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8/03/28)
(왼쪽부터, 이승만, 김구, 박헌영, 김일성, 여운형, 하지, 스티코프)
(0) 석사 논문: “한국의 세계체제 편입에 관한 연구: 1945~46년을 중심으로”
제가 입대한 때는 1986년 늦은 가을이었습니다. 그 당시 석사전문요원이라고 해서 4개월을 영천에서 훈련받고 2개월을 전방에서 소대장 실습을 마치면 소위로 임관하는 동시에 예편하는 병역 특례가 있었는데 제가 그 혜택을 받았습니다. 현역으로 3년을 고생하신 이 교수님에 비하면 “짝퉁” 병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천에서 훈련받을 때 정신교육 시간이 제법 많았는데, 교관들의 밑천이 떨어지면 후보생 중에서 추천을 받아서 대신 그 시간을 보내게 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정치학 전공자를 찾게 되었고, 그때 제가 몇 시간을 시리즈로 해방 직후의 정치상황에 대해서 나름대로 설명했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제 석사학위 논문 주제가 해방 직후부터 모스크바 삼상회의 발표(신탁통치안) 직후까지의 우리 정치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80년대 중반에 그 시기를 연구하다 보니 애로사항도 많았습니다. 해방 직후의 좌파 자료들이 중앙대 한국학 연구소에 제법 있었는데, 우리 학교 국제문제연구소의 자료 열람 요청 공문을 갖고 가도 보여주지 않는 식이었습니다. 결국, 좌파 신문인 <해방일보>는 영문 요약본을 읽고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까지 벌이면서 겨우 논문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1) 해방 직후 정치 판세
그 연구의 동기는 커밍스(Bruce Cumings)의 연구를 평가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수정주의 학파의 대표적 학자인 커밍스는 그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해방 직후 우리나라가 좌파 세상이었는데, 우파가 미국을 등에 업고 남한을 “먹었다”는 주장을 제법 정교한 사회학적 연구로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해방 직후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겨서 나름대로 실증 연구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미 국무부와 미 군정청 자료를 비롯하여 해방 직후 신문, 잡지, 자료집, 심지어 삐라까지 참조했습니다. 제 결론은 커밍스 연구도 의미가 있지만, 좌파가 일방적으로 우세한 국면은 아니었고, 좌우가 엇비슷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컨대 커밍스는 좌파 자료집인 <조선해방연보>에 나온 숫자들을 자신의 연구에 그대로 사용했는데, 그 자료집에 나온 좌파 조직들 구성원 숫자를 모두 합치면 그 당시 한반도의 성인 수에 비해서 너무 큰 숫자가 나옵니다. 잠재적 세력을 정치세력화하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더 잘 조직된 좌파 조직들이 세를 과시하려고 만든 자료에 대한 질적 분석에 있어서 커밍스는 미흡했습니다.
제가 알기로 그 시기와 관련된 연구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자료가 제 석사 논문에 나오는데, 그것이 <선구>라는 잡지의 그 당시 여론조사입니다. 1차와 2차에 나뉘어서 행해진 여론조사였는데, 정치세력 판도를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대통령으로 누가 적합한가? – 이승만, 내무부장은? – 김구, 군사부장은? –김일성, 이런 대답이 다수를 보여주는 흥미있는 여론조사였습니다. 그 자료를 포함하여 광범위한 자료들을 나름대로 참조하여 분석해보니 좌파와 우파가 엇비슷한 세력 분포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다만, 우파가 상대적으로 정치세력화가 늦어졌기 때문에 커밍스는 좌파가 매우 우세했던 것으로 과대평가한 측면이 있습니다.
(2) 김일성과 공산주의 항일투쟁
해방 직후사를 쳐다보면 자연스럽게 일제 강점기를 참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김일성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아야 객관적인 분석이 가능하죠. 지금 중고교 교과서가 김일성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제가 잘 모릅니다. 제가 받은 중고교 교육에 의하면 김일성은 본명 김성주로서, 만주에서 활동했던 그 유명한 독립투사 김일성 장군과는 다른 인물이다는 식이었죠. 또한, 북한의 김일성 독립운동 경력은 날조된 허구라고 설명하였죠.
하와이대 서대숙 교수의 김일성 연구는 매우 훌륭합니다. 서 교수의 연구만 참조해도 북한 김일성의 정체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석사 논문을 쓰면서 알게 된 것은 김일성에 대한 북한의 선전도 틀렸고, 제가 받은 중고교 교육도 틀렸다는 것입니다. 김일성이 항일 무력항쟁을 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북한이 뻥튀기했듯이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중국 공산군과 협력하면서 만주에서 소대 규모 정도의 대원을 이끌고 항일 활동을 했으며, 나중에 일본군의 추적을 받아 궤멸하면서 소련 쪽으로 피신하여 소련군에 속하게 된 것이 객관적 평가입니다. 앞에 말씀드린 정신교육 시간에 김일성이 항일 무력투쟁했다고 설명하니 많은 군 동료 후보생들이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그 내용으로 강연을 마치고 나니 저도 조금 걱정되더군요. 보안대에서 저를 잡으러 올 수도 있겠다는 기우였죠. ^^
항일 운동으로서 공산주의와 북한 정권 수립 후의 북한 노동당 공산주의는 그 성격이 확연히 다릅니다. 일제 강점기의 좌파는 항일의 수단으로서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이념뿐만 아니라 “돈 문제”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상해임시정부가 항일 자금 문제 때문에 내분을 많이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 공산주의자들도 돈 때문에 알력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앙아시아 자유시에서 벌어졌던 참변입니다. “자유시 사변”으로 알려졌는데, 소련의 지원 자금을 둘러싼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알력도 한몫했던 유명한 참극입니다. 소련이 공산주의 항일 세력의 큰 자금줄이었지요. 상해임시정부나 조선공산당 세력은 모두 이념보다는 항일 독립운동이 최우선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 당시 세계 정치 판도가 영국의 헤게모니가 깨지면서 공산주의 소련과 자본주의 미국의 양대 세력으로 재편되는 와중이었기 때문에 독립운동도 좌우로 나누어지는 구조적 문제가 있었습니다.
(3) 38선 획정과 분단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우리나라는 독립했습니다. 38선이 어떻게 그어졌느냐는 1980년대에 그 평가가 완료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설은 미소의 정치적, 군사적 고려가 복합적으로 작동하여 38선을 탄생시켰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무조건 항복하자 한반도를 어떻게 처리해야 될 것인지 고민에 빠집니다. 정치적 고려 상 한반도를 포기할 수는 없는데, 그 당시 군사적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죠. 소련은 8월 초에 드디어 태평양 전쟁 참전을 선언했고, 8월 15일 일본의 패전 발표 직후 한반도 진주를 시작합니다. 이에 비해서 미국 병력은 바다 멀리 떨어져(오키나와?) 있었죠. 그래서 미국 국방성에서 군사적 한계를 고려한 한반도 분할을 기획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동원 가능한 병력이 모자란 것을 참작하여 서울 이남을 구상하기도 했는데, 결국 수도인 서울은 포함해야 한다는 의도가 관철되어 북위 38도 선을 긋습니다. 그리고 소련의 동의를 얻습니다.
38선을 두고 남과 북에서는 좌와 우의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집니다. 중간에 좌우를 합작하는 노력도 있었습니다만, 미소가 냉전으로 치닫는 구조적 한계를 국내 세력들이 극복하지 못하고/않고 1948년 남과 북에는 별도의 국가가 탄생합니다. 즉, 민족은 하나인데 국가는 둘인 한 민족 두 국가 체제가 한반도에 도입된 것입니다. 이 기형적 구조는 아직 해소되지 않고 우리 민족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남이나 북이나, 국제정치를 잘 활용한 세력이 최종적으로 권력을 잡았다는 것입니다. 북에서는 소련군 장교 직을 갖고 있었던 김일성이 반대 세력을 숙청하였고, 남에서는 미국 정치학 박사출신인(프린스턴대) 이승만이 반대 세력을 제압하였습니다. 북에서는 조만식, 중국 공산당 쪽 공산주의자들(연안파), 김일성파 외의 소련 쪽 공산주의자들이 사라졌고, 남에서는 김구, 여운형, 공산주의자 등이 없어지거나 지하로 잠적했습니다. 남한의 경우, 김구가 국제정치적 감각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개인적으로 있습니다. 머리 싸움에서 김구가 이승만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4) 분단의 고착화
북에는 김일성 독재체제가, 남에서는 이승만 독재체제가 자리 잡았습니다. 그 와중에 북은 동원체제를 본격적으로 가동하여 한국전쟁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미국의 개입으로 침략전쟁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1960년대 말 혹은 70년대 초까지 북한은 오히려 남한보다 군사, 경제적으로 우월했지만, 그 이후 상황은 역전됩니다. 북한은 김일성의 영구 집권을 위해서 주체사상으로 인민들을 세뇌시켰고, 급기야는 아들 김정일에게 권력을 세습시켰습니다. 지금 현재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남한은 세계 11위 정도의 경제력을 갖고 있고, 북한은 핵 실험까지 했지만, 인민들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목불견의 상황입니다.
윤준현
답글삭제(2008/03/28 12:54) 안병길 박사님 감사합니다 ㅠ.ㅠ 딱 하나 부탁드릴 것이 있다면 북한의 생존 전력과 함께 우리의 대북정책에 대하여 적어주십사 하는 것이옵니다... 지난 정부에서의 햇볕 정책이 맞는 것인지 지금 정부의 상호주의가 맞는 것인지... ㅠ.ㅠ 근데 북한이 제대로 시위하네요... 남북경협사무소 남한 직원들 철수하게 하더니 이제는 미사일 발사까지...
카이지
(2008/03/28 12:56) 이승만 김구 박헌형 여운형..김일성까지.. 사진이 쟁쟁하군요!!
안병길
(2008/03/28 13:43) 사과님이 듣고 있는 강의 제목을 물어봐도 될까요?
윤준현
(2008/03/28 13:50) 제가 듣고 있는 강의 제목은 행정학으로 과제가 정부 각 부처의 조직과 기능에 관해서 연구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맡은 부처는 통일부입니다... 근데 학점도 잘 딸 겸 작업도 들어갈 겸 단순하게 조직과 기능을 그대로 서술하기 보다는 "통일부 존페 논쟁"과 "통일부의 앞으로의 할 일" 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우선 큰 틀로 햇볕정책이 타당할 것인가 상호주의가 맞을 것인가에 대하여 우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서 통일부의 역할이 달라지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비록 이런 자리를 빌어 많은 분들이 박사님의 고견을 들어 시야를 넓힐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박사님께서도 그런 생각도 갖고 글을 주셨을 거 같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박사님께 제가 당치도 않은 부탁을 드렸다는 생각이 강해져서 죄스럽기만 합니다... ㅠ.ㅠ 만일 바쁘시다면 그냥 제가 스스로 연구해보고 고민해 보겠습니다... 이준구 교수님께서도 "임마 니가 알아서 해"라고 하실 거 같은데... ㅠ.ㅠ 정말 죄송합니다...
근데 역시 김일성에 관한 연구에서는 항상 서대숙 교수님, 스칼라파노가 언급되는 군요... 언제 한 번 봐야 겠습니다... 북한학에서는 고 김남식 선생님도 유명하다고 하시던데...
안병길
(2008/03/28 13:59) 다음 글에서 그 내용이 일부 자연스럽게 나올 것 같네요. 통일부 역할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저는 봅니다. 통일부에 있는 제 친구들 일자리도 걱정이 되구요. ^^
윤준현
(2008/03/28 14:17) 아...박사님께 너무 부담을 드리는 거 같아 제가 제 생각을 올리고 박사님께서 검토하여 주시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조만간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ㅠ.ㅠ
안병길
(2008/03/28 14:21) 그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두 방향 모두 해보죠, 뭐. 저에게 부담될 것은 없습니다. 좋은 여가선용 소재를 받았다고 생각해요. 마눌님이 출장 중이라서, 타이밍도 좋네요. ㅎㅎㅎ
토로래
(2008/03/28 14:34) 안박사님이 사회과학도님에게 공부와 작업 양방향에 많은 도움을 주시네요 ㅋㅋㅋ
이준구
(2008/03/29 13:23) 안박사, 2편은 언제 올려주실 거죠?
걸기대.
안병길
(2008/03/29 14:04) 일요일 저녁까지는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개봉박두, 두둥~
김영삼
(2008/03/29 14:43) 간결하면서도 보기 좋은 글이네요.
읽으면서 편안함이 느껴지네요. 다음 연재도 사뭇 기대가 됩니다.
지금 뉴스에서는 북의 미사일실험, NLL에 대해 말하고 있네요. 흠
안병길
(2008/03/29 23:07) 분더혼님의 의견도 일리가 있습니다. 김구가 해방후 상황에 잘 적응하지 못했죠.
윤준현
(2008/03/30 02:23) wunderhorn 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그래도 이승만 보다는 김구가 훨씬 좌익을 끌어안을 줄 알았던 것 아닐까 합니다... 분단이 점점 확실하게 되어 가던 무렵 북에 있던 임정 시절의 동지 김두봉에게 편지를 써 남북 연석 회의를 열자고 한 것도 백범이었고 모든 것을 떠나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렸고 명성도 모자랐던 김일성을 만나 이야기 한 것도 백범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입국 시부터 공산주의자들을 전염병 환자에 비유하였다고 하더군요... 비록 백범이 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극우파적 테러리스트의 면모를 보였다고는 하나 이는 당시 좌우룰 막론하고 수많은 테러가 일어났다는 것을 볼 때 어쩌면 당시 미개한 정치 의식에서 비롯된 측면이 더 강하다고 생각되고 공산주의자와는 일절 대화를 해보지도 않은 이승만 보다는 훨씬 포용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정치 감각 같은 것에서 백범이 이승만에게 못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백범이 결국 정권을 잡지 못한 것은 비단 정치 감각의 문제 보다는 "민족을 위해 옳은 것"을 추구하다 보니 그런 점도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백범은 흰머리 영감 같이 자신의 집권을 위한 정읍 발언 따위의 흰소리는 하지 않았습니다..오히려 단독 정부 수립시 그래도 국회에 참여했다면 정치 지분을 확보할 수 있었음에도 임시정부의 법통을 단독 정부에 줄 수는 없다며 아예 참여하지를 않았지요.. 백범이 살해된 것도 비전이 없어서가 아니라(이승만의 생각이 비전이라고는 결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 유명한 친일파들의 6월 공세의 마지막 단계로 고 강원용 선생의 증원에 따르면 안두희는 이승만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결국 설사 정치 감각 같은 것이 이승만에게 뒤떨어졌다 하더라도 일단 인격이라는 측면에서 부터 백범이 이승만보다는 머리 위에 있고 그가 지금까지 전국민의 존경을 받는 것도 이러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네요...
물론 훌륭한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는 인격, 정책 비전, 정치 감각 모두를 갖추어야 합니다만... 그래도 당시에 비추어 볼 때 이 모두를 원하는 것은 욕심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이런 것들을 모두 갖추었다고 어떤 분들은 몽양 여운형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안병길
(2008/03/30 10:28) 여운형이 유리한 위치에 있었죠. 건준과 인공 등을 주도하면서 기선은 잡았는데, 미군의 역할에 대한 계산이 모자랐어요. 그 다음에 김구가 상해에서 들어왔고, 한참 뒤에 이승만이 미국에서 들어왔죠. 결국, 국제정치를 등에 얼마나 잘 업느냐가 관건이었다고 봅니다. 이북에서 김일성이 집권한 것도 마찬가지였구요.
역사 박사님은 석사학위 dissertion 부터 저로 하여금 후덜덜하게 만드시네요 ㅠㅠ.
답글삭제ㅎㅎㅎ 민우씨, 주제가 고리타분하지 않나요? 저는 석사 논문을 재미있게 적었습니다. 주위 어른들 의견도 직접 듣고 그랬죠. 나중에 지도교수님(서울대 외교학과 하영선 교수님)의 편저에 그 논문이 들어갔습니다. 책 제목은 "한국전쟁의 새로운 접근: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를 넘어서" 입니다.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