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서울대 경제학부 이준구 선생님께서 행태경제학 저서 <36.5도C 인간의 경제학>을 선보였습니다. 아래 글은 이 선생님 게시판에서 있었던 관련 토론의 제 의견을 정리한 것입니다. 댓글 두 개를 합치고 일부 표현을 약간 수정했습니다. 원 글: http://tinyurl.com/ljk-rational)
경제학이나 정치학의 합리적 선택이론의 특징 중 하나가 선호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말이 있죠. Preferences are given. 이것은 허점이 될 수도 있지만, 방법론적으로 장점이 있어서 그렇게 가정한 측면도 있습니다. 선호가 사람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서 자칫 잘못하면 환원론에 빠질 수 있습니다. 즉, 선호만 갖고 모든 현상을 설명해버리는 것이죠. 선호를 그냥 주어진 것으로 하면 그런 환원론에 빠지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모형을 설정할 때 결과를 참작하지 않고, 선호부터 가정해서 모형을 분석하면 환원론이 될 가능성은 매우 적어지니까요.
경제학, 특히 미시경제학 발전에 합리성 가정이 유용했던 것은 인간이 합리적임을 보여줘서, 혹은 대부분 합리적이라서 그랬던 것이라기보다, 그 가정을 채택해서 유익한 분석, 설명, 예측을 보여줬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미국 로체스터 대학교 고 Riker 교수님은 정치학도 미시경제학에서 배워와야 한다고 항상 강조하셨죠. 그래야 정치학에서도 과학적 지식을 축적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라이커 교수님은 18세기 화학, 경제학, 정치학을 비교하면서 산소가 발견되기 전에 플로지스톤이라는 개념이 일세를 풍미했던 그 당시 자연과학보다 경제학과 정치학이 더 과학적이었을 수도 있다는 해석까지 제시한 바 있습니다. 또한, 경제학과 정치학이 엇비슷한 과학적 지위를 갖고 있었는데, 경제학은 합리성 가정을 도입하여 괄목상대했지만, 정치학은 그렇게 하지 않아서 뒤처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점은 곰곰이 생각해볼 만합니다. 참조: http://tinyurl.com/riker-phlogiston
문제는 인간이 항상 합리적이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전이적이고(transitive) 완전한(complete) 선호순서를 갖고 있어야 경제학의 합리적 플레이어가 되는데, 현실에서 따져보면 그렇지 않은 사례가 많이 나온다는 것이죠. 아울러서 경제학 모형에서 상정했던 완전 정보(complete information) 상황에 플레이어가 처하지 않는 사례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두 문제를 해결하는 한 시도가 행태경제학인 것 같습니다. 행태경제학은 심리학, 인류학, 사회학, 정치학, 역사학 등 다른 인문사회 분야의 연구결과를 참조해서 주류 경제학이 설명하지 못한 anormaly를 분석할 수 있겠습니다.
기존 경제학에서 완전 정보 가정을 보완하는 연구는 제법 했습니다. 예컨대 게임이론에서 불완전(incomplete) 정보 게임을 분석하죠. 그런데 합리성 가정은 근본적으로 폐기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행태경제학 연구가 앞으로 충분히 축적되더라도 경제학의 기본 가정으로 플레이어의 합리성은 살아남을 것으로 봅니다. 비합리적 플레이어를 가정하면 특정 사례를 설명하는 데는 비교우위가 있겠지만, 일반화된 지식을 축적하고 미래에 발생할 일을 예측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조건에서 전이적 선호순서를 갖는 플레이어가 효용을 극대화한다는 것은 그 범위를 매우 좁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정을 채택하지 않으면 극단적으로는 무한대의 가능성이 생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례연구로 비합리성을 활용하는 것은 장점이 있지만, 일반화된 과학적 지식을 축적하려면 비합리성 가정은 매우 비효율적입니다.
인간이 (경제학에서 가정한) 합리적인 것이 맞는지(옳은지)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 철학을 참조해서 조금 더 생각해보니 그 질문이 별로 유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잠정 결론을 얻었습니다. 저도 합리적일 때가 있고, 합리적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합리적이라고 가정해도 문제가 생기고, 그렇지 않다고 가정해도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결국, 합리성 가정은 연구 결과를 검토하여 타당한지 아닌지를 평가하는 것이 적절한 것 같습니다. 흔히 가정은 증명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증명할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옳은지 틀린지 따지는 것은 헛수고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만약 경제학의 어떤 새로운 패러다임이 뉴턴을 포괄한 아인슈타인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경제학에서 현재 합리성 가정을 포괄하면서 비합리적 행태를 제대로 분석하는 아인슈타인이 등장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봅니다. 인간의 문제라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따라서 제 견해로는 이준구 선생님처럼 주류 경제학도 섭렵하면서, 행태경제학적 관심도 함께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습니다. 서로 보완해주는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죠.
우리가 일상용어로서 합리적이라고 하면, 바람직한 혹은 좋은 (감정에 대하는 개념으로) 이성을 뜻하는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예컨대 정치적 지역주의로 투표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했을 때, 경제학적으로 합리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고 비이성적인 감정 투표를 표현한 것이죠. 그 유권자들이 완전하면서 전이적인 선호순서를 갖고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그런 투표를 했다면, 그것은 경제학적으로 합리적 선택입니다. 합리성 정의가 그러니까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있죠. 이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면 그레샴이 귀납적으로 발견한 사실을 분석하는 연역적 사고가 들어가야 합니다. 합리성 가정이 대표적인 연역적 방법론입니다.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어떤 법칙을 쫓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인간을 관찰한 결과 인간 행동 대부분은 비합리적이라고 정리하는 것이 한 예입니다. 이에 대한 제 생각은, 경제학이 주로 분석하고자 하는 대상인 예컨대 돈에 대해서는 인간이 합리적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돈의 양이 많을수록 합리적일 가능성이 더 커진다고 저는 봅니다. 어떤 사람이 1억 원과 만 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과 만 원과 만 오백 원 중에 선택하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경제학 이론에서는 두 경우 모두 더 큰 액수를 선택하는 것을 예측합니다. 현실에서는 전자에 대한 예측이 후자보다 더 잘 맞을 것입니다.
경제학이 분석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행동으로서 아침에 일어날 때 왼쪽으로 일어나는지, 오른쪽으로 일어나는지를 경제학이 분석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까지 모두 포함하면 인간이 비합리적으로 혹은 선호를 의식하지 않고 행동할 가능성이 더 클 수도 있겠죠.
경제학은 합리성을 매우 엄정하게 정의합니다. 그 정의는 어느 경제원론을 보더라도 나와 있습니다. 합리성 혹은 비합리성이라는 절대적 진리 혹은 엄연한 사실이 존재하는데, 경제학은 합리성을 대충 가정한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인간이 합리적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그런 절대적 진리나 엄연한 사실을 미리 인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이론적으로도(연역) 그렇고, 현실 사례에서도(귀납) 그렇다고 봅니다.
과학에서 연역을 매우 중시하는 이유가 바로 예측력 때문입니다. 합리성 가정을 버리고 여러 학문의 융합적 연구를 채택해서 비합리적 개별 사례를 하나씩 하나씩 잘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 방법론에서 핵심 부품이 빠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은 일반화된 지식(generalized knowledge)을 추구합니다. 합리성 가정이 유효했던 것은 경제에 관한 일반화된 지식을 축적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역사학을 역사과학이라고 부르는 사례가 별로 없는 것을 염두에 뒀습니다. 당연히 융합적 연구가 더 과학적인 연구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류 경제학과 비주류 경제학이 서로 보완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어느 연구 방법론이 "틀렸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인식론으로도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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