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1997년 7월 11일, 인터넷 동호회에 올린 글입니다. 미시간주립대에서 서울대 국제지역원으로 직장을 옮긴 초기에 벌어졌던 에피소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997년이면 6.10 직선제 쟁취 민주화 항쟁 10주년이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집권 말기였죠.)
지난 어느 5월, 별로 따뜻하지 않은 새벽에 차를 몰고 정문 쪽에서 순환도로를 따라 테니스장 쪽으로 올라가는데, 일군의 학생들이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맞추어 같은 방향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앞에는 큰 깃발을 든 기수가 있었으며, 선도하는 듯한 학생도 있었다. 그 일행을 지나치면서 "아, 저 학생들이 바로 한총련 학생들이구나!"라는 생각에 미치자 차를 다시 돌릴 수밖에 없었다. 봄날이지만 기온은 쌀쌀했고, 그 일행이 왠지 힘이 없어 보였기 때문에 아침밥은 먹었는지 한번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 "학생들 지금 어디로 가는가요? 저는 여기 근무하고 있어요."
학생: "기숙사 쪽으로 갑니다."
나: "학생들, 아침식사는 했나요?"
학생: "나중에 도시락으로 식사하기로 되어 있어요."
"밥은 굶지 말고 하세요..."라는 인사말을 던지고 내 방에 돌아와서 앉아 있으니 계속 그 학생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커피를 한 포트 타고, 일회용 컵을 준비해서 그 학생들이 우리 건물 앞을 지나가기를 기다렸는데, 지나갈 시간이 되어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궁금해서 다시 차를 타고 기숙사 쪽으로 가니 그 일행들이 후문 방향으로 내려가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아마도 경영대 쪽으로 해서 지름길로 지나갔었던 것 같다. 나는 다시 차를 세우고 이번에는 선도하는 학생과 정식으로 인사를 하였다. 내 명함을 주고 혹시 지도부 사람 중 시간이 있는 학생은 연락해서 같이 이야기하면 좋겠다는 나의 뜻을 전달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학생 왈, "모두 매우 바빠서요..."
"몹시 바쁜 사람은 빼고, 조금 덜 바쁜 사람이면 좋겠어요."라고 나는 말하였다.
아침식사를 간단한 우동으로 때우려고 정문 가게로 갔는데, 아쉽게도 아직 열리지 않고 있었다. 일전에 그 아저씨와 나눈 대화가 인상 깊어서 가락국수나 먹으면서 다시 이야기나 나누려고 갔었는데(그 아저씨는 서울대 학생들에 대한 인상을 나름대로 강하게 나에게 표현한 적이 있었고, 그때 "과도한 일반화"를 나는 생각했었다.), 우동은 먹지 못했고 "충북총련", "충남총련"이라는 큰 깃발을 앞세운 다른 학생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호기심에 학생들이 외치는 구호를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었는데, 가장 많이 외치는 구호가 "김영삼 정권 타도하자!"였었다. 장난기가 생긴 나는 선창하는 학생에게, "이미 타도되기로 되어 있는 정권을 뭐 하려고 또 타도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선창한 학생: "적당히 외칠 구호가 모자라서요..."
나는 상당히 쇼크를 받았지만, 그래도 지도부 중 한 명과 대화를 하고 싶어서 다시 명함을 주고 똑같은 부탁을 하였다. 다른 한 그룹은 군대식 구호를 연습하고 있었는데, 짧은 나의 군대생활이 연상되는 그런 장면이었다. 삼세 번이라는 생각에 또 나의 명함을 주고 그 그룹의 선도학생에게도 같은 부탁을 하였다.
6월 25일 내가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한총련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 내 방에는 24시간 대기 중인 응답기도 놓여 있는데, 한총련이나 관련 학생이 전화메모를 남긴 적도 없었다.
하나의 가능성: 나의 청이 지도부에 전달되었지만, 지도부가 너무 바빠서 무시했다.
---> 지도부가 성의가 없는 것은 아닌지?
다른 가능성: 그 세 명의 학생들이 모두 내 명함을 분실하였다.
---> 한총련 구성원들의 자질을 의심하면 내가 너무 한 것인지?
또 다른 가능성: 그 세 명의 학생들 모두 나의 뜻을 전달하지 않았다.
---> 나를 귀찮게 생각한 것인지?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제는 내가 지도부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하나...? 그 정도로 한총련에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닌데..... 이제는 연락이 와도 만나주지 않아야 하나...? 그러면 속 좁은 사람의 전형이 될 테니 귀국해서 연락이 오면 만나기는 만나야 될 것 같은데... 그래서 주체사상에 대해서 한 번 토론해 보고 싶은데... 절대적으로 옳고 좋은 사상이
있을 수 있는지, 인간을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 자유민주주의와 집체주의는 어떻게 다른지 등등에 대해서 의견교환을 한번 하고 싶은데... 공개된 장소가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후기: 이 글을 올리고 나서 대학원생 한 명과 제법 심각한 토론을 했습니다. 그 대학원생의 주장은 한총련 학생들이 연락하지 않은 것은 결국 우리나라의 교수-학생 관계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학원생이 수강했던 강의에서 담당 교수가 한총련 학생이 있으면 손들어 보라고 했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은 사례를 제시했습니다. 한총련 학생이 있었는데도 손을 들지 않았다는 것이죠. 교수와 이야기하는 것은 벽과 대화하는 것과 같다고 인식하는 것을 토론 중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 경험은 그 교수 사례와는 다른 것이라고 설명하고, 시대가 바뀌고 있으므로 학생운동도 방향을 잘 탐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토론 마지막 글에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냈습니다.
"저는 학생운동도 '상당히 머리를 잘 써야' 일반 시민으로부터 호응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시대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문민독재'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5공 때의 독재'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면이 많습니다. 완전히 구분된다는 뜻이 아니고요. 또, 학생운동의 근본이념이 '자유민주주의'가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보는 편입니다."
그 당시 일부 학생들이 북한의 주체사상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혹시 우리 도덕/윤리 교육이 일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동체"라는 일종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이 주체사상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도덕/윤리 교육이 공동체 개념을 토대로 이뤄졌습니다. 뫼비우스의 띠라고나 할까요...
대학에 들어와서 맨 처음 들었던 수업에서..
답글삭제'오로지 직선적인 발전, 근대성만이 대부분의 것들을 관통하고, 공동체 개념 속에 깊숙히 매몰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패러다임은 일제의 패러다임과 유사한 점이 많다.'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갓 대학 들어온 어린 마음(?)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공동체 개념...' 설레임 속에 들어가서 약간의 충격 속에 나왔던 제 사상 첫 대학수업이 갑자기 기억이 납니다
^^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는 90년대 말에 한총련으로부터 탈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ㅋ
요즈음 학교 소식을 말씀드리면 최근 일은 아니지만
답글삭제이번 시국선언을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함에 있어 총학생회는 학생들을 대표할 자격이 없다고 판단(최근 일어났던 도덕성 시비), 학생들 대표들끼리 모여서 시국선언문을 만들었습니다.
NL계열(정확히 말하면 민노당 학생위원회에서 출발한 반독재투쟁위원회)에서 그 선언문에 PSI반대를 은근슬쩍 끼워넣을려다가 다른 학우들의 반발에 부딪혀 결국에 뺐습니다. ㅋㅋ
SapereAude님 의견에 감사합니다. 학생회나 학생 대표들이 사회 현안에 대해서 의견을 발표할 때는 더 조심해야겠죠. 중도 입장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답글삭제그 수업을 어느 분이 하셨는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최병택 강사님이셨습니다. 수업 제목은 '한국의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자신의 입장이 기존 역사학계에서는 '이단시'되는 입장이라고 말씀하셨었던 기억이 납니다.
답글삭제2007학년도 1학기 수업 내내 한국의 맹목적 발전 추구의 위험성과 권위주의적 문화, 진정한 민중의 행복보다는 이데올로기가 앞서있는 일직선적 문화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었습니다.
마지막 수업 시간에 하셨던 말씀이... '여기 학생들이면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뭔가를 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갈텐데, 이 수업에서 배웠던 다른 것은 다 잊어먹더라도 항상 일직선적인 맹목적 발전 추구에만 빠지지 말고 자리에 멈춰져서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지식인이 되기 바랍니다.'였습니다.
저도 뭔가에 빠지면 거기에 지나치게 매몰되는 경향이 있어서 종종 섣부른 확신을 가지거나 근대의 신화 내지는 맹신에 종종 빠지는데요.. 그 때마다 이 수업을 들으면서 받았던 충격을 기억하며 잘못된 것은 없는지 둘러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
아주 훌륭한 문제의식인 것 같습니다. 자유민주주의적 사고방식으로 보입니다. 저도 그 강의를 들었으면 많이 배웠을 텐데요,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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