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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3일 일요일

[수필] 컴퓨터와 인터넷과의 만남

1. 컴퓨터와 만나다.

제가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처음 접해본 것이 학부 4학년 겨울방학 때 학교에서 개설한 포트란 강좌를 들었을 때였습니다. 천공기로 카드에 구멍을 내어 제출하면 큰 출력지에 결과가 프린트되어 나오는 것이 매우 신기하더군요. 포트란 프로그래밍에 재미를 붙여서 강좌 마지막에는 같이 수강한 친구들과 만능 달력을 누가 더 짧게 짜는지 경쟁하기도 했죠. ^^

그다음에 컴퓨터를 구경한 것이 1987년에 박사과정 유학을 갔을 때였습니다. 옆의 사진과 같은 IBM PC 사용법을 가르쳐 주더군요. 8086 혹은 8088 CPU에 도스 디스켓을 넣어서 부팅하는 초기 PC였습니다. 집에 PC를 장만한 것이 1988년이었습니다. 그때 이미 80286을 거쳐서 80386도 나왔는데, 286과 386의 짬뽕 보급형인 386SX를 거금을 들여서 장만했었습니다. 유학생이 간이 부었었죠. 그 PC를 사게 된 동기는 아내가 전공을 바꾸면서 집에서 메인 프레임에 접속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공부하려니 꼭 필요했던 것이죠. 그런데 아내 공부보다는 제 장난감으로 더 많이 이용했던 것 같습니다. 한 때는 프로그래밍을 정식으로 배워볼까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는데, 그렇게 하면 이것도 저것도 안 될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ㅋ

제가 공부한 로체스터 정치학과는 경제학에 가까운 정치학을 주로 가르쳤습니다. 제 학위논문에 게임이론을 심각하게 적용했기 때문에 수식이 많아서 보통 워드프로세서로는 작성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공계 학생들이 사용하는 LATEX으로 논문을 썼습니다. 정치학 학위논문이지만 수식과 증명이 1/3 정도 됩니다. 주로 좌변과 우변 크기를 비교하는 간단한 수식이지만, 수식은 수식이라서 복잡했죠. ^^

컴퓨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제가 더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정치학을 공부하다 보면 이 주장도 맞는 것 같고, 저 이야기도 맞는 것 같아서 허무하게 느낄 때가 잦습니다. 애매모호한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죠. 그것이 정치학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 반면에 컴퓨터와 놀면 입력과 출력이 딱딱 맞아떨어져서 명쾌한 기분이 들죠. 출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찾아서 해결하면 되니 책임 소재도 분명한 편이고요.

2. 인터넷과 만나다.

그런 장점에 인터넷까지 더하면 금상첨화가 되죠. 1994년에 첫 직장인 미시간 주립대에 부임하니 당시로는 최고급 PC와 커다란 모니터가 제 책상에 덩그렇게 놓여 있더군요. 좋은 장난감이 하늘에서 떨어졌던 것이죠. WWW라는 것이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인터넷 바다를 누볐습니다. 그때부터 인터넷 소통에 눈을 뜨게 되었고, 1995년에는 본격적으로 인터넷 토론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개인 홈페이지도 그때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인터넷 BBS가 처음 도입된 것이 제가 알기로 1991년이었습니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KAIST의 아라 BBS와 서울대와 KAIST 이공계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통신의 무료 서버에 개설한 KIDS(Korea Internet Dream Space, http://kids.kornet.net/)가 최초 BBS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우연한 기회에 KIDS를 알게 되어 가입했고 지금까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KIDS는 지금도 웹으로는 글을 올릴 수 없고, 텔넷으로 접속해서 올리는 구닥다리 방식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동호회로 운영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 같습니다.

1995년에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인터넷 신문을 테스트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자 여론광장도 만들었죠. 미시간 촌구석에서 고국 소식도 고팠고 신기하기도 해서 두 인터넷 신문의 테스트 서비스를 애용했습니다. 여론광장에서 토론도 많이 했죠. 급기야 디지털 조선일보에서 저에게 연락하여 인터넷 신문 사용소감을 적어 달라고 하더군요. 요즘 같으면 거절했을 텐데 그때는 고국 소식을 웹으로 편하게 접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기도 하여 감상문을 적어줬습니다. 디지털 조선일보 개통 축하 메시지를 제가 적었던 셈이죠. 찾아보니 그 흔적이 아직 남아 있네요. http://pr.chosun.com/digital/news_951116_1.html 끝에 제 글을 붙여 놓았군요. 종이 신문에도 실렸습니다.

3. 서울대 국제지역원 전산실과 도서관

1997년 서울대에 부임한 이후로 컴퓨터와 인터넷은 제 일상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재직하고 있던 대학원 원장실을 지나치는데 전산실 웹 매스터가 원장 PC를 붙들고 낑낑거리고 있더군요.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들여다보니 제가 고칠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고치고 있었는데, 원장이 방에 들어오면서 그 장면을 본 것입니다.

(원장) "안 교수가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직원) "교수님이 원장님 PC를 고치고 계십니다."
(원장) "아, 그래요? 안 교수가 그런 재주를 갖고 있단 말이죠..."
며칠 뒤 원장이 조용히 저를 부르더군요. 전산실 책임교수를 맡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산실에 웹 매스터 한 명과 그래픽스 디자이너 한 명, 그렇게 두 직원이 있었습니다. 원장이 책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그래픽스 디자이너를 채용했더군요. 재미있어서 신나게 일했습니다. 대학원 설립 초창기라서 학생 컴퓨터실도 만들어야 했고, 학교 홈페이지도 구축해야 해서 일이 많았죠.

조금 지나니 원장이 저를 또 불렀습니다. 이번에는 도서관도 함께 맡으라고 했습니다. 도서관에는 사서가 세 명 있었고, 디지털 도서관 구축을 계획하고 있어서 컴퓨터를 조금 아는 교수가 맡는 것이 좋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맡았습니다. 일복이 터졌었죠. 우리나라는 교수가 연구와 교육 이외에 해야 하는 잡일이 참 많더군요. ㅜ.ㅜ

조금 더 지나서 책임자급 사서도 채용하여 전산실 두 명, 도서관 네 명, 모두 여섯 명의 직원과 재미있게 일했습니다. 지금도 같이 일했던 직원 세 명이 아직 그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찾아가면 반갑게 맞아줍니다. 그때 열심히 일해준 것이 고마워서 안부인사를 그분들에게 가끔 보내죠. 제가 컴퓨터를 알아봤자 아마추어였죠. 뭘 그렇게 잘 알았겠습니까. 아는 척하면서 직원들이 신명나게 일할 수 있도록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는 것이 정확한 평가가 되겠습니다.

아무튼, 컴퓨터와 인터넷에 대한 제 개인적인 관심이 학교에서 공부할 때나 일할 때 다양한 사람과 세상을 만나게 해줬던 것 같습니다. 유익한 경험이었습니다.

2009년 7월 25일 토요일

[자유] 교수-학생 소통의 추억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7/01, http://jkl123.com/)

미시간주립대 정치학과 교수 시절(1994~1997)부터 저는 인터넷 소통을 했었습니다. 본격적인 인터넷 소통은 서울대 국제지역원 교수로 부임한 1997년부터입니다. 인터넷에서 교수를 "괴수"로 부르더군요.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하루는 학생들이 많이 이용하는 어느 챗방에서 회원들이 귓속말을 하는 것을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딴에는 귓속말로 보냈는데, 명령어를 잘못 사용하여 화면에 떠버린 겁니다. "앗, 괴수닷! 도망가자!" 이렇게 말입니다. 저는 저으기 당황했습니다. 그 당시는 인터넷의 속성을 잘 몰라서 제 신원을 공개적으로 밝힌 상태였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교수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죠.

교수라고 밝힌 것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았어요. 대접 받으려고 그런다고. 제 뜻은 그것이 아니었거든요. 아무 생각 없이 저를 소개하려고 했던 것인데, 대부분이 학생이었던 회원들이 기분 나빠진 것입니다. 스트레스 풀려고 게시판에 들어왔는데, "괴수"를 다시 보게되서 기분 잡쳤다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저는 "괴수"라는 표현을 읽으니 순간 기분이 참 나쁘더군요. 학생의 예의 문제를 떠나서 교수를 괴수로 표현할 정도면 문제가 심각해도 한참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토론 발제문을 작성했습니다. 그 발제문 제목이 "교수? 괴수?"입니다. 제 주장은 저는 교수이지 괴수는 아니라는 것이었고, 대부분의 회원은 괴수가 맞다는 것이었죠. 그 때 제가 느낀 것은 제가 맞는 부분도 있지만, 우리나라 교육계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었습니다. 학생에게 돌아갈 연구비를 교수가 가로채고, 프로젝트를 타와서 끊임 없이 학생들에게 맡기고 교수는 외판사원처럼 밖으로 돌고, 보다 더 부려 먹으려고 학생 졸업을 늦추는 등, 괴수같은 짓을 많이 한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더군요. 발제를 한 제 체면도 있고 해서, 그래도 인문계는 이공계보다 덜 하지 않겠냐는 애매한 추정을 하면서 그 토론을 끝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저를 회원들이 괴수라고 불러도 전혀 감각이 없게 되었습니다.^^

학생들과 더 소통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뭔지 몰라도 교수 따로 학생 따로 논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서 저는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연구실에 제 학생들을 초청해서 직접 원두커피를 타주고 얘기를 나누기도 했죠. 커피는 항상 타 놓을테니 언제든지 연구실로 놀러오라고도 해봤구요. 대학원이라서 함께 술도 많이 마셨습니다. (어이쿠, 이 교수님께서는 술을 싫어 하시는데... ㅎㅎㅎ 괜찮습니다. 요즘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습니다.) 초기 제자들은 제 친구처럼 대했죠. 그래도 학생들의 마음을 열기가 참 힘들더군요. 쌍방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복잡하겠지만 그 당시 제가 대충 추정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서울대 국제지역원에 들어올 정도면 우리 사회에서 성공한 사례라고 보는 것이 맞죠. 그렇다면 초중고대까지 얼마나 많은 관문을 잘 통과했겠습니까? 점수 따는 데는 도사들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전 경험에서 무엇을 느꼈을까요. 선생이나 교수는 교육 현장에서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교육자로서 권위에 입각한 권력이죠. 그 권력자에게 잘 보이는 방법을 잘 터득했겠죠. 선생이나 교수 앞에서 실수하면 점수 잃는다는 처세술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앞에서는 극도록 조심하게 되고, 제가 아무리 마음을 열어도 짝쿵이 맞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유교문화적, 혹은 권위주의적 마인드입니다. 제자들은 대부분 범생이들이라고 보면 되죠. 우등생 아니면 들어오지 못 하는 곳이었습니다. YS 정부에서 국제화의 기치를 내걸고 많은 예산을 확보하여 대학교에 지원금을 별도로 보내서 만든 국제전문인력 양성기관이었거든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특혜가 많았습니다. 어떤 학교는 해외연수를 보내주고, 그래도 돈이 남아서 노트북 컴퓨터를 한 대씩 사주고 그랬습니다. 서울대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해외연수를 거의(성적에 따라 일부는 부담) 무상으로 보내줬죠. 그렇게 혜택이 좋으니 그 당시 최우수 인력들이 모였다고 보면 됩니다. 막바로 영어 강의를 해도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사회 전체의 권위주의적 분위기에 범생들은 어떻게 적응했겠습니까? 깍듯한 예의 하나는 끝내주는 것입니다. 물론 원론적으로는 예의를 모두 차려도 제대로 소통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조금 희소하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제대로 된 소통이 가능했겠습니까? 철벽이었습니다. 저는 강의실 밖에서도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크게 두 가지를 추진했습니다.

하나는 스킨십을 최대한 시도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얘기한 커피 타주기나 함께 술마시기가 그 예가 되겠습니다. 일대 일 면담도 참 많이 했습니다. 그 다음에 인터넷 소통을 시도했습니다. 국제지역원이 1997년에 설립되었습니다. 지금은 국제대학원이죠. 제가 PC와 인터넷을 빨리 접한 덕분에 전산실과 도서관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 때 직원들과 정말 재미있게 일을 했습니다. 전산실 관리자, 그래픽 디자이너, 사서 책임자, 그리고 사서 세 명이었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도형 군에게 빼빼로데이 쵸콜릿 배달하기 미션 대상이었죠.)

제 주도로 대학원 홈페이지를 짜게 되었고, 제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이 게시판을 통한 소통이었습니다. 익명 보드를 만들었습니다. 사실 교육 현장에서 익명 보드는 말이 안됩니다. 미국 어느 대학 홈페이지를 들여다봐도 익명 보드는 커녕 게시판 자체가 없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자유주의의 대표적 국가인데 왜 그렇겠습니까? 미국에서는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만 생긴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학생들이 제대로 된 의견을 학교나 교수들에게 아무 피해를 받을 염려 없이 전달할 수 있는 소통 채널이 안정적으로 확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것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저는 판단했습니다. 게다가 권위주의적 사회 분위기도 있구요. 그래서 익명이라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차선책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익명 보드의 관리자는 당연히 전산 담당인 제 몫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준구 교수님처럼 인터넷으로 학생들과 의견교환을 많이 했습니다. 국제지역원이 막 출범한 시점이라서 학생들의 건의도 대학원을 빨리 정착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아이디어도 있었고, 학생들의 불만을 솔직하게 전달받을 소통 통로도 필요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익명으로 했던 것이죠. 요즘은 모르겠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 분위기에서 학생들에게 "가면"을 하나씩 나눠주지 않으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렇게 머리가 좋은 학생들의 경우, 교수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괜히 한 마디 잘 못해서 찍히면 본인만 손해라는 것을 더 잘 알고 있었겠죠. 허심탄회하게 학생들이 의견을 개진해보도록 익명 보드가 학생들에게 제공되었습니다. 제가 교수로서 활동한 기간이 학기 수로 13 학기인데 별로 내세울 것이 없지만 그 당시 소통 노력은 제법 잘 된 것이었다는 생각은 아직 갖고 있습니다.

지금 떠오르는 예로, 국제지역원 전관 금연지정 소동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학생들에게 흡연실을 제공했는데, 그래도 비흡연 학생들의 민원이 생겼습니다. 문 틈으로 담배 연기가 새나와서 간접흡연이 된다는 주장이 게시판에 마구 올라왔던 것입니다. 사실 비흡연자에게는 담배 냄새가 조금만 나도 불쾌할테니까 그 주장은 타당해보였습니다. 그래서 교수회의에서 전관 금연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번에는 흡연자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참, 조그만 대학원에서 그러니, 비정규직같은 큰 쟁점에 대한 사회 갈등은 안봐도 비디오가 아니겠습니까^^) 익명 게시판에서 갑론을박이 시작되었고 결국 게시판 담당 교수인 제가 토론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죠. 역시 소통은 좋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학교의 입장을 정확하게 전달하면서 전관금연의 당위성을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흡연자들은 처음에 불만이 많았는데 제 설명을 듣고 분위기가 차분해졌습니다. 결국 원래 계획대로 건물 외부에 학생들용 파라솔과 흡연 편의시설이 갖춰지면서 전관금연은 실시되었습니다. 사회 갈등은 이렇게 풀어야 되는데, 우리 정부는... 이하 생략입니다. ㅋ .

지금까지 읽으신 분은 제가 무슨 큰 사명감에서 그런 일을 한 것으로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좋아했습니다. 저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미국 사람들과 얘기하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아직까지도 우리말이 훨씬 편해서 캘리포니아에 서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우리나라에 와서 인터넷 소통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이준구 교수님이나 한순구 교수님과 닮았다고 보셔도 되겠습니다. 교수님께 학생들은 고맙게 생각하셔야죠. 또 잘 활용하시면 자다가도 떡이 생깁니다.^^

주저리 주저리 글이 길어졌네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후기 1: 지금 상황으로는 익명 보드가 학교에서 필요 없다는 생각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 막을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할 수 있어서 그 득보다는 실이 더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이 험하죠.

후기 2: 학생들과 친하게 지낸 덕분인지 제가 국제지역원을 떠날 때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나무 두 그루를 대학원 건물 옆에 심어줬습니다. 이른 바, 안병길 사과 나무, 복숭아 나무입니다. 그 나무들은 잘 자라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ㅜ.ㅜ

2009년 7월 24일 금요일

[자유] 미시간 주립대학교를 떠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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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4월, 미시간 주립대 학생회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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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미시간 주립대학교 정치학과에 재직한 지 벌써 삼 년이 지났습니다. 1994년 어느 봄날 전 학과장이셨던 Brian Silver 교수님으로부터 조교수직을 제의받고 저 자신을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비슷한 일이 지난 2 월 중에 생겼습니다. 한국의 한 대학교의 조교수로 임명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저는 또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저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로서는 그 학교의 교수로 간다는 것이 더없는 영광이며 제 분에 넘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미시간 주립대학교에 재직하고 계신 모든 한국관계 교직원과 학생 여러분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이 지면을 빌어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동안 저에게는 많은 일이 MSU에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1995년 광복 50주년 학술행사를 임 길진 교수님의 후원을 받아서 그 당시 학생회장과 공동 조직하였으며, 작년 4월에는 정치학과 주최의 국제 학술회의를 조직하였던 기억이 주마등같이 지나갑니다. 또 1995-96 학년도에는 한국 학생회 지도교수를 맡아서 학생회 홈페이지 구축을 유도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을 하는 와중에 저 자신의 부덕과 능력 부족으로 말미암아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제가 주도한 일과 관련하여 조금이라도 잘못된 것이 있었다면 모두 제 불찰로 간주하시고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자유민주주의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MSU에서 벌어지는 한국관계 행사와 활동도 자유민주주의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여러 면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서로의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는 사회활동에서 절대적으로 옳지 않은 것을 가려내기 어려운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학생회 활동도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어떤 것이 상대적으로 더 옳은 것인지, 어떤 것을 상대적으로 더 좋아하는지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학생회는 주인이 학생이므로 지도교수님과 다른 관련된 분들의 의견을 참조할 수는 있지만, 마지막 결정은 학생회에서 주체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민주주의 기본 가정 중 하나가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MSU에서 벌어지는 한국관계 관련행사가 천편일률적으로 조직되지 않는다고 해서 전혀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저는 평소에 주장해왔습니다. 우리나라 경제발전을 빗대어서 권위주의적인 군대식 조직운영이 유리한 점이 있다고 평가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더 개방적이고, 더 합리적인 방향으로 학생회 활동과 한국관련 행사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저는 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MSU에 있는 여러 한국관계 단체들이 불협화음을 일으키거나 협력관계가 잘 유지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서로 협의하고 조정하면서 상부상조하면 더욱 훌륭한 행사와 활동이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MSU 학생회 여러분은 서로서로를 격려하면서 하시는 학업에 큰 열매를 맺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우리나라 문화를 간혹 "Culture of Discouragement"로 규정하곤 합니다. 크게 틀리지 않았다면 될 수 있는 한 타인의 의사를 존중하면서 박수와 격려를 보내는 것이 인지상정이 되어야 하는데, 남의 행동을 가능한 깎아 내리고, 또 못하도록 핀잔을 주는 경우가 주위에서 너무나도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discourage 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증명할 수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인간 행동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입니다. 남의 행동이 타인에게 해를 끼친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면 discourage보다는 encourage를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Negativism보다는 Positivism이 더 밝고 건강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제가 MSU에 있는 동안 도와주신 분들에게 성함은 모두 열거하지 못하지만,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면서 이 인사말을 마칠까 합니다. 하시는 모든 일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시길 빕니다. 한국에 오실 기회가 있으면, 꼭 연락 주셔서 활짝 웃는 낯으로 뵐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