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유주의자 라이커(William H. Riker) 교수님
일전에 말씀드린 제 사부 중에 라이커 대 사부께서 합리적 선택을 정치학에 접목시킨 태두로 평가받는다는 이야기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또한 이 교수님과 같은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자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어설프게 자유라고 하면 폭주족과 같은 마음대로 하는 사람을 연상하기 쉬운데, 그 사람도 자유를 즐길 권리가 있기는 하죠.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렇습니다. 남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다른 사람의 태클이 들어와서, 혹시 방종은 아닐까?라는 경계선 문제가 제기됩니다. 심하면 경찰서에 잡혀가서 조사받고, 모종의 처벌을 받아서 방종으로 최종 판정을 받습니다. 그런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그들의 행위는 자유가 아닌 것으로 사후적으로 확인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와 방종의 구분은 어떤 경계선 이전에는(사전적으로는, ex ante) 뒤섞여 있고, 그 이후의 적절한 조치에 의해서(사후적으로는, ex post) 정확한 판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폭주족 같은 경우 애매모호할 때는 자유주의자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자유족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그런데 애매모호하지 않은 자유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라이커 교수님 같은 경우죠.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분 같았습니다. 조용히 연구와 강의만 하시고, 복도에서 마주 지나칠 때도 잔잔히 미소와 함께 목례를 나누는 분이셨죠. 저와 마주칠 정도가 되면 오히려 노교수님께서 먼저 벽 옆으로 서시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경우와는 좀 다르죠. 우리는 학생들이 벽에 착 붙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미국의 거리를 걸으면 서로 몸을 접촉하는 것을 심하게 꺼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반면에 우리는 너무 정이 많아서 그런지 접촉하는 것을 예사롭지 않게 생각하죠. 미국 사람이 왜 그렇게 조심하겠습니까? 자유가 방종으로 변할까 걱정해서 그러는 것이죠. 신체 접촉이 일어나면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항의하게 되죠. 혹시 너 방종 아냐?라고 문제 제기를 하는 것입니다. 옛날 유럽 같으면 결투를 벌여야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될 수 있죠. 그 사람이 조심하는 것은 착해서 그렇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문화적인 현상이지만 근저에 깔린 합리성은, 상호 간의 자유가 부딪힐 때 자신에게 큰 화가 닥칠까 봐 우려해서 그런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라이커 교수님이 학생들을 잘 챙겨주셨다는 것은 이미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이 교수님과 이미지가 비슷한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자유를 그냥 마음대로 하는 것으로 쉽게 생각해서 거친 사람을 자유주의자에 가까운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정반대의 분들이 자유주의자에 가깝습니다. 마음대로 하는 사람은 권위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크죠. 이것이 왜 그러냐면 내가 마음대로 하는 자유가 상대방에게 피해를 준다면, 상대방은 그것을 마음대로 응징할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런 보복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줄이려면 오히려 자신의 자유를 절제해야 합니다. 또한, 상대방에게 더 잘해주려고 해야 합니다. 교수님들이 무슨 행복을 최고로 치겠습니까? 교수님마다 다르겠지만 제자들이 잘되는 것을 보는 행복도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라이커 교수님도 그런 행복을 추구할 자유를 갖고 계셨죠. 제자들이 잘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교수님들이 제자들에게 잘해줘야죠...^^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이타적인 행위를 이기적인 자유행위로 설명하는 것이 로체스터 학파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경제학을 빼다 박았습니다.^^ 학생들에게 잘 대해주는 교수님들이 합리적이십니다.
그런데 저는 왜 만날 이 모양 이 꼴일까요? 하라는 링컨 이야기는 하지 않고 뜬금없이 다시 자유, 방종, 이타적, 이기적, 이런 잡설을 늘어놓는 것일까요? 그것은 링컨의 정치적 행보를 이기적인 자유주의자 관점에서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2) 라이커 교수님의 저서: Liberalism against Populism
라이커 교수님이 중요한 저서를 여러 권 남기셨는데, 그중에 저는 특히 두 권의 책을 사랑합니다. 한 권은 이미 아래에서 소개되었죠. Liberalism against Populism이라는 책인데 전통적인 정치학 관점에서 보면 이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주류 정치학의 일파로 인정받고 있죠. 처음 서론 몇 장을 제외하고는 전체가 투표 이야기입니다. 애로우(Kenneth Arrow) 교수님의 불가능성 정리를 정치학적으로 해석하고 확인한 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간단한 민주주의 원칙들을 제시하고, 그 원칙들을 여러 투표 방식들이 어떤 면에서 어기는지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례들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돌고 도는 세상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정치적 선택에서 절대적으로 옳은 것을 일반적으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또 다른 버전의 불가능성 주장이 제기되고, 애로우 교수님의 연구 결과가 더 확고해집니다. 콩도르세(Nicolas Marquis de Condorcet)의 “투표의 역설(Paradox of Voting)” 연장선에 있는 연구입니다. 공공선택에 관심이 있는 분은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책 제목에서 암시하는 것은 집체주의는 경계해야 하고, 자유주의를 잘 운영해야 된다는 그런 뜻이겠죠. 그러면 라이커 교수님이 말씀하신 자유주의의 요체는 무엇일까요? “돌고 도는 세상”이라는 말씀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에는 절대적인 정답이 없다.”로 저는 표현하겠습니다. 상대적으로 더 옳은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지 모든 잣대를 꿰뚫는 만병통치약 같은 정치 제도는 이 세상에 없고, 그런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엉터리”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주장하셨다고 저는 나름대로 해석합니다. 그런 “엉터리”가 좋아하는 이념이 집체주의(Populism)라는 것이죠.
(3) 룻쏘 (J. J. Rousseau)에 대한 해석
룻쏘가 라이커 교수님께 야단을 좀 맞습니다. 너는 왜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반의지(General Will, Volonté Générale)”라는 녀석을 제시하여 “혹세무민”했느냐고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룻쏘가 누구입니까?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그 룻쏘, 아닙니까? 룻쏘는 그러겠죠.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아니었는데라고요. 사상가들은 억울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후대에 어느 시각에서 들여다보느냐에 따라서 “엉터리”가 되었다, “황금 열쇠”가 되었다 하니까요.^^
그런데 적어도 경제학자들은 라이커 교수님의 룻쏘 해석에 동의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애로우 교수님의 주장도 라이커 교수님 주장과 같거든요. 노벨상 받으셨죠?^^ 정치학 쪽에서는 룻쏘에 대한 평가가 엇갈립니다. 자유주의 학자인 칼 포퍼(Karl Popper, <열린 사회와 그 적들>)나 라이커 교수님은 강하게 비판하죠. 포퍼는 룻쏘를 공산주의자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죠. 포퍼도 비판을 받기는 받습니다. 너무 자신의 프레임에 정치철학자들을 맞췄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포퍼에게 걸리면 플라톤도 별수 없는 유사 공산주의자가 되는 정도이니까요. 그 반면 정치 공동체를 선으로 보는 사조에서는 룻쏘가 제대로 된 사상가로 평가됩니다. 어느 쪽으로 가실 것인지는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저는 저에게 그렇게 친절하게 해주신 라이커 교수님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4) 공동체 자유주의?
최근에 어떤 학자께서 공동체 자유주의라는 개념을 설파하고 계신다는데, 저 같은 교육을 받은 사람은 그 말을 딱 듣자마자, 혹시 룻쏘? 이런 생각이 팍 듭니다. 자유와 공동체를 엮어 놓으면 매우 어색한 개념이 됩니다. 자유주의면 자유주의이고, 공동체면 공동체이지 그것을 묶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책을 읽어보니 비판을 할 수가 없더군요.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주장을 해놓으니 무엇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아, 예~하고 말았죠.^^
공동체라는 상위 개념을 두는 것 자체가 진정한 자유주의에 어긋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공동체에 의해서 자유가 구속된다면 그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유는 자유에 의해서 구속되는 것이 자유주의의 핵심입니다. 개인주의 사상이라는 것이죠. 사람을 공동체로 묶어서 한 덩어리로 만드는 순간, 개인의 자유는 적어도 조금이라도 더 훼손될 수밖에 없죠. 그럼 국가는? 국가가 어떻게 일반적인 정치 공동체입니까? 여러 이익이 상충하는 큰 정치 집단일 뿐이죠. 통일도 반대하는 사람이 있죠. 평화 시 국가를 정치 공동체로 간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무엇을 제시하여 하나로 모을 수 있는지 저에게 예를 보여주시면 경품을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경우가 월드컵 4강 신화의 축구 정도가 될 텐데, 그것은 정치 이벤트가 아니죠. 또한, 더 엄밀히 따지자면, 축구 때문에 열광하는 사람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 정도인데 정치에서 무슨 국가 공동체 타령인지 모르겠습니다. 종교에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국가 운명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지구가 멸망하면 모두 끝입니다. 그런 의미라면 공동체 아닌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유는 자유이지,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을 하고 자시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열심히 사는 것이 자유주의의 모습입니다. 이기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 조화를 이루는 것이 자유주의의 정답입니다. 만약 그것을 공동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언어의 유희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십시오. 그렇게 해도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정답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자유주의입니다. 어설프게 국가 공동체를 위한다든지,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든지, 국가이익을 위한다든지, 우리는 운명 공동체 등의 주장으로 무장하여 가스통을 들고 설치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긍정적이고 건설적입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정치사에서 국가 전체적으로 평화 시에 정치적 공동체에 근접한 사례가 딱 한 번 나옵니다. 1980년 광주에서 나왔다고 저는 봅니다. 그런 것이 유사 공동체입니다. 그 부분에서는 룻쏘가 일정 부분 맞는다고 제가 인정해줄 용의가 있습니다. 그 이외에는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물론 북한에서는 룻쏘를 아주 사랑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 전체가 주체사상에 입각한 유사 공동체 아닙니까? 주체사상을 일종의 일반의지로 간주해도 큰 무리는 없겠습니다.
서설이 끝이 나지 않네요. 자유주의 전통이 그렇습니다. 여기에다 홉스, 로크(John Locke), 밀(John Stuart Mill),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기타 등등까지 언급하자면 여러분이 저를 방종으로 밀어붙일 것 같아서 자제하렵니다. (사실은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빠져나갈 때 저는 이런 못된 수법을 씁니다. ㅋ)
(5) 라이커 교수님의 다른 저서: The Art of Political Manipulation
두 번째 책이 오늘 주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휴~ The Art of Political Manipulation이라는 쪽 수가 별로 많지 않은 명저입니다. 이 책의 첫 번째 장이 링컨 이야기입니다. 반가우시죠, 링컨 이름이 나오니까. 음, 책 제목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어떻게 번역할까요? 정치적 조작의 기술(혹은 술수)? 정치조작술? 정치적 조작의 예술? 정치공학? 정치공학술? 정치공작? 정치공작술? 골라 골라 골라서 댓글로 올려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부담은 가지지 마십시오. 그냥 재미로 해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글 제목은 정치적 조작으로 되어 있는데 구애받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후다닥~
(왜 여기서 멈추는지 궁금하시죠? 다음이 설명하기가 매우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시간 벌기 작전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그 책의 제 1장을 읽어 보시오.”라고 하면서 끝내고 싶지만, 너무 무성의하겠죠. 제가 쉽게 설명드리도록 짱구를 굴려 보겠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방학을 즐기십시오. 찜통더위에 시원한 수박을 찾으셔야지, 웬 링컨 컨티넨탈 자동차를 찾으십니까. 아, 8기통이니까 강력한 에어컨이 있겠군요. ㅋ) //
중
답글삭제(2009/07/03 13:11) 너무 재미있고 유익하여 정독하게 되었습니다. 후학들을 위해 계속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
그런데 박사님 글의 마지막 문단에서 "그 책" 이란 표현은 The Art of Political Manipulation 을 지칭하는 것인가요? 다음 글 읽기 전에 "그 책" 1장 먼저 읽어보고 싶습니다.^^;;
안병길
(2009/07/03 13:17) 그렇습니다. 인터넷에 찾아 보시면 디지털 자료로 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음, 제가 "허풍"을 치는 데 지장이 생기겠네요.^^
신비아
(2009/07/03 13:39) 안박사님, 글 잘 읽었습니다. 흥미로운 내용들을 새로 알게되어 수다떨때 써먹어야겠군요..ㅋㅋ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열심히 사는 것이 곧 자유주의라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가끔씩 최선을 다하는 어느 한 개인(사회적 지위를 막론하여..)의 삶을 보면 저런 사람들 덕분에 좋은 사회가 될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꼭 공동체라는 것을 운운하지 않아도 묵묵히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 자연스레 사회에 기여하는 것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저도 더더욱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ㅋ
글구 제목은 정치공작술...에 한표 던집니다~^^
소민우
(2009/07/03 13:44) 안병길 박사님의 玉稿가 드뎌 업로드 되었네요. 기대가 됩니다.
저는 지금 한손에는 복숭아를 한 손에는 손가락 운동(키보드 질)하고 있습니다. ^^
안병길
(2009/07/03 16:51) 비아님, 예 맞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열심히 사시는 것이 최고입니다.
민우씨, 복숭아 다 드셨어예?
중
(2009/07/03 16:58) 인터넷 자료를 찾을 수 없네요^^;; 주말에 교보문고 가서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그런데 책 표지를 보니 꼭두각시 인형을 부리는 듯한 그림이 보이는데 표지만 볼 때는 The Art of Political Manipulation을 정치공작술로 해석하는게 좀 더 가까워 보이네요
안병길
(2009/07/03 17:16) 여기서 질문 1: 헌법재판소는 법을 다루는 곳인가요, 정치를 하는 곳인가요?
질문 2: 참여정부 시절 수도이전에 관한 결정을 헌재에서 내릴 때 "관습헌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똑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김윤
(2009/07/03 23:58) 평화시 국가를 정치 공동체로 간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무엇을 제시하여 하나로 모을 수 있는지 저에게 예를 보여주시면 경품을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1 평화시에도 '국난극복' 테마는 사용이 가능하지 않나요? 개인적으론 금모으기 운동 같은게 전형적인 평화시 정치적 공동체를 보여준 거 아닐까요...
1) 정치적 사법기관이라고 많이들 표현하죠. 여기에 공감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건 당시, 전 그 당시 탄핵에 반대했었지만, 만약 법리상으로 탄핵이 100% 맞았다고 가정을 하더라도, 결론은 기각으로 나왔을 겁니다...
2) 제 개인적으론 "관습헌법"은 너무 궁색한 논리가 아니었나 싶지만.. 공부하면서 판결 전문을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 좀 더 제 법률실력이 쌓인 다음에 이건 답을 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아직은 꼬꼬마 수준이라..
안병길
(2009/07/04 00:27) 김윤씨, 당첨입니다. 응모하신 것만 해도 경품을 받으실 자격이 있습니다. 제가 서울에 나타나면 좋은 일이 있을겁니다.
경제 문제가 걸리면 특히 공동체 개념을 적용하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따라서 그 운동은 공동체라는 사이비 의제를 설정하여 특정 결과를 유도한 것으로 저는 봅니다. 그 시기에 외국으로 돈을 빼돌린 사람들도 많을걸요? 만약 그렇다면 금을 갖다낸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 사이에 같은 공동체 개념을 적용하기 어렵죠.
나머지 의견에 대해서는 따로 말씀드릴게요. 고마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