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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25일 토요일

[자유] 교수-학생 소통의 추억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7/01, http://jkl123.com/)

미시간주립대 정치학과 교수 시절(1994~1997)부터 저는 인터넷 소통을 했었습니다. 본격적인 인터넷 소통은 서울대 국제지역원 교수로 부임한 1997년부터입니다. 인터넷에서 교수를 "괴수"로 부르더군요.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하루는 학생들이 많이 이용하는 어느 챗방에서 회원들이 귓속말을 하는 것을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딴에는 귓속말로 보냈는데, 명령어를 잘못 사용하여 화면에 떠버린 겁니다. "앗, 괴수닷! 도망가자!" 이렇게 말입니다. 저는 저으기 당황했습니다. 그 당시는 인터넷의 속성을 잘 몰라서 제 신원을 공개적으로 밝힌 상태였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교수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죠.

교수라고 밝힌 것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았어요. 대접 받으려고 그런다고. 제 뜻은 그것이 아니었거든요. 아무 생각 없이 저를 소개하려고 했던 것인데, 대부분이 학생이었던 회원들이 기분 나빠진 것입니다. 스트레스 풀려고 게시판에 들어왔는데, "괴수"를 다시 보게되서 기분 잡쳤다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저는 "괴수"라는 표현을 읽으니 순간 기분이 참 나쁘더군요. 학생의 예의 문제를 떠나서 교수를 괴수로 표현할 정도면 문제가 심각해도 한참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토론 발제문을 작성했습니다. 그 발제문 제목이 "교수? 괴수?"입니다. 제 주장은 저는 교수이지 괴수는 아니라는 것이었고, 대부분의 회원은 괴수가 맞다는 것이었죠. 그 때 제가 느낀 것은 제가 맞는 부분도 있지만, 우리나라 교육계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었습니다. 학생에게 돌아갈 연구비를 교수가 가로채고, 프로젝트를 타와서 끊임 없이 학생들에게 맡기고 교수는 외판사원처럼 밖으로 돌고, 보다 더 부려 먹으려고 학생 졸업을 늦추는 등, 괴수같은 짓을 많이 한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더군요. 발제를 한 제 체면도 있고 해서, 그래도 인문계는 이공계보다 덜 하지 않겠냐는 애매한 추정을 하면서 그 토론을 끝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저를 회원들이 괴수라고 불러도 전혀 감각이 없게 되었습니다.^^

학생들과 더 소통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뭔지 몰라도 교수 따로 학생 따로 논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서 저는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연구실에 제 학생들을 초청해서 직접 원두커피를 타주고 얘기를 나누기도 했죠. 커피는 항상 타 놓을테니 언제든지 연구실로 놀러오라고도 해봤구요. 대학원이라서 함께 술도 많이 마셨습니다. (어이쿠, 이 교수님께서는 술을 싫어 하시는데... ㅎㅎㅎ 괜찮습니다. 요즘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습니다.) 초기 제자들은 제 친구처럼 대했죠. 그래도 학생들의 마음을 열기가 참 힘들더군요. 쌍방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복잡하겠지만 그 당시 제가 대충 추정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서울대 국제지역원에 들어올 정도면 우리 사회에서 성공한 사례라고 보는 것이 맞죠. 그렇다면 초중고대까지 얼마나 많은 관문을 잘 통과했겠습니까? 점수 따는 데는 도사들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전 경험에서 무엇을 느꼈을까요. 선생이나 교수는 교육 현장에서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교육자로서 권위에 입각한 권력이죠. 그 권력자에게 잘 보이는 방법을 잘 터득했겠죠. 선생이나 교수 앞에서 실수하면 점수 잃는다는 처세술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앞에서는 극도록 조심하게 되고, 제가 아무리 마음을 열어도 짝쿵이 맞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유교문화적, 혹은 권위주의적 마인드입니다. 제자들은 대부분 범생이들이라고 보면 되죠. 우등생 아니면 들어오지 못 하는 곳이었습니다. YS 정부에서 국제화의 기치를 내걸고 많은 예산을 확보하여 대학교에 지원금을 별도로 보내서 만든 국제전문인력 양성기관이었거든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특혜가 많았습니다. 어떤 학교는 해외연수를 보내주고, 그래도 돈이 남아서 노트북 컴퓨터를 한 대씩 사주고 그랬습니다. 서울대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해외연수를 거의(성적에 따라 일부는 부담) 무상으로 보내줬죠. 그렇게 혜택이 좋으니 그 당시 최우수 인력들이 모였다고 보면 됩니다. 막바로 영어 강의를 해도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사회 전체의 권위주의적 분위기에 범생들은 어떻게 적응했겠습니까? 깍듯한 예의 하나는 끝내주는 것입니다. 물론 원론적으로는 예의를 모두 차려도 제대로 소통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조금 희소하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제대로 된 소통이 가능했겠습니까? 철벽이었습니다. 저는 강의실 밖에서도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크게 두 가지를 추진했습니다.

하나는 스킨십을 최대한 시도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얘기한 커피 타주기나 함께 술마시기가 그 예가 되겠습니다. 일대 일 면담도 참 많이 했습니다. 그 다음에 인터넷 소통을 시도했습니다. 국제지역원이 1997년에 설립되었습니다. 지금은 국제대학원이죠. 제가 PC와 인터넷을 빨리 접한 덕분에 전산실과 도서관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 때 직원들과 정말 재미있게 일을 했습니다. 전산실 관리자, 그래픽 디자이너, 사서 책임자, 그리고 사서 세 명이었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도형 군에게 빼빼로데이 쵸콜릿 배달하기 미션 대상이었죠.)

제 주도로 대학원 홈페이지를 짜게 되었고, 제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이 게시판을 통한 소통이었습니다. 익명 보드를 만들었습니다. 사실 교육 현장에서 익명 보드는 말이 안됩니다. 미국 어느 대학 홈페이지를 들여다봐도 익명 보드는 커녕 게시판 자체가 없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자유주의의 대표적 국가인데 왜 그렇겠습니까? 미국에서는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만 생긴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학생들이 제대로 된 의견을 학교나 교수들에게 아무 피해를 받을 염려 없이 전달할 수 있는 소통 채널이 안정적으로 확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것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저는 판단했습니다. 게다가 권위주의적 사회 분위기도 있구요. 그래서 익명이라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차선책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익명 보드의 관리자는 당연히 전산 담당인 제 몫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준구 교수님처럼 인터넷으로 학생들과 의견교환을 많이 했습니다. 국제지역원이 막 출범한 시점이라서 학생들의 건의도 대학원을 빨리 정착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아이디어도 있었고, 학생들의 불만을 솔직하게 전달받을 소통 통로도 필요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익명으로 했던 것이죠. 요즘은 모르겠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 분위기에서 학생들에게 "가면"을 하나씩 나눠주지 않으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렇게 머리가 좋은 학생들의 경우, 교수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괜히 한 마디 잘 못해서 찍히면 본인만 손해라는 것을 더 잘 알고 있었겠죠. 허심탄회하게 학생들이 의견을 개진해보도록 익명 보드가 학생들에게 제공되었습니다. 제가 교수로서 활동한 기간이 학기 수로 13 학기인데 별로 내세울 것이 없지만 그 당시 소통 노력은 제법 잘 된 것이었다는 생각은 아직 갖고 있습니다.

지금 떠오르는 예로, 국제지역원 전관 금연지정 소동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학생들에게 흡연실을 제공했는데, 그래도 비흡연 학생들의 민원이 생겼습니다. 문 틈으로 담배 연기가 새나와서 간접흡연이 된다는 주장이 게시판에 마구 올라왔던 것입니다. 사실 비흡연자에게는 담배 냄새가 조금만 나도 불쾌할테니까 그 주장은 타당해보였습니다. 그래서 교수회의에서 전관 금연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번에는 흡연자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참, 조그만 대학원에서 그러니, 비정규직같은 큰 쟁점에 대한 사회 갈등은 안봐도 비디오가 아니겠습니까^^) 익명 게시판에서 갑론을박이 시작되었고 결국 게시판 담당 교수인 제가 토론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죠. 역시 소통은 좋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학교의 입장을 정확하게 전달하면서 전관금연의 당위성을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흡연자들은 처음에 불만이 많았는데 제 설명을 듣고 분위기가 차분해졌습니다. 결국 원래 계획대로 건물 외부에 학생들용 파라솔과 흡연 편의시설이 갖춰지면서 전관금연은 실시되었습니다. 사회 갈등은 이렇게 풀어야 되는데, 우리 정부는... 이하 생략입니다. ㅋ .

지금까지 읽으신 분은 제가 무슨 큰 사명감에서 그런 일을 한 것으로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좋아했습니다. 저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미국 사람들과 얘기하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아직까지도 우리말이 훨씬 편해서 캘리포니아에 서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우리나라에 와서 인터넷 소통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이준구 교수님이나 한순구 교수님과 닮았다고 보셔도 되겠습니다. 교수님께 학생들은 고맙게 생각하셔야죠. 또 잘 활용하시면 자다가도 떡이 생깁니다.^^

주저리 주저리 글이 길어졌네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후기 1: 지금 상황으로는 익명 보드가 학교에서 필요 없다는 생각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 막을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할 수 있어서 그 득보다는 실이 더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이 험하죠.

후기 2: 학생들과 친하게 지낸 덕분인지 제가 국제지역원을 떠날 때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나무 두 그루를 대학원 건물 옆에 심어줬습니다. 이른 바, 안병길 사과 나무, 복숭아 나무입니다. 그 나무들은 잘 자라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ㅜ.ㅜ

댓글 1개:

  1.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덧글을 펐습니다.)

    세헌
    (2009/07/01 22:57) 아....
    제가 발가락만 안 다쳤어도
    두 나무가 잘 자라고 있는지 인증샷 찍어드릴텐데.....ㅠㅠㅠ

    안병길
    (2009/07/01 22:59) 세헌씨가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 그 이후로 관악에 개발의 바람이 불어서 없어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흠... 이번에는 발가락, 나아라, 얍.

    와사비
    (2009/07/01 23:36) 아.. 전혀 다른 맥락의 이야기이지만 저는 학생 시절 생각나는 선생님도 안계시고 기본적으로 선생님들을 굉장히 싫어했던 거 같아요.. 대딩때 교수님들을 향한 마음도 비슷했던 거 같습니다. 저같은 타입의 학생들이 더 다루기 힘이 드는 것은 겉으론 아무런 티를 내질 않고 고요하게 경멸을 날립니다..;;; 그런 태도를 갖게 된데에는 무언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경험에 의한 어떤 반응이 몸에 베어있었기 때문인거 같아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 공부를 해서 그런지 몰라도 선생님들이라 불리는 분들의 모습에서 사람을 보게 되는 일이 왕왕있어요. 학원 선생님부터.. ㅎ

    이준구 교수님 만나뵈었던 일, 안박사님 처럼 뜨거운 소통주의자를 보는 현재 모두 저에겐 굉장히 강한 인상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말씀드립니다. 덕분에 어릴때부터 마음속에 자리잡았던 음지괴물이 말라 죽어가는 거 같네요. 이 문제만큼은 저 같은 타입이 가장 변하기 힘든데 말이죠.. 감사드립니다..

    김윤
    (2009/07/02 00:10) 안병길 사과나무, 복숭아 나무 ..
    단서만 주시면 제가 인증샷 찍어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산책을 핑계로 심심하면 캠퍼스 내를 돌아다니는지라... ^^ (근데 박사님 떠나실 때 심으신 나무면 박사님도 모양새를 지금 모르시는..건가요? ^^:;)

    김윤
    (2009/07/02 00:11) 이교수님, 한교수님, 안박사님 같은 분을 이렇게 뵐 수 있는 것.. 정말 매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럴 때 사극에 나오는 "하해와 같사옵니다."써야하는 건가요? ^^

    소민우
    (2009/07/02 00:41) 작년 이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었던
    "상항의 안박사님은 안병길 박사님을 지칭하는 말인가"의 해석문제가 생각나네요......이준구 교수님의 엄정한 유권해석으로 일단락이 되었긴 했지만요

    그나마 야무진 ㄱㄷㅎ님이니 망정이지 ㅅㅁㅇ더러 그일을 시켰다면 배꼽간수에 신경써야 할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는 ㅋㅋㅋ

    안병길
    (2009/07/02 00:55) 와사비님의 심정이 우리 교육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제가 2000년 초에 통일부 자문위원을 할 때 공!짜로 금강산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뭐, 명목은 선상 자문회의였지만 그 정도 자문이야 누워서 떡 먹기였죠. "에, 대북 관계는, 잘 하면 됩니다." ㅋㅋㅋ
    그 때 금강산 관광 코스 중간에 서 있던 안내원과 제법 오래 얘기를 나눴는데, 같이 갔던 자문위원들이 제가 위험한 짓 한다고 말리고 그러던군요. 그래도 정치학자로서 너무나도 좋은 인터뷰 기회가 왔으니 어떻게 흘릴 수 있었겠습니까. 와사비님 말씀대로 저같은 소통주의자가 말입니다. 그 달덩이 같은 미인 안내원은 선생님 얘기를 많이 하더군요. 초중생일 때 선생님 댁에 많이 놀러 갔다고... 딱 들어보니 우리 60년대, 70년대 초에 제가 겪었던 그런 선생님들 얘기였습니다. 요즘 우리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제 후배같이(일전에 허락받고 후배글을 올린 적이 있죠) 억울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조금 삭막하다는 감상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교조도 나오고, 기타 등등 일이 그렇고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얘기하면 재미있나요? 와사비님이 저를 소통주의자라고 불러줘서 "고독한 자유주의자의 소통"이라는 글을 하나 적어볼까 하는데요. 여러분들이 싫어 하는데, 연속으로 그런 글을 올리면 그것도 방종이 되거든요.^^

    2004년에 두 그루 중 한 그루는 확인하고 사진을 찍어둔 것이 있습니다.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다른 한 그루는 무슨 공사를 하는지 펜스 안에 들어 있는 것같다고 같이 간 제자가 그럽디다. 그 제자는 지금 유엔본부에서 일하고 있는데 나무 심기 아이디어를 짜낸 장본인이었죠. 저는 너무 고마왔습니다. 제가 쓸 수 있는 물건을 선물했다면 그것이 몇 년을 가겠습니까? 나무는 몇 백년 살 수도 있죠.^^

    와사비
    (2009/07/02 01:14) 저 자려고 했는뎅 왜 글쓰게 만드세용? ㅋ

    저도 기억의 한 조각을 꺼내보면 일전에 일본에 갔을때 암튼 현지분들 배려로 조선학교엘 가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전 아는게 없는지라 일본의 조선학교가 교육문제에 있어 어떤 이상적 지향점을 세계에 제시한다는 걸 몰랐었어요. 다른 분들때문에 방문일정이 친구에게 있다고 하기에, 같이 갈래 묻길래 구경갔죠..ㅎㅎ

    그곳의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인간적인 교류를 하더랍니다. 전인교육의 모습을 저는 거기서 봤었어요. 전 졸업식 후 교복 찢어버린 학생인데요(과격하죠?;;; 근데 얌전한 학생이었어요..), 그 친구들은 졸업식날 엉엉 울더군요. 교복을 찢어버렸던 것을 나중에 후회한것은 이대서 하는 교복파티 못간다는 점 하나뿐이었어요.;; 지금은 좀 후회됩니다..

    한국에서 손님들왔다고 소조활동 시간에 피땀으로 노력한 예능의 한자락을 저희 앞에서 선보여주는 학생들 모습에 마음이 움직여져서 건물밖에서 엉엉 울었더랬어요. 그때 스스로에게 물어봤던 것은 난 왜 저 시기에 아무 열정도 없었고, 사랑하는 사람도. 친구도, 선생님도 아무것도 갖질 못했지라는 질문뿐이었습니다.

    전 정말 행복하지 못하고 가난한 과거를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ㅎ

    박사님 글은 모두 재미있고 마음을 움직입니다. 내일 또 다 읽어볼거에요~ 근데 제가 댓글 잘 안남겨도 그러려니 하세요.. 저는 진짜 여기 아니곤 글이나 댓글 전혀 안쓰거든요.. ㅡ ㅡ;



    안병길
    (2009/07/02 05:36) 와사비님, 재미있었다니 다행입니다. 서울에서 만나면 더 재미있는 얘기도 들려 드릴게요. 제 인생 경험이 좀 다양합니다.

    안병길 사과나무 찾아서 첨부했습니다.
    국제지역원 신관 옆에 있네요.^^
    2004년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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