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Notice) | 방 명 록 (GuestBoard)

2009년 7월 29일 수요일

[정치] 공공선택으로서 국회의원 선거제도

(지금 적고 있는 책의 일부분입니다. 원 글은 2008년 4월 9일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에 올렸습니다.)

[설명] 필자는 노무현 제16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정치개혁연구실에서 상근 자문위원으로 “정치적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선방안 연구”에 참여한 바 있다. 아래 글은 그 당시 참여한 학자들이 최종적으로 합의한 개선안인 소선거구제 + 일률배분 권역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다. 제18대 총선을 맞이하여 지난 시절의 소회가 떠올라서 작성한 글이다. //

공공선택(Public Choice) 측면에서 선거는 개인 선호를 특정 사회 전체 선호로 모으는 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애로우(Kenneth Arrow) 교수의 불가능성 정리를 참조하면 이 선호 전환 과정에서 완벽한 제도를 고안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어느 특정 선거제도가 모든 점에서 우월하다는 주장을 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제도를 살펴보면 가관입니다. 간접선거에 각 주의 선거인단 획득 규칙은 승자독식(winner-takes-all)이 대부분이므로 민주주의 기본원칙을 어길 가능성이 있는 제도입니다. 제도개선 주장이 제법 있지만, 그래도 그 제도를 유지하는 것은 결국, 미국의 정치/사회/문화적 요인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선거구제와 전국단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섞인 우리나라 국회의원 선거제도도 그 나름대로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 정치의 고질적 병폐로서 흔히 언급되는 정치적 지역주의를 완화할 대안을 검토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입니다. 이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그동안 검토되었던 국회의원 선거구제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중대선거구제입니다. 지역구에서 2~5명을 선출하는 제도인데,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우리 정치적 지역주의를 완화하기에는 미흡합니다. 그 효과가 미흡함에도 채택해야 할 장점이 별로 없는 제도입니다.

둘째, 독일식 선거구제 변형입니다. 원래 독일식은 지역구와 정당명부 비례대표의 기준 정원이 1:1입니다. (이 기준은 우리 현실을 고려하여 2:1 정도로 변형시킬 수 있음.) 유권자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지역구 선출투표 한 표와 정당투표 한 표를 행사합니다. 전체 정당득표율로 각 정당의 의석수를 일단 결정하고, 각 정당이 권역별로 의석을 배분하는데, 특정 권역의 지역구 당선자 수가 권역 배당을 초과하면 그 초과분을 인정해주는 제도입니다.

예를 들어서, A 권역의 전체 기준 의석수가 40석이고, X 정당의 그 권역 지역구 당선자 수가 20명이며, X 정당의 해당 권역 배분 의석수가 15석이면(전체 정당득표에 대한 그 권역 득표의 비율로 계산), 5석의 초과의석을 인정해주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되면, 선거 전 기준의석이 40석이던 A 권역은 선거 후 전체 의석이 45석이 됩니다.

이 제도는 일단 상대적으로 복잡하며, 전체 의석수가 유동적이라는 단점이 있습니다. 또한, 정책정당이 뿌리내리지 못 하는 우리 정치를 참작할 때, 현 제도를 독일식 변형으로 송두리째 바꿀만한 제도개선 유인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지역구는 갑 정당후보, 정당투표는 을 정당 식으로 투표하는 경우가 우리나라에서는 상대적으로 많이 나오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셋째, 소선거구제 + 일률배분 권역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입니다. 전국을 서울 / 인천 경기 / 강원 / 충청 / 광주 호남 / 부산 울산 경남 / 대구 경북 / (제주), 7~8개 권역으로 나눠서 권역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적용합니다. 지역구 200석, 비례대표 99석으로 하며(현행 법률상 국회의원 수 상한선은 299석), 각 권역 비례대표 배분은 각 정당의 권역 내 득표율이 아닌, 전국득표율을 기준으로 하는 내용입니다.

이 방안은 이론과 현실(국민 설득, 여야합의 가능성 등)을 심층적으로 고려한 것으로서, 정치적 지역주의 완화 효과가 뚜렷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권역별 비례대표를 전국 정당득표율로 배분하는 점에서 시비가 걸릴 수 있지만, 국회의원은 국가 전체를 대표하는 헌법기관이므로, 그렇게 배분해도 괜찮습니다. 이 제도를 도입해서 우리 정치의 발목을 잡는 정치적 지역주의를 점진적으로 완화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이 교수님 게시판에 국내정치와 관련된 글은 올리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있습니다만, 오늘은 날이 날인 만큼 정치 얘기를 한번 해봤습니다. 공공선택 분야의 선거제도에 대한 의견으로 간주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토론]

[게시판 주인(이준구 교수님)] “이런 아카데믹(academic)한 글은 많이 올라오면 올수록 좋은 것 아닙니까? 비합리성(irrationality)을 발휘해 조금 전에 투표를 하고 왔습니다.”

[필자] 저는 투표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불쌍한 인생입니다. ^^ 재정학에서도 선거제도 등 공공선택을 다루는지 궁금합니다.

[게시판 주인] “공공선택은 재정학의 중요한 이슈 중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뷰캐넌(J. Buchanan) 같은 사람에게 재정학이 무엇을 연구하는 분야라고 물으면, 공공선택 문제를 연구하는 분야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회원1] 세 번째 방안이 좋아 보인다. 현실화하려면 여론의 힘이 필요한 것 같다. 이 쟁점과 관련해서 정치학계 목소리가 작은 이유가 궁금하다.

[필자] 궁극적으로 법률을 개정해야 하므로 국회의원들 목에 방울 달기가 되겠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노 전 대통령이 대연정과 연계하면서 선거구제 개편을 걸었는데, 잘못된 것이라고 본인도 인정했죠. 타이밍도 늦었고요.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주도하면 야당들이 선뜻 합의하기 어렵습니다. 국회에서 논의해서 법률개정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 국회의원들에게 기대하기도 어렵죠. 결국, 학자들과 시민사회가 여론을 일으켜서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유력한 방법일 것입니다.

그런데 선거구제는 정답이 없어서 학자나 시민사회의 한목소리를 이끌어내기가 어렵습니다. 상당수 학자와 진보 측이 독일식을 선호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현실감각이 모자랍니다. 독일식으로는 대국민 설득도 어렵고 국회 합의도 어렵습니다. 정치적 지역주의 완화 효과도 적고요. 이번 선거 결과도 결국 정치적 지역주의를 재확인한 것이니, 학자들이 우선 그 문제를 더 부각해서 선거구제 개선 여론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토론 소감] 2003년 인수위 정치개혁 연구에 필자가 뒤늦게 합류했을 때, 당선자에게 가는 1차 보고서를 독일식 변형 위주로 정리하고 있었다. 필자는 초과의석 문제를 지적하여 독일식 변형이 현실적이지 않음을 주장했다. 결국, 최종보고서에서 제1안으로 채택된 안은 세 번째 방안이다. 그 연구에 참여한 학자들도 합의하는 데 애로사항이 많았을 정도로 선거구제 개선은 힘든 작업임에 틀림없다. 선거제도 전문 학자들이 앞장서서 여론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뚜렷한 대의명분이 있기 때문에, 다른 정치적 이해와 연결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본다. 노 전 대통령은 선거구제 개선을 대연정과 연계했는데, 정치적 판단 실수였다고 필자는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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