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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6일 화요일

[자유] 라이커 교수님과 자유주의 전통

(2009년 7월 3일부터 5일까지 사흘에 걸쳐서 작성하여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에 올린 시리즈의 첫 글입니다. 게시판의 한 회원이 링컨을 평가해달라고 요청해서 준비했습니다. 정치학이나 국제정치학에 대해서 기본 지식이 없는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참조할만한 정치학 상식에 대해서도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원 제목: 링컨의 정치적 조작: 말의 향연 (1), 2009/07/03)

(1) 자유주의자 라이커(William H. Riker) 교수님

일전에 말씀드린 제 사부 중에 라이커 대 사부께서 합리적 선택을 정치학에 접목시킨 태두로 평가받는다는 이야기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또한 이 교수님과 같은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자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어설프게 자유라고 하면 폭주족과 같은 마음대로 하는 사람을 연상하기 쉬운데, 그 사람도 자유를 즐길 권리가 있기는 하죠.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렇습니다. 남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다른 사람의 태클이 들어와서, 혹시 방종은 아닐까?라는 경계선 문제가 제기됩니다. 심하면 경찰서에 잡혀가서 조사받고, 모종의 처벌을 받아서 방종으로 최종 판정을 받습니다. 그런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그들의 행위는 자유가 아닌 것으로 사후적으로 확인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와 방종의 구분은 어떤 경계선 이전에는(사전적으로는, ex ante) 뒤섞여 있고, 그 이후의 적절한 조치에 의해서(사후적으로는, ex post) 정확한 판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폭주족 같은 경우 애매모호할 때는 자유주의자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자유족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그런데 애매모호하지 않은 자유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라이커 교수님 같은 경우죠.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분 같았습니다. 조용히 연구와 강의만 하시고, 복도에서 마주 지나칠 때도 잔잔히 미소와 함께 목례를 나누는 분이셨죠. 저와 마주칠 정도가 되면 오히려 노교수님께서 먼저 벽 옆으로 서시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경우와는 좀 다르죠. 우리는 학생들이 벽에 착 붙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미국의 거리를 걸으면 서로 몸을 접촉하는 것을 심하게 꺼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반면에 우리는 너무 정이 많아서 그런지 접촉하는 것을 예사롭지 않게 생각하죠. 미국 사람이 왜 그렇게 조심하겠습니까? 자유가 방종으로 변할까 걱정해서 그러는 것이죠. 신체 접촉이 일어나면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항의하게 되죠. 혹시 너 방종 아냐?라고 문제 제기를 하는 것입니다. 옛날 유럽 같으면 결투를 벌여야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될 수 있죠. 그 사람이 조심하는 것은 착해서 그렇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문화적인 현상이지만 근저에 깔린 합리성은, 상호 간의 자유가 부딪힐 때 자신에게 큰 화가 닥칠까 봐 우려해서 그런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라이커 교수님이 학생들을 잘 챙겨주셨다는 것은 이미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이 교수님과 이미지가 비슷한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자유를 그냥 마음대로 하는 것으로 쉽게 생각해서 거친 사람을 자유주의자에 가까운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정반대의 분들이 자유주의자에 가깝습니다. 마음대로 하는 사람은 권위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크죠. 이것이 왜 그러냐면 내가 마음대로 하는 자유가 상대방에게 피해를 준다면, 상대방은 그것을 마음대로 응징할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런 보복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줄이려면 오히려 자신의 자유를 절제해야 합니다. 또한, 상대방에게 더 잘해주려고 해야 합니다. 교수님들이 무슨 행복을 최고로 치겠습니까? 교수님마다 다르겠지만 제자들이 잘되는 것을 보는 행복도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라이커 교수님도 그런 행복을 추구할 자유를 갖고 계셨죠. 제자들이 잘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교수님들이 제자들에게 잘해줘야죠...^^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이타적인 행위를 이기적인 자유행위로 설명하는 것이 로체스터 학파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경제학을 빼다 박았습니다.^^ 학생들에게 잘 대해주는 교수님들이 합리적이십니다.

그런데 저는 왜 만날 이 모양 이 꼴일까요? 하라는 링컨 이야기는 하지 않고 뜬금없이 다시 자유, 방종, 이타적, 이기적, 이런 잡설을 늘어놓는 것일까요? 그것은 링컨의 정치적 행보를 이기적인 자유주의자 관점에서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2) 라이커 교수님의 저서: Liberalism against Populism

라이커 교수님이 중요한 저서를 여러 권 남기셨는데, 그중에 저는 특히 두 권의 책을 사랑합니다. 한 권은 이미 아래에서 소개되었죠. Liberalism against Populism이라는 책인데 전통적인 정치학 관점에서 보면 이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주류 정치학의 일파로 인정받고 있죠. 처음 서론 몇 장을 제외하고는 전체가 투표 이야기입니다. 애로우(Kenneth Arrow) 교수님의 불가능성 정리를 정치학적으로 해석하고 확인한 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간단한 민주주의 원칙들을 제시하고, 그 원칙들을 여러 투표 방식들이 어떤 면에서 어기는지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례들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돌고 도는 세상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정치적 선택에서 절대적으로 옳은 것을 일반적으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또 다른 버전의 불가능성 주장이 제기되고, 애로우 교수님의 연구 결과가 더 확고해집니다. 콩도르세(Nicolas Marquis de Condorcet)의 “투표의 역설(Paradox of Voting)” 연장선에 있는 연구입니다. 공공선택에 관심이 있는 분은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책 제목에서 암시하는 것은 집체주의는 경계해야 하고, 자유주의를 잘 운영해야 된다는 그런 뜻이겠죠. 그러면 라이커 교수님이 말씀하신 자유주의의 요체는 무엇일까요? “돌고 도는 세상”이라는 말씀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에는 절대적인 정답이 없다.”로 저는 표현하겠습니다. 상대적으로 더 옳은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지 모든 잣대를 꿰뚫는 만병통치약 같은 정치 제도는 이 세상에 없고, 그런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엉터리”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주장하셨다고 저는 나름대로 해석합니다. 그런 “엉터리”가 좋아하는 이념이 집체주의(Populism)라는 것이죠.

(3) 룻쏘 (J. J. Rousseau)에 대한 해석

룻쏘가 라이커 교수님께 야단을 좀 맞습니다. 너는 왜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반의지(General Will, Volonté Générale)”라는 녀석을 제시하여 “혹세무민”했느냐고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룻쏘가 누구입니까?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그 룻쏘, 아닙니까? 룻쏘는 그러겠죠.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아니었는데라고요. 사상가들은 억울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후대에 어느 시각에서 들여다보느냐에 따라서 “엉터리”가 되었다, “황금 열쇠”가 되었다 하니까요.^^

그런데 적어도 경제학자들은 라이커 교수님의 룻쏘 해석에 동의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애로우 교수님의 주장도 라이커 교수님 주장과 같거든요. 노벨상 받으셨죠?^^ 정치학 쪽에서는 룻쏘에 대한 평가가 엇갈립니다. 자유주의 학자인 칼 포퍼(Karl Popper, <열린 사회와 그 적들>)나 라이커 교수님은 강하게 비판하죠. 포퍼는 룻쏘를 공산주의자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죠. 포퍼도 비판을 받기는 받습니다. 너무 자신의 프레임에 정치철학자들을 맞췄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포퍼에게 걸리면 플라톤도 별수 없는 유사 공산주의자가 되는 정도이니까요. 그 반면 정치 공동체를 선으로 보는 사조에서는 룻쏘가 제대로 된 사상가로 평가됩니다. 어느 쪽으로 가실 것인지는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저는 저에게 그렇게 친절하게 해주신 라이커 교수님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4) 공동체 자유주의?

최근에 어떤 학자께서 공동체 자유주의라는 개념을 설파하고 계신다는데, 저 같은 교육을 받은 사람은 그 말을 딱 듣자마자, 혹시 룻쏘? 이런 생각이 팍 듭니다. 자유와 공동체를 엮어 놓으면 매우 어색한 개념이 됩니다. 자유주의면 자유주의이고, 공동체면 공동체이지 그것을 묶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책을 읽어보니 비판을 할 수가 없더군요.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주장을 해놓으니 무엇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아, 예~하고 말았죠.^^

공동체라는 상위 개념을 두는 것 자체가 진정한 자유주의에 어긋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공동체에 의해서 자유가 구속된다면 그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유는 자유에 의해서 구속되는 것이 자유주의의 핵심입니다. 개인주의 사상이라는 것이죠. 사람을 공동체로 묶어서 한 덩어리로 만드는 순간, 개인의 자유는 적어도 조금이라도 더 훼손될 수밖에 없죠. 그럼 국가는? 국가가 어떻게 일반적인 정치 공동체입니까? 여러 이익이 상충하는 큰 정치 집단일 뿐이죠. 통일도 반대하는 사람이 있죠. 평화 시 국가를 정치 공동체로 간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무엇을 제시하여 하나로 모을 수 있는지 저에게 예를 보여주시면 경품을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경우가 월드컵 4강 신화의 축구 정도가 될 텐데, 그것은 정치 이벤트가 아니죠. 또한, 더 엄밀히 따지자면, 축구 때문에 열광하는 사람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 정도인데 정치에서 무슨 국가 공동체 타령인지 모르겠습니다. 종교에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국가 운명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지구가 멸망하면 모두 끝입니다. 그런 의미라면 공동체 아닌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유는 자유이지,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을 하고 자시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열심히 사는 것이 자유주의의 모습입니다. 이기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 조화를 이루는 것이 자유주의의 정답입니다. 만약 그것을 공동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언어의 유희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십시오. 그렇게 해도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정답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자유주의입니다. 어설프게 국가 공동체를 위한다든지,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든지, 국가이익을 위한다든지, 우리는 운명 공동체 등의 주장으로 무장하여 가스통을 들고 설치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긍정적이고 건설적입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정치사에서 국가 전체적으로 평화 시에 정치적 공동체에 근접한 사례가 딱 한 번 나옵니다. 1980년 광주에서 나왔다고 저는 봅니다. 그런 것이 유사 공동체입니다. 그 부분에서는 룻쏘가 일정 부분 맞는다고 제가 인정해줄 용의가 있습니다. 그 이외에는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물론 북한에서는 룻쏘를 아주 사랑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 전체가 주체사상에 입각한 유사 공동체 아닙니까? 주체사상을 일종의 일반의지로 간주해도 큰 무리는 없겠습니다.

서설이 끝이 나지 않네요. 자유주의 전통이 그렇습니다. 여기에다 홉스, 로크(John Locke), 밀(John Stuart Mill),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기타 등등까지 언급하자면 여러분이 저를 방종으로 밀어붙일 것 같아서 자제하렵니다. (사실은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빠져나갈 때 저는 이런 못된 수법을 씁니다. ㅋ)

(5) 라이커 교수님의 다른 저서: The Art of Political Manipulation

두 번째 책이 오늘 주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휴~ The Art of Political Manipulation이라는 쪽 수가 별로 많지 않은 명저입니다. 이 책의 첫 번째 장이 링컨 이야기입니다. 반가우시죠, 링컨 이름이 나오니까. 음, 책 제목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어떻게 번역할까요? 정치적 조작의 기술(혹은 술수)? 정치조작술? 정치적 조작의 예술? 정치공학? 정치공학술? 정치공작? 정치공작술? 골라 골라 골라서 댓글로 올려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부담은 가지지 마십시오. 그냥 재미로 해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글 제목은 정치적 조작으로 되어 있는데 구애받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후다닥~

(왜 여기서 멈추는지 궁금하시죠? 다음이 설명하기가 매우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시간 벌기 작전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그 책의 제 1장을 읽어 보시오.”라고 하면서 끝내고 싶지만, 너무 무성의하겠죠. 제가 쉽게 설명드리도록 짱구를 굴려 보겠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방학을 즐기십시오. 찜통더위에 시원한 수박을 찾으셔야지, 웬 링컨 컨티넨탈 자동차를 찾으십니까. 아, 8기통이니까 강력한 에어컨이 있겠군요. ㅋ) //

2009년 9월 8일 화요일

[자유] 어떤 누리꾼의 사회과학 비난

다음은 제가 활동하는 인터넷 동호회의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의견입니다. 제가 올린 "우리나라 정당의 공동체 지향" 시리즈를 읽고 사회과학에 대해서 비난했습니다.

"제 목: 병신 사회과학
모 보드의 모 유저의 글을 보고 있으니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과학의 용어들은 대개 일상적인 생활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쓰던 용어로부터 규정되었거나 파생된 경우가 많은데, 그 때문에 모든 사람이 공감할 만한 명확한 역사적 맥락이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보니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는데, 실상 그 여러 가지 가능한 의미들 사이에 그리 큰 차이가 있지도 않다. 이 차이를 과장하고 심각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들은 주로 대학의 사회대/인문대에서 먹물을 먹고 글을 써서 먹고 사는 놈팽이들이다. 그래야 글을 쓸 수가 있고 자기가 씨부렁대는 잡설들이 무의미해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근원적으로 전문성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전문성을 (자칭) 주장하는 자들의 인생은 그리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애초에 전문성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대학 외부의 세계에서는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주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내용이 권위주의가 되지 않으려면, 글쓴이가 사회과학의 대가 수준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이는데, 글 내용 어디에서도 그런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전문성 운운하지만 정작 글쓴이의 사회과학에 대한 전문성이나 깊은 이해는 없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사회과학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자신이 권위가 있다는 착각에 빠진 권위주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익명의 글쓴이가 "모든 사람이 공감할 만한 명확한 역사적 맥락이 있을 수가 없다."라는 잣대를 들이민 것만 봐도 과학적 지식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부족한지 잘 알 수 있다고 봅니다.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는 것은 일반화된 지식을 추구하느냐, 또 그것을 어떻게 추구하느냐에 달린 것이지, 모든 혹은 대부분 사람이 공감하는 것이 잣대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과학을 바라보면 일세를 풍미했던, 예컨대 중세의 마녀사냥도 과학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과학의 용어는 일반인이 사용하는 용어와 그 의미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일반 용어에서 사회과학의 전문용어가 파생되었다 하더라도, 연구자가 특정 용어를 엄정하게 정의하고 과학적 분석에 활용하여 유용한 연구결과를 내놓았다면, 과학적 연구로 인정하는 것이 맞습니다.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용어들이 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정치학에서도 예컨대 힘(power)을 활용하여 세력균형, 세력전이 등의 과학적 연구결과를 보여줬습니다. 이런 노력을 모두 "놈팽이들"의 지적 유희로 욕하는 이 누리꾼의 주장이 권위주의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평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이 아니기는 하지만, 우리 인터넷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반자유주의적인 표현 사례라서 비판해봤습니다. 이 익명 의견을 코미디로 만든 댓글을 보시죠. 재미있습니다. ^^

"저런 정치 경제 하는 사람들은 참모 역할을 하게 하고 모든 정보를 종합 판단 결정하는 자리에는 과학자를 쓰는 건 어떨까? 다른 나라에서 그런 경우가 있었는지, 그 결과는 어땠는지 궁금."

과학을 하는 사람이 모두 과학이 뭔지 잘 알고 있을 수는 없겠죠...

2009년 9월 7일 월요일

[자유] 우리나라 정당의 공동체 지향 (4)

진보신당과 한나라당을 살펴봤으니 민주당도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민주당 강령 전문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는 한국 민주주의의 구심체역할을 수행했던 민주·개혁·평화·미래세력의 정치적 결사체로서, 우리는 개인과 공동체, 시장과 정부, 자율과 책임, 사익과 공익의 조화와 균형을 통해..."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정치적 공동체가 아닌 "결사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공동체는 개인에 대하는 용어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즉, 민주당의 근본적 성격은 게마인샤프트가 아니고 게젤샤프트라는 것이고, 공동체는 개인과 구분되는 "전체"를 뜻하는 표현으로 채택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정도 용도로 공동체를 수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괜찮다고 봅니다.

민주당 강령에는 "남북 간의 제반 교류협력을 증진하여 경제·문화공동체를 건설하고"라고 주장합니다. 강령 전문에 민주당 자체를 결사체로 규정했음을 참작하면, 이 표현도 게마인샤프트 공동체라기보다는 남북한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좋게 해석해줄 여지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적절하게 표현되지 않은 것으로 저는 평가합니다. 만약 제가 강령 초안을 잡았다면 공동체 대신 "협력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민주당 기본정책에는 공동체가 다양한 양식으로 나타납니다.

"개성공단사업 확대와 경제특구를 추가로 건설하여 남북 상생과 공동번영의 경제공동체를 추진한다."

"타문화에 대한 교육을 확대하여 다문화시대의 열린공동체의식을 육성한다."

"전 국토 생태네트워크를 연결하여 한반도 생명공동체를 실현한다."

남북 경제공동체와 열린공동체는 어색한 것 같습니다. 이해관계에 대한 계산 차이는 있지만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얻어낼 것은 얻어내는 협력 개념이 경제에는 더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화와 관련해서는 굳이 공동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다양하게 서로 존중하면서 함께 가는 "열린" 의식을 강조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런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을 염두에 둬서 공동체라는 표현을 연결했겠지만, 공동체 자체가 "획일성" 의미를 일부 내포하고 있어서 저로서는 어색하게 보입니다.

세 번째 표현은 그래도 나은 것 같습니다. 생태와 환경이라는 측면에서 생명공동체 구현을 주창하는 것은 덜 어색합니다. 수사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엄밀하게 따져서 더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이것도 "생명협력체"로 표현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신당, 한나라당, 그리고 민주당의 정강/강령을 살펴보니 그중 민주당의 강령이 더 자유민주주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주당은 적어도 기본 개념에서 공동체를 주창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 시리즈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09년 9월 3일 목요일

[자유] 우리나라 정당의 공동체 지향 (3)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공동체 자유주의에 대해서 저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http://tinyurl.com/ahn-lincoln1)

"최근에 어떤 학자께서 공동체 자유주의라는 개념을 설파하고 계신다는데, 저 같은 교육을 받은 사람은 그 말을 딱 듣자마자, 혹시 룻쏘? 이런 생각이 팍 듭니다. 자유와 공동체를 엮어 놓으면 매우 어색한 개념이 됩니다. 자유주의면 자유주의이고, 공동체면 공동체이지 그것을 묶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책을 읽어보니 비판을 할 수가 없더군요.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주장을 해놓으니 무엇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아, 예~하고 말았죠.^^

공동체라는 상위 개념을 두는 것 자체가 진정한 자유주의에 어긋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공동체에 의해서 자유가 구속된다면 그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유는 자유에 의해서 구속되는 것이 자유주의의 핵심입니다. 개인주의 사상이라는 것이죠. 사람을 공동체로 묶어서 한 덩어리로 만드는 순간, 개인의 자유는 적어도 조금이라도 더 훼손될 수밖에 없죠. 그럼 국가는? 국가가 어떻게 일반적인 정치 공동체입니까? 여러 이익이 상충하는 큰 정치 집단일 뿐이죠. 통일도 반대하는 사람이 있죠. 평화 시 국가를 정치 공동체로 간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무엇을 제시하여 하나로 모을 수 있는지 저에게 예를 보여주시면 경품을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경우가 월드컵 4강 신화의 축구 정도가 될 텐데, 그것은 정치 이벤트가 아니죠. 또한, 더 엄밀히 따지자면, 축구 때문에 열광하는 사람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 정도인데 정치에서 무슨 국가 공동체 타령인지 모르겠습니다. 종교에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국가 운명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지구가 멸망하면 모두 끝입니다. 그런 의미라면 공동체 아닌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유는 자유이지,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을 하고 자시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열심히 사는 것이 자유주의의 모습입니다. 이기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 조화를 이루는 것이 자유주의의 정답입니다. 만약 그것을 공동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언어의 유희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십시오. 그렇게 해도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정답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자유주의입니다. 어설프게 국가 공동체를 위한다든지,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든지, 국가이익을 위한다든지, 우리는 운명 공동체 등의 주장으로 무장하여 가스통을 들고 설치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긍정적이고 건설적입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정치사에서 국가 전체적으로 평화 시에 정치적 공동체에 근접한 사례가 딱 한 번 나옵니다. 1980년 광주에서 나왔다고 저는 봅니다. 그런 것이 유사 공동체입니다. 그 부분에서는 룻쏘가 일정 부분 맞는다고 제가 인정해줄 용의가 있습니다. 그 이외에는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물론 북한에서는 룻쏘를 아주 사랑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 전체가 주체사상에 입각한 유사 공동체 아닙니까? 주체사상을 일종의 일반의지로 간주해도 큰 무리는 없겠습니다."

한나라당의 정강 전문과 강령에는 "나눔의 공동체"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상류층이 도덕적 책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나눔의 공동체를 지향한다."

"제 14 조 (더불어 살아가는 나눔의 공동체)
집단이기주의와 배타적 공동체의식을 억제하고 상부상조의 미풍양속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실현한다."

언뜻 보기에는 정말 훌륭한 정당으로 보입니다. 이기적이 아닌 이타적 인간을 지향하는 바람직한 도덕을 추구하는 선언입니다. 정강이나 강령이 희망사항도 당연히 포함하기 때문에 그런 이타적 도덕성 지향을 궁극적으로 나무랄 수는 없겠습니다. 그런데 말은 번지르르 하지만, 실제는 어떨까요? 정당이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인지 게젤샤프트(Gesellschaft)인지 생각해보시죠. 저는 게젤샤프트로 봅니다. 게젤샤프트로 정당을 파악하면 집단이기주의로 정당을 바라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한나라당이 "상류층의 도덕적 책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서 온갖 힘을 다 기울였을까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까요? 글쎄요... 왠지 조금 간지럽습니다. 이타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개념을 활용할 것이 아니라, 건설적인 이기심으로 잘 먹고 잘 살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개념을 원용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뭔가 켕기는 것이 있는지, 다음과 같은 표현도 있습니다.

"깨끗한 정치를 구현하는 선진정치공동체를 지향한다."

차떼기 정당이라는 별명이 심히 걸리는 모양입니다. "선진정치를 지향한다."라고 간단하게 선언해도 될 것을 왜 굳이 공동체를 집어넣었는지 의문입니다. 앞에서 공동체라는 표현을 여러 번 썼으니 관성으로 들어간 것 같기도 합니다.

공동체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경제공동체, 남북공동체까지 갑니다.

"북한의 개혁ㆍ개방을 촉진하여 한반도경제공동체를 구현한다."

경제적 이익을 기반으로 하는 남북한 경제공동체라고요? 글쎄요...

2009년 9월 2일 수요일

[자유] 우리나라 정당의 공동체 지향 (2)

헌법에는 "공동체"라는 표현이 나올까요, 나오지 않을까요?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헌법학자의 설명으로는 현 헌법, 즉 1987년에 개정된 헌법이 상당히 잘 짜였다고 합니다. 6.10 직선제 쟁취 민주화 항쟁의 결과로 탄생한 헌법이 권위주의 정권에서 만들어졌지만, 상대적으로 심도 있게 연구한 결과라고 합니다. 다른 나라의 헌법도 다양하게 비교 검토했다고 하더군요. 따라서 헌법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헌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그 헌법학자는 지적했습니다. 굳이 개헌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며칠 전에 국회의장이 주도한 헌법연구회가 발표한 개헌연구 결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지 궁금합니다. 조만간 연락해서 고견을 들어봐야겠습니다.

아무튼, 우리 헌법에는 "공동체"라는 단어가 없어서 저로서는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민주는 제4조 통일조항에 명시되어 있고, 자유와 민주는 헌법 여러 곳에 대못으로 박아 놓았습니다. 즉, 자유민주 공동체라는 표현은 없고, 자유민주 대한민국이라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공동체 자유주의"라는 이상한 개념을 제시하는 정당이 있습니다. 현재 제1당인 한나라당입니다. 한나라당 정강 전문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열린 민족주의를 진작하는 공동체 자유주의의 실천이 선진화의 참된 방향임을 천명한다."

"새로운 한나라당은 이제 구각을 깨고, 공동체 자유주의와 나라 선진화의 비전을 실현하는 정책정당, 국리민복을 위해 분투하는 국민정당, 지역주의에 안주하지 않는 전국정당으로 거듭 태어난다."

한나라당은 공동체와 자유주의를 결합했습니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세일 교수가 좋아하는 개념입니다. 뭔가 있어 보이는 표현이죠. 모두를 위해서, 그리고 개인을 위해서!라는 구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개인을 위하는 자유주의가 모두를 위하는 공동체주의와 궁합이 잘 맞을까요? 자유주의는 한 명을 제외한 모든 구성원이 A를 주장해도, 그 딱 한 명이 B를 주장하면 그 자유를 존중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주의이지, 그 한 명이 나머지 모든 구성원을 위해서 자신의 주장을 굽혀야 한다는 이념이 아니죠.

이렇게 얘기하면, 한나라당에서는 그 공동체는 민주주의를 의미한다!라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에 단순과반수 원칙이라는 원리가 있습니다. 단순과반수만 충족하면 다수의 지배인 민주주의의 사회적 결정이 된다는 것이죠. 이것이 한나라당의 공동체 개념이라면 굳이 공동체라는 공룡을 정강 전문에 쓸 필요가 없죠. 그냥 "자유민주주의 실천이 선진화의 참된 방향"이라고 선언하면 됩니다. 따라서 한나라당의 공동체 자유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다른 무엇을 의미한다고 저는 봅니다. 다른 무엇? 혹시... 권위주의??? 설마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한나라당 일부 의원의 언행을 살펴보건대 한나라당에 권위주의 색채가 아직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요즘 세태에 당 전체가 권위주의를 내걸지는 못할 것입니다.

한나라당과 관련된 공동체 이야기는 내일 마무리 짓겠습니다.

2009년 8월 31일 월요일

[자유] 우리나라 정당의 공동체 지향 (1)

부산대 사회교육학과 김석준 교수님은 진보신당 부산시 위원장입니다. "약자가 강자를 어떻게 이길 수 있나요?" 시리즈 글을 김 교수님 홈페이지에 옮겨서 의견교환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기 때문에, 또 김 교수님이 좋아하는 사민주의(사회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김 교수님은 제 주장의 핵심에 동의하시면서, 그래도 힘을 모으는 "방법과 절차에 대해서 따질 것은 따지고 정할 것은 정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좋은 의견을 주셨습니다. 또한, 단기적으로는 패배해도, 장기적으로 이길 수 있으면 생고생(풍찬노숙)도 각오할 수 있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문제도 정답이 없습니다. 결국, 개인의 정치적 신념에 의해서 각자 갈 길을 가더라도 자유주의에서는 궁극적으로는 비난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단, 사회적 결정은 민주주의로 하는 것이 해법이죠. 진보신당이 주장하는 그 방법과 절차가 다수의견이 아니면, 소수의견으로 남습니다. 물론 그 소수가 다수가 될 날을 학수고대하겠죠.

김석준 교수님과 의견 교환하면서 진보신당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진보신당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소개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강령을 읽으면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제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진보신당 강령의 표현은 다음과 같습니다. 2009년 3월에 채택한 강령입니다.

"나의 자유는 그 만남의 공동체가 확장되는 만큼 넓어지고, 그 만남의 온전함만큼만 온전할 수 있다. 이처럼 자유로운 삶을 위해, 너와 내가 평등하게 만나 서로 주체로서 우리가 되고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활동이 바로 정치이다."

"하지만 국가는 만남의 최종적 전체가 아니므로, 더 큰 전체인 인류공동체를 향해 자기의 한계를 넘어서야 하며,"

"세계시민적 국제주의는 편협한 민족국가의 경계를 넘어 보편적인 인류 공동체의 건설을 추구하고 있다."

기타 등등... 제가 공동체라는 단어를 정치에서, 구성원 수가 "많은" 사회집단에 사용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진보신당 강령은 왠지 우리 도덕/윤리 교과서 분위기를 풍깁니다. 전체주의 주춧돌을 놓았다고 평가되기도 하는 룻쏘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도대체 진보신당 정치단체가 추구하는 공동체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진보신당의 강령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공동체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그 강령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공동체 밖에 존재하는 멀리 해야 하는 인생입니까? 생각이 옳지 않은 사람들인가요? 아니면 생각이 다른 시민일까요? 생각이 다르면 그 공동체에 속할 수 없겠죠?

그 강령의 초안을 작성한 진보신당의 대표적 이데올로그에게 조만간 문의를 해야겠습니다. 강령에서 나의 자유는 "공동체"가 확장되면 넓어진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만약 그 과정에서 남의 자유가 훼손되면 어떻게 됩니까? 유감스럽게도 진보신당 강령에서는 제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ㅜ.ㅜ

2009년 8월 27일 목요일

[자유] 한총련 이야기

사진: 한총련 출범식, <한겨레 신문>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1997년 7월 11일, 인터넷 동호회에 올린 글입니다. 미시간주립대에서 서울대 국제지역원으로 직장을 옮긴 초기에 벌어졌던 에피소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997년이면 6.10 직선제 쟁취 민주화 항쟁 10주년이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집권 말기였죠.)

지난 어느 5월, 별로 따뜻하지 않은 새벽에 차를 몰고 정문 쪽에서 순환도로를 따라 테니스장 쪽으로 올라가는데, 일군의 학생들이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맞추어 같은 방향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앞에는 큰 깃발을 든 기수가 있었으며, 선도하는 듯한 학생도 있었다. 그 일행을 지나치면서 "아, 저 학생들이 바로 한총련 학생들이구나!"라는 생각에 미치자 차를 다시 돌릴 수밖에 없었다. 봄날이지만 기온은 쌀쌀했고, 그 일행이 왠지 힘이 없어 보였기 때문에 아침밥은 먹었는지 한번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 "학생들 지금 어디로 가는가요? 저는 여기 근무하고 있어요."
학생: "기숙사 쪽으로 갑니다."

나: "학생들, 아침식사는 했나요?"
학생: "나중에 도시락으로 식사하기로 되어 있어요."

"밥은 굶지 말고 하세요..."라는 인사말을 던지고 내 방에 돌아와서 앉아 있으니 계속 그 학생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커피를 한 포트 타고, 일회용 컵을 준비해서 그 학생들이 우리 건물 앞을 지나가기를 기다렸는데, 지나갈 시간이 되어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궁금해서 다시 차를 타고 기숙사 쪽으로 가니 그 일행들이 후문 방향으로 내려가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아마도 경영대 쪽으로 해서 지름길로 지나갔었던 것 같다. 나는 다시 차를 세우고 이번에는 선도하는 학생과 정식으로 인사를 하였다. 내 명함을 주고 혹시 지도부 사람 중 시간이 있는 학생은 연락해서 같이 이야기하면 좋겠다는 나의 뜻을 전달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학생 왈, "모두 매우 바빠서요..."
"몹시 바쁜 사람은 빼고, 조금 덜 바쁜 사람이면 좋겠어요."라고 나는 말하였다.

아침식사를 간단한 우동으로 때우려고 정문 가게로 갔는데, 아쉽게도 아직 열리지 않고 있었다. 일전에 그 아저씨와 나눈 대화가 인상 깊어서 가락국수나 먹으면서 다시 이야기나 나누려고 갔었는데(그 아저씨는 서울대 학생들에 대한 인상을 나름대로 강하게 나에게 표현한 적이 있었고, 그때 "과도한 일반화"를 나는 생각했었다.), 우동은 먹지 못했고 "충북총련", "충남총련"이라는 큰 깃발을 앞세운 다른 학생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호기심에 학생들이 외치는 구호를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었는데, 가장 많이 외치는 구호가 "김영삼 정권 타도하자!"였었다. 장난기가 생긴 나는 선창하는 학생에게, "이미 타도되기로 되어 있는 정권을 뭐 하려고 또 타도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선창한 학생: "적당히 외칠 구호가 모자라서요..."

나는 상당히 쇼크를 받았지만, 그래도 지도부 중 한 명과 대화를 하고 싶어서 다시 명함을 주고 똑같은 부탁을 하였다. 다른 한 그룹은 군대식 구호를 연습하고 있었는데, 짧은 나의 군대생활이 연상되는 그런 장면이었다. 삼세 번이라는 생각에 또 나의 명함을 주고 그 그룹의 선도학생에게도 같은 부탁을 하였다.

6월 25일 내가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한총련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 내 방에는 24시간 대기 중인 응답기도 놓여 있는데, 한총련이나 관련 학생이 전화메모를 남긴 적도 없었다.

하나의 가능성: 나의 청이 지도부에 전달되었지만, 지도부가 너무 바빠서 무시했다.
---> 지도부가 성의가 없는 것은 아닌지?
다른 가능성: 그 세 명의 학생들이 모두 내 명함을 분실하였다.
---> 한총련 구성원들의 자질을 의심하면 내가 너무 한 것인지?
또 다른 가능성: 그 세 명의 학생들 모두 나의 뜻을 전달하지 않았다.
---> 나를 귀찮게 생각한 것인지?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제는 내가 지도부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하나...? 그 정도로 한총련에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닌데..... 이제는 연락이 와도 만나주지 않아야 하나...? 그러면 속 좁은 사람의 전형이 될 테니 귀국해서 연락이 오면 만나기는 만나야 될 것 같은데... 그래서 주체사상에 대해서 한 번 토론해 보고 싶은데... 절대적으로 옳고 좋은 사상이
있을 수 있는지, 인간을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 자유민주주의와 집체주의는 어떻게 다른지 등등에 대해서 의견교환을 한번 하고 싶은데... 공개된 장소가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후기: 이 글을 올리고 나서 대학원생 한 명과 제법 심각한 토론을 했습니다. 그 대학원생의 주장은 한총련 학생들이 연락하지 않은 것은 결국 우리나라의 교수-학생 관계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학원생이 수강했던 강의에서 담당 교수가 한총련 학생이 있으면 손들어 보라고 했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은 사례를 제시했습니다. 한총련 학생이 있었는데도 손을 들지 않았다는 것이죠. 교수와 이야기하는 것은 벽과 대화하는 것과 같다고 인식하는 것을 토론 중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 경험은 그 교수 사례와는 다른 것이라고 설명하고, 시대가 바뀌고 있으므로 학생운동도 방향을 잘 탐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토론 마지막 글에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냈습니다.

"저는 학생운동도 '상당히 머리를 잘 써야' 일반 시민으로부터 호응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시대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문민독재'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5공 때의 독재'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면이 많습니다. 완전히 구분된다는 뜻이 아니고요. 또, 학생운동의 근본이념이 '자유민주주의'가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보는 편입니다."

그 당시 일부 학생들이 북한의 주체사상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혹시 우리 도덕/윤리 교육이 일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동체"라는 일종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이 주체사상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도덕/윤리 교육이 공동체 개념을 토대로 이뤄졌습니다. 뫼비우스의 띠라고나 할까요...

2009년 8월 8일 토요일

[자유] 약자는 강자를 어떻게 이길 수 있나요? (4)

주말이군요. 사람이 머리가 별로 좋지 않으면 고생한다는 말이 있는데, 제가 이번에 그 말에 맞아떨어지는 글 적기를 했습니다. 어제 올린 이 시리즈 세 번째 글을 작성할 때는 캘리포니아 시간으로 목요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블로그는 캘리포니아 시간 기준이 아니고, 우리나라 시간 기준이거든요. ^^ 그래서 금요일 새벽에 글이 올라간 것입니다. 하루 지났으니 오늘은 토요일이죠. ㅜ.ㅜ 주말에는 가벼운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머리 굴리기를 했습니다. 어떻게 교묘하게 빠져나갈 길이 없을까... ㅎㅎㅎ 있었습니다. 어제 글 끝에 "가정" 이야기를 했죠. ㅋ 주말이니까, 가볍게 가정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렇게 빠져나옵니다. 제가 영악하다고요? 에이, 너무 그렇게 빡빡하게 하시면,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자주 하신, "너무 깨끗한 물에는 물고기가 많이 살지 않는다!"라는 말씀으로 다시 슬쩍 비켜나겠습니다. ^^

소재는 가벼운 가정이지만, 주제는 그렇게 가볍지는 않습니다. 저는 가족은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큰 사회집단에 공동체라는 말을 적용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시는 분들이 제법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이해관계가 서로 부딪힐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룻쏘의 공동체 같은 개념이 현실화되기 어렵다는 견해죠. 그런데 가족은 일단 혈연으로 끈끈하게 연결된 가까운 사이이고, 좁게 잡으면, 아빠, 엄마, 형제자매로 단출하여서, 모든 구성원이 공동으로 바라는 무엇을 그려낼 수도 있겠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가족마저 가끔 공동체가 아니고 이익집단의 속성을 드러낼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돈 문제가 걸리면 그렇습니다. 어떤 가족 결정을 해서 어떤 구성원은 힘들어지는데, 다른 가족은 편해질 때도 공동체로 똘똘 뭉치는 것이 아니고, 다투거나 시기질투할 수 있죠. 가장 작은 사회집단인 가족이 이런데, 큰 정당이 무슨 "공동체"라고, 우리 도덕/윤리 교과서 내용과 비슷한 정치적 구호를 외치면, 저로서는 우습다고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관심 있는 분은 주요 정당의 정강이나 강령을 훑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정당들이 있습니다.

가장 간단한 가족 구성부터 살펴볼까요? 남편과 아내가 있습니다. 남편은 권위주의자이고, 아내는 자유주의자라고 합시다. 어떤 모습이 떠오르나요? 집에서 아내는 집안일을 열심히 하고, 남편은 폼 잡는 모습이 저는 떠오릅니다.

겉으로 별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죠. 특히, 남편이 돈을 엄청 잘 벌면, 자유주의자 아내의 마음은 불편해도,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마음! 이것, 참 아리송한 것입니다. 불가에서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여서, 남편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떻게 행동하든, 아내가 마음 속에서 남편은 자유주의자!라고 생각하면 모두 해결된다고도 볼 수 있겠죠. 그러나 그런 해탈 경지에 이른 자유주의자는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기적 개인주의자이니까요.

이 사례가 전형적인 약자 자유주의자와 강자 권위주의자가 만난 모습입니다. 여자가 약자인 것은 우리 헌법에 나오므로 별 이의가 없을 것 같은데... ㅎㅎㅎ 이 글을 읽는 어떤 남편분은 즉각 반론을 제기하시는군요. 내 아내는 그렇지 않다! 내 아내가 얼마나 힘도 세고, 말도 잘하는지 모르시는군요. 기타 등등 이유를 대면서 저를 비판하십니다. ㅜ.ㅜ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런 예는 제외하겠습니다. ^^ 일반적으로 여자가 약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남편은 강자 권위주의자입니다. 자유주의자는 권위주의자를 싫어합니다. 개념 정의상 그렇지 않습니까? 따라서 합리적 자유주의자는 그런 불편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머리 굴리기를 일단 해야 합니다.

여러 다양한 상황이 가능한데, 권위주의자에게 "너, 권위주의자!"라고 대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공적인 관계에서는 괜찮은 작전이지만, 사적 관계에서는 부작용이 심하게 생길 수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제대로 된 전략입니다. 맞대응 전략(Tit-for-Tat Strategy)이라고 있습니다. 제 책 제7장에서 제법 자세하게 소개하는 전략인데,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잘해주고, 그다음부터는 남편이 잘해주면 잘해주고, 잘해주지 않으면 잘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ㅋㅋㅋ 남편이 계속 잘해주지 않다, 잘해주면 다시 잘해주는 것도 포함합니다.

맞대응 전략의 탁월한 효능은 이미 연구, 분석되어서 학계 정설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미시간 대학(늑대 Wolverine 학교!)의 액셀로드(Axelrod) 교수님이 잘 설명해주셨습니다. 간단하고, 나이스하고, 적절히 응징하고, 관용도 보여주는, 전략적으로 안정적인 좋은 방안이라는 것이죠. 무엇을 위하여? 이기주의자 사이에 상호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훌륭한 전략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전략을 인터넷 생활에서 항상 사용합니다. 인터넷에 이기주의자들이 득실거리죠. ^^ 제가 편하려고, 제 행복 추구를 위해서 그 전략을 활용합니다. 액셀로드 교수님이 틀렸다는 것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부부 사이에 분업할 수 있고, 필요한 경우에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내가 전업 주부라면, 대부분 가사일을 맡는 것이 적절하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이 마초 행세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남편이 자발적으로 요리, 설거지, 청소 등을 거들면 좋죠. 또한, 아이가 있으면, 아내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육아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맞벌이에 아이가 없는 자유주의자 아내와 권위주의자 남편을 생각해보시죠. 이런 때 자유주의자 아내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맞대응 전략을 적용할 수 있을까요? 이론을 현실에 곧바로 적용하면 부작용이 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배신 전략을 썼으므로, 나는 응징에 들어간다! 각오해라!" 부부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가면... 부부 싸움이 납니다. 서로 불편해집니다.

응용의 미학을 발휘해야 합니다. 남편이 청소로 깨끗해진 공부방을 무척 좋아하면, 별말 없이 청소를 슬쩍 건너뛰는 겁니다. ㅋ 아니면, 남편이 쇠고기를 무척 좋아하는데, 장을 볼 때 닭고기 위주로 장을 보는 것이죠. 적절한 설명도 해줘야 합니다. "닭고기가 쇠고기보다 몸에 덜 해롭다고 하죠?" 기타 등등... 싸우지 말고,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져서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심할 때는 절절한 심정을 담은 편지를 보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아야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협력해오지 않으면... 알아서들 하시기 바랍니다. ㅜ.ㅜ

제가 각 맞벌이 남편과 아내가 어떤 선호를 가졌는지, 구체적인 타입은 무엇인지, 문제가 되는 쟁점이 무엇인지, 일일이 따져서 전략을 보여 드리지는 못하니 독자께서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원리는 나름대로 설명했으니, 각자 머리를 잘 굴리시면 되겠습니다. ^^ 제 머리를 빌리고 싶으신 분은 연락해주세요. 공짜 점심은 없으니, 적절한 보상을 제공하시기로 합의하시면 빌려 드립니다. 그런데 큰 기대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 머리 성능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닙니다. ㅋ

머리 굴리기에 더해서 남의 힘을 빌려올 수 있으면 빌려오는 것이 좋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외딴섬에 사는 것은 아닐 테니 연결된 분들이 반드시 있죠. 대표적인 예가 아내의 부모, 남편의 부모가 계십니다. 그런 분 중에 자유주의자가 있으면, 당근 연합 전선을 펴서 권위주의자에게 세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만약, 모두 권위주의자이거나, 귀차니스트이거나, 점자니스트라면, 그분들 중 가장 자유주의에 가깝거나 아내의 뜻에 동감해줄 수 있는 분부터 자유주의 진영으로 모셔야 합니다.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힘을 모으는 연합에서 눈사람 만들기를 참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처음에는 작게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크게 만드는 것이죠. 꼬마 눈사람 노래를 들으시거나, 제가 올려 드리는 "똥퍼 내줘(표현 죄송! Tombe la Neige, 똥버 라 네줘, 내리네 눈이)"를 보고 들으시면서 편안한 주말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

Tombe la neige - SALVATORE ADAMO

사진 출처: http://cfs7.tistory.com/image/29/tistory/2008/08/14/11/36/48a39a22d52d7

2009년 8월 4일 화요일

[자유] 공동체와 개인주의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8/08/21)

오래전에 어떤 유명 인사의 칼럼에서 우리 국민이 너무 개인주의적이라고 개탄하는 것을 읽고 고개를 갸우뚱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에게 개인주의는 오히려 모자라는 것으로 보이거든요. 물론 편협한 이기주의는 일반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만, 건설적인 개인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오히려 더 장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칼럼이 개인주의를 편협한 이기주의로 해석한 것으로 설명했다면 이해했을 텐데, 흔히 언급되는 공동체 의식과 대비시키면서 개인주의를 탓해서 저로서는 동감할 수 없었습니다.

긍정적인 공동체 의식도 물론 우리 사회 발전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공동체라는 개념을 복잡한 현대 사회 전반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특히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부문에서 마냥 공동체만 강조하면 자칫 집체주의로 흐를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정치인들이 공동체를 주창하면, 저는 일단 회의적으로 바라봅니다. 왜냐하면, 현대 자유민주주의 정치와 공동체 개념은 궁합이 잘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이해관계가 어긋나므로, 공동의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호 득실이 타협 혹은 조정되는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공동체 상황이라고 강변한다면, 그것은 권위주의적 집체주의가 됩니다.

베이징에서 경기를 끝낸 우리 선수들이 귀국하고 싶은데도 귀국하지 못하고 소일거리를 찾아서 헤매고 있다고 합니다. 일을 이렇게 만든 이들은 엉뚱한 곳에서 공동체를 찾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한체육회나 정부는 더 개인주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누구를 위한 공동체입니까? 박태환 선수는 PC 게임 그만 하고 오늘 당장 귀국할 수 있는 성숙한 개인주의 의식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려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박태환 선수뿐만 아니라 더욱 많은 국민의 이익에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2009년 8월 2일 일요일

[자유, 공개서한] 교육과학기술부 장관님께

교육과학기술부 장관님께,

우리나라 교육에 불철주야 고생하시는 장관님께 안부 인사드립니다. 저는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대한민국 국민 안병길입니다. 우리나라 도덕/윤리 교육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리고자 이렇게 공개서한을 띄웁니다.

저는 현재 <자유민주주의 바로 알기: 인터넷 자유민주주의 선언>이라는 잠정제목으로 책을 적고 있습니다. 지금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서 이번 주말이면 전체 초고가 나올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우리나라 지인에게 부탁한 초등, 중등, 고등학교 도덕과 윤리 교과서를 받았습니다. 그 내용을 확인한 결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개념 설명이 우리 교과서에 매우 부족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초등학교 6학년 도덕 교과서(지학사 출판)에 자유와 권리라는 단어가 딱 두 번 나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똑같이 존중받아야 할 자유와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마다 자기의 자유와 권리만을 주장하면, 사회는 무질서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무질서를 바로잡고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법과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

이 부분을 제외하고,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은 초등학교 6학년 도덕 교과서에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를 인용하는데,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원리나 개념 설명이 아니고, 애국심과 준법정신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다른 내용 대부분은 "공동체 의식"을 부추기는 설명이었습니다.

위에 인용한 부분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대한민국 헌법에 대못을 박아놓은 자유민주주의 이념에서 자유와 권리는 가장 중요한 기초인 핵심 개념입니다. 따라서 자유와 권리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때 자유는 방종이 아니며, 권리는 남용 혹은 오용된 권리가 아닌 정당한 권리입니다. 헌법에 명시한 그 자유와 권리입니다. 역사상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미국 독립전쟁,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인권운동, 3.1 운동, 4.19 민주혁명, 한국전쟁, 그리고 우리 민주화 투쟁 등입니다.

이런 기초를 먼저 설명하고, 방종과 적절치 않은 권리 주장을 설명해야 하는데, 초등학교 6학년 도덕 교과서는 마치 자유와 권리 주장이 사회불안의 요인인 것처럼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유와 방종을 어떻게 구분하는지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국가를 위해서 악법도 지키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헌법에는 국가의 주인이 국민임을 명기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게 해로운 법이 자신에게 이롭고, 또 그것을 지키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이율배반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분위기는 중등학교 3학년 도덕 교과서(지학사 출판)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자유와 민주의 근본 원리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고, 공동체 혹은 유교적 질서 개념을 원용한 도덕 설명이 대부분입니다. 심지어 196쪽부터 3쪽에 걸쳐서 루소(Rousseau)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많은 정치학자는 과거 소련이나 현재 북한과 같은 집체주의(Populism)의 연원을 제공한 사상가로 루소를 평가합니다. 자유민주주의 사상가로 더 중요한 위치를 인정받는 홉스, 로크, 죤 스튜어트 밀, 벤자민 프랭클린도 있는데 말입니다. 조금 심하게 평가하자면, 도가 지나쳐서 북한의 주체사상을 교과서에서 가르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고등학교 시민 윤리 교과서(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정도서 편찬 위원회)는 그래도 조금 낫습니다.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 인간의 존엄성을 설명하고, 로크를 인용하고,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 독립전쟁을 소개했습니다. 136쪽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자유 민주주의 질서는 권위주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실현되었다."라고 제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유와 권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로크와 밀도 적절하게 인용했습니다. "국가의 가치는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의 가치에 있으며, 개인을 경시하는 국가는 존립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137쪽)"

그러나 시민 윤리 교과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어는 공동선, 시민 공동체, 국가 공동체, 운명 공동체, 민족 공동체 등으로 "공동체"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칼 포퍼나 윌리엄 라이커 등 많은 정치학자가 집체주의(Populism, 전체주의와 공산주의)로 연결될 수 있는 위험한 개념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들이 루소를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교과서에는 공동선이나 공동체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없습니다. 그냥 좋은 것으로 대충 상정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허상이면, 교과서 전체의 맥락이 무너집니다. 경제학과 정치학에서 자유민주주의 공동체는 허상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명제가 논리적으로 증명되어 있습니다. 애로우 교수의 불가능성 정리입니다. 그 정리를 증명하여 애로우 교수는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대로, 우리 국가의 대국민 자유민주주의 교육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고, 내용도 매우 부실하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이기적 개인주의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과서는 이타주의와 공동체를 강조합니다. 건전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자유민주주의를 활성화하는 데 매우 중요한 토양이라는 설명을 교과서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애매모호한 공동체 잣대를 들이밀면서, 착하게, 바르게, 관용하면서, 전체를 위해서 살 것을 가르칩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려면, "공동체를 위해서!"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사회 집단이 일정 범위를 넘어서면, 루소가 주장하는 그런 공동체는 흔히 볼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이 아닙니다. 종교에는 있습니다. 가족도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그만 시나 읍 정도만 되어도 그것을 공동체로 보기 어려울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교과서는 공동체와 공동선을 줄기차게 가르칩니다.

교과서가 주장한 윤리적 내용은 건전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에서 출발한 자유민주주의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매우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자유와 방종은 저항 개념으로 구분할 수 있고, 자유와 자유가 맞부딪히면 권리에 대한 제한이 생긴다는 식으로 매우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애매모호한 가상의 공동체는 필요 없는 개념입니다. 오히려 권위주의 분위기를 조장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 선진국이 되려면, 우리 국가는 자유민주주의 대국민 교육 내용을 반드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된 교육으로, 시민이 자율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더 성숙시키는 쪽으로 교육 방향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관님은 우리 도덕/윤리 교과서가 권위주의 내용을 버리고, 자유민주주의 내용을 더 포함하도록 고치실 의향은 없습니까? 이 공개질의에 장관님이 공개 답변해주실 것을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장관님의 건승과 우리 자유민주주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09년 8월 2일
안병길 드림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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