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8/05/21)
요즘(2008년 5월) 사극 "대왕 세종"을 즐겨 보고 있습니다. 양녕대군이 폐세자되는 장면에서 왜 효령이 충녕의 형인데 세자가 되지 못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정답이야 충녕대군의 여러 훌륭한 자질이 태종의 마음에 들었을 것이라는 당연한 추정은 할 수 있습니다만, 그래도 유별난 근거가 있었는지 궁금증이 발동한 것이죠.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봤습니다. 인터넷에 실록 서비스가 아주 잘 되어 있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 그런데... 그런데... 그 근거 중 중요한 것에 "술"도 있었습니다. 효령대군은 술을 한 방울도 못 마셨더군요. 그래서 실격. 이 교수님께서 왕자였다면 세자는 되지 못하셨을 것으로 생각하옵니다. ㅜ,ㅜ 학자의 길을 걸으신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
태종 35권, 18년(1418 무술 / 명 영락(永樂) 16년) 6월 3일(임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훌륭한 임금이 있으면 사직(社稷)의 복(福)이 된다.’고 하였다. 효령 대군(孝寧大君)은 자질(姿質)이 미약하고, 또 성질이 심히 곧아서 개좌(開坐)5150) 하는 것이 없다.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中宮)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 충녕 대군(忠寧大君)은 천성(天性)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봐 두려워하여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나의 큰 책(冊)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또 치체(治體)를 알아서 매양 큰 일에 헌의(獻議)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고, 또 생각 밖에서 나왔다. 만약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적이면 신채(身彩)와 언어 동작(言語動作)이 두루 예(禮)에 부합하였고,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無益)하나, 그러나, 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또 그 아들 가운데 장대(壯大)한 놈이 있다. 효령 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不可)하다. 충녕 대군 【휘(諱).】이 대위(大位)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사진 출처: 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08/0412/IE000893682_STD.jpg
홍두령
답글삭제(2008/05/21 19:29) 와! 처음 알았습니다. ^^
흠
(2008/05/21 20:40) 금주령을 내린 영조를 잊어선 아니되겠지요. ㅎㅎ 소위 영, 정조시대를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라고 하는데, 이준구 교수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뛰어난 인격, 높은 지식, 빠지지 않는 외모, '개폼' 속에 숨겨둔 테니스 실력, 철저한 자기 관리, 원칙주의 속에 빛나는 카리스마, 등등....(진심입니다)
대왕세종 같은 경우 저도 굉장히 즐겨보고 있는 프로그램인데요. '불멸의 이순신'을 쓴 작가가 쓴 것이라고 하죠.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그냥 제가 생각하기론, 이준구 교수님께선 책벌레 충녕대군보다, 이순신을 더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ㅎㅎ
흠
(2008/05/21 21:03) 아참...그리고 효령대군 같은 경우, 타고난 성품 자체가 욕심이 적고 온유한 인물로 알려져 있답니다. ^^; 왕자의난-태종 시절을 다뤘던 kbs 용의눈물 같은 경우 효령대군의 이러한 성품이 아주 잘 드러났던 것 같습니다. 오래된 드라마라 가물가물하긴 합니다만...효령대군이 불교에 심취해서 머리를 깎은 일화라든지...ㅎㅎ 픽션인지 팩트인지는 실록을 다 뒤져봐야 알겠지만 야망이 큰 인물은 결코 아니었던 듯합니다.
대왕세종에선 양녕대군이 효령대군에게 욕심을 버리라고 충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또한 실제 있었던 일화라고 전해집니다. ^^ (아마 효령대군 또한 왕자였으니 욕심 자체가 아주 없진 않았을 것입니다.)
이준구
(2008/05/21 22:14) 술을 먹지 않는다고 어떤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면 난 그 자리를 초개같이 버리겠습니다. 내 지론이 마리후나나, 담배, 술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환각작용을 일으킨다는 측면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마리후아나 피우면 감옥 가고 술 잘먹으면 풍류로 인정하는 것은 부당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특히 요즈음 와인에 대한 지식으로 특급 문화인 행세를 하는 사람들 보면 심사가 뒤틀립니다. 이상 술에 대한 나의 적대감의 표현이었습니다.
난 사실 충녕대군보다 이순신 장군이 훨씬 더 좋아. 지난 번 이순신 장군 드라마 보면서 감동에 겨워 눈물이 날 번 했다네.
안병길
(2008/05/21 22:44) 홍두령님, "억수로" 좋아하시네요. ^^
-,.-님, 그런데 드라마를 보면 재미있기는 한데, 픽션을 감안하더라도 오버가 제법 많이 보이는 것 같아요. 세자 양녕 애인이 여념집같이 세자를 당신으로 부르기도 하고, 중전이 임금에게 말을 놓기도 하고, 충녕이 임금에게 과도하게 대들기도 하고, 기타 등등... 작가의 스타일이겠죠.
선배님께서 왕자였으면 "술 마셔야 되는 세자, 안 하고 말리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셨을 것입니다. 아울러서 그런 자격 요건의 부당함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격문을 날리셨겠죠. ^^ 와인을 잘 안다고 특급 문화인 행세하는 스놉들이 많이 늘고 있는 모양입니다. ㅎㅎㅎ
흠
(2008/05/21 23:17) 불멸의 이순신 같은 경우엔, 상당히 '각잡는' 대사가 많이 나왔던 기억이 나네요. 몇몇 예외가 있긴 했지만...아무래도 군인들이 떼로 몰려나오니까^^;
드라마에 따라 구사하는 대사가 조금씩 다르겠지요. 저도 양녕-어리 구도는 좀 닭살돋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아마 양녕의 여린 모습,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삽입한 픽션이 아닐까...싶지만 조금 절제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마음은 저도 있네요. 차라리 용의눈물처럼 망나니 컨셉^^;;으로 갔어도 나쁘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사극이 참 위험한 것 같아요. 조금 어긋나면 역사왜곡이다 뭐다 말이 많고, 너무 사실적으로 그리면 '다큐 찍냐?' 이런 반응나오게 되고...대왕세종도 초반엔 약간 이런 말이 있었죠. 불멸의 이순신은 거북선 침몰 때 욕을 제일 많이 먹었고...김탁환의 '불멸의 이순신'을 김훈의 '칼의노래'와 원작으로 동시에 채택해서 원균맹장론이다 뭐다 오해도 많이 샀구요(드라마엔 이런 내용이 거의 없었는데 말입니다)
아, 근데 이 얘길 왜 이리 장황히 풀어놓고 있는 거죠? ㅎㅎ
어쨌든 대왕세종이 좀더 정치적이고 건조하게(애정구도는 좀 줄이고...그런데 세종-신빈 때문에 힘들겠군요) '대하드라마'로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랄까...
흠
(2008/05/21 23:23) 그런데 거북선 침몰 같은 경우, '합리적 픽션'에 가깝다고 보거든요. 갑판이 철판으로 되어 있고, 밑은 나무 구조이기 때문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던...하다못해 왜선이 화포를 아래로 조절한다면 어느 정도의 파손은 일어날 수 있는 배였고...한마디로 '무적의배'는 아니었으리란 생각이 들고, 당연히 만들고 띄우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으리란 생각이 들거든요.
대왕세종에서도 이런 '합리적 픽션'을 많이 넣는다면, 욕도 덜 먹고 재미도 살리고 시청률도 올리고 여러모로 좋겠죠. ㅎㅎ
중전인 원경왕후를 연기중인 최명길씨의 경우 10년전 용의눈물에서도 원경왕후를 맡았었죠. 10년전보다 훨씬 카리스마가 넘치는듯. ^^ 으흐, 아무튼 대왕세종 기대됩니다.
제자*오
(2008/05/21 23:26) 전 이 드라마에서 한글 창제 부분을 어떻게 다룰지 궁금합니다. 이기문 교수님께서는 여러 정황과 정인지의 해례본 서문을 언급하시며 세종대왕 친제론을 주장하셨거든요. 세종대왕은 제 학문 분야에 조예가 깊었는데 음운학에도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임형찬
(2008/05/22 00:43) 좀 있으면 강상인의 옥 사건이 일어나겠군요. 양녕 폐세자랑 사도세자 폐세자 참 많이 비교되는데........사실 세종이 왕이 된 이유는 수성의 군주인 까닭에...... 양녕은 이성계를 많이 닮았던 캐릭인지라 이방원이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다더군요.
근데 영락 16년하니까 생각나네요.
"불교가 전파될때 조선이 한 때 중화가 될 뻔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진이 조선에 입조하는 것을 막아야 할 것이다." 라는..영락제와 환관들의 대화가...^^
조석우
(2008/05/23 07:54) 오호.. 박사님은 인터넷으로 드라마 보시나요?? 아니면.. 그곳에서도 한국 드라마가 방송되나요?
안병길
(2008/05/23 10:02) 인터넷 - 노트북 컴퓨터 - LCD TV, 이렇게 연결해서 봅니다. 제법 볼만 합니다.
현광희
(2008/05/23 19:01) 아~~ 저 대목 어디선가 본적인네요.. 대왕세종 가끔 보고있는데 너무 픽션을 많이 넣은것같아요~~ 내용상으론 충녕을 빛나게 하기위함이겠지만 아버지 태종한테 포은 정몽주선생이나 고려왕씨에게 사과해야한다는말을 과연 충녕이 했을까하는 의문이들었습니다. 아마 하고싶어도 못했을겁니다. 그런 분위기가아니라는건 저시대를 이해한다면 알수있겠죠. 왕자라는 신분이지만 왕에게 도전하는 식의 발언은 큰죄로 취급되었고 또 부모에게 항거하는 자식이란 불효라는 논쟁에 휘말리게되기에 어려웠을거란 생각입니다.
그리고 효령대군이 왕이 못된이유로 가장큰이유는 효령대군은 불교를 숭상하는 왕자라 조선의 지도이념인 유교를 숭상하는 사대부들과 절대 융화할 수 없기에 내려진 결과가아닌가 생각합니다..그리고.개인적으로 효령대군의 손녀중에 한분이 저에게 선조(14대조부의 생모)이기에 관심있게 보고있습니다. 14조모가 또한 태조이성계의 현손녀이기도 해서 조선왕조와 인연이 깊으니 관심이 더 가네요 양녕대군이 왕이 안되고 충녕대군이 왕이된것이 다행이란 생각도 해봅니다,
이 글 안박사가 새로 쓰신 것인데, 거기에 내가 등장하는 줄 알고 댓글을 달려던 참이었습니다.
답글삭제그런데 댓글 난에 갑자기 내 이름이 나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친구가 내 이름으로 장난치나 하는 생각에서 읽었더니 이상하게 내가 하고 싶은 말과 똑같은 거예요.
"허, 참. 내 흉내 잘도 냈구나."라고 혼자 감탄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단 댓글이었네요.
하여튼 술 못 먹는 나는 출세하기는 글렀지요?
ㅎㅎㅎ 선생님 게시판에서 그대로 퍼온 글입니다.
답글삭제선생님은 술 잘 마시는 권위주의 쪽으로는 출세하시기 어려운데, 술에 대한 자유를 존중하는 자유주의 쪽으로는 큰 출세를 이미 하셨고, 더 큰 출세를 향해서 가시는 중으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