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에는 "공동체"라는 표현이 나올까요, 나오지 않을까요?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헌법학자의 설명으로는 현 헌법, 즉 1987년에 개정된 헌법이 상당히 잘 짜였다고 합니다. 6.10 직선제 쟁취 민주화 항쟁의 결과로 탄생한 헌법이 권위주의 정권에서 만들어졌지만, 상대적으로 심도 있게 연구한 결과라고 합니다. 다른 나라의 헌법도 다양하게 비교 검토했다고 하더군요. 따라서 헌법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헌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그 헌법학자는 지적했습니다. 굳이 개헌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며칠 전에 국회의장이 주도한 헌법연구회가 발표한 개헌연구 결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지 궁금합니다. 조만간 연락해서 고견을 들어봐야겠습니다.
아무튼, 우리 헌법에는 "공동체"라는 단어가 없어서 저로서는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민주는 제4조 통일조항에 명시되어 있고, 자유와 민주는 헌법 여러 곳에 대못으로 박아 놓았습니다. 즉, 자유민주 공동체라는 표현은 없고, 자유민주 대한민국이라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공동체 자유주의"라는 이상한 개념을 제시하는 정당이 있습니다. 현재 제1당인 한나라당입니다. 한나라당 정강 전문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열린 민족주의를 진작하는 공동체 자유주의의 실천이 선진화의 참된 방향임을 천명한다."
"새로운 한나라당은 이제 구각을 깨고, 공동체 자유주의와 나라 선진화의 비전을 실현하는 정책정당, 국리민복을 위해 분투하는 국민정당, 지역주의에 안주하지 않는 전국정당으로 거듭 태어난다."
한나라당은 공동체와 자유주의를 결합했습니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세일 교수가 좋아하는 개념입니다. 뭔가 있어 보이는 표현이죠. 모두를 위해서, 그리고 개인을 위해서!라는 구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개인을 위하는 자유주의가 모두를 위하는 공동체주의와 궁합이 잘 맞을까요? 자유주의는 한 명을 제외한 모든 구성원이 A를 주장해도, 그 딱 한 명이 B를 주장하면 그 자유를 존중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주의이지, 그 한 명이 나머지 모든 구성원을 위해서 자신의 주장을 굽혀야 한다는 이념이 아니죠.
이렇게 얘기하면, 한나라당에서는 그 공동체는 민주주의를 의미한다!라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에 단순과반수 원칙이라는 원리가 있습니다. 단순과반수만 충족하면 다수의 지배인 민주주의의 사회적 결정이 된다는 것이죠. 이것이 한나라당의 공동체 개념이라면 굳이 공동체라는 공룡을 정강 전문에 쓸 필요가 없죠. 그냥 "자유민주주의 실천이 선진화의 참된 방향"이라고 선언하면 됩니다. 따라서 한나라당의 공동체 자유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다른 무엇을 의미한다고 저는 봅니다. 다른 무엇? 혹시... 권위주의??? 설마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한나라당 일부 의원의 언행을 살펴보건대 한나라당에 권위주의 색채가 아직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요즘 세태에 당 전체가 권위주의를 내걸지는 못할 것입니다.
한나라당과 관련된 공동체 이야기는 내일 마무리 짓겠습니다.
그 헌법학자분 이니셜이 ㅈㅈㅅ 교수님이시죠?
답글삭제다른 거는 모르겠습니다만 굳이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면 우리 헌법 제29조 제2항 규정과 제67조에 규정되어 있는 대통령 선거에 관한 규정을 고쳐야 될 듯 싶습니다.
답글삭제뒤에 것은 교수님께서 관심을 갖고 있는 선거제도에 관한 것이고 앞에 있는 것은 국가배상제도에 관한 것입니다.
제29조 제2항이 왜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 시간이 나는데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답글삭제ㅈㅈㅅ 교수님은 개헌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국회의장이 주도한 개헌연구회의 핵심 구성원이기도 합니다.
답글삭제제가 언급한 헌법학자는 현재 중앙대 법대에 재직하고 계신 신우철 교수님입니다. 원 글에 나오는 의견은 2003, 2004년 신 교수님이 영남대에 재직하고 계실 때 제가 들었던 내용입니다. 그때 신 교수님은 굳이 개헌을 한다면 대통령 중임제 정도의 최소 범위 개헌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헌법을 세부적으로 따지면 개헌해야 할 부분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저는 대통령 중임제와 결선투표제를 명기하는 개헌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민우 씨도 나름대로 제29조에 대해서 개정의 필요성을 주장하실 수 있겠습니다. 민우 씨의 옥고를 기대합니다.
제가 가입한 인터넷 동호회에서 의견교환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그 내용입니다.
답글삭제>굉장히 철학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하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그놈의 공동체가 뭐냐는 질문은 한 발작 더 나가면 왜 사냐
>또 한 발 더 나가면 존재는 다 무엇이냐로 가기 직전의 질문인 것 같네요.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가 관심이 있는 것은 그 공동체라는 표현이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격이 될 수도 있다는 문제의식입니다. 제 문제의식이 기우이면 좋겠습니다.
저는 공동체라는 단어에서 지난 날의 국민교육헌장이나 북한의 주체사상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회원 의견) "진보신당 강령은 전남대 김상봉 교수가 기초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거기서 나오는 공동체가 요새 경향신문에서 나왔던 박명림교수와의 서신교환에서 '공화국' 논의와 연관이 있을듯이 보입니다. 철학자이신 분이라서 아마 강령모양이 그렇게 된 모양일지도 모르겠군요. 근데 '공동체'에서 그런 연상을 하시는건 좀 오버이신거 같기도 ^^;"
(제 답)
(이 의견은 OO님을 익명처리하여 제 블로그에도 올립니다.)
OO님의 의견을 읽고, 제 천학과 과문을 탓하며 경향신문의 그 시리즈 첫 글인 김상봉 교수의 글을 이제야 봤습니다. 그 글에서 김 교수는 매우 중요한 개념들을 정확한 정의 없이 사용했습니다. 국가, 나라, 공공성, 공동체, 공화국 등입니다. 나머지 글들을 모두 읽으면 김 교수가 그 개념들을 명확하게 어떤 의미에서 사용했는지 제가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 교수가 진보신당 강령 초안을 작성했다는 것은 김석준 교수에게서 들었습니다. 조만간 연락해서 주요 개념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저도 제가 오버이면 좋겠습니다. 최근에 읽은 우리나라 초중고 도덕/윤리 교과서 내용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쥐꼬리만큼 언급하면서, 공동체는 고양이만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물론 교과서에도 그놈의 공동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를 내리지 않습니다. 두루뭉술 공동체이지요. 그래서 우리 정당들의 정강이나 강령에 공동체가 그렇게 자주 등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공동체를 집단, 단체, 사회 등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가 태클을 거는 것은 그런 용도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과서나 정당의 주요 문건에서 핵심 개념으로 사용된 공동체가 문제입니다. 진보신당 강령을 읽어보시면 공동체가 핵심 개념으로 원용된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죠. 제 무지가 오버의 실마리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혹시 OO님은 진보신당 강령에 등장하는 공동체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경향신문 첫 글에 나오는 공공성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십니까?
(의견 교환이 또 있었습니다.)
답글삭제OO님의 소중한 정보 전달에 감사합니다.
제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책을 최근에 적었습니다. 초고를 끝내고 출판사를 타진하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공공"이라는 개념이 애매모호하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일부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헌법) 제37조 제2항에 나오는 공공복리라는 표현도 애매모호하다. 구체적인 표현은 다음과 같다.
'2.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여기서 “공공”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 문제는 자유주의만 들여다봐서는 도저히 풀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세상에서는 각 개인이 무엇이 “공공”인지 마음대로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공”을 정의할 수 있는 다른 도구가 필요하다. 이때 민주주의라는 자유주의의 친구가 슬쩍 등장해서 도와줄 수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또 애매한 개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이 문제는 미궁에 빠질 수도 있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예컨대 합법적으로 정당하게 큰 부자가 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부자가 강남 대치동의 큰 아파트 단지를 모두 사들여 자신이 거주하려고 대저택을 지으려고 한다고 상상해보자. 공공복리를 위해서 이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다는 것이 헌법의 규정이다. 공공이라는 것이 결국 사람의 집합인데,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이므로 민주적으로 공공을 정의할 수는 있을 것이다. 가령 국회의원선거 유권자 과반이 그 자유의 제한에 찬성한다면 공공복리에 어긋난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관련 공권력 기관이나 판사가 자기 마음대로 대충 공공을 적용한다면 기본권이 훼손될 수도 있다.
이상의 논의에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헌법에 나오는 애매한 용어로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 제한의 범위를 최소한으로 해석하여 엄정하게 적용해서 만일에 있을지도 모르는 기본권 침해를 최대한 막아야 할 것이다. 조금 주제넘지만, 법조인들이 이 점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으로 믿고 싶다. 인터넷 논객인 미네르바가 경제 예측을 한 것을 공공복리와 연결한 검찰의 주장을 기각시킨 사법부의 판단을 보건대 필자의 믿음은 근거가 있다고 본다."
김상봉 교수가 생각하는 공공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과 법을 지키는 것이 김 교수의 공화국이라는 설명이 경향신문의 두 번째 글에 있더군요. 그 주장을 강하게 뒷받침하기 위해서, 민주주의는 과두지배라든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진정한 공공이 아니라든지, 칸트의 공화국은 자유민주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든지 등의 해석을 펼쳤습니다. 김 교수가 그렇게 주장하면 그것이 공공의
사회적 정의가 될까요? 저만 해도 그런 정의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옳고, 누가 틀린 것일까요? 자유민주주의에서는 그것까지 궁극적으로 따지지 않습니다. 서로 견해가 다르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OO님이 지적하셨듯이, 김상봉 교수는 고대 민주주의와 현대 민주주의를 뒤섞어서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1인1표 평등이념을 채택한 현대 민주주의를 과두지배로 볼 수는 없습니다. 물론 특정 사례에서 민주주의의 가면을 쓴 권위주의 과두지배가 있기는 있겠죠. 우리나라의 현재 실정도 과두지배로 보기는 무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민주주의가 상대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김 교수의 머리 속에 있는 어떤 이상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해서 공화국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제 시각에서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입니다. 더 성숙한 민주 공화국이 될 수도 있고, 일시적으로 후퇴하는 민주 공화국이 될 수도 있습니다. 권위주의의 나락으로 빠질 수도 있겠죠. 저는 현 상황을 일시적인 후퇴로 봅니다.
모든 국민이 잘 먹고 잘 사는 것만큼 명확한 공공의 이익은 없다고 봅니다. 김 교수는 그것 마저 부정하더군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김 교수는 자신이 정의한 공화국 혹은 이상적 정치를 신성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자유민주주의에서는 각 개인의 머릿속 생각 자유를 제외하면 어떤 것이든 신성시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절대성을 부정하니까요.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읽어보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고 공화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내용을 잘 살펴보면 결국 현실에서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의미한다고 저는 해석합니다. 이 점은 보는 시각에 따라서 해석의 차이가 가능합니다. 김상봉 교수는 칸트가 자유민주를 부정하고 공화국을 주창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데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옳다고 정치적으로 강하게 주장하면 저는 일단 의심합니다. 권위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신 헌법도 공공성을 앞세우고, 더 발전한 자유민주주의를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우리나라를 위해서 옳은 길이라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무엇인지 애매모호한 "모두를 위한 공공과 공동체"를
앞세우면, 저는 국민교육헌장 생각이 나는 것이죠. 마르크스도 인간 소외를 궁극적으로 해소하여 자유를 만끽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르크스에서 소련의 레닌과 스탈린도 파생했고,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도 연결되어 나왔습니다. 생각해볼 만합니다.
저는 안교수님의 지적에 매우 공감합니다.
답글삭제"공동체, 공공의 이익"이라는 말이 우리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로 주로 활용되었는지 되돌아본다면 당연한 지적이라고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초중고 교과서에서 '자유'나 '민주'라는 다루는 태도를 보면 '자유'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위험성을 가르치기 위해 '자유'를 언급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주류, 또는 특권층의 자유, 자유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반영된 결과라고 봅니다. 그래서 온전히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고, 그 '자유'에 '공동체'의 족쇄를 씌워 두려는 것이구나 생각하니다.^^
ssha님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을 잘 지적해주셨습니다. 자유주의가 엄한 곳에서 엄한 사람들을 만나서 생고생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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