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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24일 금요일

[자유] 둘에 둘 더하면 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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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6월 5일 조선일보 여론면 옴부즈맨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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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5월 28일 자 홍사중 문화마당의 "둘에 둘 더하면 다섯"은 다수결이 항상 정의와 진실에 더 가깝게 가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매우 중요하고도 자명한 사실을 지적하였다. 즉, 한 초등학교의 산수문제 풀이 예를 들면서, 민주적 결정이 "둘에 둘을 더하면 다섯"이라는 오답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민주주의 기본 원칙인 다수결, 정확하게는 단순과반수 원칙이 민주주의 사회의 모든 결정과정에 적용되지 않고, 어떤 의제가 절대적 정의나 진실을 묻는 것이 아닐 때 주로 적용함을 이 글에서 지적하고자 한다. 다수결 원칙은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라, 한 사회 구성원이 전체적으로 어떤 것을 상대적으로 더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결정하는 정치 제도라고 볼 수 있다.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선호를 사회 전체 결정으로 바꾸는 한 방법이 바로 다수결이다. 절대군주제하에서는 왕이나 소수 신하가 국민 선호를 직접 묻지 않고 국가적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민주주의 선거는 일정한 나이와 자격을 갖춘 국민은 모두 일인일표를 던져서 전체 사회 결정을 이끌어내는 일반투표권(universal suffrage)을 채택하는 차이점이 있다.

민주주의의 세부적인 절차는 잘 알다시피 시대와 사회에 따라서 각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대통령 선거제만 예를 들더라도 우리나라는 직접투표에 의한 단순다득표제, 프랑스는 직선 결선투표제, 미국은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를 채택하고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천편일률적인 양상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각 사회의 역사, 문화에 따라서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홍사중 선생이 언급한 "다수결 원칙"도 민주주의 사회의 모든 결정과정에 도입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미국 배심원 제도 중 일부는 배심원 중 한 명이라도 피고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 피고인은 무죄가 된다. 그와 유사한 예로 홍사중 선생이 든 7명의 반대를 무시한 링컨의 결정은 "다수결 원칙"을 링컨과 관계장관들 회의에 적용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예들에서 민주주의 사회가 "다수결 원칙"을 모든 결정과정에 도입하는 것은 아니고, 또 그 원칙을 평가하는 적절한 예가 아님을 역설적으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배심원 제도는 "피고의 인권보호," 링컨의 결정은 "대통령의 비토권"이라는 원칙을 더 중요하게 적용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둘에 둘 더하면 다섯"의 예로 "다수결 원칙"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예가 될 수 없고, 그 원칙이 오용 내지는 남용된 예일 뿐이다. 즉, 초등학교 교실의 문제 풀이 정답은 "선생님이 제시한다." 라는 원칙을 적용함이 더 적절하다는 예시일 뿐이다.

"다수결 원칙"은 민주주의의 어느 결정에서 존중해야 하는 원칙인가? 그 원칙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절대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안건을 처리할 때 주로 적용해야 하는 원칙이다. 둘에 둘 더하기 의제는 이미 절대적으로 옳은 답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투표를 하여 과반이 다섯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전혀 중요한 결정 기준이 될 수 없다. "둘에 둘 더하면 그냥 넷"이라고 말하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절대적 진리를 확보할 수 없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선거이다. 물론 선거에 입후보한 모든 정치인이 "나는 절대적으로 옳다!"라고 주장하면서 유권자를 설득하겠지만, 그중에 누가 옳은지를 평가하는 것은 유권자가 투표해서 결정한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유권자들이 사회적으로 어느 후보를 더 좋아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선거이다.

다수결(단순과반수 의결) 원칙은 갑과 을 두 후보가 있을 때, 갑을 을보다 좋아하는 유권자가 더 많으면 갑이 당선되어야 한다는 원칙일 뿐이지, 갑이 항상 옳다든지 옳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원칙이 아니다. 따라서 다수결에 의한 결정에 옳지 않은 것이 선택되는 것은 그 원칙 자체 결함이 아니라 유권자 선호의 결함일 뿐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선거에서 "단순과반수 의결" 원칙을 강조하는 것은, 일인일표제 평등주의하에서 과반수 의견을 소수의견보다 더 존중해야 함을 의미하지, 과반수가 맞다든지, 소수가 틀려야 한다든지 등의 논의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이념적 바탕이 인간의 올바른 이성을 믿는다. "단순과반수 의결"을 통해서 정치지도자를 뽑으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는 신념이 강하게 채색되어 있지만, 절대적 정의나 옳음을 확보하는 과정이 아님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예컨대, 어떤 국가에서 "단순과반수 의결"을 채택하여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를 대통령으로 뽑았다면, 그것은 "단순과반수 의결"의 오류가 아니고, 그 국민의 오류이며, 그들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둘에 둘 더해서 다섯"이 나오면 독재의 폐해를 볼 것이고, "둘에 둘을 더해서 넷"이 나오면 그런 폐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는 유추가 가능할 뿐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사상적 기반은 답이 "넷"으로 나올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믿음을 깔고 있다. 미국 로체스터 대학교 라이커 교수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단순과반수 의결"은 민주주의 사회의 선거에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왜냐하면, 선거에서는 누가 절대적으로 옳은지 판가름하기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단순과반수 의결이 정의와 진실에 더 가깝게 가는 것을 보장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다 더 멀리 가는 것도 아니라는 점도 같은 비중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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