라든지 일반화시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합리적 경제 행위자는 "현실" 그 자체 얘기가 아니고 "모형" 얘기라고 봐야 될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합리적, 비합리적 행위자가 모두 존재하지만, 경제학 주류 모델에서는 비합리적 행위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비합리적 행위자를 경제학 주류 모델로 분석해봤자 별 신통한 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과보다 감, 감보다 배, 배보다 사과를 더 좋아한다면 효용함수를 어떻게 그려낼 수 있겠습니까. 또 무엇을 선택할지 어떻게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다트로 찍어서 예측하는 식으로 할 수 밖에 없죠. 사과, 감, 배 순서로 좋아한다고 해야 그 사람은 사과를 먹을 것이라고 예측 가능한 것이죠. 그렇게 가정해야 과학적으로 일반화된 지식의 축적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모형이 현실을 얼마나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는가도 관건이 될 것입니다. 모형은 합리적 행위자를 가정했는데, 현실에서는 주로 비합리적 행위자들이 오리무중으로, 혹은 랜덤하게 움직인다면 설명이나 예측이 제대로 되지 않겠죠. 그런데 다행히도 경제 현상은 인간의 원초적인 탐욕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현실에서 관찰해봐도 합리적인 인간군상의 모습은 쉽게 드러납니다. 만 원권 보다는 새로 나온 오만 원권을 대부분 좋아하시겠죠.

정치 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에서는 손에 잡히지 않는(intangible) 부분도 상당히 개입되지만, 인간이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정치적 자원이 분명히 있습니다. 공금의 예는 말할 것도 없고, 권력욕도 인간사회에 편재되어 있다고 봐야죠. 따라서 다른 분야는 제가 과문해서 모르겠는데, 적어도 경제학과 정치학에서 합리성을 가정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3) 정치학과 합리성 개념

주류 경제학에서는 이런 합리성 문제를 갖고 시비가 걸리는 일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정치학에서는... 아직까지도,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비일비재할 것입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정치학이 여러 분과로 나뉘는데 보통 정치 사상/이론, 비교 정치, 국제 정치, 한국(미국은 미국) 정치, 정치학 방법론, (실증정치이론=합리적 선택), 등 다섯 (여섯) 분과로 나뉩니다. (미국에서는 괄호 안의 분과도 대세이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표시했습니다.) 예컨대 비교 정치는 여러 나라의 정치 행태를 비교하는 것이라서 굳이 합리적 행위자를 가정하지 않아도, 겉으로 드러난 데이타를 갖고 충분히 연구할 수 있습니다. 물론 특정 정치 행태가 왜 나왔느냐를 분석할 때는, 저로서는 합리적 행위자를 가정하는 것도 괜찮다고 봅니다.

따라서 연구자가 어떤 세부 전공에서 주로 활동하느냐에 따라서 합리성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경우가 정치학에서는 충분히 가능하죠. 정치사를 주로 연구한 분들은 역사학에 가까운 방법론을 동원합니다. 역사 기술을 하는데도 일종의 틀로서 합리성 잣대를 이용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 있죠. 그러나 과학은 아닐 겁니다.

(4) 정치학의 합리적 선택이론

정치학자들 사이에서도 정치는 있습니다. 합리적 선택이론이 무슨 절대 진리도 아니니, 예컨대 미국 정치학계에서 주류가 되려면 더 많은 학자들이 동참해줘야 되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전통적 방법론을 고수하는 쪽과 새 물결인 합리적 선택 쪽이 세게 부딪혔습니다. 합리적 계란이 나중에 전통적 바위를 깨는 현상이 벌어진 것을 참조하면, 합리성이라는 가정이 정치학에서도 과학적인 일반화된 지식을 축적하는 데 분명히 장점이 많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문제는, 합리적 선택이론(공공선택이론, 게임이론, 공간모형이론)이 전부 모형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합리적 선택이론은 일단 모형을 분석하고, 그 다음에 현실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예측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전통적 방법론을 활용하는 학자들은 현실을 곧바로 쳐다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연구자의 연구 프레임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마저 모형으로 간주하지는 않기로 합시다. 그것까지 모형으로 끌어들이면 투키디데스도 합리적 선택이론 쪽에 속한다고 강변할 수 있습니다. 용의자의 딜레마 게임을 활용했다고요. 제가 말씀드리는 합리적 선택이론은 경제학과 그 방법론이 동일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5) 합리적 선택이론에 대한 전통주의자들의 비판

따라서 전통적 방법론 쪽은 합리적 선택이론 쪽을 비판할 때, 모델이 엉성하다는 뜬 구름 잡는 얘기를 꺼내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현실을 직접 쳐다보니 엄청 복잡하죠. 그런데 게임이론에 나오는 2x2 보수행렬을 보니 한심스럽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단순한 표 하나로, 그렇게 많은 정치 현상을 설명하려는가 하시면, 시비가 걸립니다. 그 분들은 수요 공급 곡선은 시비걸지 않습니다.^^ 기득권이 있는 곳에서 복잡한 현실 중 일 부분을 쓰윽 꺼집어 내어서, 이런 것도 있는데...라고 말씀하시죠.

모형은 다른 모형과 비교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모형을 이용한 과학적 분석이 무엇을 보여줬는지를 따져보는 것이 적절한 평가이지, 모형이 현실과 얼마나 다른가를 갖고 시비가 붙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결과가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미국 학계에서도 60년대, 70년대에는 조각배가 록키 산맥에 걸리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전통 쪽과 합리 쪽이 서로 다른 얘기를 하면서 감정 싸움에 가까운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이죠.

(6) 합리성 찬양론자 BDM 교수님

제 미국 은사이신 Bruce Bueno de Mesquita(BDM) 교수님은 평소에는 그렇게 자상하실 수 없습니다. 운전수 노릇까지 자청하시면서 학생들을 캘리포니아 해안을 구경시켜주신 적도 있습니다. 저는 뒷자리에서 편하게 딩가딩가했죠. 그런데 그런 유하신 분이 세미나 장에서, 적절한 근거도 없이 당신 모델이 현실과 다른데...라는 얘기를 들으시면, 그 날은 난리가 납니다. 얼굴이 벌개지면서 특유의 달변으로 우렁차게 당신의 연구를 방어합니다. 궁금하시죠? 한번 보십시오. 2009년 2월 캘리포니아에서 대중을 상대로 짧게 합리성을 설명하고, 이란을 어떻게 예측할 것인지에 대해서 공개 강좌를 하신 동영상입니다.


“이란의 미래를 예측하는 BDM (Bruce Bueno de Mesquita predicts Iran's future.)”

청산유수시죠? 경제학자들이 보시면 뭐하러 합리성을 저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나, 그냥 인간들이 합리적이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될 것을...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정치학이나 정치 현상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은 안타깝게도 아직 그 수준에 이르지를 못했습니다.

17분 경에 마무리 멘트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한 줄 요약은, 뭔가 옳다고 믿는 일을 할 때, 주위에서 모두 당신에게 불가능이라고 얘기하면, 그것은 당신들이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다라고 되받아 돌려주라는 말씀입니다. 합리적 선택이론이 살아남은 방법을 한 마디로 요약하신 것이고, 저에게 건설적 비판은 필요하니, 네가 맞다고 믿으면 주위에서 모두 반대해도 감행해라고 얘기하신 그 맥락입니다.

자유주의적 아이디어입니다. 양심, 표현의 자유와 함께 애로우(Arrow) 교수님의 보편적 영역(Universal Domain)도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권위주의에서는 가공의, 정체 불명의 권위에 따라가게 되겠죠. 자신의 양심을 거역하면서까지 말입니다.

(7) 현실에는 비합리성도 존재함

BDM 교수님이 비합리적 행위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에서는 충분히 존재할 수 있고, 정치 현상에 비합리성이 개입할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아시죠. 이 교수님께서 미시경제학 교과서에 행태/행동 경제학을 분석하고 계신 것을 봐도 이 점은 명확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요 공급 곡선에 비합리성을 넣어서 분석할 수는 없는 것이죠. 따라서 합리성이라는 도구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위하여 활용할 것인가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현실과 다른 것은 원래 그렇습니다.

정치나 경제에서 몫(stake)이 크게 걸리면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계산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겠죠. 엄청난 부자가 매일 로또를 사는 그런 비합리적인 경우도 있기는 있을 것입니다. 비합리적 행위는 비합리적 연구 방법론을 적용하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심리분석이 되었든, 최면술이 되었든 말입니다.

(8) 드디어 본론

휴~ 또 서설이 이렇게 길어졌습니다. 본론은 짧게 말씀드릴게요. 자유민주주의가 합리적인 개인을 상정합니다. 직관적으로 자유주의는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유의 극대화라고 표현할 수 있겠죠. 민주주의에서 합리성은 조금 애매모호합니다. 절대적인 기준으로 사회적 합리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애로우 교수님이 증명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요. 그래서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라는, 듣기에 따라서 애매모호한 개념을 사용합니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과반수 득표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과반수인지 아닌지를 형식적으로나마 확인하려면 결선투표가 필요했죠. 그래도 다수의 지지를 합법적으로 받은 것으로 간주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만약입니다, 결선투표를 해서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 했다면, 현행 대선제도가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 과반수 원칙에 어긋나는 대통령 당선자가 나왔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단순 과반수 원칙이란 후보가 두 명일 때, 보다 많은 득표(자동으로 과반수)를 한 후보가 당선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 대통령의 경우는 이렇게 1, 2 등이 결선에서 바뀔 가능성은 높지 않았던 것 같지만, 앞으로 그런 비합리적인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겠습니다.

이런 경우가 발생하면, 개인들은 합리적인데, 사회는 비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다. 대운하나 4대강 살리기를 보시죠. 각종 여론조사에서 추진하지마라는 개인들의 합리성이 집단으로 표출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합리적 사회가 되려면 그 개인들의 선호가 제대로 사회적 선호로 관철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렇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합리적인 개인과 비합리적인 사회로 보입니다만...

이 교수님께서 <쿠오바디스 한국 경제>에서 제발 합리적으로 하자는 말씀을 통절하게 하시죠... 그 뜻을 그들은 제대로 이해나 했을까요?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힘찬 하루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

[토론]

[회원1] 일반 대중은 정책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하고 찬반을 하지 않는다. 특정 지역에서는 감정적 투표를 한다. 따라서 합리적 인간의 가정은 낭설이라고 생각한다. 조중동에서 종부세를 좌파정책이라고 덮어씌우면 서민이 따라가는 것을 봐도 합리성 가정은 비현실적이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미국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필자] 제가 원용한 합리성 개념은 회원1님이 생각하시는 그 합리성과 일치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경제학에서 합리적이라 함은 자신의 선호에 따라서 효용을 극대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옳고 그른 기준이나, 정책을 잘 따지는 기준이 아니고, 좋고 싫음이 기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회원2] 경제학을 처음 접했을 때 혼동했던 부분이다. ‘합리적’을 ‘合理’가 아닌 ‘合利’로 생각하면서 공부했다. 언론이 시민의 선호를 왜곡할 때, 그것이 시민의 진정한 이익을 위하는 것이 아님을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필자] 회원2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합리적이지만 비이성적인 혹은 감정적인 투표 행위가 시정될 수 있도록 사회지도층이나 언론에서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언론을 보면 정치인보다 더하죠. 이런 경우는 건전한 이기주의가 아니고, 편협한 이기주의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장기적으로는, 편협한 이기주의는 오히려 자신에게 손해를 더 끼친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회원3] 우리나라 정치에서는 오로지 ‘지역’만이 절대적인 고려 요소라서, 합리성이란 단어는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진다. //

[토론 소감] 이 글에서 합리적이라는 용어는 좋고 싫은 선호에 관한 것임을 밝혔음에도, 회원1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이성적이라는 의미로 합리성을 받아들였다. 회원2는 경제학을 공부할 때 합리성 개념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원 글에서 필자가 뜻한 합리성을 제대로 설명했다. 회원3도 회원1과 비슷한 오해를 한 것으로 보인다.

[수필] 합리적 선택이론에 대한 추억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1/31)

제가 박사학위 최종심사를 받던 날 벌벌 떨면서 논문 발표를 마치자 심사위원들께서 저에게 밖에 나가 있으라고 하시더군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심사해서 당락을 결정하셨습니다. 다행히도 합격 통보를 잠시 뒤 받았습니다. 학과 라운지로 올라갔더니 지도교수님이 샴페인을 준비하셨더군요. 제 미국 사부님은 제자가 박사학위 최종심사를 통과하면 샴페인 한 잔씩을 학과 교수님과 학생들에게 제공하면서 축하해주는 전통을 갖고 계십니다. 샴페인을 잔에 부어주시면서, "Congratulations, Dr. Ahn!" 하시더군요.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우리나라로 돌아가는 저에게 BDM 사부님은 한국 정치/국제정치학계에서도 합리적 선택이론을 더 받아들이면 좋겠다는 희망을 말씀하시면서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저는 감히 낙관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합리적 선택이론이 정치학에서 방법론적으로 유용하다는 확신이 박사과정 공부 중에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정치학계에서는 규범적, 역사적, 記述的 방법론이 대세였습니다. 그 즈음에 경제학의 합리적 행위자 가정을 정치학에 접목시키는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도되면서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정치학계의 큰 지각변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래 허 교수님의 논문에서 언급되는 연구들이 큰 몫을 했죠. 그중에서 로체스터 정치학과를 현재의 모습(합리적 선택이론, 즉 Positive Political Theory를 주종목으로 함)으로 만드신 故 W. H. Riker 교수님의 공헌은 지대했습니다.

요즘은 미국 정치학회지인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미국 정치학계 랭킹 1위 학술지)를 보면 경제학 논문인지, 정치학 논문인지 애매한 논문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치학이 Political Science("과학"에 밑줄^^)이니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변방의 소수파가 중심부의 "정상 과학"이 되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었죠.

이런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첫째, 학문적/방법론적 경쟁력이 있어야 되고, 둘째, 그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연구를 수행하는 학자 군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 두 가지를 함께 보여주신 분이 Riker 교수님입니다. 첫 번째에 대해서는 허 교수님이 논문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에 대해서 Riker 교수님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박사과정 4년 차일 때 하루는 교수님이 제 공부방에 들어오셨습니다.

"싱가폴 대학에서 사람을 찾고 있는데 자네가 응모해볼 생각 없느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연로하신 지존 Riker 교수님이 미천한 제 일자리까지 걱정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걸음걸이가 불편할 정도의 연세가 될 때까지 후학 양성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셨던 것은 물론이고, Job Market에 나가는 학생들의 인터뷰 리허설에 교수님은 반드시 참석하셔서 코멘트를 해주셨습니다. 심지어 돌아가시던 날 병상에서 한 학생의 논문에 대한 구체적인 코멘트를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내용은 좋았다고 전해달라는 말씀을 남기셨다고 합니다. 합리적 선택이론으로 무장한 제자들을 학계에 더 많이 진출시키려는 Riker 교수님의 "합리적 선택"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아, 그렇다고 해서 교수님의 자상한 보살핌을 평가절하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합리적 선택이 benevolent 할 수 있다는 예가 되겠습니다.

(웬 떡이냐면서 싱가폴 대학으로 밀어주십사 부탁을 드렸어야 정상인데, 그때는 싱가폴이 너무나도 먼 이국으로 느껴지더군요.^^)

아래 허 교수님 논문을 읽으면서 만감이 교차하여 두서없이 주저리주저리 해봤습니다. 법학, 경제학, 정치학을 연결하는 허 교수님의 법학 연구가 Riker 교수님이 하셨던 것 같이 빛을 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법학에서 공공선택이론을 활용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꼭 필요한 것인데요...라는 말씀을 드리면서 미력하나마 허 교수님을 응원해봅니다.

p.s. 1. S.M. Amadae and Bruce Bueno de Mesquita, 1999, "THE ROCHESTER SCHOOL: The Origins of Positive Political Theory" Annual Review of Political Science Vol. 2: 269-295는 정치학에서 경제학이, 합리적 선택이론이 어떻게 자리를 잡았는지를 보여주는 글입니다.

p.s. 2. 법학이 사회과학이냐 아니냐의 문제에 대한 단견을 말씀드리자면, 사회과학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또한 법학의 어떤 세부 분야를 고려하느냐에 따라서 그 답은 달라질 것이라는 하나마나? 한 얘기를 해봅니다.

2009년 8월 2일 일요일

[수필] 미국 사부님 이야기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8/03/18)

일전에 미국 사부님과 관련된 일화를 약간 소개했었습니다. (사부님으로 모시겠다고 찾아갔더니 친밀하게 지내야 한다는 한마디만 하셨다는 것) 몇 가지 더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미국 사부님 성함은 Bruce Bueno de Mesquita 입니다. 이름이 Bruce이고 나머지 모두가 성입니다. 미국에서는 사부님도 그냥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Hi, Bruce!" 이런 식이죠. ^^ 성이 약간 특이해서 손해 보실 때가 있습니다. 인용 횟수를 셀 때 잘 몰라서 Mesquita로 세기도 하고, de Mesquita로 세기도 하고, 전체 성으로 세기도 하면 횟수가 평균 1/3로 줄어들죠. 성이 너무 길어서 아는 사람들은 BDM 약칭을 많이 씁니다.

살아오면서 이 선배님과 같은 훌륭한 분을 알게 되었듯이, 저는 학계에서 사람 복이 많은 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부님들도 아주 좋은 분들이셨고, 미국 사부님들도 그렇습니다. (유학 가셔서 사부님 잘 만나야 합니다. 사부님 스타일에 따라서 배우는 내용과 유학 기간에 큰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브루스 사부님은 제가 학위 과정을 할 때, 적을 두 군데 두고 계셨습니다. 제가 다닌 동부 학교와 서부의 한 연구소였죠. 댁은 서부에 있었기 때문에 강의는 1년에 한 학기만, 2주에 한 번씩 비행기로 오셔서 연강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저 그런 제자였는데, 강의 시간에 큰 점수를 딸 기회를 우연히 갖게 되어, 그다음부터는 사부님의 사랑도 제법 받았습니다. 하루는 강의 중에 발칸반도의 국가 이름이 생각나지 않으셔서 머뭇하셨는데, 제가 쇠발에 쥐잡기 식으로 "헤르쩨고비나"를 알아 맞춤으로써 사부님을 흐뭇하게 해 드린 에피소드였습니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세계사 교육 덕택을 톡톡히 봤죠. ^^ (hugo님, 세계사 공부 열심히 하세요.)

제가 다녔던 학과는 4년이 지나면 펠로십(등록금+생활비) 지원을 중단하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4년 안에 학위를 받고 나가든지, 아니면 시간 강의를 하든지, 그것도 안되면 자비로 공부하라는 취지였죠. 그 당시 브루스 사부님 제자들의 혜택 중 하나가 4년 뒤에도 서부의 연구소로 옮겨서 펠로십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 혜택을 받게 되었고, 자동차로 대륙횡단을 하여 서부로 이사하였습니다.

학교에서는 조교를 하면서(첫 일 년은 제외)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상당했던 액수의 펠로십이 사부님의 연구 기금에서 나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부님 일을 많이 도와드려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지날 때까지 아무 일도 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불안해서 사부님을 찾아뵙고, "무슨 일을 해 드릴까요?"라고 여쭤보았죠.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니 학위 논문이나 적어라." 이러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는 것도 저를 시키지 않고 직접 하셨습니다.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교수님을 도와드리면 배우는 것이 많죠. 그렇게까지 하신 것을 보면 제 "배신"을 우려하신 연구 보안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 아무튼, 저는 2년 동안 "공돈"을 받아가면서 편하게 학위 논문을 적을 수 있었습니다.

그 2년 동안 교수직을 알아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학위 예정자도 취업 시장에 흔히 뛰어들죠. 그 무렵 일자리 시장이 불황이라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첫해에는 인터뷰를 몇 군데 했는데, 오라는 데가 없더군요. 둘째 해도 비슷한 양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부님께 찾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물론 영어로).

"사부님, 제 현재 꿈이 서울에 있는 모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쳐보는 것입니다. 곧바로 그 학교 교수로 가기는 어렵지만, 제가 미국 교수로 경력을 쌓는다면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제 말을 들으시자, 사부님은 즉시 전화통을 붙잡고 제가 원서를 낸 학교의 학과장에게 전화를 거셨습니다. 친분이 있는 사이라서 가능했죠. 제가 있는 자리에서 그 학과장에게, 도움이 되는 괜찮은 제자이니 인터뷰를 해보라고 권하시더군요. 몸 둘 바를 몰랐지만, 매우 고마웠습니다. 맨 처음에 친밀하게 지내야 된다는 말씀의 의미를 그때 깨달았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가, 그 전화 한 통이 제법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일자리 구할 때 운도 많이 작용합니다. 제 경우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인간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브루스 사부님은 이상형에 가까웠습니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교수님도 사부님으로서 매우 훌륭하신 분이라는 확신이 이 홈페이지를 보면서 많이 들었습니다. 제자 여러분은 행운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래의 떡 배달과 같은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 (저는 반성하고 있습니다.)

선배님 제자들도 훌륭하다는 믿음이 요즘 생기기 시작합니다.
(너무 점수 따기에 급급한 것 같죠? 제가 아부 체질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