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Notice) | 방 명 록 (GuestBoard)

레이블이 집체주의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집체주의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09년 10월 9일 금요일

[자유] 룻쏘 일병 구하기

(올해 7월 초에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이 부재중이셔서 제가 임시로 운영보조를 맡고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 제 활동에 대한 자평과 함께 게시판의 상황을 자유주의 꽃밭으로 평가했습니다. 룻쏘를 활용하여 게시판 개선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를 살펴보았지만,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평등을 보충하는 데 룻쏘를 활용했음을 설명했습니다. 또한, 집체주의에서는 정치적 조작으로 새로운 세상을 고안하는데 룻쏘를 원용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간략하게 설명했습니다. 2009/07/08, 원 제목: 게시판 평가 및 룻쏘 일병 구하기)

(1) 게시판 운영자의 권한은?

주어진 권한을 행사하지 않는 것도 어쩌면 “방종”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지금 임시 “대빵?”^^인 데요, 그렇다면 어떤 권한을 제가 갖고 있을까요? 무소불위의 권한일까요? 하루에 글을 10개나 올려서 도배해도 괜찮은 권한일까요? 이 점을 알아내려면 지금까지 교수님께서 어떻게 이 게시판을 운영하셨는지 참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제가 이 게시판에 처음 등장했던 작년 2월에는 회원제가 아니었죠. 실명이든, 필명이든 마음대로(자유) 골라서 써넣은 다음, 글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아주 이상적인 자유 세상의 틀이었습니다. 그렇게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회원 가입의 귀찮은 과정도 없이, 우연히 들렀다가 필이 팍 꽂혀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올리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좋은” 글은 많으면 많을수록 이 게시판의 효용이 올라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평화로운 세상이 어느 순간 깨어졌단 말씀입니다. 따라서 교수님께서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하시고, 전격적으로 회원제를 도입하셨습니다.

(2) 룻쏘 살리기 (병 주고 약 주기?)

룻쏘가 억울할 수도 있기 때문에 룻쏘를 약간 구명하고자 합니다.^^ 사상가들은 말을 많이 쏟아 놓기 때문에 발췌 신공을 적절히 활용하면 친구가 되었다, 적이 되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회원제 이전과 이후를 나눠보시죠. 보는 시각에 따라서 이전이 더 아름다워 보일 수 있고, 그 이후가 더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지금 상태가 좋지만, 자유주의자인지 방종주의자인지는 몰라도 과거가 더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회원제 이전으로 돌아가라!”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죠?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룻쏘의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현재 상황이 옛날 자연 상태보다 여러 면에서 열등하다면, 그렇게 주장할 수 있죠.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자연 상태로 돌아가면, 홉스가 등장합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될 가능성을 홉스가 제기할 것입니다. 그래서 홉스의 주장을 따라서 이번에는 사회 계약으로 국가를 만들면, 큰 칼을 든 괴물이 한 명 등장하는 것이죠. 그 괴물이 플라톤의 철인 왕이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네로나 히틀러라면, 어머나, 어머나, 어쩌나, 어쩌나가 됩니다.

(3) 룻쏘의 재해석 및 활용

따라서 룻쏘의 “돌아가라!”라는 이야기를 잘 해석해야 합니다. 룻쏘가 관찰하기에 자신이 살고 있었던 세상이 너무 불평등한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기분이 아주 안 좋아졌죠, 그래서 일종의 강조법을 사용합니다. 이럴 바에야 그 옛날 자연 상태가 더 좋으니 그 정신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입니다. 더욱 평등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었죠.

룻쏘의 이런 피맺힌 고언은 후대 사람의 입장에서는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사람이 냉정하고 (경제학적으로) 합리적이라서, 그 주장을 이기적으로, 자기 입맛대로 갖다 붙입니다. 크게 두 진영이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집체주의 진영입니다. 민주주의 진영에서는 자본주의를 수정, 보완하는 데 룻쏘를 끌어다 활용합니다. 복지도 강화하고, 부자들에게 세금도 더 때리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명시적 보호도 보충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이죠. 그 결과가 현재의 북유럽 나라들의 모습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것도 무슨 이타적인 행위의 결과가 아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수를 이루는 민중들이(1인 1표로) 갈아엎을 가능성이 농후하니까, 힘에 밀려서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룻쏘가 이 부분에서는 공을 크게 세웠습니다. 인정합니다. 고마워요, 룻쏘!

(4) 한편 다른 진영에서는...

집체주의 진영은 룻쏘를 활용하여 가공의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크게 보면 파시즘 쪽이 있고, 처음에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적으로 집체주의에 빠지게 된 사회주의/공산주의 쪽이 있습니다. 라이커 교수님이 룻쏘를 비판하는 것은 이 부분이라는 것은 금방 눈치채시겠죠?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의 끝을 단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그 정치 이념의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인간들에 의해서 정치 질서는 바뀔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반면에 공산주의는 역사의 끝을 상정합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완성되어서 인간 소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상태가 공산주의가 말하는 역사의 종착점입니다. 이 포인트가 바로 칼 포퍼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핵심입니다. 역사의 끝이 어디 있노?라고 되묻는 것입니다. 아주 적절한 문제제기입니다. 공산주의 비판을 하려면 포퍼식으로 하는 것이 제대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공산주의를 무슨 피 빨아 먹는 요괴로 그리면, 권위주의 때문에 생각이 굳은 상태에서는 머리에 쏙쏙 들어가지만, 나중에 자아를 다시 깨닫고, 자유를 제대로 고민하게 되면, “빨갱이?” 그것 조금 이상하네... 이렇게 됩니다. 실상을 알고 나서는 반작용으로 오히려 자발적 공산주의자가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그런 것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죠. 머릿속에서만 공산주의자라면, 태클을 걸 수도 없고, 걸 필요도 없죠.

(5) 그래도 지구는 돈다?

어떤 사람은 역사의 끝이 있다!라고 외칠 수도 있겠습니다. 핼리인지 섈리인지 혜성처럼 큰 덩어리가 지구를 꽝 치면, 그것이 역사의 끝이다!라고 그 증거를 갖다댑니다.^^ 누가 그것을 모릅니까?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죠.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정치 질서를 따지고 있죠. 이 말도 어디서 많이 들어봤네요.

(6) 히레스쎄티션과 정치적 조작

링컨이 말 하나는 참 잘했습니다. 그래서 라이커 교수님이 링컨을 Heresthetician 최고봉 중 한 명으로 칭찬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히레스쎄티션... 저도 이 괴이한 단어를 정학하게 발음할 자신이 없습니다. 라이커 교수님이 직접 발음하시는 것을 강의 시간에 들어봤지만, 들어서 모두 따라 할 수 있다면 세상에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의제 설정을 통하여 정치적 조작을 잘하는 사람을 히레스쎄티션(?)이라고 라이커 교수님이 정의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수사(설득)에 능한 사람이 아니고요, 무슨 말을 해서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는(유리한 전략적 상황을 도출) 일종의 전략가입니다. 영어 사전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교수님이 그리스 어를 참조하여 만드셨거든요. 히레스쎄티션이 보여주는 정치적 조작술을 Heresthetic이라고 합니다. 발음 한번 시도해보시길... 저는 싫네요. 이 단어 한번 발음하고 나면 제 영어실력에 대해서 회의가 왕창 듭니다.^^

마르크스는 나름대로 훌륭한 수사를 구사했지만, 정치 조작가는 아니었죠. 마르크스를 활용하여 정치 조작가로 성공한 대표적인 사람이 레닌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7) 원위치!

또 삼천포로 빠졌습니다. (저는 삼천포와 어떤 감정 관계도 없습니다. 사람이 쓰기에 그냥 따라서 썼습니다. 삼천포 출신들의 양해 바랍니다.^^) 제가 하려던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기억이 어렴풋해서 방금 스크롤 하여 위에 올라갔다 다시 왔습니다.^^

(8) 자유주의 꽃밭, 이 교수님 게시판

따라서 룻쏘를 이 교수님 게시판 개선에 긍정적으로 활용하려고 해도, 이전의 비회원제 상태로 돌아가서, 다시 홉스가 등장하는 순환을 거듭하면 당연히 안 되겠죠. 제가 보기에 별로 개선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 현재 상태가 이상형은 아니지만(현실에 이상형은 구현 불가능에 가깝죠), 매우 바람직한 상태로 운영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의 제도로 최대한의 자유주의적 자율이 이뤄지고 있다고 봅니다. 준 익명도 허용되고 있죠.

교수님께서 홈피 주인으로서 권한을 과하게, 아니죠, 보통 이상으로 행사하시는 것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일전에 방종의 느낌을 진하게 주는 어느 회원의 글을 삭제하실 때도 노심초사에 노심초사를 거듭하셨죠. 그리고 최종결정을 하시기 전에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이상적인 것은 아니지만(자진 삭제가 아니므로), 개인 홈피 주인으로서 당연히 그런 권한을 갖고 계시고, 그렇게 하셔야 되는 시점이라고 의견을 드렸습니다. 또 다른 분들의 의견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다음에 다른 수단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시고, 그 회원에게 제재를 가하신 것이죠. 결과는 평화였습니다.

자유주의, 어디 멀리서 찾으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있는 이 공간이 자유주의를 제대로 하는, 교수님께서 공들여 가꾸고 계시는 사회대 옆 화초 텃밭과 같은 곳입니다. 게시판 모든 분의 자율적인 “참여”와 교수님의 탁월한 감각으로 이런 행복을 이뤄냈다고 생각합니다.

(9) 스스로 평가

제가 운영자를 임시로 맡은 약 열흘 동안의 행보를 교수님의 평소 운영과 스스로 비교해볼 때, 약간의 방종 기미가 있다는 자책인지, 자학인지가 조금 들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열흘 동안 매일 이런 장문을 올리신 적은 없잖아요.^^ 교수님께서 일일이 댓글에 코멘트를 해주시는 것은 제가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들의 홍수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ㅜ.ㅜ 이 점에서 저는 약간의 방종을 저질렀다는 의혹을 스스로 생각해볼 수가 있겠습니다. 아직 어느 회원분도 명시적으로 제 행보를 방종끼(?)가 있는데...라고 제기하신 분이 없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격려를 많이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종 판정은 교수님께서 내려주실 것 같습니다.^^

(10) 드리고 싶은 질문

제가 서울에 들어가서(빨리 들어가고 싶어서 짬만 나면 열공 중입니다^^) OO 씨와 약속한 집담회에 서게 되면, 간단한 인사를 드리고 다음과 같은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저도 자유인이고, 여러분도 자유인입니다.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제가 커밍아웃하는 것으로, 보는 시각에 따라서 제 사생활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저에게 들으신 이야기는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제가 드린 말씀을 옮기는 자유를 만끽한다면, 그 사람의 행위는 방종인가요, 자유인가요? 그것이 오늘의 질문입니다. 정답이 없습니다. 각자 입장대로 주장하면 그것이 정답입니다. 자유민주주의에는 절대적 잣대는 없습니다. 상대적 줄자만 있습니다.^^ 단, 적절한 근거는 있어야겠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이틀 정도 이 문제를 갖고 고민을 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의견을 참조하면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기적인 마음에, 이렇게 장문의 글도 적고 끝에 부탁도 드리고 있습니다. 공짜는 없으니까요. 도와주세요. 꾸벅~ (부탁할 때는 비굴 모드라고 있습니다. 굴비 사촌이죠.^^) //

2009년 8월 27일 목요일

[자유] 한총련 이야기

사진: 한총련 출범식, <한겨레 신문>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1997년 7월 11일, 인터넷 동호회에 올린 글입니다. 미시간주립대에서 서울대 국제지역원으로 직장을 옮긴 초기에 벌어졌던 에피소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997년이면 6.10 직선제 쟁취 민주화 항쟁 10주년이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집권 말기였죠.)

지난 어느 5월, 별로 따뜻하지 않은 새벽에 차를 몰고 정문 쪽에서 순환도로를 따라 테니스장 쪽으로 올라가는데, 일군의 학생들이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맞추어 같은 방향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앞에는 큰 깃발을 든 기수가 있었으며, 선도하는 듯한 학생도 있었다. 그 일행을 지나치면서 "아, 저 학생들이 바로 한총련 학생들이구나!"라는 생각에 미치자 차를 다시 돌릴 수밖에 없었다. 봄날이지만 기온은 쌀쌀했고, 그 일행이 왠지 힘이 없어 보였기 때문에 아침밥은 먹었는지 한번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 "학생들 지금 어디로 가는가요? 저는 여기 근무하고 있어요."
학생: "기숙사 쪽으로 갑니다."

나: "학생들, 아침식사는 했나요?"
학생: "나중에 도시락으로 식사하기로 되어 있어요."

"밥은 굶지 말고 하세요..."라는 인사말을 던지고 내 방에 돌아와서 앉아 있으니 계속 그 학생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커피를 한 포트 타고, 일회용 컵을 준비해서 그 학생들이 우리 건물 앞을 지나가기를 기다렸는데, 지나갈 시간이 되어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궁금해서 다시 차를 타고 기숙사 쪽으로 가니 그 일행들이 후문 방향으로 내려가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아마도 경영대 쪽으로 해서 지름길로 지나갔었던 것 같다. 나는 다시 차를 세우고 이번에는 선도하는 학생과 정식으로 인사를 하였다. 내 명함을 주고 혹시 지도부 사람 중 시간이 있는 학생은 연락해서 같이 이야기하면 좋겠다는 나의 뜻을 전달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학생 왈, "모두 매우 바빠서요..."
"몹시 바쁜 사람은 빼고, 조금 덜 바쁜 사람이면 좋겠어요."라고 나는 말하였다.

아침식사를 간단한 우동으로 때우려고 정문 가게로 갔는데, 아쉽게도 아직 열리지 않고 있었다. 일전에 그 아저씨와 나눈 대화가 인상 깊어서 가락국수나 먹으면서 다시 이야기나 나누려고 갔었는데(그 아저씨는 서울대 학생들에 대한 인상을 나름대로 강하게 나에게 표현한 적이 있었고, 그때 "과도한 일반화"를 나는 생각했었다.), 우동은 먹지 못했고 "충북총련", "충남총련"이라는 큰 깃발을 앞세운 다른 학생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호기심에 학생들이 외치는 구호를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었는데, 가장 많이 외치는 구호가 "김영삼 정권 타도하자!"였었다. 장난기가 생긴 나는 선창하는 학생에게, "이미 타도되기로 되어 있는 정권을 뭐 하려고 또 타도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선창한 학생: "적당히 외칠 구호가 모자라서요..."

나는 상당히 쇼크를 받았지만, 그래도 지도부 중 한 명과 대화를 하고 싶어서 다시 명함을 주고 똑같은 부탁을 하였다. 다른 한 그룹은 군대식 구호를 연습하고 있었는데, 짧은 나의 군대생활이 연상되는 그런 장면이었다. 삼세 번이라는 생각에 또 나의 명함을 주고 그 그룹의 선도학생에게도 같은 부탁을 하였다.

6월 25일 내가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한총련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 내 방에는 24시간 대기 중인 응답기도 놓여 있는데, 한총련이나 관련 학생이 전화메모를 남긴 적도 없었다.

하나의 가능성: 나의 청이 지도부에 전달되었지만, 지도부가 너무 바빠서 무시했다.
---> 지도부가 성의가 없는 것은 아닌지?
다른 가능성: 그 세 명의 학생들이 모두 내 명함을 분실하였다.
---> 한총련 구성원들의 자질을 의심하면 내가 너무 한 것인지?
또 다른 가능성: 그 세 명의 학생들 모두 나의 뜻을 전달하지 않았다.
---> 나를 귀찮게 생각한 것인지?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제는 내가 지도부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하나...? 그 정도로 한총련에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닌데..... 이제는 연락이 와도 만나주지 않아야 하나...? 그러면 속 좁은 사람의 전형이 될 테니 귀국해서 연락이 오면 만나기는 만나야 될 것 같은데... 그래서 주체사상에 대해서 한 번 토론해 보고 싶은데... 절대적으로 옳고 좋은 사상이
있을 수 있는지, 인간을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 자유민주주의와 집체주의는 어떻게 다른지 등등에 대해서 의견교환을 한번 하고 싶은데... 공개된 장소가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후기: 이 글을 올리고 나서 대학원생 한 명과 제법 심각한 토론을 했습니다. 그 대학원생의 주장은 한총련 학생들이 연락하지 않은 것은 결국 우리나라의 교수-학생 관계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학원생이 수강했던 강의에서 담당 교수가 한총련 학생이 있으면 손들어 보라고 했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은 사례를 제시했습니다. 한총련 학생이 있었는데도 손을 들지 않았다는 것이죠. 교수와 이야기하는 것은 벽과 대화하는 것과 같다고 인식하는 것을 토론 중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 경험은 그 교수 사례와는 다른 것이라고 설명하고, 시대가 바뀌고 있으므로 학생운동도 방향을 잘 탐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토론 마지막 글에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냈습니다.

"저는 학생운동도 '상당히 머리를 잘 써야' 일반 시민으로부터 호응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시대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문민독재'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5공 때의 독재'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면이 많습니다. 완전히 구분된다는 뜻이 아니고요. 또, 학생운동의 근본이념이 '자유민주주의'가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보는 편입니다."

그 당시 일부 학생들이 북한의 주체사상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혹시 우리 도덕/윤리 교육이 일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동체"라는 일종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이 주체사상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도덕/윤리 교육이 공동체 개념을 토대로 이뤄졌습니다. 뫼비우스의 띠라고나 할까요...

2009년 8월 2일 일요일

[자유, 공개서한] 교육과학기술부 장관님께

교육과학기술부 장관님께,

우리나라 교육에 불철주야 고생하시는 장관님께 안부 인사드립니다. 저는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대한민국 국민 안병길입니다. 우리나라 도덕/윤리 교육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리고자 이렇게 공개서한을 띄웁니다.

저는 현재 <자유민주주의 바로 알기: 인터넷 자유민주주의 선언>이라는 잠정제목으로 책을 적고 있습니다. 지금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서 이번 주말이면 전체 초고가 나올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우리나라 지인에게 부탁한 초등, 중등, 고등학교 도덕과 윤리 교과서를 받았습니다. 그 내용을 확인한 결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개념 설명이 우리 교과서에 매우 부족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초등학교 6학년 도덕 교과서(지학사 출판)에 자유와 권리라는 단어가 딱 두 번 나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똑같이 존중받아야 할 자유와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마다 자기의 자유와 권리만을 주장하면, 사회는 무질서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무질서를 바로잡고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법과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

이 부분을 제외하고,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은 초등학교 6학년 도덕 교과서에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를 인용하는데,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원리나 개념 설명이 아니고, 애국심과 준법정신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다른 내용 대부분은 "공동체 의식"을 부추기는 설명이었습니다.

위에 인용한 부분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대한민국 헌법에 대못을 박아놓은 자유민주주의 이념에서 자유와 권리는 가장 중요한 기초인 핵심 개념입니다. 따라서 자유와 권리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때 자유는 방종이 아니며, 권리는 남용 혹은 오용된 권리가 아닌 정당한 권리입니다. 헌법에 명시한 그 자유와 권리입니다. 역사상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미국 독립전쟁,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인권운동, 3.1 운동, 4.19 민주혁명, 한국전쟁, 그리고 우리 민주화 투쟁 등입니다.

이런 기초를 먼저 설명하고, 방종과 적절치 않은 권리 주장을 설명해야 하는데, 초등학교 6학년 도덕 교과서는 마치 자유와 권리 주장이 사회불안의 요인인 것처럼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유와 방종을 어떻게 구분하는지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국가를 위해서 악법도 지키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헌법에는 국가의 주인이 국민임을 명기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게 해로운 법이 자신에게 이롭고, 또 그것을 지키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이율배반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분위기는 중등학교 3학년 도덕 교과서(지학사 출판)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자유와 민주의 근본 원리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고, 공동체 혹은 유교적 질서 개념을 원용한 도덕 설명이 대부분입니다. 심지어 196쪽부터 3쪽에 걸쳐서 루소(Rousseau)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많은 정치학자는 과거 소련이나 현재 북한과 같은 집체주의(Populism)의 연원을 제공한 사상가로 루소를 평가합니다. 자유민주주의 사상가로 더 중요한 위치를 인정받는 홉스, 로크, 죤 스튜어트 밀, 벤자민 프랭클린도 있는데 말입니다. 조금 심하게 평가하자면, 도가 지나쳐서 북한의 주체사상을 교과서에서 가르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고등학교 시민 윤리 교과서(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정도서 편찬 위원회)는 그래도 조금 낫습니다.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 인간의 존엄성을 설명하고, 로크를 인용하고,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 독립전쟁을 소개했습니다. 136쪽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자유 민주주의 질서는 권위주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실현되었다."라고 제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유와 권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로크와 밀도 적절하게 인용했습니다. "국가의 가치는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의 가치에 있으며, 개인을 경시하는 국가는 존립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137쪽)"

그러나 시민 윤리 교과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어는 공동선, 시민 공동체, 국가 공동체, 운명 공동체, 민족 공동체 등으로 "공동체"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칼 포퍼나 윌리엄 라이커 등 많은 정치학자가 집체주의(Populism, 전체주의와 공산주의)로 연결될 수 있는 위험한 개념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들이 루소를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교과서에는 공동선이나 공동체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없습니다. 그냥 좋은 것으로 대충 상정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허상이면, 교과서 전체의 맥락이 무너집니다. 경제학과 정치학에서 자유민주주의 공동체는 허상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명제가 논리적으로 증명되어 있습니다. 애로우 교수의 불가능성 정리입니다. 그 정리를 증명하여 애로우 교수는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대로, 우리 국가의 대국민 자유민주주의 교육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고, 내용도 매우 부실하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이기적 개인주의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과서는 이타주의와 공동체를 강조합니다. 건전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자유민주주의를 활성화하는 데 매우 중요한 토양이라는 설명을 교과서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애매모호한 공동체 잣대를 들이밀면서, 착하게, 바르게, 관용하면서, 전체를 위해서 살 것을 가르칩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려면, "공동체를 위해서!"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사회 집단이 일정 범위를 넘어서면, 루소가 주장하는 그런 공동체는 흔히 볼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이 아닙니다. 종교에는 있습니다. 가족도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그만 시나 읍 정도만 되어도 그것을 공동체로 보기 어려울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교과서는 공동체와 공동선을 줄기차게 가르칩니다.

교과서가 주장한 윤리적 내용은 건전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에서 출발한 자유민주주의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매우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자유와 방종은 저항 개념으로 구분할 수 있고, 자유와 자유가 맞부딪히면 권리에 대한 제한이 생긴다는 식으로 매우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애매모호한 가상의 공동체는 필요 없는 개념입니다. 오히려 권위주의 분위기를 조장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 선진국이 되려면, 우리 국가는 자유민주주의 대국민 교육 내용을 반드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된 교육으로, 시민이 자율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더 성숙시키는 쪽으로 교육 방향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관님은 우리 도덕/윤리 교과서가 권위주의 내용을 버리고, 자유민주주의 내용을 더 포함하도록 고치실 의향은 없습니까? 이 공개질의에 장관님이 공개 답변해주실 것을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장관님의 건승과 우리 자유민주주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09년 8월 2일
안병길 드림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국민

(이 공개서한은 출처를 http://ahnabc.blogspot.com으로 밝히시고 마음껏 퍼가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