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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1일 목요일

[정치] 노무현의 정치 성적표

(2007년 12월 18일, 제17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작성한 글입니다. 일부 표현만 다듬었습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하려고 합니다. 제왕적 대통령 탈피와 민주주의를 더 성숙시킨 것이 노 전 대통령의 대표적인 정치 부문 업적이라면, 이 글에서 주장한 점이 아쉬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의 맹점 중 대표적인 것으로 중우정치를 들 수 있다. 이 맹점은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언급되었던 것으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예는 독일의 히틀러가 민주주의 모범으로 여겨졌던 바이마르 헌법 체제에서 탄생했던 것이다. 정치 자체가 지극히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개념이므로 민주주의를 통해서 나타나는 부작용은 오히려 자연스럽고 태생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도 이 지구 상에서 나타난 정치체제 중에서 현재 가장 높은 점수를 받고 있고, 궁극적으로 살아남을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이 민주주의인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는 이성적이며, 민주주의를 통해서 인간들의 역사가 장기적으로는 개선되고 발전한다는 추론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개별적인 사례에서 민주주의 실패가 국가 자체의 소멸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제17대 대선 과정에서 이명박 후보가 부동의 여론조사 1위를 계속 유지해왔고, 그대로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민주주의의 맹점인 중우정치가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중우정치를 평가하는 잣대에 따라서, 혹은 결과론적으로 평가하려면 아직 현 상황이 중우정치인지 아닌지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대통령 자질이라는 객관적이면서 최소한의 기준을 적용하여 평가한다면 중우정치라고 평가할 수 있다.

현 상황이 중우정치가 맞는다면 그 실마리는 무엇인가? 대중이 아무 이유 없이 우매해졌다고, 한국인의 속성이 원래 그렇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대통령이라는 가장 중요한 공직을 선출하는 선거에서 국민의 선택이 마냥 비이성적이라고 강변할 수는 없다. 수많은 실마리를 열거할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뽑으라면 나는 현 대통령인 노무현의 정치 성적표를 들겠다.

많은 사람이 노 대통령을 정치 9단으로, 혹은 10단으로 표현하는데 필자는 동의할 수 없다. 현 상황이 그 반증이다. 2005년 대연정 제안이 있었을 때, 정치부문을 담당하고 있던 한 청와대 비서관이 몇 사람의 의견을 듣기 위한 비공식적인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필자는 그 비서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노 대통령의 지지도가 왜 그렇게 낮은지 아십니까?”
“왜 그렇습니까?”
“정치를 잘 못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직선적으로 얘기해서 그런지 그 이상의 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여당의 최고위직에 있던 사람을 일대 일로 만난 자리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대연정이 정말 그렇게 말이 되지 않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큰일 날 수도 있다고 짧게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제16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참여하기 전에는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지인이 인수위원회의 정치개혁연구 부문의 실무 책임자가 되고, 내가 자원해서 그 연구에 참여하면서 큰 관심이 생겼다. 지금도 인상깊게 남는 것은 그 당시 읽은 기록 중에서 두 교수와 당선자가 의견교환을 했던 비공식 기록의 한 문장이다. 참석했던 교수가 당선자에게 소주제로 자유주의를 제안했을 때 당선자의 즉답이 매우 흥미로웠다.

“저는 자유주의를 잘 모릅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자유주의 소주제에 대한 토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 대통령이 어떤 정치인인가에 대해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 객관적인 서술이 많이 나올 것이다. 내가 파악한 정치인 노무현은 다음과 같은 주요 특징을 갖고 있다.

1) 자신이 정치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에 대해서는 한 수 가르쳐줄 수 있다는 식으로 언급한 적이 많다. 그래서인지 퇴임 후 정치학 교과서를 집필하겠다고 한다.
2) 정치는 근본적으로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는 투쟁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정치학에서 흔히 얘기되는 현실주의적 정치관이다. 장차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치는 투쟁이라고 일갈한 것은 그 정치관을 잘 보여준다.
3) 자신이 그리는 정치적 설계는 옳다고 강하게 믿으며 실현 가능성이 작더라도 일단 추진한다. 대표적인 예가 대연정 제안,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국회의원 선거구제 개편 제안, 개헌 제안 등이다.
4) 정치적 수사가 세련되지 못하고 직선적이다.
위에 열거한 네 가지 특성은 정치인으로서 장점도 될 수 있고, 단점도 될 수 있다. 나는 노 대통령의 정치인으로서 자질은 높게 평가하는 편이다. 그러나 대통령 임기 시절의 노무현 정치에 대한 나의 평가는 네 특성이 잘못 결합하여서 별로 좋지 않은 결과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그 결과의 극단적 성적표가 될 것이다. 최근 노 대통령은 삼성 특검을 수용하면서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 정치는 없다고 했다. 상당히 맞는 말이다. 결과를 고려하건대 노무현 정치는 성공하지 못했다. 정치를 그렇게 잘 안다는 정치인이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를 의미한다는 기본 원리를 잠깐 망각한 것은 아니었는지? 소수파 대통령으로 시작한 정치인 노무현이 다수파로 나아가는 정치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 더 심한 소수파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바이마르 헌법 체제하에서 히틀러가 나와서 독일 국민이 질곡에서 헤맸지만 결국 독일이 부활했듯이, 우리도 단기적으로는 이상한 대통령이 통치권을 갖게 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민주주의도 발전하고 민중도 더 잘살게 될 것이라는 위안이다. 물론 극적으로 그 이상한 대통령이 탄생하지 않으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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