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지도층 지식인의 역할은 어두운 바다에서 배가 좌초하지 않도록 등불을 밝혀주는 등대지기의 역할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 등대지기를 떠오르게 하는 서울대 경제학부 이준구 교수의 사회비평 모음이 출간되었다. "쿠오바디스 한국 경제"는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한 암초가 무엇인지를 탄탄한 논리로 밝혀주는 등대라는 감명을 준다.
자유민주주의의 대전제 하에서 사회비평을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작업이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인간사의 모든 면을 꿰뚫는 절대적인 원리를 신봉하지 않는 근본적인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사회비평도 자유민주주의에서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그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사회비평은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는지 애매할 수 있다는 문제점이 금방 떠오른다. 이준구 교수의 "쿠오바디스 한국 경제"는 바람직한 자유민주주의적 사회비평으로서 갖춰야 할 조건을 훌륭하게 충족시키고 있다.
먼저 이 교수는 자신의 열린 생각을 독자들에게 제시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제 말만 옳다고 주장할 생각은 꿈에도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p. 13)이런 열린 사고방식은 자신의 견해만 옳은 것이라고 강변하는 닫힌 주장과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다른 주장이 더 적절할 수도 있고, 심지어 자신의 주장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자세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교수는 이런 개방적 자세를 견지하면서 대통령과 정부에게도 같은 마음가짐을 갖추도록 당당하게 요청하는 것이다.
"제가 이 자리를 빌려 대통령과 현 정부에 대해 간곡하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말보다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을 더 열심히 듣도록 노력해달라는 것입니다." (p. 325)소통을 통해서 중지를 모으는 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을 시의적절하게 제시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열린 사고방식이 흐리멍텅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수십 년 동안 경제학 연구에 매진하여 축적한 지식을 활용하여 이 교수는 자신의 주장을 뚜렷하게 밝힌다. 무슨 주장을 하는지 불분명한 시론을 흔히 접할 수 있는데 이 교수의 사회비평에서는 그런 애매모호함은 없다. 종부세에 대한 이 교수의 다음과 같은 단호한 자세는 단적인 예이다.
"만약 지금 계획된 그대로 종부세가 부과되기만 한다면 주택시장 안정에 확실한 효과가 날 것이라고 자신 있게 예측할 수 있다. 나의 학문적 명예를 걸고 어느 누구와도 자신 있게 내기를 할 용의가 있다." (p. 87)만약 종부세가 시행된 이후에도 주택시장 안정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이 교수는 스스로 틀렸음을 인정해야만 되었을 것이다. 여러 복잡한 조건을 나열하여 예측이 빗나갔어도 빠져나갈 여지를 만들어놓는 방식이 아니다. 이렇게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여 주장의 근간을 밝히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
대운하, 교육, 주택시장, 한미 FTA 등의 다른 주제에서도 이 교수는 예의 명쾌함을 보여주고 있다. 명쾌함과 더불어 이 교수 특유의 솔직함도 빛이 난다.
"경제학자인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할지 모르지만, 비용-편익분석(cost-benefit analysis)은 그다지 과학적인 분석 방법이 아니다. 편익과 비용을 제 맘대로 조작할 수 있는 수많은 편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p. 28)상기 내용은 재정학을 전공하는 경제학자로서 쉽게 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니다.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어서 발등을 스스로 찍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운하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터무니없는 뻥튀기 연구결과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 국민이 알고 있어야 되는 배경지식으로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담백한 솔직함으로 인하여 이 교수 주장에 대한 신뢰가 더 생긴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교수는 "좌빨"이라는 망발성 인신공격을 많이 받았는데, 그의 글들을 정독하면 중용의 지혜를 견지하는 지식인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종부세 근간의 유지에 찬성하고, 대운하는 반대하며, 신자유주의적 교육문제 해법에 일침을 놓는 등 현 정부를 비판하는 견해를 주장하였지만, 이 교수 자신이 밝혔듯이 그런 주장은 좌나 우와 같은 이념적 잣대에 의해서 개진된 것이 아니다.
한미 FTA의 전반적 기조에 찬성하는 뜻은 우파라서 나온 것이 아닌 것도 물론이다. 경제학적 지식에 근거하여 국민 다수의 편익 증진에 도움이 될지 안 될지가 판단의 기준이며, 그것이 바로 중용의 지혜이다. 정파나 당파에 맹종하여 갑론을박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 세태에서 중용의 지혜로 우리 사회의 중심을 잡으려는 이 교수의 노력은 정말 소중한 것이다.
중용의 자세는 미국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서도 드러난다.
"시장과 정부 사이의 적절한 역할 분담이란 문제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나라에 따라 그리고 시대에 따라 그 답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미국 모델이 마치 모범답안이라도 되는 양 그저 베껴오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제 미국 모델이 가진 한계가 명백해진 이상 그것을 베껴오는 전략에도 근본적 수정이 필요해졌다." (p. 184)적절한 보완책을 전제한 한미 FTA에 찬성하지만, 미국의 신자유주의 경제가 불러온 금융위기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이 교수의 견해를 참조하면 미국식을 편애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상대적으로 멀리 하는 것도 아니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뉴욕주립대 교직에 있었던 경력을 고려하여 이 교수를 미국과 관련시켜 섣부르게 평가하는 예도 있는데, 정확한 평가로 볼 수는 없다.
이 점은 과도한 영어교육에 대한 이 교수의 통렬한 비판에서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 및 자본주의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상대적으로 약한 다수 구성원에 대한 배려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 문제의식을 잘 드러내는 이 교수의 주장을 접할 때마다 어두운 바다에서 등대를 만난 듯한 반가운 마음이 든다.
"최소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계층에 있는 사람들만은 자신의 편협한 이해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스스로 무지의 장막 뒤에 가려지는 상태를 선택해 불편부당하고 공정한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p. 142)
"시장의 원리를 도입해 경제와 사회를 활성화한다는 아이디어 그 자체는 전혀 나무랄 데 없다. 문제는 이념의 노예가 되어 시장은 좋고 정부는 나쁘다는 식의 맹목적 사고를 한다는 데 있다. 시장원리의 도입이 때로는 서민들의 삶을 한층 더 팍팍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p. 170)
"다가오는 새해는 좀 더 밝고 편안했으면 좋겠다. 나날이 쪼그라들어 가는 서민들의 주머니가 두둑해질 수 있는 기적을 바라고 싶다.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전 국민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정부를 보고 싶다." (p. 189)
"대학은 입만 열면 3불정책의 폐기를 주장하고 있지만, 자기 대학만 잘되자는 이기주의가 그 밑에 깔려 있다... 대학이 입시의 기본틀을 짤 때 사회적 파장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이기적인 관점만 강조되는 현실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p. 201)스스로 시장주의자로 고백한 이 교수는 우리 사회의 저변에 이기주의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기주의가 편협한 것이 되면 안 된다는 점을 사회지도층에 있는 지식인으로서 토로하는 것이다. 지식인의 양심은 이런 것이라고 모범을 보여주는 듯하다.
사회비평은 일반 국민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지고의 지식이라도 난해하면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교수의 사회비평은 고학력자가 아니더라도 정독만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심지어 어려운 경제학 용어도 그 핵심에 금방 다가갈 수 있도록 해준다. 종부세에 대한 헌재의 결정이 가진 문제점을 "결혼중립성"과 "수평적 공평성"으로 설명하는 부분과 주택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가진 속성에 대한 통찰을 읽으면 이 점을 잘 느낄 수 있다.
지금까지 제시한 열린 생각, 명쾌함, 솔직함, 중용의 지혜, 약자 배려의 양심, 쉬운 설명을 모두 갖춘 자유민주주의적 사회비평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런 요소들을 두루 갖춘 이준구 교수의 "쿠오바디스 한국 경제"는 보기 드문 훌륭한 사회비평이라는 감상을 강하게 받는다.
에필로그에 토로한 이 교수의 불편한 감정은 등대지기 역할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가늠하게 해준다.
"솔직히 말해 사회적 문제와 관련된 활동을 할 때는 매우 피곤하고 불편한 심정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지난 1년은 그 어느 때보다 피곤하고 불편한 한 해였습니다." (p. 327)등대가 필요 없는 사회가 되면 이상적이겠지만 현실성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등대지기인 이 교수가 더 편안하게 등댓불을 밝힐 수 있는 미래가 펼쳐지면 좋겠다. 그런 미래가 펼쳐지지 않으면, 대단히 미안합니다만 힘드시더라도 우리 사회를 위해서 등댓불을 계속 비춰주십사라고 부탁드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윤
답글삭제(2009/05/22 12:05) 지식인이 다른 지식인의 책에 대해 한 서평이군요... 역시 격이 다른 서평인 것 같습니다.
본인: '준쿠리님 책 좀 짱인듯ㅋ우왕ㅋ굳ㅋ'
친구들: 뭐가 좋은데?
본인: '아 그냥 좋아 읽어봐....'
라고 친구들한테 말하고 다녔던 제 자신이 지금 몹시 부끄럽네요 ^^;;;;;;;;;;;;;;
이준구
(2009/05/22 20:34) POSCO 방문을 위해 지금 광양에 내려와 있습니다. 다행히 묵고 있는 호텔에 인터넷이 되는 바람에 안박사의 분에 넘치는 서평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쓴 책에 대해 이렇게 분에 넘치는 서평, 더군다나 동료 학자가 정성을 들여 친히 쓴 서평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바쁘실 텐데 제 책으로 시간을 뺏어 죄송한 터에, 이 기나간 서평 쓰시는 시간까지 또 뺏었군요.
정말로 너무나 감사합니다. 격려를 채찍으로 알고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안병길
(2009/05/22 21:38) ^^;;님, 좋게 봐주셔서 고마와요. 감상을 효율적으로 압축해서 표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선배님의 노고에 비하면 제 스스로 즐겁게 적은 짧은 글짓기는 조족지혈입니다. 독후감을 적을 기회를 제공해주신 선배님께 제가 오히려 머리 숙여 감사드려야 합니다.
선배님 사회비평, 킹왕짱입니다!
이준구
(2009/05/26 22:40) 안박사, 이 서평은 저에게 큰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시론에 옮겨서 올려도 좋을까요? 객원 기고 형식으로 말이지요. 꼭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병길
(2009/05/27 00:13) 그렇게 해주시면 저로서 큰 영예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