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Notice) | 방 명 록 (GuestBoard)

2009년 7월 26일 일요일

[수필] 나와 아버지의 눈물

(이전에 적어둔 글을 일부 수정했습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부산의 부심지인 서면 근처 부전동이다. 초등학교 2학년 1학기까지 그곳에서 살다, 광안리 해수욕장 근처의 남천동으로 이사해서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살았다. 남천동 집은 바다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서, 어릴 때 해수욕을 하러 갈 때는 집에서 수영복을 입고 출발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그 집은 마당도 제법 넓었다. 아버지는 은행 차장으로 근무하시면서 대지를 사들이고, 직접 설계도 하실 만큼 애정을 쏟은 집이었다.

아버지의 취미 생활은 마당에서 수목과 화초를 돌보시는 것이었다. 딸기도 재배해서 여름에는 직접 따 먹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대학생이 된 이후에 언제부터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아버지는 공작을 한 쌍 키우셨다. 나는 애완동물에 별 관심이 없었던 아버지가 왜 공작을 키우시게 되었는지 항상 궁금했었다. 그 답은 어떤 날 아버지가 손님과 나누는 대화 중에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아들을 네 명 봤고 딸도 한 명 있는데, 지금은 모두 내 곁에 없습니다. 어떤 때는 쓸쓸하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해서 공작들을 자식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모두 객지에서 살고 있어서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을 항상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평소에는 자식들에게 너무나도 무뚝뚝하셨지만(나는 막내라서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었음), 속으로 아버지의 깊은 정을 감추고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눈시울이 붉어졌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공작들이 별로 예쁘지 않더니, 조금 지나니 숫 공작은 예의 아름다운 꼬리를 선보이면서 남천동 집의 명물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공작이 보기에는 아름다운데, 한번 울기 시작하면 온 동네가 떠나갈듯한 소음공해를 배출하는 것이었다. 이웃들의 항의가 이어지고, 결국 공작 문제에 대해서 아버지는 용단을 내리실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가족들에게 공작을 표구로 만들고, 그 고기는 가족들 보신에 사용하시겠다는 "엄청난" 결정을 발표하셨다. 마침 방학 중이라서 내가 그 얘기를 현장에서 들었는데, 얼마나 놀랐던지... 죽은 공작도 아닌 산 공작을 잡아서 표구로 만들고, 그 고기를 먹는다고 한번 상상해보시라. (여담이지만, 나는 아직 보신탕을 거의 먹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남들이 보신탕을 먹는 데 대해서 혐오감을 가진 것도 아니다. 식용 개와 애완용 개의 분리를 통한 보신탕의 합법화를 제안한 적도 있다.)

나는 결단코 반대했다.

"아부지, 안됨미더. 병들어서 죽은 공작이면 표구를 하는 것이 좋겠지만, 이 경우는 살아서 우리의 귀여움을 받던 공작아님미꺼."

"그럼, 어떻게 해야 되노? 무슨 대안이 있어야 할꺼 아이가?"

나는 조금만 여유를 두고 공작 처리문제를 심사숙고해보자고 아버지께 말씀드렸고, 아버지는 대안을 찾아보라고 하셨다. 남천동에서 부산의 부심지인 서면 쪽으로 가면, 대연동이 끝나고 문현동이 시작하는 지점 근처에 "부산 혜성학교"라는 장애인 특수 교육학교가 있었다. 나는 그 점에 착안하여, 오랫동안 교육계에 계셨던 작은아버지께 연락드려 혜성학교가 공작을 기부받을 의사가 있는지 타진해보시도록 청을 드렸다. 혜성학교는 크게 환영했고, 아버지는 처음 결정을 번복하시고 공작들을 기증하도록 허락하셨다.

공작들이 이주하는 날에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별로 날렵해보이지 않던 공작들이 혜성학교 선생님들이 잡으려고 하자, 그 좁은 공작 장 안에서도 이렇게 피하고 저렇게 피해서 도저히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공작이 약간의 부상을 당하는 불상사가 벌어진 이후에 공작들은 함께 철거된 공작 장과 함께 혜성학교로 떠나게 되었다. 몇 달 지나서 나는 혜성학교를 직접 방문해서 공작들이 건강하게 잘 살아있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했다. 공작들이 떠나고 나서 휑하니 남은 빈자리를 보신 아버지는, "공작 장까지 가져갈 필요는 없었는데..."라고 아쉬움을 표하셨다. 아마도 공작 대신 다른 "자식들"을 키울 생각도 있었을 것 같다.

위에 적은 내용을 영작해서 대학생일 때 활동하던 EHSA(English Hearing and Speaking Association)의 문집 EIDOS에 실은 적이 있다.

대학교 4학년 겨울 방학때 우리 가족 전체의 분위기가 심하게 깔아 앉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형제애에 대해서 훈계를 하셨다. 그래도 풀리지 않는 분위기가 계속 되었다. 하루는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내가 그 영작문을 번역해서 읽었다. 내 글이 가족들의 내려 앉은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끌어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끝까지 읽지 못했다. 눈물이 너무 많이 나와서 끝까지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중간에 가족들 앞을 물러날 수 밖에 없었고, 결국은 큰 형이 이어 받아서 그 영작문을 끝까지 번역해서 읽었다. 눈물을 훔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수건을 들고 방에서 나오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가 우시는 것을 그 때 이외에는 본 적이 없다...

댓글 2개:

  1. 이런글보면 가슴이 먹먹해지곤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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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버님은 막내인 제가 첫 직장을 잡고 나서 몇 달 뒤에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불효를 생각하면 요즘도 마음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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