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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31일 월요일

[단상] 영어로 수업 하기: 나의 경험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8/02/15)

인수위의 일 주일 해프닝으로 끝난 "영어 몰입" 교육에 대해서 제 경험을 두서없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미국 대학교에서 영어로 강의하다, 한국 대학교로 직장을 옮긴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곳의 방장이신 이 교수님도 그런 이력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 당시 한국으로 직장을 옮긴 이유가 여럿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언어 문제입니다. 영어로 강의를 하다 보니 제가 전달하고 싶은 내용을 충분히, 또한 재미있게 전달하지 못하는 애로사항이 있었습니다. 강의라는 것이 같은 내용을 전달해도 유머를 섞어 가면서 재미있게, 강사의 머리 속에 있는 내용을 학생들이 잘 이해하도록 해야 하는데, 사용 언어가 모국어가 아니고 외국어라면 당연히 그런 애로점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미국 대학교에 첫 직장을 잡고 첫 강의를 하기 하루 전에는 거의 잠을 설쳤습니다. 영어 때문이죠. 학생들이 제 영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 어떡하나, 영어 때문에 지식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어떡하나라는 고민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스트레스는 계속 되었습니다. 제가 이공계 공부를 하던 사람이었으면 그래도 조금 나았을텐데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이라서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몇 년을 그런 스트레스 속에서 살다 한국에 직장이 생겨서 옮겨올 때는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영어로 강의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었습니다.

첫 학기를 우리 말로 강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감사가 나왔습니다. 제가 재직했던 곳이 국제전문인력 양성을 기치로 새로 탄생한 국제대학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감사의 타겟이 바로 "왜 외국어로 강의하지 않고 우리 말로 강의하니?"였습니다. 청와대에서 모 대학의 교수 한 분을 특별 암행어사로 임명하여 여러 국제대학원의 "우리 말로 강의하기" 실태조사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저는 감사장에서 제 경험을 얘기하면서 전 강의를 모두 영어로 강의하는 것은 교육의 질을 오히려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강변했습니다만, 일개 조교수가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그리하야 제 행복은 한 학기로 끝나버렸습니다. 다시 영어로 강의를 하게 된 것이죠. 허탈했습니다. 모국어로 강의해서 너무 좋았는데, 다시 어버버해야 하는 영어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미국 학교에서 영어로 강의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수강생들이 영어를 아주 잘 하니까요. 토론을 할 때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제가 영어가 조금 떨어져도 내용은 제법 알고 있으니까, 또 듣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으니까 학생들을 많이 떠들게 하면 됩니다. 모두 듣고 나서, 음 그러면 이 사부가 한 수 가르쳐주마 하고 이러쿵 저러쿵 얘기해주면 되는 것이죠.

그런데 모국어가 우리 말인 학생과 모국어가 우리 말인 선생이 만났는데 강의를 영어로 진행하면 참 어색합니다. 오전 강의라고 생각해보죠. "Good morning everybody!" 이렇게 시작하는 것과 "자, 여러분들 잘 지냈나요? 책을 펴고 머리를 한번 굴려 봅시다"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큰 차이가 납니다. 비슷한 흉내를 내려고 콩글리쉬로 "Let's unfold your textbooks, and spin our heads." 이렇게 하면 짝퉁 코메디는 되겠습니다. 실제로 우리 학생들 앞에서 강의 시작 전에 "Good morning." 이렇게 내뱉으면 머리 속에서는 "이런 우라질 굿모닝이 뭐야, 굿모닝이"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물론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면 우리 말로 진행할 때와는 비교하여 영어 실력이 쬐끔 향상되기는 합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서 보다 정확하게 평가하면, 쓰기 실력은 제법 향상되지만(이것은 우리 말로 진행해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음), 듣기와 말하기는 미세한 정도입니다. 쓰기도 학생들이 제출하는 과제물에 강사가 일일이 코멘트를 해주고 수정할 것은 수정해주고 그래야 향상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영어 사용 습관은 그대로 유지되는 편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런데 영어 실력 향상이 목표가 아닌 강의에서 영어로 진행되면 잃는 것은 매우 큽니다.

국제전문인력이면 영어를 잘 해야 합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예컨대 국제협상에 나아가서 상대방과 밀고 당기기를 할 때,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영어를 더 잘 하면 더 좋겠죠. 그런데 국제협상에서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언어가 아니고 협상자의 머리 굴리기라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유엔의 반기문 사무총장이 구사하는 영어를 들어보면 반기문식 영어입니다. 발음 등을 기준으로 평가하면 반 총장이 영어를 잘 한다고 절대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총장으로 선출될 때 영어가 문제되었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영어로 교육을 받아서 국제협상자로 기본 머리 굴리기 측면에서 더 좋은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면 그 교육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경제학에서 얘기하는 기회비용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국제대학원에서도 옥석을 가려서 영어로 강의할 과목을 정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영어 몰입 교육(저는 이 용어도 별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영어로 교육하기"로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은 일 주일 해프닝으로 끝났습니다만, 이제는 영어를 영어로 가르치기가 국민들의 큰 관심사가 되어 있습니다. 제가 몇 해 전에 난곡동에서 자원봉사자로 그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TESOL 자격증이나 여타 자격증이 없었으니 사이비 강사였던 셈이지요. 학생들은 성인도 있었고, 어린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이 경우, 영어로 영어를 가르치려고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두번 째 시간부터는 아마 학생이 한 명도 나타나지 않는 불상사까지 상상할 수 있겠습니다.

교육이라는 것이 그 사회의 문화와 현재 교육 여건 등을 주도면밀하게 검토하여 구체적 시행책을 내놓는 것이 맞습니다. 현재 인수위가 강행하려고 하는 "2년 뒤에 요이땅" 정책은 전시행정적인, 자기 과시적인, 무책임한 교육 정책 밀어 붙이기입니다. 현재 초, 중, 고등학교 영어 교사분들의 영어 회화 실력이 2년 동안 얼마나 향상되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영어로 수업하기가 되지 않는 교사분들을 교육 현장에서 몰아내겠습니까? 몰아내지 않으면 짝퉁 영어로 수업 시간에 어버버할 수 밖에 없는데, 그 때 발생하는 사회적 기회비용은 누가 책임집니까? 제가 보기에는 우리 말로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더 효율적인 경우도 많습니다.

언어 교육을 전공한 실력있는 학자분들의 조언을 받아서, 현장 선생님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또한 기타 현실적 문제들을 잘 감안하면서 점진적이면서 단계적인 국민 영어 실력 향상 프로그램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인수위가 생각해낸 벼락치기식으로 하면 국민들이 벼락 맞습니다... 어느 외국인이 인수위의 아이디어를 조목조목 체계적으로 비판한 글을 읽으면서 웃기도 하고, 동감도 했지만, 동시에 한국인으로서 수치심도 느꼈습니다. 외국인이 언론에 그런 글을 배포하여 저같이 죄없는 백성들이 수치심을 느끼게 한 당선자와 위원장은 진중한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댓글 3개:

  1. 존경하올 안병길 박사님을 '웃게 만들고 동감하게 만들고 동시에 한국인으로서 수치심을 느끼게 한' 데니스 하트 선생의 글은 다음주소에 있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28785

    이 분의 박사학위 지도 교수는 브루스 커밍스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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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요즘은 English를 못하면 Human 취급을 못 받는다는데
    수준 미달인 저로서는 사람되기도 바빠서 Human 되기는 차치하였습니다. ;ㅁ;
    한국어를 통역 시킬 나고도 된 세대가 올 날이 있겠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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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민우 씨의 친절한 안내에 감사합니다.

    파란봄님, 대한민국 사람이면 영어보다 우리말을 기본적으로 잘해야 되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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