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는 2학년에 올라가면서 문과와 이과를 나눴습니다. 한 학년에 반이 10개였는데, 이과가 7반, 문과가 3반이었습니다. 저는 주저 없이 문과를 선택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과를 택해서 의사가 되거나, 컴퓨터 관련 공학자가 되는 것이 더 적성에 맞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가끔 듭니다만, 그때는 외교관이 되고 싶어서 문과를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경로가 서울대 사회과학계열, 외교학과, 외무고시, 그리고 외교관으로 활동하는 것이었죠.
아버지는 제 선택에 전혀 조언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 자유를 존중해주신 것이고, 다르게 보면 구체적으로 조언하실 만한 정보가 없어서 그냥 방임하신 면도 있습니다. 제가 서울대 사회계열에 합격하고 외교학과로 들어간 후에서야 아버지는 제 진로에 대해서 회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길이는 법대로 갔어도 좋았을 텐데..."
미리 말씀하셨다면 제가 법대에 원서를 냈을지도 모르죠. 지금은 듣보잡(그 듣보잡은 아닙니다!)이지만, 고등학생일 때 제가 공부를 조금 했습니다.^^ 그때는 예비고사 제도였죠. 예비고사 전국수석이 부산 출신이었습니다. 그것도 집이 광안리였습니다. 제 고향이 광안리 아닙니까. 집에 확인전화가 오기도 했습니다. 혹시 수석 한 것 아니냐고... ㅋㅋㅋ 전국수석은 차치하고, 학교에서 수석도 못했습니다. 그래도 재수는 안 했습니다. 본고사 수학문제가 매우 어렵게 출제되었는데, 저는 운 좋게도 몇 문제를 풀 수 있어서 그럴 듯한 성적으로 사회계열에 합격했습니다.
유치원 때부터 친구인 의사가 있습니다. 의대로 진학하여 꿈을 이뤘죠. 서울에 가면 그 친구 병원에 꼭 놀러 갑니다.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수술 한 건 하고 나면 대부분은, 행복이 증가하는 사람이 한 명 탄생하거든요. 자신도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매우 뿌듯하게 생각합니다. 자칭 예술가죠. ^^
사회과학을 공부하면 그런 뿌듯함을 느끼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공부하면 할 수록 이것도 맞는 것 갖고, 저것도 옳은 것 같아서 뭐가 뭔지 헷갈릴 때가 흔히 있습니다. 인간사가 그렇지 않습니까.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해서도 보는 시각에 따라서, 서거가 되기도 하고, 사망도 되고, 자살이 되기도 하죠. 각자 마음과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까요.
사회과학 교수가 되면 교육과 연구에서 보람을 찾으면 됩니다. 사실, 직업 한도 내에서는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행복 찾기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연구는 반드시 어려운 전문 논문용 연구가 아니더라도, 예컨대 일반인을 위한 해설서라든지, 학생교육을 위한 훌륭한 교과서를 집필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도 있죠. 교육, 연구에 덤으로 자신의 아이디어가 정책에 반영되어 사회가 더 발전하면 더 좋은 것이죠. 그런 욕심이 없는 학자를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나라 출신 이공계 학자들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활동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회과학자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학위를 하고 최종 종착지는 우리나라 직장을 선택하죠. 저도 그랬습니다. 첫 직장은 미국 대학교였지만, 영 재미가 없었습니다. 영어로 교육하려니 기본은 가르치겠는데, 강의만 마치고 돌아서면 뭔가 허전한 것입니다. 우리말로 가르쳤으면 더 잘 설명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정년을 보장받으려면 허접한 논문 여러 개보다 똑똑한 자식 한둘이 더 위력을 발휘합니다.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설을 매우 잘 풀면, 미국 정치학 학술지 랭킹 1위인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에 논문을 게재할 수 있겠죠. 그런데 학술지 제목을 보십시오. American으로 시작합니다. 물론 미국 정치학회 학술지라서 그렇지만, 내용도 USA 위주입니다. 지금까지 그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우리나라 출신 학자는 한 손에 꼽습니다.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 학술지에 한 편 실으면 가문의 큰 영광이 됩니다. 신촌 모 대학의 제 친구가 오래전에 한 편 실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무조건 실력을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부러비~라고 말했습니다. ^^
미시간 촌구석에서 저 같은 듣보잡이 아무리 떠들어봐야, 워싱턴 DC에서는 들은 척도 안 합니다. 당연하죠. 미국에 학자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중에서 실력이 뛰어나고, 또 정책 입안자들이 고르고 골라서 학자들의 주장을 듣습니다. 극동 아시아에서 온 촌놈이 워싱턴 쪽에 먹히는 한 소리를 내놓는 것은, 저로서는 고양이가 쥐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수가 되면 상황은 급반전합니다. 왜일까요? 실력이 갑자기 좋아져서일까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학자 숫자가 적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인구가 4천 5백만 정도죠. 미국은 약 3억입니다. 대충 7배라고 합시다. 미국 학자수는 7배보다 훨~씬~ 많습니다. 대학교 수만 비교해도 뻔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게다가 소위 일류 대학교라는 학교로 범위를 좁히면, 큰 방 하나면 해당 정치학자 모두 모을 수 있습니다. (물론, 소위 일류대학 교수라고 해서 더 실력이 좋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지금은 이전보다 경쟁이 제법 생겼다고 하지만, 학자 숫자 자체가 적으면 제대로 된 경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대학교 교수 숫자는 더 늘어나야 합니다. 대운하니, 4대강이니, 그런 데 돈을 쓸 것이 아니라, 일부라도 비정규직 대학교원을 정규직으로 바꾸는 데 돈을 쓰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학자들 사이에 경쟁도 생기고, 지식의 축적이 일어나서, 장기적으로 우리나라 발전에 도움이 됩니다. 돈 쓰고 환경 파괴하는 것과 비교해 보십시오. 얼마나 좋습니까.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는 주로 연구와 강의를 통해서 자신의 철학과 주장을 관철합니다. 그렇지만 때에 따라서 신문에 시론을 쓰든지, 일반인을 대상으로 책을 내서 사회를 상대로 홍보하기도 하죠. 이럴 때,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해주면 더 행복해지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맥이 탁 풀릴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장은 올곧은데 비주류가 될 때입니다. 많은 사람이 참 옳은 말이라고 칭찬을 해주는데, 현실 정책으로는 반영이 되지 않을 때입니다. 이럴 때도 신이 난다면, 무골호인이죠. 성인의 반열에 올라도 됩니다. 그런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바람직한 사회는 그런 분이 비주류가 되지 않는 사회일 것입니다. 그래야 사회과학을 제대로 하는 재미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두서없이 주저리주저리 했습니다. ^^
(사진 출처: 서울대 경제학부 이준구 교수님께서 직접 촬영하신 것입니다.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그런 분이 비주류가 되지 않는 사회, 그리고 비주류의 의견도 존중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
답글삭제Hyun님 말씀이 맞습니다. 자유주의에서는 비주류도 존중해야 합니다. 권위주의만 아니라면 말입니다.^^
답글삭제박사님, 안녕하세요? 박사님 블로그에 처음 댓글 남깁니다. 앞으로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답글삭제>>이럴 때도 신이 난다면, 무골호인이죠. 성인의 반열에 올라도 됩니다.
그럴 때 신이 나는 사람은 성인이라기 보다는 악인에 가깝지 않을까요. ^^;
윽.. 구글 블로그는 댓글을 삭제해도 흔적이 남네요.
답글삭제오타 내지 않도록 주의해야겠군요.
홍기호님, 어서 오세요. 앞으로 자주 놀러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답글삭제안박사가 말씀하시는 비주류가 바로 저를 마음에 두신 건 아니신지요?
답글삭제어디에 가든 늘 형편없는 minority라는 걸 느낍니다.
요즘 많은 글이 선생님으로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답글삭제박사님! 혹시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에 글을 실으신 분이 혹시 kws 교수님 말씀하시는건가요?ㅋ
답글삭제연세대 국제학대학원 모종린 교수입니다. 합리적 선택이론을 방법론으로 활용했습니다. 스탠포드 경영대학에서 정치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했습니다. 오스틴 텍사스대학 정치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했고, 제가 아는 우리나라 학자 중 영어를 가장 잘 구사합니다.
답글삭제박사님, 글 잘 읽었습니다. 근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겼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학진학률은 거의 세계1,2위를 다투고 있고, 대학수는 지나치게 많다고 해서 구조조정에 돌입한 상태인데, 그렇다면 교원 수 자체는 상대적으로는 많을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요?
답글삭제SapereAude님이 좋은 질문을 하셨네요. 저도 정확한 통계를 찾아봐야겠습니다만, 일단 추측을 말씀드릴게요. 더 정확한 설명을 해주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답글삭제미국은 community college를 포함한 대학 종류가 다양해서 상대적으로 학생 수가 많고(나이 들어서도 대학에 진학), 대학원 학생도 많죠. 그것을 고려해야 하고, 우리나라는 특유의 쏠림 현상이 있어서, 세칭 좋다는 대학은 학생 대 교수 비율에서 학생 수가 월등히 많을 겁니다. 또한 미국 대학교수는 강의 부담이 우리나라처럼 많지 않습니다. 이것도 학생 대 교수 비율에 영향을 미치죠. 저는 미시간 주립대에서 첫 1년은 3 과목 가르쳤습니다. 2년차부터는 4과목 가르쳤고요. 한 학기에 두 과목이죠. 연구 열심히 해서 정년보장 받으라는 것이죠. 연구만 하는 교수급 인력도 대학에 많고요. 그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네요. 번개같이 스쳐 지나가는 생각은 그렇습니다. 대충 맞을 것 같습니다.^^
이와 더불어 요사이 한국대학은 무조건의 SSCI급 논문게재를 요구하고 있어 논문의 질보다는 수량을 채우는 데 급급한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SSCI급에 해당하는 저널에도 천차만별이거든요. 제가 몸 담고 있는 일본대학에서도 논문게재를 중요시 여기기는 하지만 한국만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선 일본저널에 실리는 것도 중요하게 카운트되고 논문보다는 단행본 출간, 그리고 더욱 중요시 여기는 것은 학생들과 직접 대면하는 수업의 질적 향상이라고 하더군요. 물론 열공해서 논문을 많이 내는 것도 중요하지요.. 그냥 지나가면서 넋두리 좀 해 보았습니다.^^
답글삭제김 교수, 어서 오세요. 우리나라에서 정확하게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들리는 이야기로는 분명히 개선해야할 점이 제법 있는 것 같더군요. 김 교수 말대로 양에 너무 치중하는 모양입니다.
답글삭제교육도 중요하지요. 교수 직업의 특성을 딱 두 단어로 핵심을 요약하면, 연구와 교육이니까요.
열심히 해서 훌륭한 논문도 발표하고, 학생들 평가도 잘 받는 교육자가 되길 빕니다.
모종린 교수님이시군요.
답글삭제모 교수님은 대학원 교수님이셔서 수업을 들어볼 기회가 없었네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들어봐야겠습니다.
정치학 관련 글 항상 흥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아! 저는 1년 전 쯤에 메일 드렸었던 아드님 친구입니다)
ㅎㅎㅎ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죠? 열공하셔서 정치학 내공에 큰 발전이 있길 빕니다. 모 교수 강의는 잘 하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들어보지 못해서... ㅋ 논문 발표와 영어는 아주 잘 합니다. 혹시 캠퍼스에서 만나게 되면 제가 안부 물었다고 전해주세요. 연구실에 놀러 가세요. 사람 참 좋습니다. ^^
답글삭제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드님과는 facebook에서 몇 일전에 친구가 되었습니다ㅎㅎ당연한 이야기지만 초등학교 때에 비해 몸이 엄청 좋아졌네요. 제가 지금 휴학하고 신림동에 들어와있지만 후에 학교에 돌아가면 박사님 덕분에 교수님들께 접근(?)할 기회가 생겼네요 ㅋㅋ지금은 무늬만 정외과생이지만-_- 많이 배워서 진정한 정외과생으로 거듭나도록 하겠습니다^^
답글삭제아들과 다시 연락이 되었다니 저도 기쁩니다. 서로 좋은 정보 많이 교환해서 도움이 되는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바랍니다. 한글도 잘 읽으니 페이스북에 한글로 메모를 남겨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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