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7/01, http://jkl123.com/)
(치악산에서. 자주색 모자 쓴 젊은? 청년?이 저입니다. ㅋㅋ 2004년 )
선생님들에게 가장 큰 보람은 역시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게시판의 글들을 읽으면서, 이 교수님께서 제자들을 생각하시면 흐뭇하실 때가 잦겠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저에게도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러시아에서 온 학생이 조금 특별한 경우라서 요즘도 한 번씩 생각이 나곤 합니다. 그 학생은 러시아 정부가 한국통으로 키울 요량으로 상당한 투자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대 학생으로 오기 전에 평양의 김일성 대학에서 우리말을 공부했으며, 서울대도 일종의 러시아 국비 장학생으로 한국학 석사과정에 입학했으니까요. 그 한국학 과정은 외국인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강의와 학위논문 작성은 우리말로 했습니다. "한국어 몰입" 교육이었던 셈이죠.
그 잘 생긴 러시아인 학생이 저에게 논문 지도교수를 해달라고 찾아왔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제 사부께 지도교수 청을 드리러 갔던 장면이 그때 떠오르더군요. 받아주실지 아닐지 가슴을 졸이면서 겨우 말씀을 드렸더니, 제 미국 사부는 공부 얘기는 하지 않으시고, "We need to maintain an intimate relationship." 한마디만 하시더군요. 그 학생이 어렵게 어렵게 말을 꺼내는 것을 보고, 옛 생각이 나서 흔쾌히 승낙하여 스승-제자 관계가 성립했습니다. 논문 주제는 남북한 관계에 관한 것이었는데, 나중에 지도하면서 간단한 게임 모델도 활용하도록 했었습니다. 학위 논문의 한글 교정을 보면서 상당한 시간을 들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 러시아 학생을 포함해서 학생들과 소주를 한잔하러 가면 주위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쳐다봤습니다. 일단 생긴 것이 많이 다르니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고, 외국인 학생이 우리말을 매우 잘하니 그것도 일종의 구경거리가 되었던 것이죠. 한 술 더 떠서 그 학생이 저에게 소주잔을 받을 때, 처음에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았으니 주위 사람들이 보면 아마 가관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군사부일체를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더 잘 아는 것 같더군요.
그 학생의 한국 사랑은 유별났습니다. 석사 과정을 마치고 러시아로 돌아가서 외교관이 되었습니다. 자신은 당연히 서울로 발령을 받을 줄 알았는데, 그런 낌새가 없자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고, 러시아 한 신문사의 특파원이 되어서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서울로 오고 싶어서 그랬다고 그러더군요. 아마 지금도 서울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들에게 가장 바람직한 제자 상은 어떤 것일까요? 저는 그 러시아 학생이 그런 제자 상에 가까웠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공부도 열심히 했고, 스승을 대하는 태도도 예의 바르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는 모두 하는 편이었으니까요. 덧붙여서 사회에 진출하여 반듯하게 살거나(부정부패하지 말고, 남 등쳐먹지 말고, 능력껏 주위를 도와주면서 자기실현을 추구), 스승을 학문적으로 뛰어넘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가 되겠습니다. 아래에서 이 교수님께서 청출어람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그런 경우입니다.
이 교수님 학생들이 바람직한 제자가 되어서, 이 교수님께 아름답고 보람있는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을 감히 기원해봅니다.
(요즘 이 교수님께서 이 게시판에 들이시는 정성을 보건대, 교수-학생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학생들에게는 매우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경제학에서 행위 주체를 흔히 합리적 행위자로 가정하는데, 실습을 할 좋은 기회인 것 같습니다. 많이 많이 활용하세요. ^^)
이준구
답글삭제(2008/03/08 22:35) 안박사, 그런 좋은 제자를 두어서 좋으시겠습니다. 제자 복 많은 사람들 보면 부러운 생각이 듭니다. 내가 제자 복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요, 그런데 나와 생각을 같이 하는 젊은 경제학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조금 섭섭하긴 합니다. 나는 그 동안 강의를 통해 제자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교수가 사회에 기여하는 올바른 길이라는 믿음을 가져왔는데요.
안병길
(2008/03/08 23:20) 좋은 제자들은 많이 두었는데, 제가 미욱해서 제자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교수라는 직업이 딱 두 단어로 요약하면, 가중치는 경우에 따라서 다르지만 교육과 연구로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서울대와 같이 최우수 재원들을 학생으로 받아들이는 경우에 교육의 중요성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 학생들이 후일 우리나라를 이끌어가는 엘리뜨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까요. 따라서 서울대 교수님들은 학생들 교육에 더욱 매진하시면 그만큼 우리 사회에 더 기여하시는 것이라고 저도 믿고 있습니다. 선생으로서 보람도 있는 것이구요. 특히, 출세 지상주의와 편협한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우리 사회에서 장기적으로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올바른 방향과 지식을 제시해주는 스승님들이 좀더 많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선배님 연륜이나 인품을 고려하면 충분히 후배 교수들에게 잔소리하셔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불러 모아서 야단?(표현 죄송) 한번 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 주제 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조석우
(2008/03/09 08:57) 사회에 진출할때가 된 청년으로서 가장 궁금해 하고 있는 것이 이미 진출해 있는 기성세대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가 무엇을 보며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는가 그들은 어떠한 삶의 궤적을 따라 살아오고 어떻게 선택을 내리고 있는가 이런 것들입니다.
항상 안병길 교수님의 글은 제가 간지러운 곳을 잘 긁어주시네요..^^;;
글마다 리플로 인사하진 못하지만, 좋은 글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안병길
(2008/03/09 09:47) 학생들에게 "사회에 진출하여 착하고 바르게 살기 바란다"라고 자주 얘기했었습니다. 여기서 착한 것은 바보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 한도 내에서 남을 도와주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고, 바르게 사는 것은 부정부패 하지말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학생들에게 그런 식으로 얘기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우리 사회와 같이 각박한 곳에서 착하고 바르게 살면 혹시 남들에게 당하지는 않을까라는 걱정은 있었습니다.(실제로 제 학생들 중에는 그렇게 살면 우리 사회에서 뒤쳐지는 "바보"가 된다는 의견을 내놓는 경우도 있었죠.^^) 그래도, 단기적으로는 큰 재미를 못 봐도 장기적으로는 결국 각 개인이나 전체 사회에 큰 이득이 된다는 믿음에서 제 학생들에게 그렇게 얘기하곤 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학생들에게 밝은 사회로 나아가는 사회개선의 작은 "성냥불"이 되는 것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대학 교수의 역할로서 조금 오버이기도 했지만, 우리 현실을 감안하면 그 정도의 사회책임의식 주지시키기는 필요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 교수님 게시판에 글을 올리면서 항상 걱정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으면 어쩌나, 혹은 이 선배님께 누가 되지는 않을까 등인데 애송이님의 댓글을 보니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은 모양이라는 안도의 느낌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이준구
(2008/03/09 10:06) 안박사, 안사람이란 학생의 글을 지우나보니 댓글들의 문맥이 이상해졌군요.
안박사의 댓글 두 개도 마저 지우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렇게 했으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병길
(2008/03/09 10:10) 예, 선배님. 잘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워진 댓글 중에서, 제가 사용한 엘리뜨란 용어는 단순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는 엘리뜨로 이해해달라고 부탁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준구
(2008/03/09 10:13) 안박사, 엘리뜨의 책임을 강조한 데 100% 공감합니다. 내가 강의 중에 늘 강조하는 점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사회개선의 작은 "성냥불"이 되는 것을 권한다."라는 말도 정말로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것은 어려울 둣 합니다. 이제 모두 자신의 주관을 가진 어엿한 사회인들이니 말입니다.
안병길
(2008/03/09 10:19) 그렇습니다, 선배님. 그냥 조언인 셈이었습니다. 작은 바람이기도 했구요.
조석우
(2008/03/10 01:04) 그런 "잔소리"를 듣기 좋아하는 젊은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어느 길로 가야 좋은 지 몰라서 헤매는 이들도 많이 있구요.. (그런데 두분 교수님 말씀하시는 걸 보면...저만 그런건지도 모르겠군요..ㅜㅜ)
뭐, 어찌 되었든.. 전 정말 어른들 혹은 선배들의 사는 이야기, 생각 이야기, 그리고 경험에서 나온 잔소리를 듣는게 너무 즐겁습니다..
안병길
(2008/03/10 01:56) 우리 사회에서는 그 반대쪽 잔소리도 많은 편이지요. ^^ 사회에 진출할 때가 되면 이런 저런 잔소리를 참조해서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전개되는 것 같아요. 애송이님 같이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열린 사람들을 보면 그래도 우리 사회의 미래가 밝다는 생각을 합니다. 애송이님 응원해 드릴께요. Encouragement matters!
안병길
(2008/03/10 12:17) 반대쪽 잔소리의 사례; 모 사학 총장 입학식 축사 중에서...
"...,,,(중략) 지금 이 순간에도 적들의 책장은 넘어가고 있다. 눈이 감기는가. 그러면 미래를 향한 눈도 감길 것이다. 한 시간 더 공부하면 "여러분 미래의 배우자의 얼굴이 달라질 것입니다."
대학 새내기들에게 이런 충고를 해준 대학 총장은 무슨 철학으로 교육자의 길을 걸었던 것일까요?
제자*오
(2008/03/10 12:46) 제 아내가 고등학생때 선생님께 들었다는 이야기의 다른 버전이군요. "한 시간 더 공부하면 너네들 남편 직업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전에 웃으면서 제게 '한 시간 덜 잘걸'하고 그러길래 제가 갑자기 간이 커지면서 '고시 공부 안한 게 후회된다' 고 했지요.^^; 중고교때 선생님들이 공부 열심히 하라고 대개 지나가는 말로 하는 말씀을 대학 총장이 입학식사로 하다니 우리 사회의 수준을 보여주는 듯해 씁쓸합니다.
안병길
(2008/03/10 12:50) 음, 부부 싸움 크게 날뻔 했군요. ^^
이준구
(2008/03/10 13:23) 소위 지식인이란 사람들이 그 천박한 외모지상주의에 빠져 있다니. 바로 이게 우리 지식인의 얼굴입니다. 세계화 한다고 무차별적인 영어 강의로 난리를 치는 것이나 똑같은 일이지요.
제자*오
(2008/03/10 18:46) 안 박사님, 다행히도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도 우스개 소리로 놀린다고 한건데 아내의 표정이 변하는 걸 보자마자 사태가 점차 제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를 것같아 한마디 덧붙였죠. "고시 패스했어도 당신을 만났을 것이다. 당신은 한 시간 덜 공부해도 괜찮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걸 내가 증명하지 못한 게 아쉽고 후회된다...." 그러자 풀린 아내 왈, "당신도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야." 짧게나마 진땀 뺀 해피엔딩이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운하에 대한 강의를 하셨다니 퇴근해서 봐야겠군요.
안병길
(2008/03/10 22:01) 두 분 사이의 새록새록한 사랑이 엿보입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