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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7일 토요일

[자유민주] 박근혜 위원장과 연좌제

김종인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은 최근 박근혜 위원장을 유신 독재의 폐해와 연결하여 비판하거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연좌제이며 지나친 정치적 행위라고 주장했다 위원은 연좌제라는 의제를 설정하여  위원장을옹호하려는 것으로 보인다아버지가 독재자라서  딸이 부당하게 공격당하는 것은 억울하다는 것이다일리가 있는 어법이다부모가 아무리 못나도 자식은 훌륭할  있으니까박근혜 위원장을 단순히 독재자의 비판하거나 공격하는 것에 대한 제법  만한 방어술이다.

 의제 설정은 유신 독재에 대한 평가나 정치철학을 묻는 매우 적절한 문제 제기를 슬쩍 피해 나갈 수도 있을것이다예컨대, “자유민주주의와 민주화를 가혹하게 탄압한 유신 체제에 대한 평가/사과 요청 아버지의 독재에 대한 자식의 사죄 요구 슬쩍 비틀어서 연좌제로 받아치는 식이다.   

독재자의 이나 연좌제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그런 것은 정치인들이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서 활용하는정치적 수사일 뿐이다핵심은 최근  방송사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문재인 이사장이 에둘러서 표현한 적이 있다유신 시절  이사장이 민주화 운동으로 구속되어 있었을   위원장은 청와대에 있었다는 회고이다.여기서 청와대 대통령 아버지의 관저라는 의미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위원장이 유신 독재의 퍼스트레이디(First Lady)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퍼스트레이디는 단순한 내조만 하는 것 아니고고도의 정치적 의미가 있는 자리임은 자명하다.

독재는 자유민주주의 공적 1호이다 위원장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유명 정치인이며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의 유력 주자이다그런 인사가 유신 독재체제에 퍼스트레이디로 적극 협조했다면 국민에게 일단 공식적으로 사과하여 용서를 구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일이다정치나 공직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풀었어야 과제였다나는 아직  위원장이 그렇게 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2010년 6월 21일 월요일

[서평-Slimer님] 권위주의의 가면을 쓴 '엉터리' 자유민주주의와 싸우자!

(누리꾼 Slimer님의 제 책에 대한 서평을 퍼서 옮깁니다. Slimer님께 감사드립니다.)
출처: http://slimer.tistory.com/512

책 뒷 표지에 적혀있는 한 구절을 그대로 가져와 포스팅의 제목으로 사용했습니다. '권위주의의 가면을 쓴 '엉터리' 자유민주주의와 싸우자!' 이 말이 가장 이 책을 잘 표현 하는 것 같습니다.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 에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약자가 '권위주의'의 강자를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앞 표지에 적혀있는 '대통령도 모르는 자유민주주의 바로 알기'라는 문구가 책을 집어 든 순간 느낌이 왔습니다. 정말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초등학생 만큼이라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유민주주의'의 반대말이 무엇일까? 이 질문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다른 개념의 정치이념일 뿐, 서로 대립되는 의미는 아닙니다. 냉전시대에 양 체제를 내세운 국가가 대립을 했을 뿐이지 이념 자체가 대립을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이 둘을 극과 극으로 생각하게 하는 반공교육으로 사람들을 세뇌시켜 놓았습니다. 덕분에 요즘 같은 21세기에도, 아이폰을 비난하고 싶으면, '아이폰 사용자는 빨갱이'라고 하면 통합니다.

그래도 일단 헌법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임을 확정해 두었으니 우리는 분명 자유민주주의의 체제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겉 모습만 그럴 뿐 사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사회주의'에 더 가까운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면, 조직에게 피해가 될 수 있다며 개인의 입을 막습니다. 이런 게 가능한 '공동체의식'이란 것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과서 등을 통해 교육 받습니다. 그러면서 '자유민주주의'라고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좀 분해해서 보면 '자유 + 민주주의' 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유'에 대한 부분을 보면 대한민국은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이 자유와 관련되어 요즘 많이 나오는 말이 개인주의 입니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개인주의는 원래 나쁜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아닌 개인의 단위로 나뉘기 때문에, 각자의 영역이 철저하게 분리되는 것을 올바른 개인주의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나의 영역이 보호 받으려면, 다른 사람의 영역을 먼저 침범하지 않는 것이 개인주의입니다.

언젠가 방송에서 보았던 한 김제동 씨의 말이 기억납니다. 자신의 말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를 받지 않을까 고민되어 함부로 방송에서 말을 할 수 없다 라는 내용으로 기억되는데, 폭로, 비난, 뒷담화가 빠지면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 요즘 방송에서 이런 것 없이 재미있게 웃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회자로 생각됩니다. 다소 지나칠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관점에서 저는 김제동 씨를 철저한 개인주의자로 생각합니다. 반면, 개인의 자유는 매우 소중히 하면서 남의 자유를 마음대로 침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보통 인터넷에 XX남, XX녀로 소개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럼 '자유민주주의'와 반대되는 개념은 무엇일까요?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에서는 '권위주의'가 정답일 것입니다. 이 권위주의는 주로 힘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힘을 유지하고 세습하는데 사용합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자꾸 무언가 특권을 챙기려는 권위주의는 출발선을 평등하게 설정 하도록 규정한 민주주의에 매우 강한 불만이 있습니다. 출발선이 같다면, 자신들의 힘을 유지하는 데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 노력을 덜려면, 가지고 있는 힘을 이용해 출발선을 앞으로 당겨놓아야 하니, 민주주의란 눈에 가시 같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게 누구나 평등하게 1인 1표인데, 현실적으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항상 선거의 결과를 보면, 다수의 약자보다 소수의 강자에 유리한 결과가 나옵니다. 사람의 힘이 아닌 머릿수로 결정되는 것이 선거이지만, 이런 결과를 보면, 선거 역시 그 과정에서 강자에게 유리하게 설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약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른 채 강자의 감언에 눈을 흐리기도 합니다.

분명 이론 상으로는 강자이든 약자이든 다수가 이겨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하지만 이게 현실과 다르게 적용된다면, 그 방법이나 구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구도에서 민주주의를 방해하는 권위주의의 강자를 우리 약자는 어떻게든 잡아 내려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부터 차근차근 그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또 후기를 적다 보니 책 읽고 공부하자는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만, 현실적으로 그 방법 밖에는 아직 더 좋은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 생각보다 읽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 드문드문 읽어야 하기도 했지만, 천천히 생각하면서 읽어야 할 부분도 많습니다. 하지만, 어느 한 페이지 쉽게 넘겨버릴 수가 없습니다. 뭐처럼 제대로 나온 '민주주의 학습서'라고 하면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2010년 6월 2일 수요일

[서평-이준구 교수님] 높이 치켜든 자유민주의 횃불

높이 치켜든 자유민주의 횃불

이준구 교수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일상생활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흔하게 쓰고 있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느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나를 위시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확하게 뭔지는 몰라도 그저 좋은 체제라는 의미에서 그 말을 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친숙한 일상의 사례를 들어가며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자유민주주의의 ABC를 풀어서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책을 모두 읽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유민주주의가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그 윤곽이 차츰 분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조그만 성냥불을 들어 올리는 심정으로 이 책을 썼다는 저자의 말에 짙은 감동을 느낀다. 그의 바람대로 이 조그만 성냥불이 온 세상을 환히 비치는 밝은 횃불로 활활 타오르기를 함께 기원해 본다. 그는 왜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를 귀중히 여기고 그것이 우리 사회에 굳건한 뿌리를 박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하는지 그 이유를 한 점 의심의 여지가 없이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나라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하며 사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사회 도처에 권위주의적 사고방식, 낡은 사회질서와 도덕률이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큰 이유는 자유민주주의의 적(敵)인 권위주의가 교묘하게 자유민주주의의 가면을 쓰고 발호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내가 늘 개탄하고 있는 바지만, 우리 사회에서 소리 높여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고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권위주의적인 경우가 그리 드물지 않다. 이런 사기행각 때문에 존중의 대상이 되어야 할 자유민주주의가 경멸의 대상이 되어 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살벌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대운하사업은 경제성이 없다는 말을 한 죄로 하루아침에 '좌빨'로 몰린 나인지라, 이 혼란한 세태에 유감이 없을 리 없다. 그렇지만 자유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저자의 지적에 적지 않은 위안을 느낀다. 자유민주주의냐 아니면 권위주의냐가 진정한 의미를 갖는 선택의 문제일 뿐, 보수냐 진보냐의 선택은 별 의미가 없다는 그의 말에 전적인 지지를 보낸다.

나는 저자가 이 책의 제목을 왜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으로 결정했는지 의아해했다. 책 중반에 가서야 비로소 그 의문이 풀렸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권위주의자와 자유민주주의자 사이에서 맞짱 토론이 벌어졌을 때 자신만 옳다고 믿는 권위주의자가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 상대방도 옳을 수 있다는 유연한 사고를 갖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자는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 책의 제목에는 자유민주주의자들이 뭉쳐야만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표지의 그림을 보면 포식자 상어에게 떼를 지어 용감하게 대항하는 고등어의 무리를 연상하게 된다.

저자는 타인의 방종을 묵인하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길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싸운다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중시하는 이기적 관점에서 볼 때도 유리한 전략이라는 메시지다. 사실 우리는 권위주의의 위협이 심각한 상황에서도 "내가 뭘?" 혹은 "나 대신 남들이 싸워 주겠지"라는 편리한 구실을 붙여 뒷걸음치기 일쑤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번번이 권위주의가 승리를 거둬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유민주주의자가 함께 뭉쳐서 싸우지 않으면 권위주의가 발호하는 사회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경고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흥미롭게 느낀 점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신고전파 경제학을 공부한 나보다도 이기심과 개인주의를 더욱 긍정적으로 바로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기심과 개인주의에 대한 긍정이라는 측면에서 신고전파 경제학을 능가하는 것을 생각하기 힘들 텐데 말이다. 여기서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읽어내는 것은 과히 어렵지 않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노력을 하면서 어떤 거창한 명분을 갖다 대지 말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회를 위한다는 둥, 공익을 위한다는 둥 거창한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은 바로 자신을 위한 싸움임을 깨우쳐 주는 데 저자의 주안점이 있는 것이다. 자신의 자유와 권리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면 권위주의에 과감하게 맞서 싸우라는 독려의 메시지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이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데 부어지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이것이 왜 소중한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 점에서 보면 비록 범위가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훌륭한 정치학의 소개서 역할을 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이든 배울 바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학에 과문한 나 자신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느낀다.

그러나 이 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조그만 성냥불을 켜들자고 외치는 저자의 열정이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흔들림 없는 신뢰는 우리를 감동하게 만든다. 우리가 왜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논거는 한 점 의혹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를 따라 나도 목이 터져라 "자유민주주의 만세"를 외치고 싶다.

출처: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10년 4월 4일 일요일

[칼럼-중앙SUNDAY] 권위주의자 남편을 이기는 지혜

원 제목: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 - 맞대응 전략과 가정 자유민주주의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16705


2010년 3월 31일 수요일

[단상] 경찰은 그곳에 왜 갔을까요?

천안함 침몰로 가장 가슴 아픈 분들은 실종 장병의 가족들이죠. 생사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가족이 겪어야 할 고통은 어디에 비할 바가 아닐 겁니다. 그 가족들이 모여 있는 2함대 사령부에 경찰 정보과 인력이 신원을 밝히지 않고 사복 차림으로 섞여 있다 망신을 당했습니다. 경찰은 그곳에 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났을까요?

국가는 폭력 덩어리입니다. 폭력을 행사하죠. 일종의 ‘조폭’이라고 보면 됩니다. 마피아와 같은 조폭과 다른 점은 국가는 정당하게 공적으로 폭력을 독점하는 것입니다. 그 합법적인 독점 폭력의 양대 지주가 군대와 경찰입니다. 천안함 실종자 가족은 그 한 축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다른 축에서 인력을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경찰이 2함대 사령부의 허락을 받고 입장했답니다. 경찰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막강한 무기를 소유한 군대가 실종자 가족의 신변 안전을 보장할 능력이 없어서 경찰의 입장을 허락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른 이유가 있었겠죠. 그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그 소식을 듣고 일제 강점기의 순사를 떠올렸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무슨 작당을 하는지 사찰을 했겠죠. 그 다음에 떠오른 것은 우리 초등학교 6학년 도덕 교과서 66쪽에 나오는 다음 구절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똑같이 존중 받아야 할 자유와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마다 자기의 자유와 권리만을 주장하면, 사회는 무질서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무질서를 바로잡고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법과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으니, “무질서를 바로잡고… 누구든지 법과 규칙을 지켜야” 하는 것을 경찰이 보여주려고 그곳에 그런 방식으로 나타났을까요?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더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시민의 염장을 지르는 일은 하지 않는 자유민주주의 경찰이 되소서…

2010년 3월 11일 목요일

[수필] 자유민주 열공 최종 보고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10/03/04)

작년 7월 1일에 시작한 자유민주주의 열공에 대한 최종 보고를 드립니다. 우연한 기회에 이준구 선생님 게시판을 처음 방문한 때가 2008년 2월이었습니다. 그때 이 선생님의 혜안이 담긴 여러 시론과 수필을 읽고 공감하는 바가 매우 커서 게시판 소통을 시도했었습니다. 굴러온 촌뜨기를 따뜻하게 대해주셔서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습니다.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작년 6월에 제가 가입한 인터넷 동호회에서 저와 관련된 별로 유쾌하지 않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저를 다른 회원으로 착각한 어떤 회원이 심한 욕설과 인신공격을 저에게 해댄 해프닝이었죠. 그 회원의 공개 사과를 받기 위하여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때 이 선생님께서 댓글로 올리신 자유와 권리, 그리고 자유주의자에 대한 설명이 저에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신기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 사건을 전혀 모르셨을 텐데 마치 꼭 찍어서 저를 격려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덕분에 저는 힘껏 노력하여 그 회원의 정중한 공개사과를 받았습니다.

그 인터넷 동호회에서 욕설과 인신공격으로 문제가 생긴 것은 별로 특이한 일은 아닙니다.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서 언어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죠. 어떤 회원은 욕설 사용이 그 동호회의 문화라고 주장하는 정도였으니까요.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왜 그런 언어폭력이, 권위주의적인 문화가 버젓이 소위 자유 공간에서 날뛰는지 고민했습니다. 일부 회원이 자유민주주의를 잘 모르거나, 알아도 편한 대로 해석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자유민주주의의 진면목을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이런저런 단상은 오래전부터 제가 해왔던 것입니다. 1994년 미시간주립대 정치학과에 조교수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예컨대 미시간주립대의 한국 관련 행사를 어떤 방식으로 추진할 것인지에 대해서 저는 다원적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바람을 1997년에 미시간주립대를 떠나면서 한국학생회에 인사말로 남겼습니다.

1997년에 서울대 국제지역원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상념이 더 깊어졌습니다. 왠지 우리나라 자유민주주의가 매우 어설프게 보였거든요. 인터넷에서 토론하면서 그런 생각이 더 들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우리 인터넷 문화가 상당히 거칠었죠. 2003년부터 우리나라에서 다시 활동하면서 그 고민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제16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정치개혁을 연구하면서, 또한 민간 종합정책 싱크탱크를 목표로 조그만 연구원을 발족하고 관련 활동을 하면서, 정부 쪽과 시민 쪽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 관찰하고 나름대로 분석했습니다.

작년 7월 1일부터 이미 적어둔 글들을 정리하고 새로 글도 적으면서 책으로 엮은 것은 약 15년 동안 제 머릿속에서 맴돌았던 그런 생각들을 펼쳐낸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인지 8월 중순에 일단 마무리한 초고는 그 분량이 많았고, 또한 산만했습니다. 출판사와 접촉하여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서 초고를 대폭 정리하면 될 것으로 봤지만, 출판사 섭외가 쉽지 않더군요. 결국 제일 먼저 접촉한 도서출판 동녘에서 한번 해보자는 답을 받았고, 출판사의 요청을 참작해서 초고를 대폭 고쳤습니다.

수정 원고가 책으로 만들어져서 서점에 선보이기까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교정을 여러번 봤는데도 계속 바로잡을 것이 나오더군요. 제목을 정하는 것도 정말 힘들었습니다. 일반인이 많이 읽어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더 눈에 띄는 제목을 고르는 것이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지인의 아이디어도 빌리면서 추린 약 20개 정도의 제목 후보에서 최종 낙점을 받은 것은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입니다. 약자 자유민주주의자가 강자 권위주의자를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라는 문제의식이 반영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이번 주에 제 열공의 한 매듭이 맺어집니다. 이준구 선생님의 성원이 없었다면 제 책은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깊은 은혜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게시판 친구들의 응원과 도움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특히 초고를 읽고 소중한 조언을 보내주셨거나 교정을 봐주신 회원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온라인 공간의 자유민주주의 모범을 이 선생님 게시판이 계속 보여줄 것을 기대하면서, 또한 믿으면서 열공 최종 보고를 마칩니다. 꾸벅.

p.s. 인터넷 서점 한 곳에는 이미 올라와 있군요. ^^ 책 홍보를 해서 미안합니다.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76121

2010년 3월 3일 수요일

[자유민주] 1997 년 7 월 자유민주주의 개념 토론 (3)

이번 주에 제 책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 - 대통령도 모르는 자유민주주의 바로 알기》가 출판될 예정입니다. 책 4장 첫 절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인가?>의 밑그림이 되었던 1997년의 한 인터넷 동호회 토론을 소개합니다. 그 절 초고의 일부분이기도 합니다.

(인터넷 동호회, 1997/07/06 ~ 7/17)

[익명 2] 필자가 이야기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지금까지 우리나라 기득권층이 사용한 자유민주주의가 어떻게 다른지 필자가 설명해야 한다. 지금까지 사용된 자유민주주의는 우리의 민주화에 이바지한 바가 없다.

[필자] (며칠 동안 관망하겠다는 뜻이 와전된 측면이 있어서 제 견해를 밝힙니다. “자유민주주의” 논쟁에서 빠져나가겠다는 뜻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 논쟁은 자연히 소멸하겠지요.)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 저 자신이 오해를 받는 소지가 제법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걸었음에도, 자유민주주의에 반하는 요소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제 견해를 이미 밝혔습니다. 그래도 이쪽이냐 저쪽이냐 견책성 질문들을 일부 받았습니다. 대부분 의견이 무엇인가 토의해보겠다는 열의에 가득 차 있어서(물론 오해도 쌍방 있었겠지만), 스스로 신이 나서 그 많은 글을 제가 올렸던가 봅니다. 결국, 제가 올릴 댓글인 (자유민주주의 = 자유주의 + 민주주의)에서 뜻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글을 준비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어떤 글이 올라와서 관련 의견을 던졌고, 저는 표현방식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용자와는 일대일 대응방식 토론은 큰 변화가 있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토론은 쌍방이 합의해야 되고, 어느 한 쪽에서 합당한 이유를 대고 회피할 수도 있어야 됩니다. 저 자신은 새로운 논쟁에 들어가지 않아도 준비하는 글에서 궁금증을 밝혀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견해는 그렇습니다. 저에게 “핵심”을 밝히라고 요구한(혹은 부탁한) 분은 어떤 때는 제 주장의 “핵심”을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어떤 때는 전혀 모르는 식으로 이야기해서 저 자신이 혼란스러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어떤 사용자는 처음부터 잘 모르겠다고 질문한 예도 있습니다.) 제 주장의 “핵심”은 그분들이 추측하는 그것과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제 주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현재 우리나라가 전체주의나 독재국가가 아닌 자유민주주의국가 형태인 것은 분명하나, 자유민주주의 제 원칙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분야가 적지 않다. 하지만, 발전 양상을 볼 때, 앞으로는 상대적으로 더 자유민주주의적 국가가 될 가능성이 크며, 이미 그 징후는 보이고 있다. 따라서 지금 현재는 과도기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이 과도기에는 전체주의적 요소, 봉건적 요소, 전근대적 요소, 전통적 요소, 현대적 요소, 자유민주주의적 요소 등등이 뒤섞여서 나타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적 요소가 점차 우월해질 가능성이 크다. 그 과정에서 사회제도만 자유민주주의화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개인행동도 자유민주주의로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봉건제 국가는 당연히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전체주의 국가로 볼 수도 없습니다. 영국이나 미국과 같이 제법 정비된 자유민주주의 국가도 아닙니다. 그러나 분류를 하자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분류해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에 어긋나는 요소만 부각하면 한이 없습니다. 며칠 전 어떤 미국인을 만났는데, 미국 정치자금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미국 정치가 부패해서 이제 더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고 강변하더군요. 저는 그래도 자유민주주의라고 웃으면서 이야기하면서 잘못된 것은 당연히 고쳐야 한다고 담소했답니다.

상대적으로 더 나은 자유민주주의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성미가 급한 시민은 “이것은 말도 안 된다. 없애버려야 한다. 모두 바꿔버려야 해!”라고 말하는 분도 있고, “중요한 부분부터 개혁해서 바꾸는 것이 좋아.”라고 말하는 분도 있을 것이고, “조그만 곳에서, 가능성이 큰 것부터 시작해서 더욱 큰 부문으로 옮겨가는 방식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시민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세 번째 처지에 서 있습니다. 사회과학 방법론으로서 데카르트가 주장한 뜻과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저는 효율성도 중시하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첫 번째나 두 번째 방법이 틀렸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좋은 방향으로 간다는 보장이 있고, 또 현실성이 높다면 첫 번째가 제일 바람직하겠지요. (중간 생략)

제가 생각하는 자유민주주의 몇몇 측면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상호존중, 개인 이익 중시, 다양성 인정, 상대주의, 정치적 선택에서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는 인식론(절대주의 부정) 등등이었습니다. 이런 측면을 드러내는 이론적 해석을 현실에 결부시켜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또, 가능하면 예도 들려고 합니다. (중간 생략)

먼저, 자유주의는 국가와 개인의 관계만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 관계, 집단과 집단 관계, 집단과 개인 관계, 국가와 국가 관계까지 설정하는 이념입니다. 국가와 국가 관계에 있어서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자유무역이 자유주의 이념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보호무역도 때로는 자유주의 이념에서 나온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저라면 “자유주의가 국가의 권한과 기능에 대한 하나의 견해를 밝힌다. 그 뜻은 국가가 개인 기본권과 자유를 가능한 한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라고 표현하겠습니다. 국가를 필요악으로 보는 자유주의 한 부류가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자유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물론 “자유”입니다. 만약, 어떤 동떨어진 섬에 한 명만 산다면(로빈슨 크루소), 그 사람은 완벽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이 두 명만 되어도 완벽한 자유를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A 의 자유가 B 의 자유와 상충) 따라서 어떤 사회라도 각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자유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그 자유를 보장한다면 전체 구성원이 불안에 떨게 됩니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그런 자유는 제한해야 하고, 사회 구성원이 각자 가진 그 부분의 자유를 일시적으로 (급하면 다시 찾아올 수도 있으므로 “일시적”이라고 표현) “내어 놓는” 혹은 “양도하는” 일종의 “포기 각서”를 쓰게 됩니다. 그것을 누구에게 어떤 내용으로 쓰느냐에 따라서 자유주의 견해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홉스(Thomas Hobbes)는 궁극적으로 국가라는 괴물(리바이어던, Leviathan)에게 양도계약서를 쓰는 것으로, 로크(John Locke)는 양도를 서약하지 않고 자유권 행사의 대리인으로 국가를 지정하는 것으로(위임 계약) 봅니다. 위임이나 양도 대상이 되는 자유를 죽이거나 남을 해치는 등 신변보장에 관한 것에만 국한하자고 주장하면 야경국가론이 됩니다. 만약, 어떤 사회 구성원이 정말 착해서 남을 전혀 해치지 않는다면, 또 외적이 침입해서 그를 해칠 염려가 없다면 야경국가는 필요없는 존재가 되겠습니다. 따라서 국가를 필요악으로 보는 자유주의의 극단적인 부류는(양도나 위임을 매우 억울하게 느끼는 부류) 국가가 없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외적도 있고, 내부에서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그 소중한 자유 일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어서 국가를 필요악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밖에 적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한참 전에... 적다 보니 글이 길어지고 구질구질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도 들고, 또 개인적으로 바빠서 내팽개쳤는데, 다시 읽어 보아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간결하고 구체적으로 적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원색적인 욕은 정말 곤란합니다. 저에게 그런 욕을 퍼부은 익명손님은 스스로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

[토론 소감]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건설적 토론이 될 수 있었는데, 일부 회원의 과도한 표현과 필자에 대한 공격으로 용두사미가 된 격이다. 특히 회원 6 은 소통 방식이 전혀 자유주의적이지 않고, 자신의 뜻을 강요한다든지, 토론 상대방을 압박하는 그릇된 방식을 보여주었다. 필자는 맞대응으로 회원 6 과 토론을 거부하였다. 많은 회원이 회원 6, 회원 7, 그리고 공격에 가담한 다른 토론자를 비판했다. 자유민주주의 개념에 대한 토론이 소통과 관련된 의제로 변한 셈이다. 적절하지 않은 표현 때문에 토론 의제가 변경된 사례로 평가한다. 인터넷에서 언어폭력은 자유주의 정신을 훼손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며, 여러 명이 한 명을 토론 주제와 상관없이 몰아세우는 것도 일종의 폭력이라고 볼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권위주의적 언행이다.

토론 내용에 있어서, 그 당시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한 주요 근거는 진보정당이 없다는 것인데, 그 원인을 집권층에서 찾느냐, 아니면 여러 다양한 요인을 고려해야 하느냐가 관건이다. 필자는 후자 견해였고, 전자를 지지한 토론자들은 과거 권위주의 체제로부터 물려받은 집권층의 행태에 거의 분노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현 시점에서 평가해보면, 필자와 상대방 사이에 토론의 초점이 맞지 않았던 것 같다. 필자는 국가, 시민 집단, 시민 등 모든 상관관계를 포괄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총체적 모습을 제시하려고 했으나, 반대편은 당시 집권층이 과거 권위주의와 별다를 것이 없다는 데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결국, 이 토론은 필자가 후속편을 내놓지 못하여 자연 종결되었으며, 12 년 뒤 발간하는 책이 필자의 답변인 셈이다. 이 토론에서 필자가 예측했던 우리 정치의 진행상은 맞아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공고화는 노무현 정권까지 점진적으로 상당히 이뤄졌다. 문제는 시민 사회의 자유민주주의화가 앞으로 한층 더 발전적으로 전개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어야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을 것으로 필자는 전망한다. //

2010년 3월 1일 월요일

[자유민주] 1997 년 7 월 자유민주주의 개념 토론 (2)

이번 주에 제 책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 - 대통령도 모르는 자유민주주의 바로 알기》가 출판될 예정입니다. 책 4장 첫 절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인가?>의 밑그림이 되었던 1997년의 한 인터넷 동호회 토론을 소개합니다. 그 절 초고의 일부분이기도 합니다.

(인터넷 동호회, 1997/07/06 ~ 7/17)

[회원 5] 자유주의는 국가 대 개인의 관계를 살피는 것으로 본다. 필자의 견해는? 자본주의와 결합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필자의 자유민주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2 차 대전 후 독일 자유민주 질서하에서 나치와 공산당이 해체된 것에 대해서 어떻게 보는가?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묶어서 전체주의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람직한가?

[필자 설명] 여기서 이 토론은 전환점을 맞게 된다. 본격적으로 자유민주주의 토론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어떤 회원이 새로 등장하여 돌발상황이 발생한다.

[회원 6] 필자의 글이 읽기 거북하다. 자세히 읽지는 않았다. 이전 익명손님의 문제제기는 우리나라에 진보정당, 노조 정치운동도 없는데 무슨 자유민주주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 진보와 사회주의 운동이 존재했는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없어졌다. 그런데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 자유민주주의 이야기인가. 필자의 자유민주주의와 현실 권력층의 자유민주주의는 내용이 다르니, 구분해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필자] 일단 용어 선택은 조심스럽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역사주의에서는 역사가 단선적으로, monotonic 하게 발전한다고 보고 있지만, 저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발전적으로 전개될 때도 있고, 오히려 퇴행할 때도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자유민주주의가 공고화되고 있느냐, 오히려 퇴보했느냐에 대한 견해는 “귀신 뭐 하는” 소리가 아니라 보는 견해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해방 직후와 한국전쟁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긴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귀신 뭐 하는” 이런 용어를 쓰는 양반과는 토론 자체가 건설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한번 생각해보세요. “생존”이라는 기본권의 문제, 자유민주주의 공고화를 측정하는 잣대는 하나밖에 없는지, 노동문제에서 발전한 것은 없는지, 그 발전문제를 보는 시한은 어떻게 한정해야 할지, 더 좋은 방향으로 갈 가능성은 공고화에 포함하면 안되는지, 꼭 님이 생각하는 문제가 남한 내부만의 문제인지, 북한이 전체주의를 버리고 체제 경직성을 완화하면 남한 자유민주주의는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지, 기타 등등... 님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고, 다른 이의 견해가 “귀신 뭐 하는” 소리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다시 부탁합니다. 차분한 토론을 위해서 용어사용은 조심스럽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회원 6] 필자는 아직 답이 없다.

[필자] 회원 6 님, 자유민주주의라고 해서 언제나 님이 편한 대로 “가볍게” 하실 수는 없습니다. 님의 이익(interest)이 중요하면, 남도 자신의 이익을 중시하는 법이겠지요? “귀신 뭐 하는” 그런 이야기를 자신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남에게 사용할 때는 “가볍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그런 식으로 “가볍게” 하다가는 이 게시판이 난장판이 될 걸요?

[회원 6] 필자는 가벼운 질문이라도 성의 있게 답하라. 또 귀신 이야기인가. 필자가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 토론 글을 올린 적이 있는가? 이런저런 일관성 없는 이야기뿐이었다.

[필자] (회원 6 님에게 드리는 마지막 글) 저는 님이 태도 문제(attitude problem)가 있는 사용자라고 생각합니다. 큰 변화가 있지 않으면 님 의견은 무시합니다. 님 글에 이미 제 주장의 핵심을 아는 듯이 표현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뭐 하려고 또 다시 그 핵심을 듣고 싶나요?

(님의 글 중에서) “문제의 핵심만 알고 있으면 되지요. 제가 다 안 읽었다고 했지, 하나도 안 읽었다고는 이야기 안 했는데요.”

행복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회원 7] “XX 학과 놈팽이들의 사회과학 실력이 어느 정돈지 한번 구경이나...” 필자는 술 먹다 쥐어패도 상관 별로 없을 사람.

[회원 8] 회원 7 글은 보기 좋지 않다. 이런 “이지메”는 삼가는 것이 좋겠다.

[필자] (제목: 인터넷과 자율) 인터넷이 전형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구현할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만, 사용자들이 어떻게 참가하고 운영하느냐에 따라서 건설적으로 될 수도 있고, 기존 현실보다 더 “막가는” 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게시판이 건설적인 곳이 되기를 희망하는 바입니다. 모두 성의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차분하게 성정을 다듬는 한편, 쓸데없이 과민반응을 보이는 사용자들은 자제하는 미덕을 보여야 될 것입니다. 이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다른 여러분의 조그만 정성이 필요합니다. 저는 며칠 추세를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은 아닙니다.

[회원 9] 이곳이 건설적일 필요가 있나? 필자의 “건설적”이란 말이 애매하다. 필자 의견이 비건설적이거나 악화일 수 있다. 필자의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회원 6] 성의와 노력은 이미 많이 나왔다. 필자가 과민반응인데, 글을 적지 않겠다니 나도 당분간 적지 않겠다. 나는 이지메에서 빼달라. “시작하자마자, 꼬리를 감추는군. 쩝.”

[회원 10] 회원 7 형, 반갑다. 필자 “뭐시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회원 11] (회원 7)은 또 술 마시고 포스팅한 것 같다.

[회원 12]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욕설을 퍼붓나? 교수가 아니라면 들어먹지 않을 욕까지 듣고 있다. 이지메 맞다. 역겹다는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

[회원 8] 회원 6 은 토론을 했는데, 다른 사람들끼리 필자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공개적으로 써놓은 것은 좋지 않다.

[회원 6] 나는 필자를 욕한 적은 없다. 필자가 역겨운 것은 할 수 없다.

[익명 1] “(필자) X 새끼. 나가 뒈져라!”

[회원 13] 맘에 안 든다고 역겹다고 하는 것은 자유이고, “사람도 아니라느니 똥통이 어쩌니”를 두고 뭐라 하면 너그럽지 않은 것이 되는구나. 이 게시판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되나?

[회원 7] “이 게시판 수준이 그런 게 아니라, 제 수준이 그런 것이니 널리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회원 14] 여러 사람이 필자를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

[회원 15] 이전에는 건설적인 토론이 많았다. 토론에서 적어도 예의는 지켜야 한다. 지식보다 인격이 더 중요하다.

[회원 16] 단지 기분이 나쁘다고 공개 포스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통신 에티켓을 생각해보자.

[회원 17] 회원 7 은 그 도가 지나쳤다. 사과하는 것이 좋겠다. 술 때문이라면 실수를 인정해야 한다.

[회원 14] 회원 6 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은 동감이다. 논쟁 중에 감정적이어서도 안 되고, 자신의 의견을 상대에게 강요해서도 안된다. 회원 6 은 정중히 사과해야 필자와 토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2010년 2월 28일 일요일

[자유민주] 1997 년 7 월 자유민주주의 개념 토론 (1)

이번 주에 제 책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 - 대통령도 모르는 자유민주주의 바로 알기》가 출판될 예정입니다. 책 4장 첫 절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인가?>의 밑그림이 되었던 1997년의 한 인터넷 동호회 토론을 소개합니다. 그 절 초고의 일부분이기도 합니다.

(인터넷 동호회, 1997/07/06 ~ 7/17)

[설명] 1987 년 6 월 민주화 항쟁으로 우리 국민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여 절차적 민주주의의 초석을 마련했다. 그 이후 전두환 정권의 후원으로 탄생한 노태우 정권은 절차적 민주주의 달성의 첫 과도기로, 1992 년 대선에서 승리한 김영삼 정권은 두 번째 과도기로 필자는 평가한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 그 과도기를 자유민주주의로 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필자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공고화되는 초기단계로 간주하여, 적어도 1997 년 당시는 부족한 점이 있었어도 자유민주주의로 간주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토론에 참여한 많은 회원은 필자와 달리 자유민주주의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권위주의 정권이 자유민주주의를 이용해서 진보정당도 허용하지 않는 등, 국민을 억누르고 있다는 인식이었다. 또한, 그들은 우리 정치의 장래가 어두운 것으로 전망했는데, 필자는 그렇지 않고 점진적으로 민주주의가 공고화될 것으로 예측했다. //

[회원 1] (의견 내용은 아래 필자 답에 포함되어 있음.)

[회원 2] 법치도 없고, 정부를 비판하면 용공으로 몰고, 권력자 개인 의지 = 합법 = 자유민주주의 도식에서 어떻게 자유민주주의 지향을 찾을 수 있나?

[회원 3] 민주적이지 못한 사회에서 가진 자들은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가지지 못한 자에게 나눠주지 않는다. 그렇게 지식과 정보로부터 소외된 인간들은 다시 의사결정 능력에 대해서 신뢰받지 못할 인간이 된다. 가진 자들이 여러 사회이익을 챙기려는 속셈이다.

[필자] 회원 1 씨 글들에 답합니다.

(회원 1: 나는 자유민주주의에 확신이 없다. 자본주의와 맞물리면 더욱 그렇다. 그 둘의 결합은 극복의 대상이다. 그 이유는 체제내적 모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 사회주의를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니고 열린 자세를 취하고 싶다. 자유민주주의를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아주 긴 글을 올리셔야 토론이 될 것 같습니다. 현재로서는 토론을 할 만한 단서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주장의 구체성이 없습니다. 회원 1 씨의 주장을 제가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단, 하나 말씀드리자면, 자유민주주의 기본이 상대주의입니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를 절대적인 것으로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 좋은 이념이나 체제가 있으면 당연히 그쪽으로 가야 합니다. 현재 자유민주주의보다 상대적으로 더 우월한 대안이 있습니까? 계속 찾는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도 존중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입니다. 물론 존중한다고 해서 반드시 채택되는 것은 아니지요.

(회원 1: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은 부르죠아와 프롤레타리아가 연대해서 “전면전”을 벌인 결과이지, 봉건제 내에서 점진적 개선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부르죠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연대에 의한 “전면전”이요? 글쎄요... 그런 학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통설은 아닐 겁니다, 아마... 또 “점진적 개선”도 있었고 “혁명적 변화”도 있었습니다. “변화”에 초점을 맞춘 것이지, “개선”이 중요한 잣대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진보정당이 없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 부정적인 회원 1 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결함이 있는 문장으로 보입니다. 진보정당이 안정적 자유민주체제의 필요조건입니까? 충분조건입니까? 필요충분조건입니까? 저는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연히 필요충분조건도 아니지요.

[회원 4] 필자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정치에서는 의회주의, 경제에서는 자본주의인가?

[필자] 자유민주주의 = 자유주의 + 민주주의 (내용 X)

(우리 정치현실이 진보정당의 활동과 존립을 불가능하게 한다.)

불가능이요? 지금 현재 “진보정당의 활동과 존립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라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구체적으로 적어주세요. 제가 생각하는 이유와 같은지 다른지 비교하게요. 화두를 이렇게 바꿉시다. “남한의 정치현실에서 진보정당의 활동과 존립은 그 가능성이 크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사상 자유를 구속하는 정치현실)

어떻게 구속하는데요? 절대적으로 구속합니까? 미국에는 공산당이 왜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십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한국을 미국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니까.

[회원 3] 자유주의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필자] 자유민주주의 = 자유주의(liberalism) + 민주주의(democracy)에 대해서 일부 설명이 되면, 그다음 제 발제문에서 “개인 대 개인 관계에서 자유주의”를 간략하게 정의하고 토론을 제안하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굳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혹은 민주)”를 구분해서 토론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발제문에서는 “개인 대 개인 관계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나름대로 정의하고 토론제안을 드리고자 하는데, 지금 댓글도 두 개나 밀려 있고, 제 생업에 관계된 일도 있어서 언제 발제문을 올릴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안을 합니다. 그 주제에 대해서 토론하시고 싶은 분은 나름대로 “개인 대 개인 관계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정의하고, 그에 따라서 자신이 그러한지 아닌지 등에 대해서 의견을 주셔도 아주 좋은 의견교환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정의를 하지 않으시고 사회통념으로 “자유민주주의 개념(일상 대화에서 어떤 용어를 쓰면, 정의를 안 해도 무슨 뜻인지 아는 개념)”을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각 사용자가 사용하는 개념 의미가 차이 나면 서로 대화해서 조정할 수도 있겠지요? (이하 생략)

[필자] 어떤 상황을 설정하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어떤 회원님이 제안하신 글에서 “자유적”이란 표현을 쓰셨는데, 저는 “자유주의적” 혹은 “자유민주주의적”이란 표현이 제가 원래 가진 의도입니다. 다분히 말장난 같지만, “자유적”은 “개개인 마음대로”라는 뜻을 풍기고 “자유주의적”은 “개개인 마음대로이지만 상대방 마음대로도 참작하면서”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어떨까요? 친구들끼리 만나서 무엇을 할까 결정하는데, 예를 들어서 다음 주에 등산을 갈 것인지, 오늘 경마장을 갈 것인지, 술을 마시러 갈 것인지, 술을 마시면 어떤 곳에 가서 마실 것인지, 공부를 같이할 것인지, 잠을 잘 것인지, 집에 가서 모두 효도를 할 것인지 등등에 대한 가능성을 두고 의견교환도 할 수 있고, 또 각각의 예로 결정이 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견교환과 행동의 결정에 있어서 얼마나 자신이 자유민주주의적인가에 대해서 글을 주시면 아주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서 그만 적겠습니다. 저는 발제문에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또 하나 빠졌군요. 위의 예에서 항상 어떤 친구의 결정대로 따라가는 친구관계는 자유민주주의적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또 자신의 생각은 따로 있는데, 그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있다든지 표현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자유민주주의적이지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어떤 결정을 적절한 절차를 밟아서 했는데, 그것을 존중하지 않는 것도 자유민주주의적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기타 등등입니다. (“가능성”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절대적으로 그렇지는 않다는 뜻입니다.)

[익명 0] 진보정당이 자유민주주의의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라는 것은 필자의 현실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정부기관은 관변단체를 활용하여 진보운동 집단을 빨갱이, 공산주의자로 몰아가고 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가?

[필자] “제가 왜 그런 현실을 모르겠습니까?” 자유민주주의 원칙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또한, 국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생존”입니다. 각 국가의 생존에 관련된 특수상황은 어느 국가에서나 있는 법입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공고화로 가는 과도기에 있다고 저는 봅니다. 안보논리가 항상 “생존”이라는 이슈를 건드릴 수 있는 상황에서는, 우리나라와 같은 특수한 과도기 상황에서는, 진보정당을 기성 권력층이 견제하기 쉬운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고는 말을 못합니다. 말씀드렸지요, 자유민주주의는 절대주의를 취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주의를 취하는 것이라고요. 그 영역만 볼 것이 아니라, 다른 영역과 원칙도 보는 객관적 시각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필요조건, 충분조건 이야기는 회원 1 씨도 동의했지만, 일반적으로 이야기해서 자유민주주의에서 정당은 시민이 선택하는 것이지, 반드시 어느 정당이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시민의 자유로운 선택을 가로막는 벽이 있다고 하시겠지만, 가로막는 예도 있고, 그렇지 않은 예도 있습니다. 명분 없이 가로막는 것만으로 특정정당이 존재할 수 없다면, 그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기성 정치권이 안보논리로 진보정당을 가로막는 측면 + 정치인들 사이 권력투쟁 + 진보정당 활성화를 바라지 않는 시민 선호 등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진보정당이 없는 것으로 저는 봅니다. 국가나 정부가 무조건 틀어막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적어도 현 정부하에서는 그렇습니다.

미국은 진보정당을 시민이 아예 선택하지 않은 측면이 큽니다. 매카시즘 같은 해프닝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미국시민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지 않아서” 혹은 “선호하지 않아서” 진보정당을 아주 미미한 존재로 만들어버렸다고 저는 봅니다. 결국,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시민이 상대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는 기본속성이 있습니다. 선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누가 절대적으로 옳은지 모르잖아요?

(계속)

2009년 12월 8일 화요일

[자유] 자유, 민주, 그리고 참여 성냥불을 켭시다!


(2010년 초 도서출판 동녘에서 발간 예정인 제 책 <성냥불 자유민주주의(가제)> 원고 마지막에 나오는 글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유”라고 하면  포근하고 아름다운, 좋은 것이라는 이미지를 주로 갖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자유는 우리의 기본을 규정하는 매우 중요하고 소중하면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갖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때로는 결단과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역사를 훑어보면 자명한 것입니다. 자유와 인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은 멀리는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 독립전쟁/남북전쟁이 있고, 가까이는 우리의 한국전쟁이 있습니다. 모두 수 많은 목숨이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스러져 갔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박정희 독재 시절과 전두환 군부정권 시절에 민주화를 위해서 엄청난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런 분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이 정도의 자유민주주의를 누리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역사에는 그 끝이 없습니다. 칼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공산주의가 역사의 끝을 단정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열린 사회에서는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적인 끝이 있는 것이 아니고, 더 발전하거나, 정체하거나, 퇴보하거나 셋 중 하나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는 우리나라 자유민주주의가 계속 발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 닫힌 생각을 하는 분을 흔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충분한 근거 없이 나만 옳다고 막무가내로 주장하는 분은 닫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은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닙니다. 특히 사회지도층에서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더욱 충실하게 자유와 평등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사회지도층은 자유와 평등의 열린 마음으로 사회를 쳐다보는 새로운 눈을 떠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이기심에 의해서도 사회적 약자를 배려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사회적 강자가 장기적으로도 잘 살려면 그 방법이 더 유력한 길입니다.

자유와 권리 지키기에 대한 귀차니즘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모두를 위해서 더 좋은 길입니다. 길거리를 지나다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방종으로 의심할 만한 일을 당하면, 자유인지 방종인지 따져보는 용기를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그냥 귀찮아서 봐준다는 식으로 방종을 내버려두면 “엉터리” 자유가 우리를 억압하게 됩니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잘 압니다. 단기적으로는 힘드실 것입니다. 귀차니즘과 점자니즘의 향수도 느끼실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노력하면 장기적으로는 더 많은 자유와 권리를 누리실 것이고, 우리의 자손들은 더 자유롭고 평등한 자유민주주의를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쾌적한 환경에서 이 금수강산을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조금만 신경 쓰는 것은 그렇게 큰 비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보수든 진보든 자유민주주의 근본 정신에 투철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심지어 진보가 보수의 가면을 써도 좋고, 보수가 진보의 가면을 써도 괜찮습니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인 자유, 평등, 참여에 대해서 제대로 된 뜻만 가지고 있으면 괜찮습니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민주주의의 공적은 권위주의이지, 진보나 보수가 아닙니다.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건전한 이기심과 개인주의를 담금질하셔서, 여러분의 자유와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신경 쓰고 노력하시면 좋겠습니다.

자유민주주의자 여러분, 힘내시기 바랍니다!


2009년 11월 18일 수요일

[자유] 스토커에 대한 단상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7/15)

(이전에 적어둔 글을 약간 수정했습니다. 이 교수님 게시판의 특정 사안과... 관련이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습니다.^^)

스토커는 무엇을 원하기 때문에 스토킹을 하는 것일까? 스토킹이라는 행위는 상대방의 동의를 받지 않고 마구잡이로 쫓아다니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어떤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를, 그 여자가 원하지 않는데도 쫓아다니면서 괴롭히는 행위가 스토킹이다. 그렇다면 스토킹을 하는 사람은 적지 않은 노력과 시간, 그리고 비용을 들여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

앞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자면 그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를 보고 싶어서, 말이라도 한번 붙여보고 싶어서, 또한 사궈보고 싶어서 그런 노력과 시간, 그리고 비용을 내는 것이다. 그러면 당하는 여자로서는 어떻게 그 스토커의 행위를 응징할 수 있을까? 심한 경우에는 국가 공권력에 호소하여 스토커를 벌할 수 있지만, 우리 현실을 참작할 때, 그것은 별로 효과적이지 않은 것 같다. 실제로 들은 얘기에 의하면 심야에 어떤 여성의 침실 유리창으로 조그만 돌을 던지는 경우가 있어서 그 여성이 경찰에 신고했는데, 사정을 들은 경찰은 얼굴이나 한번 보여주면 해결되었을 것 아니냐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국가 공권력인 경찰이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으려 하고 오히려 신고한 여성을 핀잔주는 형국이다.

자구의 방법을 생각해보자. 스토커는 스토킹 자체에서 행복감을 찾는 징후를 가진 사람이다. 그렇다면 스토킹에서 행복감을 찾지 못하도록 당하는 쪽에서 약간의 자구의 노력을 해서 스토커를 불행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 스토커가 계속 전화를 걸어오면 발신 전화번호를 수신거부해야 하고, 다른 전화를 이용해서 전화를 걸어오면 아예 전화번호를 바꿔 버리는 것이 좋다. 스토커의 전화를 받아서 스토커를 야단친다거나 얘기를 들어주면, 그것은 그 스토커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스토커가 집에 찾아와서 만나자고 하면 절대로 얼굴을 보여줘서는 안된다. 얼굴을 보여주지 말고, 물러가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단호하게 한 마디만 해주는 것이 좋다. 그래도 계속 집 앞에 있다면 사후처리를 해줄 수 있는 지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때는 경찰에 신고하여 따끔하게 혼쭐을 내줘야 한다. 사후처리를 해줄 지인이 없다면 주위 이웃들이 자연스럽게 스토커를 물리치도록 유도해주는 것이 좋다. 어떤 경우에도 얼굴을 보여주면 스토커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보고 싶은 얼굴과 듣고 싶은 목소리를 못 듣게 하는 것이 현실적인 벌이 될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스토커가 부자라든지, 사회적 지위가 높다든지, 권력을 갖고 있다면 문제는 매우 복잡해진다. 특히 그런 위치에 있는 남자가 결혼을 약속해가면서 결혼 적령기의 여성을 스토킹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예컨대 그 여성의 가정 형편이 어렵지만 자기 계발 혹은 다른 개인적 이유로 열심히 생업에 임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사는 것이 힘들어서 어느 순간에는 상대방이 자신을 정말 사랑하는 것 같아서 결혼하여 어려운 현실을 탈피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 경우 스토커는 상대방의 약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서 그 여성을 악용할 가능성이 크다. 여성은 스토커임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질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 경우에는 가능한 한 빨리 스토커를 테스트하여 진정으로 결혼을 원하는 경우인지, 아니면 단기간에 재미를 맛보고 히죽거리는 경우인지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괜찮겠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앞에서 설명한 방법으로 스토커에게 불행을 안겨줌으로써 관계를 끝내야 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서 합의나 계약에 입각하지 않고 남을 건드리는 행위는 방종으로 응징되어야 한다. 나의 자유가 소중한 만큼 남의 자유도 소중한 것이다. 스토킹의 정신적 피해를 보지 않을 자유와 권리가 있음을 스토커들은 현실적인 제재를 받아서 깨달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남을 건드릴 때는 상대방의 합의가 있어야 되는 것이다.

2009년 10월 13일 화요일

[자유] 교수님 뒷 담화 및 어느 자유주의자의 소통 노력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7/07)

며칠 전에 OOO님에게 약속한 글을 올립니다. Pacta sunt servanda.(Pacts should be served?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국제법의 제1 원칙이라고 볼 수 있음. @@씨 맞나요?^^)를 하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제 생각에 교수님께서 이번에도 저에게 중책을 맡기신 것은 무슨 배려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전적으로 제 추측입니다만, "안박이 뭔가 할 말이 있는가보다. 에라 잘 됐다, 나는 여행을 떠나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돌아와서 봐야지. 오버할 가능성이 있지만, 그 정도야 내가 똘레랑스를 베풀 수 있지."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을까 싶네요.^^ 죄송합니다. 제 마음대로 교수님의 양심의 자유를 추정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러나 저도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예 이 기회에 교수님 뒷 담화까지 감행하는 자유를 만끽하고자 합니다. 제 자유가 방종으로 판정되면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 판정은 여러분이 민주주의적으로 해주십시오. 1인 1표입니다. 댓글 중 반 이상이 방종으로 판정내리면, 그 뜻을 존중하고 교수님께서 내리시는 처벌을 받겠습니다. 제 댓글은 당연히 투표에서 제외됩니다.

1. 뒷 담화 전통 수립을 위하여!

쉿, 교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뒷 담화를 하는 전통을 만들어볼까 합니다. 작년에 교수님께서 부재중일 때 "불손"하게도 제가 뒷 담화 이벤트를 열었었죠. 그때 부산 분도 유치원 출신 ***님께서 영예의 대상을 차지했습니다. 유치원을 좋은 데를 나와야 합니다! 부상으로 고급 머스탱 자동차를 한 대 제공했습니다. 2등은? %%씨가 랜드로바를 받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번 방학 때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랜드로바가 비포장 도로를 달릴 때는 최고입니다. 그런데 연료를 제법 많이 먹는 점이 조금 맘에 걸리기는 합니다.^^ 올해에도 이벤트를 해볼까 했는데 요즘 경기가 좋지 않아서 제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그 비싼 자동차들을 살 여력이 되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저 혼자 교수님 뒷 담화를 하고 끝내려고 합니다.

2. 교수님과의 만남

사실 제가 교수님을 직접 뵌 것은, 제 기억으로는 최대한 네 번입니다. 서울대에 부임해서 첫 번째로 논문 발표를 한 곳이 경제학과 경제연구소 주최 세미나였습니다. 주제는 대통령 선거제도 개선방안이었죠. 결선투표 도입해야 된다고 신나게 떠들었죠. 공공선택 분야입니다. 그 세미나에 들어오셨다면 네 번이고, 아니면 세 번입니다. 두 번은 테니스장에서 뵈었고, 한 번은 회식자리였습니다. 제가 서울대에 부임한 이후에는 테니스를 그렇게 자주 하지는 않았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는 자주 쳤죠. 서울에서는 잡다한 일이 너무 많아서 테니스를 할 여유가 별로 생기지 않더군요. 그래도 가끔 사회대 테니스 모임이 있을 때는 끼어들어서 신세를 지곤 했습니다.

3. 권위주의형 식당 종업원

교수님을 뵌 것을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1997년 사회대 교수 테니스 대회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소속도 달랐지만, 주최 측에서 사회대 출신이라서 덤으로 붙어도 괜찮다고 하여 참가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제가 그날 상도 받았습니다! ㅎㅎㅎ 실력이 좋아서 받은 것이 아니고, 2부 리그에 출전했는데 거의 다 상을 받으시더군요. ㅋ

테니스 대회가 끝나고서 저녁 회식을 하러 갔었습니다. 그 자리에 교수님도 계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쟁쟁한 학자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부푼 가슴을 안고 약속장소로 갔습니다. 그런데 다른 회식 자리와 별 차이가 없더군요.^^ 고기를 시켰습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안심, 차돌박이, 꽃등심, 이런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보통은 식당을 찾는 손님들이 어떤 순서대로 고기를 먹을지 결정하는 자유를 갖고 있죠. 그런데 어떤 교수님이 이러저러한 순서대로 고기를 갖다 달라고 하니, 담당 종업원이 그렇게 먹으면 고기맛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냥 공손히 손님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정도가 아니라 제법 고집이 있더군요.^^

여러분은 이럴 때 어떻게 하십니까? 그 자리에 있었던 교수님 대부분은 조금 기분이 나쁜 눈치는 보였지만, 별말씀을 하지 않으시더군요. 그런데 제일 막내인 제가 꼭지가 돌아버렸습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교수님들께 결례한 것이더군요. 이 자리를 빌려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고기 순서뿐만 아니라, 어느 교수님이 참기름을 갖다 달라고 했는데, 쇠고기는 참기름을 발라 먹으면 제 맛을 알 수 없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정도였습니다. 권위주의형 식당 종업원이었습니다. 미국에서 그렇게 서빙을 하면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종업원에게 직접 얘기하면 서로 기분이 상할 수 있으니 일단 매니저를 불러달라고 요청해서 매니저에게 항의합니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담당 종업원을 교체해줍니다. 정중하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요.

저는 화가 나서 미국식으로 하지 않고, 종업원에게 "개인 선호 존중"의 중요성에 대해서 초스피드 강의를 해버렸습니다.^^ 어떤 교수님께서 우스개 말씀을 하시면서 그 일은 봉합되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낯 뜨거운 장면입니다. 그 자리에 교수님이 계셨던 것이 맞았다면 정중하게 사과드립니다. (무슨 뒷 담화가 이럴까요?^^)

4. 문화의 차이

그 일이 벌어졌던 시점을 기준으로, 시간강사를 했던 1994년 봄 학기를 제외한 10년 정도를 저는 미국에서 살다 귀국했었죠. 게다가 로체스터에서 혹독한 자유주의 훈련을 받았고 현지 실습도 장기간 했기 때문에, 1997년에 귀국해서 서울에서 살아보니,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이 불편할 정도였습니다. 지하철에서 제 몸을 밀치고 나가는 승객님, 싸울 듯한 어투로 정치에 대해서 한 강의를 해주시는 택시기사분(그럴 때는 저 대신 강의를 드릴까 고민을 했죠^^), 불친절한 식당 종업원, 에스컬레이트에서는 양쪽을 모두 차지해서 바쁜데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 기타 등등 참 불편하더군요.

엄한 집에 시집온 며느리에게 시어머니가 훈계하듯이 "입 다물고 3년" 이런 충고도 들었습니다.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교수라면 영혼이 가장 자유로워야 하는 직업인데,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 영혼은 어쩌라는 것인지 이해가 잘 안되더군요. 그래서 저는 일을 하면서도 입을 별로 다물지 않았습니다. 제가 옳다고 믿은 것은 적절하게 의사표현을 했습니다. 그래 봤자, 일 개 조교수라서 별수는 없었지만요.^^ 그 당시 제가 많이 들었던 충고는 "마, 편하게 살아라!"였습니다.

5. 구조적 폭력의 문제

저는 이런 것들이 권위주의형 문화의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에서는 각자의 스타일을 최대한 존중합니다. 남에게 객관적인 피해만 끼치지 않으면 대충 OK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 "피해"라는 것이 근거도 없고 매우 주관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런 다른 이유 없이, 기분 나쁘니까 토요일에는 노란색 옷을 입고 오지 마!라고 얘기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을 우리는 제법 마주칠 수 있습니다.

OOO님과 대화 중 그 점을 느꼈습니다. 저야 그 당시에 사회적 약자가 아닌 강자 쪽에 있었던 사람이라서, 그런 얼토당토않은 일을 당하면, 상대방에게 오히려 방종 아니냐고 제대로 항의를 했죠. 그런데 OOO님과 같이 사회적 약자로 간주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그런 일을 겪으면... 마음에 병이 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구조적 폭력"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학에서 구조적 폭력을 많이 다뤘습니다. 인간 소외의 문제가 그것과 직결되어 있죠. 마르크스의 경우, 사람이 생산양식으로 말미암아 일할 맛이 나지 않으면, 구조적 폭력을 당하는 경우이므로 모두 단결하여 갈아엎어버리자고 주장한 것과 같습니다. 요한 갈퉁의 경우, 잘 사는 나라가 못 사는 나라의 인적 물적 자원을 착취한다고 보고, 그것을 구조적 폭력이라고 파악한 것이죠. 지금은 유행이 지났습니다만 종속이론(Dependency Theory)이 그 계통이죠.

6. 인터넷상의 구조적 폭력

저는 우리나라에도 이런 구조적 폭력 문제가 제법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인터넷 문화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서는 몸과 몸이 직접 부닥치지 않습니다. 글과 미디어 자료, 그리고 기타 무형의 정보전달로 모든 교류가 이뤄집니다. 따라서 언어 문제가 매우 중요합니다. 예컨대, 토론 중에 욕설을 퍼붓는 사람이 있습니다. 욕설의 미학도 있기는 있습니다. 어떤 정책이나 사안에 대해서 시원하게 욕설을 해대면 공감을 얻기도 하죠. 그러나 저는 그것마저도 별로 공감하지 않습니다. 제 선호가 그렇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같은 공간에 있는 다른 네티즌을 향해서 욕설을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일정 수를 넘어서면 구조적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저같이 욕설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욕설이 가해졌다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인신공격도 있죠.

최근에 이외수 씨가 공권력까지 동원해서 자신을 공격한 네티즌을 혼을 내겠다고 했는데, 만약 그 공격 내용이 사실이라면 저는 찬성입니다. 이것을 두고, 이외수 씨도 입이 험했다, 그 정도 똘레랑스도 없느냐, 그렇게 되면 국가가 자유 공간에 개입하는 것이라서 바람직하지 않다, 기타 등등 별의별 이유를 갖다대서 이외수씨를 말리거나 나무라기도 하지만, 사안의 핵심은 폭력의 문제입니다. 만약 이외수 씨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것이 있다면, 그 사람이 자구책을 행사하면 됩니다.

이렇게 자유주의는 각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려는 상호 견제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폭력"을 용인하는 것은 별로입니다. 언어 폭력에 대해서 관용을 베푸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관용입니다. 이런 때에는 불관용이 더 맞는다고 생각해요. 국가와 국민, 혹은 시민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유주의에서는 억울하게 당하지 않을 자유와 권리가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욕설을 들어서 언어 폭력을 당했다는 객관적 사실을 입증할 수만 있으면, 헌법의 기본권을 방어할 자유가 있습니다. 인권이 침해된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가 무서운 것입니다. 되받아칠 때는 더 심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되받아 치는 쪽은 뚜렷한 명분이 있거든요. 그때는 똘레랑스의 수위 조절은 완전히 정당방위 자구책을 행사하는 쪽에 있습니다. 그 자유를 비난하는 자유도 있지만, 근거가 충분해야 되겠죠. 그렇지 않으면 권위주의형 소통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다, 즉, 욕설이 문화였다고 주장하는 경우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욕설을 해도 된다고 투표를 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욕설에 대해서 같은 선호를 하고 있겠습니까. 이런 경우는 자신이 생각하는 문화의 특성이라는 가상 설정에 도덕적 판단을 환원시키는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입니다.

욕설은 나쁘다는 것이 사회 통념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도 존중해야죠. 특정 사이버 공간에 욕설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고 해서 전체를 그런 "욕설 공동체"로 몰고 가는 것은 일종의 집체주의적(populism) 사고방식입니다. 그것을 빌미로 욕설을 마음껏 쓰는 사람을 정치학에서는 권위주의자, 심한 경우에는 독재자라고 부릅니다.

7. 최근의 제 경험

저도 최근에 이외수 씨와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제 경우는 이외수 씨 것보다 더합니다. 이외수 씨는 일종의 공인으로 볼 수 있지만, 저는 그 사이버 공간에서 필명만 존재했거든요. 저에 대한 나머지 정보는 사생활에 해당되는 것이었죠. 서로 평등한 상태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온갖 자구책을 다 생각해봤고, 힘들게 실행에 옮기던 중에... 2009년 6월 28일 14시 33분(한국 시각)에 제 인생에 큰 변화가 옵니다. 이 교수님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래에 증거도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주의가가 되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야. 자유와 권리가 조금이라도 침해된다면 목숨을 걸고 싸울 용기를 갖고 있어야 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뿐 아니라 남의 자유와 권리까지도."
저는 교수님께 이 뒷 담화로 제 인생을 바꾸신 책임?을 여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교수님의 말씀을 읽고 용기를 내서 힘껏 노력하여 문제가 잘 해결되었습니다. 교수님, 매우 고맙습니다.

8. 다시 생각해본 "사회개선의 조그만 성냥불"

아울러서 제가 오랫동안 갖고 있었던 문제의식의 미흡한 점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가 찾아왔습니다. 이것도 교수님 말씀 때문입니다. 책임?지셔야 합니다.^^

제 제자들에게 오래전에 제안한 사회개선 운동이 하나 있습니다. 이름하여 "조그만 성냥불" 운동입니다. 건전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장기적으로 계산하면,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므로 그렇게 살겠다고 결심하는 운동입니다. 도덕재무장 운동이 아니고, 제대로 된 건전한 이기주의자 되기 운동입니다.

그런데 심지어 제 제자들로부터도 큰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뭐,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게임이론을 가르치면서 용의자의 딜레마 반복게임에 따르는 상황일 때, 상호배신을 상호협력으로 바꾸는 유력한 방법으로 Tit-for-Tat이라는 것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려던 것이 원래 취지였으니까요. 그래도 그 개인주의 운동이 더 알려지면 좋겠다는 생각에 같은 내용으로 신문에 칼럼을 적기도 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성냥불 운동이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천학이라서 푸코가 본질과 현상에 대해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정확하게는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만, 제가 아무리 본질을 얘기해도 받아들이는 쪽에서 현상으로 해석하면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제 책임도 분명히 있는 것이죠. "착하고 바르게 살기"가 이기주의, 개인주의라고요? 잘 믿기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따라서 일단 구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다음에 성냥불 운동은 사회지도층을 향하는 외침입니다. 엘리트들이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에 대해서 각성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거든요. 그런데 힘이 있는 사람들은 남의 말을 잘 듣지도 않고,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현재 잘사는데, 복잡하게 자신의 마음을 바꿉니까. 자유주의 세상인데요. 결국, 성냥불 운동이 자유주의에 입각한 운동이지만, 그 자유주의 때문에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제가 발견한 것입니다.

9. 자유민주주의 제대로 알기

짙은 구름 사이에서 한 줄기 빛이 내리는 것을 본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그 빛의 힘으로 엔돌핀이 돌아서 많은 말들을 제가 쏟아 놓았습니다. 제 글을 격려해주신 분들께 대단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모두 교수님 덕분입니다. 이번에는 착하고 바르게 살기가 아니고, 자유민주주의 바로 알기를 시도해볼까 합니다. 대상도 사회지도층이 아니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해볼까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제가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 더 잘 알아야 하기 때문에, 열공을 한 다음에 적당한 시기가 되면 제 생각을 체계적으로 펼쳐 놓겠습니다. 물론 공부 중간에도 인터넷을 통해서 의견교환을 하겠습니다. 모두 지켜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수님께 책임?을 여쭙겠습니다. 저에게 이런 보람찬 길을 보여주신 교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면서, 이 행복한 사태를 어떻게 책임?지실 것인지 무척 궁금합니다. 이 우문에 대한 교수님의 현답을 학수고대합니다.^^

여러분, 제 뒷 담화가 방종입니까? 투표 부탁드립니다.^^
될 수 있으면 자유 쪽으로 해주시면 안될까요? 벌 받는 것, 싫거든요. ㅋ

2009년 10월 12일 월요일

[자유] 자유민주주의 참여의 문제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7/12, 원 제목: Culture of Negativism and Discouragement)

1. 부정(소극)적이고 좌절시키는 문화

잘 안 되는 영어이지만, 제목으로 한번 뽑아봤습니다. 제가 미국에 살고 있으니 영어도 어느 정도는 대접을 해줘야죠.^^ 제목을 번역하면 "부정(소극)적이며 좌절시키는 문화" 정도가 되겠습니다. 이 경우에 네가티브는 포지티브와 맞선 개념으로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반대편에는 "긍정(적극)적이며 격려하는 문화"가 있겠죠.

미국에서는 유턴금지 표지가 없으면 모두 유턴이 가능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유턴 표지가 있어야 유턴이 가능하더군요. 미국은 유턴이 위험한 지역이 그렇게 많지 않고, 도로 사정이 여유가 있는 편이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으므로 도로 안내판이 그렇다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유턴하는 것은 긍정의 개념이고, 유턴 안/못 하는 것은 부정의 개념이죠. 부정보다는 긍정이 좋은 것 같습니다...

(저는 성이 안씨라서 이런 불명예를 항상 달고 삽니다. 제가 "안 박사"인데요, 박사가 아니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죠.^^ 저, 박사 맞습니다.ㅜ.ㅜ 그러나, 괜찮습니다. 이임하신 국가인권위원장께서 같은 성씨이므로 완전 괜찮습니다. 조상님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안강최의 안!입니다.^^)

이 교수님께서 힘들게 사회비평 등대지기를 하실 때 좌절시키려는 사람들이 더 많을까요, 긍정적으로 격려해주는 사람들이 더 많을까요?

2. 인터넷 동호회의 가상 사례

한 인터넷 동호회에서 어떤 회원이 근거 없는 생욕과 인신공격을 받았을 때,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 상대방을 응징했다고 합시다. 그 와중에 동호회 회원들이 그 회원에게 보여준 반응은 세세하게 따지면 매우 복잡하겠죠. 사안에 관심이 없었던 회원들을 제외하면, 반응 행태는 대략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적극적 지지: 공개 글이나 사신으로 격려해준 분들입니다.
2) 소극적 지지: 마음으로는 그 회원의 뜻에 동의하나 그냥 지켜본 분들입니다.
3) 말림의 미학: 그 회원의 뜻에는 동의하지만, 그 회원 자신을 위해서 자제하라는 투로 글을 올리거나 사신을 보낸 회원들입니다.
4) 소극적 반대: 무슨 이유에서든 그 회원의 행보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침묵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5) 적극적 반대: 원래 그런 욕설이 횡행하던 곳인데 그 회원이 오버했다고 비난하든지, 아예 비슷한 욕설을 그 회원에게 해댄 인간들입니다.

그 회원이 무슨 도발을 한 것도 아니고,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아서 침해된 자신의 명예를 되찾겠다는 대의명분을 갖고 온 힘을 기울인 사람에게 이렇게 다양한 반응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3. 싫어할 자유와 좋아할 자유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사에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이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죠. 그 과정이 복잡했을 테니, 그 회원의 행보 중 일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발췌 잡공을 현란하게 뿌려서 그 회원을 탐탁지 않은 존재로 스스로 생각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 세상이니까요. 제 해석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5번은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회원을 일종의 말썽꾸러기로 본다고 간주해도 별 무리가 없죠. 1번의 경우는 그 회원에게는 가장 소중한 분들이고, 동지가 된 경우입니다. 만약 그 회원이 인터넷 소통에서 맞대응 전략(Tit-for-Tat)에 준하는 상호작용을 유지했다면, 그런 분들이 격려의 글/사신을 올리거나/보내왔을 때 반드시 화답했을 것입니다. 상호협력을 유지하자는 것이죠.

4. 귀차니즘, 점자니즘, 그리고 말림의 미학

2번, 3번, 4번 유형은 조금 분석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2번과 4번은 제법 줄여서 "귀차니즘" 혹은 "점자니즘"에 빠졌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남들이 알아서 해결하면 대충 따라가겠다는 회원들이죠. 귀찮게 생각하거나, 아래 것들이 까부는데 점잖은 자신들은 빠져 있겠다고 생각했을 수 있겠습니다.

3번이 상당히 재미있는 유형입니다. 건강을 염려해주시는 분, 취지는 맞는데 방법이 너무 세다는 분, 귀찮은데 그냥 대충 지나쳐주지(똘레랑스) 뭘 그렇게 혼을 내려고 하느냐는 분, 기타 등등 여러 표현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 회원으로서는 고맙죠. 대의는 바르다고 일단 동의를 해줬으니 얼마나 고마운 분들입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정중하게 감사를 드려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말리는지 그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것 같습니다. 진정으로 그 회원을 걱정해서 말리는 경우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고맙죠. 그 회원으로서는 감사해야 합니다. 예컨대,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단식을 오랫동안 했다면, 저라도 말리겠습니다. 일단 건강을 해치면 바람직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심한 경우가 아닐 때, 말리는 것이 그 회원을 행복하게 해줄지 아닐지는 똑 부르진 답이 없을 것 같습니다. 말리는 것 자체가 사실 그 회원을 별로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그 회원이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결국은 행복하기 위해서 고생하는 것인데, 관두라!라고 하면 그 회원은 맥이 팍 빠질 수도 있겠죠.

말리는 이유가 그들 자신을 위해서라든지, 게시판 전체라는 가공의 무엇을 위해서라든지면 오히려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회원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되고, 양보해서 그분들이 행복해진다면 전체 사회의 행복 총합으로서는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판단이 설 수도 있겠죠. 그 회원이 적어도 편협한 이기주의자가 아니면 가능한 얘기입니다.

5. 말리지 않을 자유

저는 이 말리는 문화에도 권위주의 유산이 일부 베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구요? 그 회원의 선호를 자신의 선호에 맞춰서 추정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 회원도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경우입니다. 상대방 타입이나 스타일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네 뜻은 옳다, 그러나 네 행복을 위해서 관두라는 식으로 얘기합니까? 그 회원의 행복을 그 회원이 더 잘 알지, 그분들이 더 잘 알겠습니까. 옛말에 야단치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는 말이 있죠. 이 예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길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말리는 미학이 아직도 팽배해 있습니다. 주위에서 살펴보십시오. 경험도 많이 해보셨을 것입니다. 말렸든지, 말림을 당했든지요. 옳다고 공감하면 그쪽에 힘을 보태는 것이 자유주의에 맞습니다. 괜히 남의 선호를 갖고 이렇게 저렇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권위주의적이죠. 만약 그런 말리는 행위가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라면, 깨끗하게 이런저런 점은 객관적으로 잘못이니 인정하라고 요청하는 것이 더 당당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올바르고 정당한 일을 하는 사람을 말리는 이들이 많은 사회에서 어떻게 제대로 된 자유민주주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올바른 방향을 그렇게 좌절시키려고 하면 힘들게 자유와 권리를 위해서 힘껏 노력하는 사람은 얼마나 실망이 클까요. 이런 식으로 말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침묵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만 있는 현상은 아닙니다. 미국의 킹 목사도 인권 운동을 할 때, 주위에서 말리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겠죠. 춘추도 그러한데, 건강을 생각하십쇼, 이런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숫자보다는, 맞다! 우리가 그것을 깜빡했다, 지금부터는 킹 목사 당신에게 힘을 보태겠다!, 이렇게 해서 링컨 기념관 앞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인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몽고메리에서 흑백차별 버스 안 타기 운동을 벌였을 때, 사람들이 동참해줬던 것이죠. 귀차니즘, 점자니즘, 말림의 미학 등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6. 말림이 비추가 될 때

자유주의에서는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거나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면, 간섭하지 말고 그냥 놔두는 것이 정답입니다. 이기적 개인주의이니까요. 그 이외는 기냐 아니냐로 입장을 분명히 정리해서 자기편이 이기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기려고 노력하는 전략은 다양합니다. 무시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방안이 될 수도 있죠. 스토커는 무시하는 것이 적절할 때도 있습니다.)

게다가 민주주의까지 그 문제에 들어오면 반드시 "참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쪽 수로 밀려서 소수파가 되고, 다수파의 입장이 전체 사회적 결정으로 확정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투표합시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독일의 정치이론가 칼 슈미트는 "정치적이라는 것(the political)"은 "적"과 "친구"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 속 뜻을 음미해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주위에 올곧은 일을 하신다는 믿음이 가는 분들이 있으면, 귀차니즘이나 점자니즘으로 소극적으로 대하는 것이나, 말림의 미학으로 좌절을 안겨주는 것이 그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줄지 한번 생각해보시죠. 제가 보기에 적어도 말림은 그분들에게는 별로 행복감을 안겨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자유주의에서 강요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화내면 자신이 또 손해거든요.^^ 남에게 무엇을 요구할 때는 권유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7. 자유민주주의적 참여: 선진국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해볼 만한 것은, 마냥 착한 바보같이 사는 것이 적절하냐는 문제입니다. 이타주의가 오히려 더 불행한 사태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나약한 이타주의는 그렇습니다. 예컨대, 최진실 사건 이후로 네티즌들이 선플달기 운동을 하죠. 아주 좋습니다. 선플이 흘러 넘치면 양화가 악화를 구축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동참하지 않는 자유인지 방종인지를 만끽하려는 사람들이 일정 수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냇물을 흐린다는 옛말이 있죠. 그런 미꾸라지는 미끄러워서 잡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노력해서 한 곳에 모여 있도록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밉다고 추어탕을 해 드시지는 마시길... 자유주의는 그런 미꾸라지도 존재 그 자체는 인정합니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그것은 간단한 모형을 사용하여 순차 게임으로 주어진 조건에서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 작년에 제가 관련 포스팅을 이미 올렸습니다. "주말, 전쟁 공부 (http://tinyurl.com/ahn-bdm)"라는 제목이었습니다. 클릭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물론 평화주의자들끼리 사는 세상에는 이타주의자도 착취당하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우습게 보이면 달려들어서 홀라당 등치려는 늑대들이 곳곳에 있는데 어쩌겠습니까. 겉으로라도 센(tough) 척해야죠. 그래야 응징이 두려워서라도 늑대들이 자제할 것 아닙니까.

자유민주주의가 발전하려면 제대로 된 "참여"가 필수적입니다. 그 참여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으면, 그 참여를 뒷받침하는 시민 정신과 문화가 성숙하지 않으면.......... 선진국, 가기 힘들걸요?

2009년 10월 9일 금요일

[자유] 룻쏘 일병 구하기

(올해 7월 초에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이 부재중이셔서 제가 임시로 운영보조를 맡고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 제 활동에 대한 자평과 함께 게시판의 상황을 자유주의 꽃밭으로 평가했습니다. 룻쏘를 활용하여 게시판 개선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를 살펴보았지만,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평등을 보충하는 데 룻쏘를 활용했음을 설명했습니다. 또한, 집체주의에서는 정치적 조작으로 새로운 세상을 고안하는데 룻쏘를 원용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간략하게 설명했습니다. 2009/07/08, 원 제목: 게시판 평가 및 룻쏘 일병 구하기)

(1) 게시판 운영자의 권한은?

주어진 권한을 행사하지 않는 것도 어쩌면 “방종”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지금 임시 “대빵?”^^인 데요, 그렇다면 어떤 권한을 제가 갖고 있을까요? 무소불위의 권한일까요? 하루에 글을 10개나 올려서 도배해도 괜찮은 권한일까요? 이 점을 알아내려면 지금까지 교수님께서 어떻게 이 게시판을 운영하셨는지 참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제가 이 게시판에 처음 등장했던 작년 2월에는 회원제가 아니었죠. 실명이든, 필명이든 마음대로(자유) 골라서 써넣은 다음, 글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아주 이상적인 자유 세상의 틀이었습니다. 그렇게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회원 가입의 귀찮은 과정도 없이, 우연히 들렀다가 필이 팍 꽂혀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올리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좋은” 글은 많으면 많을수록 이 게시판의 효용이 올라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평화로운 세상이 어느 순간 깨어졌단 말씀입니다. 따라서 교수님께서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하시고, 전격적으로 회원제를 도입하셨습니다.

(2) 룻쏘 살리기 (병 주고 약 주기?)

룻쏘가 억울할 수도 있기 때문에 룻쏘를 약간 구명하고자 합니다.^^ 사상가들은 말을 많이 쏟아 놓기 때문에 발췌 신공을 적절히 활용하면 친구가 되었다, 적이 되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회원제 이전과 이후를 나눠보시죠. 보는 시각에 따라서 이전이 더 아름다워 보일 수 있고, 그 이후가 더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지금 상태가 좋지만, 자유주의자인지 방종주의자인지는 몰라도 과거가 더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회원제 이전으로 돌아가라!”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죠?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룻쏘의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현재 상황이 옛날 자연 상태보다 여러 면에서 열등하다면, 그렇게 주장할 수 있죠.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자연 상태로 돌아가면, 홉스가 등장합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될 가능성을 홉스가 제기할 것입니다. 그래서 홉스의 주장을 따라서 이번에는 사회 계약으로 국가를 만들면, 큰 칼을 든 괴물이 한 명 등장하는 것이죠. 그 괴물이 플라톤의 철인 왕이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네로나 히틀러라면, 어머나, 어머나, 어쩌나, 어쩌나가 됩니다.

(3) 룻쏘의 재해석 및 활용

따라서 룻쏘의 “돌아가라!”라는 이야기를 잘 해석해야 합니다. 룻쏘가 관찰하기에 자신이 살고 있었던 세상이 너무 불평등한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기분이 아주 안 좋아졌죠, 그래서 일종의 강조법을 사용합니다. 이럴 바에야 그 옛날 자연 상태가 더 좋으니 그 정신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입니다. 더욱 평등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었죠.

룻쏘의 이런 피맺힌 고언은 후대 사람의 입장에서는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사람이 냉정하고 (경제학적으로) 합리적이라서, 그 주장을 이기적으로, 자기 입맛대로 갖다 붙입니다. 크게 두 진영이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집체주의 진영입니다. 민주주의 진영에서는 자본주의를 수정, 보완하는 데 룻쏘를 끌어다 활용합니다. 복지도 강화하고, 부자들에게 세금도 더 때리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명시적 보호도 보충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이죠. 그 결과가 현재의 북유럽 나라들의 모습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것도 무슨 이타적인 행위의 결과가 아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수를 이루는 민중들이(1인 1표로) 갈아엎을 가능성이 농후하니까, 힘에 밀려서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룻쏘가 이 부분에서는 공을 크게 세웠습니다. 인정합니다. 고마워요, 룻쏘!

(4) 한편 다른 진영에서는...

집체주의 진영은 룻쏘를 활용하여 가공의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크게 보면 파시즘 쪽이 있고, 처음에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적으로 집체주의에 빠지게 된 사회주의/공산주의 쪽이 있습니다. 라이커 교수님이 룻쏘를 비판하는 것은 이 부분이라는 것은 금방 눈치채시겠죠?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의 끝을 단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그 정치 이념의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인간들에 의해서 정치 질서는 바뀔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반면에 공산주의는 역사의 끝을 상정합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완성되어서 인간 소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상태가 공산주의가 말하는 역사의 종착점입니다. 이 포인트가 바로 칼 포퍼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핵심입니다. 역사의 끝이 어디 있노?라고 되묻는 것입니다. 아주 적절한 문제제기입니다. 공산주의 비판을 하려면 포퍼식으로 하는 것이 제대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공산주의를 무슨 피 빨아 먹는 요괴로 그리면, 권위주의 때문에 생각이 굳은 상태에서는 머리에 쏙쏙 들어가지만, 나중에 자아를 다시 깨닫고, 자유를 제대로 고민하게 되면, “빨갱이?” 그것 조금 이상하네... 이렇게 됩니다. 실상을 알고 나서는 반작용으로 오히려 자발적 공산주의자가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그런 것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죠. 머릿속에서만 공산주의자라면, 태클을 걸 수도 없고, 걸 필요도 없죠.

(5) 그래도 지구는 돈다?

어떤 사람은 역사의 끝이 있다!라고 외칠 수도 있겠습니다. 핼리인지 섈리인지 혜성처럼 큰 덩어리가 지구를 꽝 치면, 그것이 역사의 끝이다!라고 그 증거를 갖다댑니다.^^ 누가 그것을 모릅니까?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죠.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정치 질서를 따지고 있죠. 이 말도 어디서 많이 들어봤네요.

(6) 히레스쎄티션과 정치적 조작

링컨이 말 하나는 참 잘했습니다. 그래서 라이커 교수님이 링컨을 Heresthetician 최고봉 중 한 명으로 칭찬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히레스쎄티션... 저도 이 괴이한 단어를 정학하게 발음할 자신이 없습니다. 라이커 교수님이 직접 발음하시는 것을 강의 시간에 들어봤지만, 들어서 모두 따라 할 수 있다면 세상에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의제 설정을 통하여 정치적 조작을 잘하는 사람을 히레스쎄티션(?)이라고 라이커 교수님이 정의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수사(설득)에 능한 사람이 아니고요, 무슨 말을 해서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는(유리한 전략적 상황을 도출) 일종의 전략가입니다. 영어 사전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교수님이 그리스 어를 참조하여 만드셨거든요. 히레스쎄티션이 보여주는 정치적 조작술을 Heresthetic이라고 합니다. 발음 한번 시도해보시길... 저는 싫네요. 이 단어 한번 발음하고 나면 제 영어실력에 대해서 회의가 왕창 듭니다.^^

마르크스는 나름대로 훌륭한 수사를 구사했지만, 정치 조작가는 아니었죠. 마르크스를 활용하여 정치 조작가로 성공한 대표적인 사람이 레닌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7) 원위치!

또 삼천포로 빠졌습니다. (저는 삼천포와 어떤 감정 관계도 없습니다. 사람이 쓰기에 그냥 따라서 썼습니다. 삼천포 출신들의 양해 바랍니다.^^) 제가 하려던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기억이 어렴풋해서 방금 스크롤 하여 위에 올라갔다 다시 왔습니다.^^

(8) 자유주의 꽃밭, 이 교수님 게시판

따라서 룻쏘를 이 교수님 게시판 개선에 긍정적으로 활용하려고 해도, 이전의 비회원제 상태로 돌아가서, 다시 홉스가 등장하는 순환을 거듭하면 당연히 안 되겠죠. 제가 보기에 별로 개선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 현재 상태가 이상형은 아니지만(현실에 이상형은 구현 불가능에 가깝죠), 매우 바람직한 상태로 운영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의 제도로 최대한의 자유주의적 자율이 이뤄지고 있다고 봅니다. 준 익명도 허용되고 있죠.

교수님께서 홈피 주인으로서 권한을 과하게, 아니죠, 보통 이상으로 행사하시는 것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일전에 방종의 느낌을 진하게 주는 어느 회원의 글을 삭제하실 때도 노심초사에 노심초사를 거듭하셨죠. 그리고 최종결정을 하시기 전에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이상적인 것은 아니지만(자진 삭제가 아니므로), 개인 홈피 주인으로서 당연히 그런 권한을 갖고 계시고, 그렇게 하셔야 되는 시점이라고 의견을 드렸습니다. 또 다른 분들의 의견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다음에 다른 수단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시고, 그 회원에게 제재를 가하신 것이죠. 결과는 평화였습니다.

자유주의, 어디 멀리서 찾으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있는 이 공간이 자유주의를 제대로 하는, 교수님께서 공들여 가꾸고 계시는 사회대 옆 화초 텃밭과 같은 곳입니다. 게시판 모든 분의 자율적인 “참여”와 교수님의 탁월한 감각으로 이런 행복을 이뤄냈다고 생각합니다.

(9) 스스로 평가

제가 운영자를 임시로 맡은 약 열흘 동안의 행보를 교수님의 평소 운영과 스스로 비교해볼 때, 약간의 방종 기미가 있다는 자책인지, 자학인지가 조금 들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열흘 동안 매일 이런 장문을 올리신 적은 없잖아요.^^ 교수님께서 일일이 댓글에 코멘트를 해주시는 것은 제가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들의 홍수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ㅜ.ㅜ 이 점에서 저는 약간의 방종을 저질렀다는 의혹을 스스로 생각해볼 수가 있겠습니다. 아직 어느 회원분도 명시적으로 제 행보를 방종끼(?)가 있는데...라고 제기하신 분이 없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격려를 많이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종 판정은 교수님께서 내려주실 것 같습니다.^^

(10) 드리고 싶은 질문

제가 서울에 들어가서(빨리 들어가고 싶어서 짬만 나면 열공 중입니다^^) OO 씨와 약속한 집담회에 서게 되면, 간단한 인사를 드리고 다음과 같은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저도 자유인이고, 여러분도 자유인입니다.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제가 커밍아웃하는 것으로, 보는 시각에 따라서 제 사생활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저에게 들으신 이야기는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제가 드린 말씀을 옮기는 자유를 만끽한다면, 그 사람의 행위는 방종인가요, 자유인가요? 그것이 오늘의 질문입니다. 정답이 없습니다. 각자 입장대로 주장하면 그것이 정답입니다. 자유민주주의에는 절대적 잣대는 없습니다. 상대적 줄자만 있습니다.^^ 단, 적절한 근거는 있어야겠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이틀 정도 이 문제를 갖고 고민을 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의견을 참조하면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기적인 마음에, 이렇게 장문의 글도 적고 끝에 부탁도 드리고 있습니다. 공짜는 없으니까요. 도와주세요. 꾸벅~ (부탁할 때는 비굴 모드라고 있습니다. 굴비 사촌이죠.^^) //

2009년 10월 5일 월요일

[자유]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

(2009년 10월 3일 인터넷에 댓글로 올린 글을 추리면서 일부 수정했습니다. 원 글 출처: http://tinyurl.com/ahn-yshahn)

1)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들도 여러 유형이 있을 겁니다. 제 절친 중에 지금은 변호사로 활동하는, 80년대 초반 운동권에서 유명했던 친구가 있습니다. 고등학생일 때 제 짝이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 잡혀가서 칠성판에 누워서 전기고문까지 당했죠. 친구들과 만나도 전혀 그런 기색은 하지 않았습니다. 민주화 운동을 할 때도 그랬고, 수형 생활을 마친 이후에도 그랬습니다. 고등학생이었을 때도, 민주화 운동을 하던 대학생이었을 때도, 사회인이 되어서도 정말 여리고 겸손했습니다. 그런 친구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습니다. 이 친구 성도 안 씨네요... 자신의 수사를 맡았던 공안 검사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가 있습니다. 2003년 3월에 적은 글입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11986
다른 친구도 있었습니다. 이 친구 이야기는 제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참조: http://ahnabc.blogspot.com/2009/08/80-80.html)

그 친구들은 민주화에 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살게 되었어도,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인권과 목숨을 짓밟은 것은 정당화할 수 없다고 봅니다.

2) 현대 민주주의가 대의제를 위주로 하지만, 직접 민주주의의 중요성도 간과하지 않습니다. 주민 발의/투표/소환이 대표적인 직접 민주주의 제도입니다. 아울러서 시민이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국민의 기본권에 속합니다. 우리 헌법에도 그렇게 대못을 박아 놓았습니다.

기본권을 경제학자들이 어떻게 편익계산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 "알량한", 어쩌면 돈도 되지 않는 자유나 인권 때문에 사람이 죽기도 합니다. 경제학적으로는 매우 비합리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인간으로서는 합리적인 행위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시민이 왜 거리에 나와서 촛불을 들었습니까? 시민 대부분이 할일 없어서 재미거리로 그렇게 했습니까? 우리 국가의 신인도를 낮추려고 그렇게 했습니까? 법원이나 정부 청사 앞에서 시민이 왜 시위를 합니까? 자유주의에서는 생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가 모두 기본권입니다. 물론 생각의 자유를 제외하면 절대적 자유는 아닙니다. 자유와 자유가 박치기하면 자유가 제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헌법에 명기한 기본권을 정당한 사유 없이 제한하려는 발상은 권위주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 헌법재판소의 야간 집회에 대한 결정을 어떻게 봅니까? 경제적 효율을 떨어뜨릴 잘못된 결정으로 봅니까?

작년 촛불 집회 및 시위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었다고 봅니까? 정부입니까? 시민입니까? 촛불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방해하려 했다고 봅니까, 표현의 자유를 행사해서 자유민주주의를 진작시키려고 했다고 봅니까? 촛불 시위의 근본 원인이 정부에 있었다면 관련 경제적 비효율을 초래한 것은 정부라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참조: "민주주의에 대한 단상들" http://ahnabc.blogspot.com/2009/10/blog-post_03.html
"권위주의와 경제발전" http://ahnabc.blogspot.com/2009/09/blog-post_18.html

3) 민주주의를 과소 평가하는 것도 곤란하지만, 과대 평가하는 것도 곤란합니다.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조작도 가능합니다. 우리나라의 현행 대통령 선거제도는 비민주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 모범으로 불렸던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에서 히틀러와 나찌가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참조: "투표의 역설과 의제 설정" http://ahnabc.blogspot.com/2009/09/blog-post_985.html
"현행 대통령 선거제도 개선" http://ahnabc.blogspot.com/2009/08/blog-post_4732.html
"노무현의 정치 성적표" http://ahnabc.blogspot.com/2009/10/blog-post_6865.html

자유민주주의가 지금까지 있었던 정치 이념/제도 중에서 상대적으로 괜찮은 평가를 받는 것은 맞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민주주의의 완결판이 나온 것은 아닙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의 끝을 상정하지 않습니다. 진보하든지, 정체하든지, 후퇴하든지, 셋 중 하나라고 보면 됩니다. 대의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혹은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국가의 주인인 국민은 언제든지 정치적 의사를 직접 표현하여 시정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위임한 권력을 철회할 수도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시민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혹은 바람직하다는 정답을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그냥 소소하게 헌법 정신에 따라서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확보하려고 노력하며, 헌법에 명시한 국민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원리 정도만 제시하고 싶습니다. 구체적으로 시민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답을 정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특히, 자유주의의 속성을 살펴보면 그런 생각이 더 듭니다.

집체주의(Populism, 예컨대 구 소련 공산주의, 현재 북한의 주체사상) 에서는 인민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정답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죠. (참조: http://tinyurl.com/ahn-rousseau "룻쏘 일병 구하기") 국민교육헌장이라고 있었죠. 국민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답을 상세하게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유신 헌법이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국민의 기본권을 극심하게 제한하면서도 "한국식" 자유민주주의 정답이라고 정부에서 홍보했습니다.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대한민국과 국민을 돕는 것인지, 집권자나 정부에게 대충 ok 사인을 날려주는 것이 바람직한지, 건설적인 비판을 수시로 해주는 것이 좋은 것인지, 어떻게 해야 제대로 도와주는 것인지, 기타 등등... 개인마다 생각이 다를 것입니다. 특히 ex ante(사전적) 평가는 무엇이 정답인지 애매모호할 때가 잦을 것입니다. 사람은 로보트가 아니라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니까요.

인간사가 복잡한 편이지요. 자유민주주의도 정말 복잡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미리 답으로 정해놓고 사람들이 그 방향으로 획일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강한 주장을 만나면 어색하다는 느낌이 주로 듭니다. 이념적으로 어느 쪽이든 어색하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2009년 10월 1일 목요일

[정치] 노무현의 정치 성적표

(2007년 12월 18일, 제17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작성한 글입니다. 일부 표현만 다듬었습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하려고 합니다. 제왕적 대통령 탈피와 민주주의를 더 성숙시킨 것이 노 전 대통령의 대표적인 정치 부문 업적이라면, 이 글에서 주장한 점이 아쉬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의 맹점 중 대표적인 것으로 중우정치를 들 수 있다. 이 맹점은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언급되었던 것으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예는 독일의 히틀러가 민주주의 모범으로 여겨졌던 바이마르 헌법 체제에서 탄생했던 것이다. 정치 자체가 지극히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개념이므로 민주주의를 통해서 나타나는 부작용은 오히려 자연스럽고 태생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도 이 지구 상에서 나타난 정치체제 중에서 현재 가장 높은 점수를 받고 있고, 궁극적으로 살아남을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이 민주주의인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는 이성적이며, 민주주의를 통해서 인간들의 역사가 장기적으로는 개선되고 발전한다는 추론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개별적인 사례에서 민주주의 실패가 국가 자체의 소멸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제17대 대선 과정에서 이명박 후보가 부동의 여론조사 1위를 계속 유지해왔고, 그대로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민주주의의 맹점인 중우정치가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중우정치를 평가하는 잣대에 따라서, 혹은 결과론적으로 평가하려면 아직 현 상황이 중우정치인지 아닌지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대통령 자질이라는 객관적이면서 최소한의 기준을 적용하여 평가한다면 중우정치라고 평가할 수 있다.

현 상황이 중우정치가 맞는다면 그 실마리는 무엇인가? 대중이 아무 이유 없이 우매해졌다고, 한국인의 속성이 원래 그렇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대통령이라는 가장 중요한 공직을 선출하는 선거에서 국민의 선택이 마냥 비이성적이라고 강변할 수는 없다. 수많은 실마리를 열거할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뽑으라면 나는 현 대통령인 노무현의 정치 성적표를 들겠다.

많은 사람이 노 대통령을 정치 9단으로, 혹은 10단으로 표현하는데 필자는 동의할 수 없다. 현 상황이 그 반증이다. 2005년 대연정 제안이 있었을 때, 정치부문을 담당하고 있던 한 청와대 비서관이 몇 사람의 의견을 듣기 위한 비공식적인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필자는 그 비서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노 대통령의 지지도가 왜 그렇게 낮은지 아십니까?”
“왜 그렇습니까?”
“정치를 잘 못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직선적으로 얘기해서 그런지 그 이상의 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여당의 최고위직에 있던 사람을 일대 일로 만난 자리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대연정이 정말 그렇게 말이 되지 않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큰일 날 수도 있다고 짧게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제16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참여하기 전에는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지인이 인수위원회의 정치개혁연구 부문의 실무 책임자가 되고, 내가 자원해서 그 연구에 참여하면서 큰 관심이 생겼다. 지금도 인상깊게 남는 것은 그 당시 읽은 기록 중에서 두 교수와 당선자가 의견교환을 했던 비공식 기록의 한 문장이다. 참석했던 교수가 당선자에게 소주제로 자유주의를 제안했을 때 당선자의 즉답이 매우 흥미로웠다.

“저는 자유주의를 잘 모릅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자유주의 소주제에 대한 토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 대통령이 어떤 정치인인가에 대해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 객관적인 서술이 많이 나올 것이다. 내가 파악한 정치인 노무현은 다음과 같은 주요 특징을 갖고 있다.

1) 자신이 정치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에 대해서는 한 수 가르쳐줄 수 있다는 식으로 언급한 적이 많다. 그래서인지 퇴임 후 정치학 교과서를 집필하겠다고 한다.
2) 정치는 근본적으로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는 투쟁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정치학에서 흔히 얘기되는 현실주의적 정치관이다. 장차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치는 투쟁이라고 일갈한 것은 그 정치관을 잘 보여준다.
3) 자신이 그리는 정치적 설계는 옳다고 강하게 믿으며 실현 가능성이 작더라도 일단 추진한다. 대표적인 예가 대연정 제안,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국회의원 선거구제 개편 제안, 개헌 제안 등이다.
4) 정치적 수사가 세련되지 못하고 직선적이다.
위에 열거한 네 가지 특성은 정치인으로서 장점도 될 수 있고, 단점도 될 수 있다. 나는 노 대통령의 정치인으로서 자질은 높게 평가하는 편이다. 그러나 대통령 임기 시절의 노무현 정치에 대한 나의 평가는 네 특성이 잘못 결합하여서 별로 좋지 않은 결과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그 결과의 극단적 성적표가 될 것이다. 최근 노 대통령은 삼성 특검을 수용하면서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 정치는 없다고 했다. 상당히 맞는 말이다. 결과를 고려하건대 노무현 정치는 성공하지 못했다. 정치를 그렇게 잘 안다는 정치인이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를 의미한다는 기본 원리를 잠깐 망각한 것은 아니었는지? 소수파 대통령으로 시작한 정치인 노무현이 다수파로 나아가는 정치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 더 심한 소수파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바이마르 헌법 체제하에서 히틀러가 나와서 독일 국민이 질곡에서 헤맸지만 결국 독일이 부활했듯이, 우리도 단기적으로는 이상한 대통령이 통치권을 갖게 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민주주의도 발전하고 민중도 더 잘살게 될 것이라는 위안이다. 물론 극적으로 그 이상한 대통령이 탄생하지 않으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