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탓하는 것이야 인간의 기본 속성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일종의 자기방어 기제에 속한다고나 할까요. ^^ 그런데 유달리 남 탓을 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치와 관련된 분들도 그 부류에 속한다고 저는 봅니다. 언론 매체를 통해서 이 점은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는데, 실제로 만나봐도 그렇더군요.
저는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에 결선투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한번은 평소 주장해왔던 결선투표제에 대해서 여당과 야당 연구소 학자들과 따로 의견교환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 주장을 처음 대하시는 분을 위해서 그 요점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행 대선제도가 채택하는 단순 다득표제는 유효표의 과반수를 획득하지 않아도 1위 후보가 당선됩니다. 이것은 민주주의 기본 원리인 단순과반수 원칙을 어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민주적일 가능성이 큰 결선투표제를 채택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 제 주장의 핵심입니다. (참조: http://ahnabc.blogspot.com/2009/08/blog-post_4732.html)
결선투표제(일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획득하는 후보가 없으면 다득표한 두 명을 결선에 올려서 최종 당선자를 뽑는 방식)를 채택하여 기대할 수 있는 혜택으로서 여당에 대한 확실한 평가, 장기적으로는 지역주의 완화, 정당 간 연합을 거쳐서 궁극적으로는 정책대결 조장, 그리고 야당 후보의 자동 단일화가 예측됩니다. 현재 프랑스와 러시아가 대표적으로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투표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미국 대선도 단순과반수 선거인단을 1위 후보가 얻지 못하면 의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므로 결선투표제를 포함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오래전 한 저녁 모임에서 우연히 여당 연구소의 한 학자와 마주 앉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던 도중에 야당 대선후보 단일화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 학자에게 야당 후보 단일화는 결선투표만 도입하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분은 매우 진지한 태도로 설명을 모두 들은 다음 몇 가지 질문을 저에게 던졌고, 저는 성의껏 대답하였습니다. 그 여당 측 학자의 마지막 언급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장기적인 정치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논의해야 하는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다만, 현실적인 문제로 아마 야당에서 결선투표제를 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즉, 제 주장은 맞지만 현실에서 채택되기는 어려울 것인데, 그 원인은 야당 쪽에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저는 이론적으로 현행 대선제도의 문제점을 분석했던 것이지 현실적으로 결선투표제 추진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당연히 미칠 수가 없었죠. 그저 논문이나 발표하고, 다른 학자들과 토론하고, 인터넷에 글도 올려서 간접적으로 정치인들에게 이런 것도 있다고 할 수는 있었겠죠.
결국, 국회에서 정치인들이 결선투표제 도입에 합의하느냐 마느냐가 관건이 됩니다. 정치인의 이해관계도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정치에 관한 아무리 좋은 분석이라도 정치인에게 별로 이익이 되지 않으면 그 분석은 현실적으로 채택되기 매우 어렵습니다. (이럴 때 여론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정치인들이 하기 싫더라도 전체적으로 이득이 되는 제도이면 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이 여론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투표도 같은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이익만 챙기는 정치인이 있으면 다음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낙선시키는 관행이 확립되면 정치인은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유권자의 권익도 염두에 둘 것입니다.) 저와 대화를 나눈 그 학자는 결선투표제가 야당 측 정치인들의 이해관계와 어긋나므로 현실에서 채택되기 어렵다는 주장을 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이번에는 공교롭게도 야당 연구소의 한 학자와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또 우연히 대선과 야당 후보 단일화가 화젯거리가 되어서 제가 결선투표제를 그 학자에게 설명했습니다. 그분의 마지막 언급이 또한 인상적이고 흥미로웠습니다.
"아주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주장입니다. 이론상으로는 거의 하자가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현실적인 문제로 아마 여당 측이 결선투표제를 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 야당 연구소 학자의 입장은 결선투표제가 이론상으로는 옳은데 현실에는 채택하기 어려울 것이고, 그 원인은 여당 측에 있다는 주장이었지요. 어떻습니까? 두 학자의 주장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물론 두 학자가 여당과 야당의 공식 견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계의 분위기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내 탓이오, 모두 내 탓이오."가 아니고 "네 탓이오, 모두 네 탓이오."라고 주장하는 것이 정치의 본질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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