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Notice) | 방 명 록 (GuestBoard)

2009년 8월 20일 목요일

[단상]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제가 학부 시절 국제법 강의를 들으면서 배웠던 라틴말 구절 중에 Pacta sunt servanda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Promises made should be kept." 혹은 "Pacts should be served." 정도가 될 것입니다.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뜻으로서 국제법에서는 조약 체결의 기본 원칙이 됩니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특히 엘리트(권력, 재력, 지적, 문화)들이 얼마나 그 원칙을 잘 지키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잦습니다. 약속 시간의 예를 들어봅시다. 5명 이상이 모이는 모임이면 정시에 모임에 나가는 것이 일종의 바보 취급받지는 않는지요. 약속한 시간에 나타난 사람은 멍하니 천정을 쳐다보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은지요. 10분이 지나면 1명 나타나고, 또 15분이 지나면 1명 나타나는 식은 아닌지요. 늦으면 늦는다고 연락을 취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요. 그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요.

술좌석에서 한 약속도 약속입니다. 저는 오래전에 예술인들과의 술좌석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그 모임의 주인공인 화가의 전시회에 장미 100송이를 선물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종합정책연구원에서 일했기 때문에 예술 부문도 많이 배워야 했었습니다. 그날 많이 배웠기에 고마워서, 또 예술인들의 애로사항이 많은 것 같아서 서로 돕자는 의미에서 꽃을 선물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 날 고속버스 터미널의 꽃 도매시장에 가서 꽃바구니를 사서 삼청동에 있는 화랑에 제가 직접 전달했습니다. 그 화가는 전화를 걸어와서 깜짝 놀랐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정도면 제가 비정상입니다. 술좌석에서 지나가는 말로 여겼기 때문에 꽃이 전달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저는 Pacta sunt servanda가 얼마나 중요한 사회 운용의 원칙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약속을 이행했던 것입니다.

Pacta sunt servanda도 있지만 "사정변경의 원칙"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약속이 성립된 당시와 현저하게 다른 사정이 생기면 그 약속은 파기되고 새로운 계약이 성립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정변경을 함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원래 약속의 본질과 관련된 사정이 뚜렷하게 변경되어야 합니다. 지엽적인 문제를 제기하여 사정변경을 내세워서 약속이행을 못 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 됩니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서로 믿지 못하는 사회가 됩니다. 신용이 없는 사회가 됩니다. 그러면 서로 견제하게 되고 불편한 하루하루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심하면 서로 싸우게 되지요. 돈을 빌리면 갚아야 합니다. 돈을 갚는 사람이 큰소리치는 사회가 되면 안됩니다. 갚으면서 빌려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고리대금업자에게 갚는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엘리트는 그 사회에 빚이 많은 사람입니다. 엘리트가 되는 경로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엘리트는 도움받은 만큼 그 사회에 이바지할 약속을 맺은 것으로 저는 해석합니다. 그렇다면 Pact sunt servanda 원칙에 따라서 그 빚을 갚아야 합니다. 자신보다 더 권력이 많고, 더 재산이 많고, 더 지적인 사람들이 많다는 것만 인식하고 위로만, 위로만 가려고 하면 빚을 갚을 여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엘리트들은 자신이 갖춘 능력의 한도 내에서 사회에 빚을 갚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엘리트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댓글 2개:

  1. Pacta sunt servanda.

    무릇 명시적으로 체결하는 조약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흔히 하는 구두의 약속도 지켜져야 하겠죠.
    저는 가끔은 저와 더 가깝다는 이유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공수표를 남발 할 때도 있는데, 물론 서로의 신뢰에 기대어 이해는 할 수 있겠지만, 그 신뢰마저 져 버려서는 안되겠죠?^^;

    또한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고쳐져야 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korean time 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30분 정도 늦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오히려 일찍 온 사람들이 손해를 보게 합니다.
    그 다음에는 일찍 왔던 사람이 같이 30분씩 늦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1~2시간씩 늦기도 하죠.)
    참으로 열등한 균형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원칙,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원칙이 무엇인가 새삼 떠올리며 저는 이만 취침하러 가겠습니다.

    굿모닝입니다 박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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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구구절절 옳은 말씀입니다.
    Good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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