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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1일 목요일

[수필] 자유민주 열공 최종 보고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10/03/04)

작년 7월 1일에 시작한 자유민주주의 열공에 대한 최종 보고를 드립니다. 우연한 기회에 이준구 선생님 게시판을 처음 방문한 때가 2008년 2월이었습니다. 그때 이 선생님의 혜안이 담긴 여러 시론과 수필을 읽고 공감하는 바가 매우 커서 게시판 소통을 시도했었습니다. 굴러온 촌뜨기를 따뜻하게 대해주셔서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습니다.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작년 6월에 제가 가입한 인터넷 동호회에서 저와 관련된 별로 유쾌하지 않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저를 다른 회원으로 착각한 어떤 회원이 심한 욕설과 인신공격을 저에게 해댄 해프닝이었죠. 그 회원의 공개 사과를 받기 위하여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때 이 선생님께서 댓글로 올리신 자유와 권리, 그리고 자유주의자에 대한 설명이 저에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신기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 사건을 전혀 모르셨을 텐데 마치 꼭 찍어서 저를 격려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덕분에 저는 힘껏 노력하여 그 회원의 정중한 공개사과를 받았습니다.

그 인터넷 동호회에서 욕설과 인신공격으로 문제가 생긴 것은 별로 특이한 일은 아닙니다.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서 언어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죠. 어떤 회원은 욕설 사용이 그 동호회의 문화라고 주장하는 정도였으니까요.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왜 그런 언어폭력이, 권위주의적인 문화가 버젓이 소위 자유 공간에서 날뛰는지 고민했습니다. 일부 회원이 자유민주주의를 잘 모르거나, 알아도 편한 대로 해석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자유민주주의의 진면목을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이런저런 단상은 오래전부터 제가 해왔던 것입니다. 1994년 미시간주립대 정치학과에 조교수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예컨대 미시간주립대의 한국 관련 행사를 어떤 방식으로 추진할 것인지에 대해서 저는 다원적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바람을 1997년에 미시간주립대를 떠나면서 한국학생회에 인사말로 남겼습니다.

1997년에 서울대 국제지역원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상념이 더 깊어졌습니다. 왠지 우리나라 자유민주주의가 매우 어설프게 보였거든요. 인터넷에서 토론하면서 그런 생각이 더 들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우리 인터넷 문화가 상당히 거칠었죠. 2003년부터 우리나라에서 다시 활동하면서 그 고민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제16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정치개혁을 연구하면서, 또한 민간 종합정책 싱크탱크를 목표로 조그만 연구원을 발족하고 관련 활동을 하면서, 정부 쪽과 시민 쪽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 관찰하고 나름대로 분석했습니다.

작년 7월 1일부터 이미 적어둔 글들을 정리하고 새로 글도 적으면서 책으로 엮은 것은 약 15년 동안 제 머릿속에서 맴돌았던 그런 생각들을 펼쳐낸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인지 8월 중순에 일단 마무리한 초고는 그 분량이 많았고, 또한 산만했습니다. 출판사와 접촉하여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서 초고를 대폭 정리하면 될 것으로 봤지만, 출판사 섭외가 쉽지 않더군요. 결국 제일 먼저 접촉한 도서출판 동녘에서 한번 해보자는 답을 받았고, 출판사의 요청을 참작해서 초고를 대폭 고쳤습니다.

수정 원고가 책으로 만들어져서 서점에 선보이기까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교정을 여러번 봤는데도 계속 바로잡을 것이 나오더군요. 제목을 정하는 것도 정말 힘들었습니다. 일반인이 많이 읽어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더 눈에 띄는 제목을 고르는 것이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지인의 아이디어도 빌리면서 추린 약 20개 정도의 제목 후보에서 최종 낙점을 받은 것은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입니다. 약자 자유민주주의자가 강자 권위주의자를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라는 문제의식이 반영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이번 주에 제 열공의 한 매듭이 맺어집니다. 이준구 선생님의 성원이 없었다면 제 책은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깊은 은혜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게시판 친구들의 응원과 도움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특히 초고를 읽고 소중한 조언을 보내주셨거나 교정을 봐주신 회원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온라인 공간의 자유민주주의 모범을 이 선생님 게시판이 계속 보여줄 것을 기대하면서, 또한 믿으면서 열공 최종 보고를 마칩니다. 꾸벅.

p.s. 인터넷 서점 한 곳에는 이미 올라와 있군요. ^^ 책 홍보를 해서 미안합니다.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76121

2010년 1월 4일 월요일

[단상] 그림으로 보는 신문 인터넷 편집 비교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8/06/28)


(그림을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좌상부터 시계 방향으로 한겨레, 조선, 경향, 오마이뉴스, 중앙, 동아입니다. 같은 이슈를 두고 이렇게 다르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2010년 1월 3일 일요일

[수필] 컴퓨터와 인터넷과의 만남

1. 컴퓨터와 만나다.

제가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처음 접해본 것이 학부 4학년 겨울방학 때 학교에서 개설한 포트란 강좌를 들었을 때였습니다. 천공기로 카드에 구멍을 내어 제출하면 큰 출력지에 결과가 프린트되어 나오는 것이 매우 신기하더군요. 포트란 프로그래밍에 재미를 붙여서 강좌 마지막에는 같이 수강한 친구들과 만능 달력을 누가 더 짧게 짜는지 경쟁하기도 했죠. ^^

그다음에 컴퓨터를 구경한 것이 1987년에 박사과정 유학을 갔을 때였습니다. 옆의 사진과 같은 IBM PC 사용법을 가르쳐 주더군요. 8086 혹은 8088 CPU에 도스 디스켓을 넣어서 부팅하는 초기 PC였습니다. 집에 PC를 장만한 것이 1988년이었습니다. 그때 이미 80286을 거쳐서 80386도 나왔는데, 286과 386의 짬뽕 보급형인 386SX를 거금을 들여서 장만했었습니다. 유학생이 간이 부었었죠. 그 PC를 사게 된 동기는 아내가 전공을 바꾸면서 집에서 메인 프레임에 접속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공부하려니 꼭 필요했던 것이죠. 그런데 아내 공부보다는 제 장난감으로 더 많이 이용했던 것 같습니다. 한 때는 프로그래밍을 정식으로 배워볼까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는데, 그렇게 하면 이것도 저것도 안 될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ㅋ

제가 공부한 로체스터 정치학과는 경제학에 가까운 정치학을 주로 가르쳤습니다. 제 학위논문에 게임이론을 심각하게 적용했기 때문에 수식이 많아서 보통 워드프로세서로는 작성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공계 학생들이 사용하는 LATEX으로 논문을 썼습니다. 정치학 학위논문이지만 수식과 증명이 1/3 정도 됩니다. 주로 좌변과 우변 크기를 비교하는 간단한 수식이지만, 수식은 수식이라서 복잡했죠. ^^

컴퓨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제가 더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정치학을 공부하다 보면 이 주장도 맞는 것 같고, 저 이야기도 맞는 것 같아서 허무하게 느낄 때가 잦습니다. 애매모호한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죠. 그것이 정치학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 반면에 컴퓨터와 놀면 입력과 출력이 딱딱 맞아떨어져서 명쾌한 기분이 들죠. 출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찾아서 해결하면 되니 책임 소재도 분명한 편이고요.

2. 인터넷과 만나다.

그런 장점에 인터넷까지 더하면 금상첨화가 되죠. 1994년에 첫 직장인 미시간 주립대에 부임하니 당시로는 최고급 PC와 커다란 모니터가 제 책상에 덩그렇게 놓여 있더군요. 좋은 장난감이 하늘에서 떨어졌던 것이죠. WWW라는 것이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인터넷 바다를 누볐습니다. 그때부터 인터넷 소통에 눈을 뜨게 되었고, 1995년에는 본격적으로 인터넷 토론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개인 홈페이지도 그때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인터넷 BBS가 처음 도입된 것이 제가 알기로 1991년이었습니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KAIST의 아라 BBS와 서울대와 KAIST 이공계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통신의 무료 서버에 개설한 KIDS(Korea Internet Dream Space, http://kids.kornet.net/)가 최초 BBS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우연한 기회에 KIDS를 알게 되어 가입했고 지금까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KIDS는 지금도 웹으로는 글을 올릴 수 없고, 텔넷으로 접속해서 올리는 구닥다리 방식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동호회로 운영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 같습니다.

1995년에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인터넷 신문을 테스트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자 여론광장도 만들었죠. 미시간 촌구석에서 고국 소식도 고팠고 신기하기도 해서 두 인터넷 신문의 테스트 서비스를 애용했습니다. 여론광장에서 토론도 많이 했죠. 급기야 디지털 조선일보에서 저에게 연락하여 인터넷 신문 사용소감을 적어 달라고 하더군요. 요즘 같으면 거절했을 텐데 그때는 고국 소식을 웹으로 편하게 접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기도 하여 감상문을 적어줬습니다. 디지털 조선일보 개통 축하 메시지를 제가 적었던 셈이죠. 찾아보니 그 흔적이 아직 남아 있네요. http://pr.chosun.com/digital/news_951116_1.html 끝에 제 글을 붙여 놓았군요. 종이 신문에도 실렸습니다.

3. 서울대 국제지역원 전산실과 도서관

1997년 서울대에 부임한 이후로 컴퓨터와 인터넷은 제 일상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재직하고 있던 대학원 원장실을 지나치는데 전산실 웹 매스터가 원장 PC를 붙들고 낑낑거리고 있더군요.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들여다보니 제가 고칠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고치고 있었는데, 원장이 방에 들어오면서 그 장면을 본 것입니다.

(원장) "안 교수가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직원) "교수님이 원장님 PC를 고치고 계십니다."
(원장) "아, 그래요? 안 교수가 그런 재주를 갖고 있단 말이죠..."
며칠 뒤 원장이 조용히 저를 부르더군요. 전산실 책임교수를 맡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산실에 웹 매스터 한 명과 그래픽스 디자이너 한 명, 그렇게 두 직원이 있었습니다. 원장이 책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그래픽스 디자이너를 채용했더군요. 재미있어서 신나게 일했습니다. 대학원 설립 초창기라서 학생 컴퓨터실도 만들어야 했고, 학교 홈페이지도 구축해야 해서 일이 많았죠.

조금 지나니 원장이 저를 또 불렀습니다. 이번에는 도서관도 함께 맡으라고 했습니다. 도서관에는 사서가 세 명 있었고, 디지털 도서관 구축을 계획하고 있어서 컴퓨터를 조금 아는 교수가 맡는 것이 좋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맡았습니다. 일복이 터졌었죠. 우리나라는 교수가 연구와 교육 이외에 해야 하는 잡일이 참 많더군요. ㅜ.ㅜ

조금 더 지나서 책임자급 사서도 채용하여 전산실 두 명, 도서관 네 명, 모두 여섯 명의 직원과 재미있게 일했습니다. 지금도 같이 일했던 직원 세 명이 아직 그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찾아가면 반갑게 맞아줍니다. 그때 열심히 일해준 것이 고마워서 안부인사를 그분들에게 가끔 보내죠. 제가 컴퓨터를 알아봤자 아마추어였죠. 뭘 그렇게 잘 알았겠습니까. 아는 척하면서 직원들이 신명나게 일할 수 있도록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는 것이 정확한 평가가 되겠습니다.

아무튼, 컴퓨터와 인터넷에 대한 제 개인적인 관심이 학교에서 공부할 때나 일할 때 다양한 사람과 세상을 만나게 해줬던 것 같습니다. 유익한 경험이었습니다.

2009년 10월 12일 월요일

[자유] 자유민주주의 참여의 문제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7/12, 원 제목: Culture of Negativism and Discouragement)

1. 부정(소극)적이고 좌절시키는 문화

잘 안 되는 영어이지만, 제목으로 한번 뽑아봤습니다. 제가 미국에 살고 있으니 영어도 어느 정도는 대접을 해줘야죠.^^ 제목을 번역하면 "부정(소극)적이며 좌절시키는 문화" 정도가 되겠습니다. 이 경우에 네가티브는 포지티브와 맞선 개념으로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반대편에는 "긍정(적극)적이며 격려하는 문화"가 있겠죠.

미국에서는 유턴금지 표지가 없으면 모두 유턴이 가능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유턴 표지가 있어야 유턴이 가능하더군요. 미국은 유턴이 위험한 지역이 그렇게 많지 않고, 도로 사정이 여유가 있는 편이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으므로 도로 안내판이 그렇다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유턴하는 것은 긍정의 개념이고, 유턴 안/못 하는 것은 부정의 개념이죠. 부정보다는 긍정이 좋은 것 같습니다...

(저는 성이 안씨라서 이런 불명예를 항상 달고 삽니다. 제가 "안 박사"인데요, 박사가 아니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죠.^^ 저, 박사 맞습니다.ㅜ.ㅜ 그러나, 괜찮습니다. 이임하신 국가인권위원장께서 같은 성씨이므로 완전 괜찮습니다. 조상님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안강최의 안!입니다.^^)

이 교수님께서 힘들게 사회비평 등대지기를 하실 때 좌절시키려는 사람들이 더 많을까요, 긍정적으로 격려해주는 사람들이 더 많을까요?

2. 인터넷 동호회의 가상 사례

한 인터넷 동호회에서 어떤 회원이 근거 없는 생욕과 인신공격을 받았을 때,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 상대방을 응징했다고 합시다. 그 와중에 동호회 회원들이 그 회원에게 보여준 반응은 세세하게 따지면 매우 복잡하겠죠. 사안에 관심이 없었던 회원들을 제외하면, 반응 행태는 대략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적극적 지지: 공개 글이나 사신으로 격려해준 분들입니다.
2) 소극적 지지: 마음으로는 그 회원의 뜻에 동의하나 그냥 지켜본 분들입니다.
3) 말림의 미학: 그 회원의 뜻에는 동의하지만, 그 회원 자신을 위해서 자제하라는 투로 글을 올리거나 사신을 보낸 회원들입니다.
4) 소극적 반대: 무슨 이유에서든 그 회원의 행보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침묵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5) 적극적 반대: 원래 그런 욕설이 횡행하던 곳인데 그 회원이 오버했다고 비난하든지, 아예 비슷한 욕설을 그 회원에게 해댄 인간들입니다.

그 회원이 무슨 도발을 한 것도 아니고,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아서 침해된 자신의 명예를 되찾겠다는 대의명분을 갖고 온 힘을 기울인 사람에게 이렇게 다양한 반응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3. 싫어할 자유와 좋아할 자유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사에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이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죠. 그 과정이 복잡했을 테니, 그 회원의 행보 중 일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발췌 잡공을 현란하게 뿌려서 그 회원을 탐탁지 않은 존재로 스스로 생각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 세상이니까요. 제 해석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5번은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회원을 일종의 말썽꾸러기로 본다고 간주해도 별 무리가 없죠. 1번의 경우는 그 회원에게는 가장 소중한 분들이고, 동지가 된 경우입니다. 만약 그 회원이 인터넷 소통에서 맞대응 전략(Tit-for-Tat)에 준하는 상호작용을 유지했다면, 그런 분들이 격려의 글/사신을 올리거나/보내왔을 때 반드시 화답했을 것입니다. 상호협력을 유지하자는 것이죠.

4. 귀차니즘, 점자니즘, 그리고 말림의 미학

2번, 3번, 4번 유형은 조금 분석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2번과 4번은 제법 줄여서 "귀차니즘" 혹은 "점자니즘"에 빠졌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남들이 알아서 해결하면 대충 따라가겠다는 회원들이죠. 귀찮게 생각하거나, 아래 것들이 까부는데 점잖은 자신들은 빠져 있겠다고 생각했을 수 있겠습니다.

3번이 상당히 재미있는 유형입니다. 건강을 염려해주시는 분, 취지는 맞는데 방법이 너무 세다는 분, 귀찮은데 그냥 대충 지나쳐주지(똘레랑스) 뭘 그렇게 혼을 내려고 하느냐는 분, 기타 등등 여러 표현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 회원으로서는 고맙죠. 대의는 바르다고 일단 동의를 해줬으니 얼마나 고마운 분들입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정중하게 감사를 드려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말리는지 그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것 같습니다. 진정으로 그 회원을 걱정해서 말리는 경우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고맙죠. 그 회원으로서는 감사해야 합니다. 예컨대,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단식을 오랫동안 했다면, 저라도 말리겠습니다. 일단 건강을 해치면 바람직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심한 경우가 아닐 때, 말리는 것이 그 회원을 행복하게 해줄지 아닐지는 똑 부르진 답이 없을 것 같습니다. 말리는 것 자체가 사실 그 회원을 별로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그 회원이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결국은 행복하기 위해서 고생하는 것인데, 관두라!라고 하면 그 회원은 맥이 팍 빠질 수도 있겠죠.

말리는 이유가 그들 자신을 위해서라든지, 게시판 전체라는 가공의 무엇을 위해서라든지면 오히려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회원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되고, 양보해서 그분들이 행복해진다면 전체 사회의 행복 총합으로서는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판단이 설 수도 있겠죠. 그 회원이 적어도 편협한 이기주의자가 아니면 가능한 얘기입니다.

5. 말리지 않을 자유

저는 이 말리는 문화에도 권위주의 유산이 일부 베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구요? 그 회원의 선호를 자신의 선호에 맞춰서 추정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 회원도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경우입니다. 상대방 타입이나 스타일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네 뜻은 옳다, 그러나 네 행복을 위해서 관두라는 식으로 얘기합니까? 그 회원의 행복을 그 회원이 더 잘 알지, 그분들이 더 잘 알겠습니까. 옛말에 야단치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는 말이 있죠. 이 예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길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말리는 미학이 아직도 팽배해 있습니다. 주위에서 살펴보십시오. 경험도 많이 해보셨을 것입니다. 말렸든지, 말림을 당했든지요. 옳다고 공감하면 그쪽에 힘을 보태는 것이 자유주의에 맞습니다. 괜히 남의 선호를 갖고 이렇게 저렇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권위주의적이죠. 만약 그런 말리는 행위가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라면, 깨끗하게 이런저런 점은 객관적으로 잘못이니 인정하라고 요청하는 것이 더 당당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올바르고 정당한 일을 하는 사람을 말리는 이들이 많은 사회에서 어떻게 제대로 된 자유민주주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올바른 방향을 그렇게 좌절시키려고 하면 힘들게 자유와 권리를 위해서 힘껏 노력하는 사람은 얼마나 실망이 클까요. 이런 식으로 말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침묵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만 있는 현상은 아닙니다. 미국의 킹 목사도 인권 운동을 할 때, 주위에서 말리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겠죠. 춘추도 그러한데, 건강을 생각하십쇼, 이런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숫자보다는, 맞다! 우리가 그것을 깜빡했다, 지금부터는 킹 목사 당신에게 힘을 보태겠다!, 이렇게 해서 링컨 기념관 앞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인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몽고메리에서 흑백차별 버스 안 타기 운동을 벌였을 때, 사람들이 동참해줬던 것이죠. 귀차니즘, 점자니즘, 말림의 미학 등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6. 말림이 비추가 될 때

자유주의에서는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거나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면, 간섭하지 말고 그냥 놔두는 것이 정답입니다. 이기적 개인주의이니까요. 그 이외는 기냐 아니냐로 입장을 분명히 정리해서 자기편이 이기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기려고 노력하는 전략은 다양합니다. 무시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방안이 될 수도 있죠. 스토커는 무시하는 것이 적절할 때도 있습니다.)

게다가 민주주의까지 그 문제에 들어오면 반드시 "참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쪽 수로 밀려서 소수파가 되고, 다수파의 입장이 전체 사회적 결정으로 확정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투표합시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독일의 정치이론가 칼 슈미트는 "정치적이라는 것(the political)"은 "적"과 "친구"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 속 뜻을 음미해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주위에 올곧은 일을 하신다는 믿음이 가는 분들이 있으면, 귀차니즘이나 점자니즘으로 소극적으로 대하는 것이나, 말림의 미학으로 좌절을 안겨주는 것이 그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줄지 한번 생각해보시죠. 제가 보기에 적어도 말림은 그분들에게는 별로 행복감을 안겨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자유주의에서 강요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화내면 자신이 또 손해거든요.^^ 남에게 무엇을 요구할 때는 권유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7. 자유민주주의적 참여: 선진국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해볼 만한 것은, 마냥 착한 바보같이 사는 것이 적절하냐는 문제입니다. 이타주의가 오히려 더 불행한 사태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나약한 이타주의는 그렇습니다. 예컨대, 최진실 사건 이후로 네티즌들이 선플달기 운동을 하죠. 아주 좋습니다. 선플이 흘러 넘치면 양화가 악화를 구축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동참하지 않는 자유인지 방종인지를 만끽하려는 사람들이 일정 수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냇물을 흐린다는 옛말이 있죠. 그런 미꾸라지는 미끄러워서 잡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노력해서 한 곳에 모여 있도록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밉다고 추어탕을 해 드시지는 마시길... 자유주의는 그런 미꾸라지도 존재 그 자체는 인정합니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그것은 간단한 모형을 사용하여 순차 게임으로 주어진 조건에서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 작년에 제가 관련 포스팅을 이미 올렸습니다. "주말, 전쟁 공부 (http://tinyurl.com/ahn-bdm)"라는 제목이었습니다. 클릭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물론 평화주의자들끼리 사는 세상에는 이타주의자도 착취당하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우습게 보이면 달려들어서 홀라당 등치려는 늑대들이 곳곳에 있는데 어쩌겠습니까. 겉으로라도 센(tough) 척해야죠. 그래야 응징이 두려워서라도 늑대들이 자제할 것 아닙니까.

자유민주주의가 발전하려면 제대로 된 "참여"가 필수적입니다. 그 참여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으면, 그 참여를 뒷받침하는 시민 정신과 문화가 성숙하지 않으면.......... 선진국, 가기 힘들걸요?

2009년 7월 30일 목요일

[단상] 인터넷과 가면 놀이

인터넷 게시판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누면 실명제 공간과 비실명제 공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실명제 공간에서는 가면 놀이가 가능하지 않죠. 그런데 비실명제 공간에서는 가면 놀이가 가능합니다. 그 공간은 다시 익명이 허용되는 곳과 허용되지 않는 곳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익명이 허용되지 않는 비실명 공간의 가면 놀이는 기껏해야 필명을 사용하는 정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가면은 실제로는 완벽한 가면이라고 할 수 없겠습니다.

인터넷 인생이 십수 년이 되다 보니 별의별 일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중에 가면 놀이와 관련된 해프닝이 생각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래전에 모 게시판에서 높은 수준의 내공을 보여주던 한 필명이 있었습니다. 항상 재미있는 글들을 많이 올려서 인기도 좋았습니다. 저는 처음에 여자 대학생 혹은 대학원생인 줄 알았습니다. 문체나 화법이 그랬거든요.

그런데 그 필자는 여자도 아니었고, 학생도 아니었습니다. 우연히 그 사실을 제가 알게 되었죠. 그 이후에 제가 발제를 해서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방법"에 대한 토론이 있었는데, 그 필자가 또 여학생인 척 글을 올렸습니다. 토론이 과열되면서 가면 뒤의 실제 인물에 대한 얘기가 오가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필자가 어느 학회의 뉴스레터에 한 수학 문제에 대한 수필을 실었는데, 대충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왔었던 모양입니다. "필자가 자주 가는 인터넷 게시판의 회원인 X가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 문제는 다음과 같이 풀 수 있다..."

그런데 그 X가 필자 자신이었다는 것이 위의 토론 과정에서 밝혀져 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X는 게시판을 자진 탈퇴하고 사라졌습니다. 가면 놀이의 씁쓸한 결말이었습니다. 가면이 가식이 되어버린 경우죠.

익명이라는 진짜 가면을 쓰게 되면 심한 경우에는 욕설이 오고가는 목불견이 생기기도 하지요. 가면도 잘 쓰면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면서 자신의 행복추구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가면은 벗겨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가면을 쓰더라도 벗겨질 경우를 염두에 두고 가면 놀이를 해야 합니다. ^^

[자유] 인터넷과 민주주의

(1996년 3월 1일에 작성한 글입니다. 현 시점에서도 유효한 내용이라서 올립니다.)

국회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원래 국회란 대의정치의 편의 기구로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국민의 뜻을 더 잘 대표할 수 있는 방편만 있으면 국회나 국회의원은 없어도 된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지금 미국에서는 현대 문명의 발전에 힘입어 모든 안건을 전 유권자가 직접 결정하자는 운동이 일각에서 일고 있다. 인터넷을 이용한 직접 투표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현재로서는 인터넷을 이용한 직접 민주주의가 대부분 국가에서 구체화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급속히 발전하는 정보 기술을 참작할 때, 가까운 장래에 "국회를 없애자!"라는 주장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날지도 모른다.

직접 민주주의가 아니더라도 인터넷은 전자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대의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믿음 중의 하나는, 더 많은 유권자가 사회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면 더 나은 결정을 가져 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에서는 대다수 여론을 최대한 존중하는 원칙을 지켜나간다. 그런데 한 사회의 크기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시민의 뜻을 어떻게 취합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반드시 생긴다. 인터넷은 그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들의 곁에 어느새 다가와 있다.

인터넷이 없던 시기에는 말로 전달하든지, 신문고를 울리든지, 투서를 하든지, 종이 신문에 독자 의견을 내든지, 방송에 나가서 하소연하든지 등등의 형식으로 시민의 뜻을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법들은 모두 여론이 전달되는 범위가 좁거나, 전달 매체에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다. 인터넷은 이런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특성이 있다. 인터넷은 광범위하며, 24시간 접근할 수 있다. 또한, 웹에서 대표적으로 구현하듯이, 인터넷은 일반 신문이나 방송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많은 시민의 의견 피력을 허용하고 있다. 따라서 인터넷을 잘만 이용한다면, 대의 정치의 가장 중요한 명제인 여론 형성과 전달에 획기적인 발전도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전자 민주주의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관계하는 모든 이의 협력과 노력이 필요하다. 근래에 주목받는 안내판 (BBS)과 인터넷 신문의 독자의견란, 혹은 포럼(뉴스 그룹)의 예를 들어 보자. 먼저,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시민은 어떤 특정 정치인이나 현안에 대해서 말하고자 할 때, 그것이 욕설이 되지 않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다. 객관적인 사실에 따라 건전한 비평이나 의견교환이 될 수 있도록, 글을 적은 후 다시 정독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아도 인터넷이 쓰레기장으로 변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타나고 있는데, 신선한 의견이 흘러 넘쳐야 할 곳에 몇몇 사람이 욕설에 가까운 표현이나, 억지 같은 논리를 펴서 대중을 피곤하게 한다면 진정한 전자 민주주의는 머나먼 일이 될 것이다.

근래에는 정치와 관련 있는 웹 페이지들을 많이 만들고 있다. 정부나 정당, 혹은 정치인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시민과 접촉을 시도할 때는, 특히 정보나 의견의 상호 교류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청와대 웹 페이지는 대통령에게 의견을 제출할 수 있도록 하는데, 만약 어떤 시민이 의견을 낸다면, 대통령이 직접 답하지는 않더라도, 담당자가 빨리 답을 해줘야 한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웹 페이지를 개설한 정당이나 후보자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가진 정보는 최대한 유권자에게 보여줘야 할 것이고, 유권자가 질의/건의한 내용에 대해서는 성심껏 답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다른 시민이 어떤 의견을 내었는지도 될 수 있으면 공개하는 것이 옳다.

인터넷은 잘만 활용하면, 국회가 없어도 괜찮은 그런 이상향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민주주의 대원칙인 대의정치를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좋은 방편이 될 것이다. 아울러서, 인터넷이 민주주의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도 연구, 검토하여 진정한 전자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2009년 7월 29일 수요일

[자유] 인터넷 소통 자유민주주의 선언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6/29)

(패러디 한번 해봤습니다.^^ 인터넷 자율정화에 대한 일반론입니다.
우리 게시판의 특정 사안을 염두에 두고 작성된 것이 아닙니다.)

인터넷 소통 자유민주주의 선언

인터넷 소통에 귀신들이 떠돌고 있다. 인터넷의 하늘에는 인신공격, 심한 욕설, 사생활 공개, 중상모략(인욕공모)의 귀신들이 아직 떠돌고 있다. 지금 네티즌은 자유와 평등을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이에 인터넷 소통 자유민주주의 선언을 하여 우리들의 자유와 평등 권리를 귀신들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을 전 네티즌에게 호소한다.

1. 자유

어떤 네티즌도 표현의 자유를 갖는다. 그러나 이 자유는 어떤 표현도 용납하는 방종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기본 가치와 권리를 부정하는 어떤 표현도 네티즌은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인욕공모로 중무장한 귀신들은 우리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면서 요술을 부리고 있다. 우리는 그 귀신들이 훼손하려는 인터넷 자유 정신을 온 몸으로 지켜야 한다.

네티즌은 준익명의 자유를 갖고 있다. 준익명 정신은 자유를 진작시키는 도구로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준익명 정신을 악용하려는 귀신들의 준동은 단호히 처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 진작의 준익명 정신이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다. 귀신들은 준익명을 악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하고 괴롭히고 있다. 이들의 준동을 막아야 인터넷 자유는 온전히 보전될 수 있다.

2. 평등

네티즌은 인터넷 서비스에 가입하면서 평등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평등은 어떤 특권도 용납하지 않는다. 귀신들은 사이비 자유를 달콤하게 속삭이면서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려고 한다. 우리가 이 귀신들을 처단하지 않으면 국가라는 괴물이 개입할 수도 있다. 그 괴물은 인터넷 밖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귀신들의 몰지각한 이기주의와 인욕공모 신공이 괴물이 쳐들어 올 빌미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귀신들이 그런 신공을 사용할 자유가 있다면 우리는 그 신공을 비판할 자유 묘법이 있다. 평등하기 때문이다.

3. 참여

"자유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본래 자유와 평등은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들에게 부여된 선물이다. 그것을 진작하려는 노력을 펼치지 않으면 귀신들의 요술 신공에 현혹되어 국개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사람이지 개가 아니다.

자유와 방종의 차이는 인터넷에서 어떻게 구분되는 것이 바람직한가? 관리자가 구분하는 것인가, 국가가 구분하는 것인가?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려는 네티즌들의 노력은 얼마나 있었는가? 방치되는 방종은 자유가 되어버린다. 방종을 비판하고 적절히 제어해야 그 때 방종과 자유가 확연히 구분된다. 그렇지 않으면 방종이 자유의 가면을 쓰고 인터넷 거리를 활보할 수 밖에 없다.

자유와 평등을 지키려는 참여가 없이 인터넷을 지키려는 것은 공짜 점심을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세상에 공짜가 없듯이, 인터넷에도 공짜는 없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네티즌의 자발적인 참여는 필수조건이다.

귀신들에게 묻는다.

너희들의 귀신 가면은 영원히 특권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귀신 너희들은 인터넷의 자유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국가라는 괴물로부터 인터넷 소통을 온전히 보존할 비책이 있는가?

전 네티즌에게 온 몸으로 호소한다.

- 인터넷 자유민주주의 깃발 아래 모두 모이자!
- 귀신들의 준동이 자유가 아니고 방종임을 온 몸으로 보여주자!
- 귀신들은 가면을 벗고 원래 모습인 인간으로 돌아오라!

인터넷의 진정한 자유인들이여 대동단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