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 아래 글은 영국 정치사상가 홉스(Thomas Hobbes)를 원용하여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평등 개념이 어떻게 도출되는지를 보여준다. 국가는 당연히 여자나 장애인과 같은 헌법에 규정된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해야 한다. 그것은 국가의 책무이다. 이것을 지키지 않는 국가에 대해서는 국민이 그 시정을 강력하게 요청해야 한다. 아울러서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더라도 사회적 약자라는 공감대가 생기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그들을 돕고 보호해야 한다.
(1) 홉스와 데카르트(Rene Descartes)
국가의 역할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능은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국가기능이 역할을 제대로 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약자를 보호한다는 측면에서는 아쉬움을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국가가 왜 약자를 보호해야 하느냐를 설명하려면 홉스의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참조하는 것이 한 방법일 것입니다. 홉스는 마키아벨리(Nicolo Machiavelli)와 함께 근대 정치학의 한 획을 긋는 영국의 정치사상가로서 자연상태와 사회계약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켰습니다. 우리의 귀에 익숙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란 유명한 말을 남겼죠.
홉스의 방법론을 이해하려면 프랑스의 데카르트를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합니다. 데카르트는 <방법 서설>에서 지식을 어떻게 축적할 것인가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연역적 방법론을 체계화시켰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Je pense, donc je suis. Cogito ergo sum.)”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설명하면 “생각은 존재의 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면 생각을 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해보면 됩니다. 이 명제는 (생각 => 존재)의 관계를 설파하는 것으로 대우명제는 (존재X =>생각X)이 되겠습니다. 참인 명제입니다.
이 명제가 사회과학 방법론에 미친 영향은 큽니다. 지식이 어떻게 축적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데카르트는 분석대상을 쪼개서 연구할 것을 제시했습니다. 인간만큼 중요한 분석대상도 없습니다. 인간을 인간 전체로 분석하자면 너무 복잡해서 인간에 대해서 잘 알 수 없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입장이었습니다. 군인으로 막사에 앉아서 화롯불을 쬐면서 데카르트는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결국 쪼개서 연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머리 즉 생각은 분리해버리면 인간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명제가 나온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데카르트는 이 모든 것을 생각으로 해결했습니다. 연역적 방법론입니다. (생각 => 존재)의 논리를 사회과학 전반에 적용시켜서 전체는 부분으로 쪼개서 분석하자는 주장이지요. 이것이 근대 실증과학 철학의 근간을 형성합니다. 어려운 것보다는 쉬운 것부터,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부터 분석해서 하나하나 쌓아 올리는 지식축적론을 주창한 것입니다. 이 방법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서구문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2) 자연상태와 국가 형성의 사회계약: 평등 구현
홉스와 데카르트의 연관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홉스는 아주 간단한 모형에서 시작하여 국가의 형성을 설명하려고 하였습니다. 즉, 통치기구도 없고 아무런 질서도 없는 가장 단순한 자연상태를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도 아주 단순하게 보았습니다. 홉스는 흔히 두려움(fear)과 쌍생아 관계라고 얘기합니다. 어릴 때부터 유약했던 홉스에게 인간의 존재, 즉 생존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는 해석이지요. 자연상태에서는 경찰도, 어떤 형태의 도와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자기 자신만을 믿을 수 있을 뿐이지요. 자구(self-help)가 유일한 생존법칙인 세계입니다.
이런 자연상태의 세상에서는 일단 힘이 있어야 합니다. 홉스의 원초적 인간관은 아시다시피 매우 부정적입니다. 자연상태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폭력과 지능밖에 없습니다. 남을 순수한 폭력으로 제압하든지, 돌멩이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지능을 동원) 물리칠 수 있어야 자신의 안전에 대한 약간의 안심을 할 수 있는 지경이니까요.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약자는 강자에게 당해야 되는 세상이고, 틈만 나면 남을 제거해야(궁극적으로는 자신만 남아야) 안전이 더 많이 확보되는 아주 불편한 인간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이런 자연상태였는지 홉스가, 또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홉스도 연역적 방법을 동원하여 일단 이론적으로 그런 모형을 만들어서 국가 형성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인간은 역시 생각하는 동물이라 위와 같은 불편함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시작합니다. 홉스에 따르면 자신이 가진 물리적 폭력을 대부분 포기할 것을 서로 약속하게 됩니다. “사회계약”을 이루어서, 국가라는 “괴물(성서의 리바이어던)”에게 남을 해칠 수 있는 능력을 포기하는 “각서”를 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국가는 관리자가 되고 사회계약 속의 인간들은 남의 생명을 해치지 못하도록 규정된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평등을 이룩합니다. 즉, 약자나 강자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왜 강자가 그런 계약을 맺게 되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절대적인 강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약한 인간들도 연합해서(혹은 머리를 써서) 힘센 사람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시민 혹은 국민은 누구나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된다는 당위성이 생깁니다.
(3) 룻쏘(J. J. Rousseau)와 사토리(Giovanni Sartori)의 평등 개념
홉스 이후의 룻쏘나 사토리 같은 정치사상가들의 주장을 같이 참조하면, 우리 헌법에도 명문화되어 있듯이 장애인과 여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는 국가가 더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이 제시됩니다. 그런 논의들의 출발점이 바로 홉스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즉, 자연상태에서 불평등한 인간들이 국가를 만들어서 일종의 “평등” 상태를 구현한다는 아이디어입니다.
그런데 룻쏘가 볼 때, 인간 사회가 평등하지 않은 것입니다. 룻쏘는 불평등을 자연적(육체적) 불평등과 정신적(moral) 불평등으로 나눴습니다. 다른 사회계약론자인 로크(John Locke)가 인간들이 사회계약을 자발적으로 맺는 것으로 파악했지만, 룻쏘는 특히 정신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들에게 강제적으로 사회계약을 맺게 하는 측면을 강조하게 됩니다. 룻쏘가 정치사상사에서 권위주의(authoritarianism)나 사회주의/공산주의 주춧돌을 놓은 것으로 평가되는 것은 이때문입니다.
그다음에 사토리는 평등 개념을 더 체계화시켜서 정치적 평등, 사회적 평등, 기회균등을 민주주의의 기본 평등 개념으로 제시합니다.
“완전한 정치적 평등(보통 선거권), 사회적 평등(계급 및 재산과 상관없는 동등한 지위와 배려), 그리고 기회의 균등(동등한 출발점과 진입)”
“Full political equality (as equal universal suffrage), social equality (as equal status and consideration regardless of class or wealth), and equality of opportunity (as equal access and equal start)”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홉스의 평등 개념에서 시작하여 룻쏘를 거쳐서 사토리까지 참조하면 국가는 사회적 약자를 더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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