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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일 일요일

[수필] 미국 사부님 이야기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8/03/18)

일전에 미국 사부님과 관련된 일화를 약간 소개했었습니다. (사부님으로 모시겠다고 찾아갔더니 친밀하게 지내야 한다는 한마디만 하셨다는 것) 몇 가지 더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미국 사부님 성함은 Bruce Bueno de Mesquita 입니다. 이름이 Bruce이고 나머지 모두가 성입니다. 미국에서는 사부님도 그냥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Hi, Bruce!" 이런 식이죠. ^^ 성이 약간 특이해서 손해 보실 때가 있습니다. 인용 횟수를 셀 때 잘 몰라서 Mesquita로 세기도 하고, de Mesquita로 세기도 하고, 전체 성으로 세기도 하면 횟수가 평균 1/3로 줄어들죠. 성이 너무 길어서 아는 사람들은 BDM 약칭을 많이 씁니다.

살아오면서 이 선배님과 같은 훌륭한 분을 알게 되었듯이, 저는 학계에서 사람 복이 많은 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부님들도 아주 좋은 분들이셨고, 미국 사부님들도 그렇습니다. (유학 가셔서 사부님 잘 만나야 합니다. 사부님 스타일에 따라서 배우는 내용과 유학 기간에 큰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브루스 사부님은 제가 학위 과정을 할 때, 적을 두 군데 두고 계셨습니다. 제가 다닌 동부 학교와 서부의 한 연구소였죠. 댁은 서부에 있었기 때문에 강의는 1년에 한 학기만, 2주에 한 번씩 비행기로 오셔서 연강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저 그런 제자였는데, 강의 시간에 큰 점수를 딸 기회를 우연히 갖게 되어, 그다음부터는 사부님의 사랑도 제법 받았습니다. 하루는 강의 중에 발칸반도의 국가 이름이 생각나지 않으셔서 머뭇하셨는데, 제가 쇠발에 쥐잡기 식으로 "헤르쩨고비나"를 알아 맞춤으로써 사부님을 흐뭇하게 해 드린 에피소드였습니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세계사 교육 덕택을 톡톡히 봤죠. ^^ (hugo님, 세계사 공부 열심히 하세요.)

제가 다녔던 학과는 4년이 지나면 펠로십(등록금+생활비) 지원을 중단하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4년 안에 학위를 받고 나가든지, 아니면 시간 강의를 하든지, 그것도 안되면 자비로 공부하라는 취지였죠. 그 당시 브루스 사부님 제자들의 혜택 중 하나가 4년 뒤에도 서부의 연구소로 옮겨서 펠로십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 혜택을 받게 되었고, 자동차로 대륙횡단을 하여 서부로 이사하였습니다.

학교에서는 조교를 하면서(첫 일 년은 제외)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상당했던 액수의 펠로십이 사부님의 연구 기금에서 나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부님 일을 많이 도와드려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지날 때까지 아무 일도 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불안해서 사부님을 찾아뵙고, "무슨 일을 해 드릴까요?"라고 여쭤보았죠.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니 학위 논문이나 적어라." 이러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는 것도 저를 시키지 않고 직접 하셨습니다.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교수님을 도와드리면 배우는 것이 많죠. 그렇게까지 하신 것을 보면 제 "배신"을 우려하신 연구 보안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 아무튼, 저는 2년 동안 "공돈"을 받아가면서 편하게 학위 논문을 적을 수 있었습니다.

그 2년 동안 교수직을 알아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학위 예정자도 취업 시장에 흔히 뛰어들죠. 그 무렵 일자리 시장이 불황이라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첫해에는 인터뷰를 몇 군데 했는데, 오라는 데가 없더군요. 둘째 해도 비슷한 양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부님께 찾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물론 영어로).

"사부님, 제 현재 꿈이 서울에 있는 모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쳐보는 것입니다. 곧바로 그 학교 교수로 가기는 어렵지만, 제가 미국 교수로 경력을 쌓는다면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제 말을 들으시자, 사부님은 즉시 전화통을 붙잡고 제가 원서를 낸 학교의 학과장에게 전화를 거셨습니다. 친분이 있는 사이라서 가능했죠. 제가 있는 자리에서 그 학과장에게, 도움이 되는 괜찮은 제자이니 인터뷰를 해보라고 권하시더군요. 몸 둘 바를 몰랐지만, 매우 고마웠습니다. 맨 처음에 친밀하게 지내야 된다는 말씀의 의미를 그때 깨달았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가, 그 전화 한 통이 제법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일자리 구할 때 운도 많이 작용합니다. 제 경우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인간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브루스 사부님은 이상형에 가까웠습니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교수님도 사부님으로서 매우 훌륭하신 분이라는 확신이 이 홈페이지를 보면서 많이 들었습니다. 제자 여러분은 행운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래의 떡 배달과 같은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 (저는 반성하고 있습니다.)

선배님 제자들도 훌륭하다는 믿음이 요즘 생기기 시작합니다.
(너무 점수 따기에 급급한 것 같죠? 제가 아부 체질은 아닙니다.)

댓글 1개:

  1. ESPRIT
    (2008/03/18 14:12) 헉. IR의 특급스타인 BDM이 안박사님의 지도교수님이셨군요! (저는 이준구 선생님 홈페이지를 즐겨오는 구경꾼입니다. 정치과 학생이구요.) 이전에 Riker와 Banks 교수 이야기를 하시는걸 봤는데 BDM까지. 제가 아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니 정말 반갑네요. 안박사님 글 매우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물론 이준구 선생님과 한순구 선생님의 글은 제가 이곳을 즐겨오는 이유이구요.^^

    안병길
    (2008/03/18 17:29) 여기 서출 한 명 더 있네요. ^^ 반갑습니다. 제 사부님을 알고 계신 분을 만나서 더 반갑구요. 저는 언뜻 보고, IR이라는 락그룹의 BDM이라는 가수 얘기 하시는줄 알았네요.ㅋㅋㅋ IR = International Relations, 국제정치학, 국제관계학.

    선배님, 감축드리옵니다. 경제 사대부 뿐만 아니라 정치 서출들 사이에서도 선배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사옵니다.

    이준구
    (2008/03/18 22:04) 이거 공짜 비행기 타다 심하게 추락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그려.

    안병길
    (2008/03/19 00:16) 선배님,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

    브루스 사부님의 내공 중 특이했던 것이 이재에도 매우 밝으셨다는 것입니다. 워싱턴 디씨에 합작으로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셨는데, 주 고객이 메이저 석유회사들이었습니다. 유가 예측 모델에 정치적 변수(특히, 중동은 이 변수가 일리 있음)를 넣어서 분석해주고 자문료를 받는 식이었습니다. 석유가 워낙 단위가 큰 사업이라 자문료도 고액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사부님은 그 회사들이 당신의 분석을 활용해서 폭리를 취하므로 자문료가 너무 저렴하다고 말씀하시곤 했죠. ^^ 저는 그 재주를 사사받지 못해서 아직 노후를 걱정하는 편입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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