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Notice) | 방 명 록 (GuestBoard)

2009년 12월 10일 목요일

[단상] 교직에 있는 어느 후배의 편지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8/12/22)

연말이면 이런저런 모임이 많습니다. 저도 우리나라에 있으면 여러 송년 모임에 바쁜 밤을 보내고 있을 텐데 이곳은 그런 모임이 별로 없어서 조용히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파면/해임된 교사들에 대한 언론보도를 접하면서 요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상태인데, 중고등 교직에 있는 어떤 후배에게서 두 통의 편지를 지난주에 받았습니다. 송년 모임의 한 참석자가 교사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얘기했던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우리 교육의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는 글입니다. 생각해볼 만한 주제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포스팅을 허락해준 그 후배에게 감사하면서 시작합니다.

<시작>
어딜가나 자녀 교육 문제는 가장 큰 화두이고,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이 왜 이리도 힘든지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되었는지 답답하지요.

그런데 교육문제를 이야기 하는 도중에 교직에 있지 않는 어떤 근엄한 후배가 갑자기 뜬금없이 "강남에 선생들이 많이 몰려 사는 값싼 동네"라는 말을 꺼내면서, "저기 일원동 저층 아파트 값싼 동네에 선생들이 많이 몰려 산다", 또 "전세가 아주 싸다"고 하면서, 연거푸 반복해서 "선생들이 그 값싼 동네에 많이 산다"고 강조 하더군요. 그 어조와 표정은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선생인 제 입장에서 선생님도 아닌 선생들이 무더기로 비하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교육문제 얘기하다, 갑자기 값싼 동네에 몰려사는 선생이라니요.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아마 무의식속에 잠재되어 있던 교사에 대한 인식에 그런 발언을 낳았나 봅니다.

집값이 싸고 안 싸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발언은 일반인이 교사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느냐를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예이지요. 낯선 모임에 가면 '선생들' 욕하는 소리에 얼굴을 들기가 힘듭니다.

마치 돈없는 교사가 강남 한 구석에 비집고 전세들어 와 부유층에 끼어 살려고 발버둥 치는 매우 모멸적이고 경멸적인 언사로 들렸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아'와 '어'가 다르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요.

그 동네에 교사만 사는 것도 아니고, 택시 운전사, 교수, 상점주인 등,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교사들은 서울 어디에나 골고루 살고 있습니다. 상계동 목동 송파구... 부자인 교사도 있고 가난한 선생도 많습니다.

우리 현실은 경기가 좋을 때는 교사는 관심에도 없다가, 경기가 어려울 때는 교사 집단은 철밥통이라고 매도되며 숱한 뭇매를 맞습니다. 사실 제가 봐도 한심한 교사 많구요, 교직 사회에는 큰 수술대에 올라야 할 부분이 상당합니다. 어떤 획기적인 혁명이 일어나서 게으르고 실력없고 열정없는 교사는 물러나고, 아이들도 사람간의 예의나 배려, 기본적인 인성을 갖추고, 밤늦게까지 학원에 가지 않고, 선행학습이란 것을 없애고, 학교는 진정 배움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사는 돈이 없어 값싼 집에 사니까 결국 힘이 없습니다. 요즘은 아무나 교사에게 대듭니다. 특히 가정에서 교사 비하 발언에 대해 많이 접해 본 아이들일수록 학교에 와서 안하무인으로 교실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런 학생들은 자라서 역시 그 잘난 부모들까지 무시하지요.

제가 18년 전에, 프라이드(이건 자동차입니다)를 몰고 교정을 빠져 나오는데 한 학생이 "무슨 돈으로 차 샀어(요)?" 합니다. 얼마 전 조선일보에도 "학부모 노릇하기 힘들다"는 교사 고발 기사가 있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촌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고 즐겨 보는 미국 드라마가 있어요. - "The West Wing"
백악관의 west wing 에서 근무하는, 대통령을 중심으로 그 보좌관들이 등장하는 정치 드라마입니다. 대부분 하바드, 예일, 버클리 법대 등등을 졸업한 미국 최고의 엘리트들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던 대통령과 국내는 물론 세계 정치를 논하며 매일 매일 숨가쁘게 살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속에 아주 왜소하고 늙고 주름이 조글조글한 한 할머니가 대통령의 비서로 있습니다. 그 할머니는 두 아들을 군대에 보낸 후 전쟁에서 모두 잃고, 남편과도 사별하고, 평생을 중고차만 몰고 다닌,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지 않은 전직 교사입니다. 대통령의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지요. 대통령에게는 누나 같은 존재로 사소한 부분까지 배려해 주고 챙겨주지만, 때로 대통령이 괜한 고집을 부릴 때는 아무도 안 보는 데서 대통령을 호되게 야단도 치는 이 할머니가 어느날 드디어 평생 처음으로 새 자동차를 구입하게 됩니다. 다른 직원들 모두가 자동차를 싸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왜 비싸게 샀느냐며 도와주겠다고 해도 이 꼿꼿한 할머니는 정당한 값을 주었을 뿐이라며 거부합니다.

그 새 차를 운전하고 출근하는 첫 날 아침, 이 할머니는 어느 과속 운전자의 부주의로 사고를 당하고 그만 세상을 뜨고 맙니다. 교회에서 장례식을 마친 후 대통령은 모든 사람을 교회 밖으로 나가게 한 후, 선생님에게 새 자동차 한 번을 타보는 호사로움 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무자비한 하나님을 향해 욕설을 퍼붓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아버지가 교장이었던 그 사립고등학교 시절에 반항의 표시로 했던 것 처럼, 담배를 피우고는 그 꽁초를 교회 바닥에 버려 짓밟습니다. 그 후로도 대통령은 종종 선생님의 빈 자리에 쓸쓸해 합니다.

물론 드라마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나에게는 스승이 없다"고 울부짖고 전국의 모든 교사들을 학생들을 볼모삼아 학부모로부터 촌지나 울궈먹는 사기꾼 집단으로 매도하여 교사의 권위를 짓밟아 뭉개고 우리나라 교육문제의 원인을 나약한 교사의 책임으로만 전가하고, 그 후 교실을 봉숭아 학당보다 더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우리 나라 교육부 장관같이 똑똑하신 분은 없습니다. 이 드라마가 추구하는 가치가 바로 이 작은 선생님의 일화에 그려져 있어서 저는 좋습니다.

좋은 학교 가려고 대부분의 사람들 바둥거리지만, 그 목적이 자기보다 못난 사람을 비하하고, 반대로 자기 보다 공부 열심히하고 잘 살고 많이 배운 사람을 어떻게든지 끌어 내리려 하는 사회 분위기에서는 그 궁극의 결과가 어찌될지 자못 무섭습니다.

저는 우리의 아이들이 제대로된 성품을 갖춘 인간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그런 도덕 문제를 시험지로 풀 것이 아니라 우리 어른들이 일상에서 몸으로 실천하며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먼저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겠지요.
다가오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끝>

댓글 4개:

  1. 김형균
    (2008/12/22 10:14) 고등학교 교사의 아들로서 공감이 많이 가는 글이네요. 안박사님 평화롭게 한해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매일밤마다 알콜에 제 간을 담그고 있습니다. 흑흑;;

    한가지 사족: Mrs. Landingham은 바틀렛 대통령의 고교시절 학교행정직원쯤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위키피디아에는 교장 비서로 나오네요. 바틀렛의 아버지가 그 학교 교장이었죠. ^^

    안병길
    (2008/12/22 10:43) 형균님, 술 조심하세요.^^

    제가 웨스트 윙을 아직 못 봤는데 이번 연말 연휴에 구해서 봐야겠습니다. 재미있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신영기
    (2008/12/22 13:30) 안 박사님 후배 분의 편지를 읽고 나니, 교등학교 은사님들께 이메일이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리 사회가 '교사 집단'을 매도하더라도, 좋은 선생님들께는 잊지 않고 찾아오는 제자들이 있어 즐거운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준구
    (2008/12/22 14:08) 선생님이 존중되는 사회가 되어야 마땅한 일인데, 요즈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걱정스럽군요.
    학부모들이 제 자식만 깜싸고 돌고, 참다운 교육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교사 집단에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지요.
    그러나 신교수 말대로 좋은 선생님들까지 싸잡아 매도 당하는 세태는 정말로 걱정입니다.

    임형찬
    (2008/12/22 21:45) 싸잡아 매도 되는 것은 안타깝습니다만은 저도 사교육시장에 있으면서 느끼는 바가 많은 교사들이 의욕을 잃고 사교육에 제자들을 맡긴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것이 그들의 본심은 아닐 것이지만 가끔씩 '어떤 동기'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답글삭제
  2. 이런 사례들 읽으면 부모 노릇이 떠오릅니다.
    부모 노릇 무겁고 녹녹지 않거든요.

    답글삭제
  3. 동감입니다. 부모 노릇...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네요.

    답글삭제
  4. 메이데이 2009/12/12 14:11
    부모 노릇 시험 치면 낙제생 여기 한 사람 있습니다.

    병길청해 2009/12/12 19:18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좋은 부모님이신 것 같습니다.^^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