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칙 사회에 태클을 걸자
불법과 졸속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을 꺽을 반칙왕을 기다린다
최근 서울대에는 영화 <반칙왕> 포스터를 패러디한 안내문이 붙어 학생들의 눈길을 붙잡았다. 전직 원로교수들의 친일행적을 거론한 뒤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재임용에서 탈락한 김민수(40) 전 서울대 교수(산업디자인학부)의 ‘무학점 강의’ 강행을 알리는 이 안내문은 반칙이 어지럽게 춤추는 우리 사회에 대한 풍자를 영화에서 읽어낸 학생들의 작품이다.
식민지 시대의 유물, 반칙 사회
사실, 눈앞의 승리를 챙기기 위해 최소한의 염치마저 저버린 채 약속을 깨뜨리는 반칙선수들은 링 밖에서 더 현란한 테크닉을 선보이고 있다. 지역감정 조장해 국회의원 되기, 군의관 매수해 군대 안 가기, 내부정보로 주식투자하기, 변칙상속으로 세금 안 내기…. 실정법을 위반한 범죄행위, 그 틈새를 교묘히 비집고 들어가는 편법들, 아예 양심을 마비시켜버리는 관행이라는 이름의 반칙 등 그 층위도 다양하다.
“초등학교 때 한개 틀릴 것을 컨닝해서 만점 맞았다.” “외근 핑계대고 집에서 하루 놀았다.” “아버지가 슈퍼에서 물건 값을 잘못 거슬러받고 너무 좋아한다.” “차가 없을 때는 집 앞 도로를 무단횡단한다.”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 반칙고백 설문조사에 네티즌들이 보내온 답변은 ‘게임의 룰’이 깨져 예리한 파편으로 널려 있는 세상에서 너무 순진한 고백으로 들릴 정도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알아? 쟝글이야, 쟝글!” <반칙왕>에 나오는 대사는 ‘정글의 법칙’이 반칙왕들의 바이블임을 보여준다. 반칙은 “정도를 지켜봤자 결국 막심한 손해를 보고 바보 취급만 당한다”는 신앙으로 내면화해 있다. 그 강포한 신념이 빚어 내는 씁쓸한 풍경 하나. 지난 3월1일 서울의 한 놀이공원에서 초등학생에게 주먹질을 한 40대 여인이 경찰에 입건됐다. 그는 새치기를 하려다 어린 아이의 항의를 받자 화가 나 일을 저질렀다고 한다. 과연 언제부터, 왜,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게 됐을까.
최봉영 항공대 교수(사회학)는 반칙 사회의 출발점을 일제 식민지 경험에서 찾는다. “국가는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개인이 명예로서 보상받는 역사의 무대였다. 그 무대가 사라지자 개인적인 영화를 최상의 가치로 삼게 됐다. 입신양명이 입신출세로, 다시 출세로 대체되는 용어의 변천은 이런 가치관의 변화를 반영한다.” 여기에 급격한 사회문화적 변동과 곤궁의 역사가 겹쳐지면서 비정상적인 처세 심리가 굳어졌다는 것이다.
한일합방과 태평양 전쟁, 6·25 전쟁, 군사 쿠데타, 오일 쇼크…. 위기의 연속이었던 현대사에서 새치기와 빽과 뇌물없이는 살아남기 힘들었고, 갖은 편법과 졸속과 무리가 꾸준한 노력과 정상적인 절차보다 나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연줄이나 금품 동원, 새치기, 거짓말, 규정 위반, 남의 불행을 이용하는 일 등이 비상시라는 이유로 정당화했던 것이다.
상대방을 배반하는 전략은 유용하지 않다
(사진/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편법과 졸속이라는 반칙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가를 보여준 본보기인 셈이다)
한경구 국민대 교수(문화인류학)는 이런 상황을 통해 형성된 독특한 삶의 태도를 ‘위기 인성’이라 정의한다. 특히 생존을 위협받을 정도로 수탈이 극심했던 일제 말기나 극한상황인 전쟁 기간에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은 이때 형성된 가치관의 영향 아래 평생을 살게 된다고 한다.
모리시마 미치오 런던정경대 교수의 저서 <왜 일본은 몰락하는가>(1999)에 사용된 세대론적 접근을 한 교수가 우리 사회에 적용한 결과를 보면, 2000년대에도 위기 인성의 영향 아래에 있는 세대가 전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한 교수는 쿠데타로 얼룩진 60년대에 10대 시절을 보낸 1940∼49년생까지를 1차 위기인성 집단으로, 이후 1979년생까지는 위기를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윗세대로부터 위기상황의 행동방식을 학습한 2차 위기 인성 집단으로 본다.
한 교수는 “이처럼 위기 인성을 가진 사람이 사회에서 인구학적으로 다수가 되고 각종 조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각자는 상대방도 위기상황의 행동방식에 따를 것이라고 여기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반칙 심리는 이처럼 역사 속에 뿌리를 대고 있고 당시의 절박한 생존 욕구를 반영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보이는 반칙 가운데는 생존을 위한 궁여지책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 많다.
지난 2월 말 발표된 고위공직자 재산변동신고 내역을 보면 재산이 늘어난 상위 20명 가운데 14명이 주식투자를 했고 이들의 평균 수익은 7억7천여만원이었다. 시민단체들은 뇌물성 정보를 이용한 재산증식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수사가 진행중인 병역비리 사건에서는 정치인 27명의 아들 31명과 사회지도층 인사의 아들 35명이 대상에 올라 있다. 재벌들의 탈세와 변칙상속까지 떠올리다보면, ‘배부른 사자는 사냥을 하지 않는다’는 정글의 법칙마저 덧없어진다.
‘제아무리 맹수라도 자기가 다칠 위험이 있으면 사냥을 포기한다’는 규칙도 찾아볼 수 없다. 노동부가 지난달 추락·낙하·붕괴 등 재해발생 요인이 높은 중·소규모 건설현장을 점검한 결과 안전규정 위반으로 45개소가 작업중지 조처돼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9배 높은 수치를 보였다. 잇따른 대형 붕괴사고는 희생자 명단 이외에 아무런 교훈도 남기지 못한 셈이다. 구속될 위험을 감수하는 은밀한 거래는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점점 투약 강도를 높이다 스스로 치사량을 주사하는 약물중독자처럼 제 몸을 상하게 해서라도 승부수를 던져야 하는 게 반칙선수들의 운명이다. 해결책은 더욱 미궁에 빠진다. 세대론의 접근법처럼, 위기 인성의 소유자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게 될 2020년대에 가서야 반칙의 지리한 악순환은 치유될 것인가.
게임이론은 이 의문에 대해 흥미롭고도 의미심장한 해답을 던지고 있다. 게임이론은 이해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각 행위자들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고 그 결과는 어떤지를 다루는 학문이다. ‘죄수의 딜레마’는 널리 알려진 게임이론의 하나다. 이 이론은 두 죄수가 따로 심문을 받으면서 ①2명 모두 범행을 부인하면 1년형 ②한쪽만 부인하면 자백한 쪽은 무죄, 부인한 쪽은 10년형 ③모두 자백하면 5년형이라는 조건을 제시받았을 때, ②의 경우를 염려해 모두 자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나를 배신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협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①)보다 나쁜 결과(③)를 초래하는 행동을 택하게 됨을 보여준다. 인생이 한판의 게임이라면 반칙왕들의 선택은 자명하다.
그러나 미국 미시간대 정치학 교수인 악셀로드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반복할 경우 상대방을 배반하는 전략이 궁극적인 이득이 되지 않음을 입증했다. 항상 부인하기, 항상 자백하기, 부인과 자백을 번갈아 하기 등 여러 가지 전략을 가진 죄수들이 모두 1 대 1로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서 만나도록 컴퓨터 시뮬레이션 게임을 반복했을 때, 각각 받은 형량의 최종 합계가 가장 적은 것은 이른바 ‘팃포탯’(Tit-for-Tat) 전략이었다.
분명하고도 엄한 처벌을 정착시켜야
(사진/툭하면 난장판이 돼버리는 국회.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권의 반칙은 민주주의 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많은 심리학자, 사회학자, 게임이론가들이 내놓은 전략들을 제친 팃포탯 전략은 특정 상대와 첫 번째 만났을 때는 무조건 협력(부인)한 뒤 한번 협력한 상대방에게는 다음번에도 협력하고 배신(자백)한 상대방에게는 다음번에 배신을 안겨준다는 간단한 내용이다. 배신한 상대방이 협력으로 돌아서면 그뒤로는 다시 협력한다. 이 전략은 일본 자동차회사인 혼다 등에서 기업 경영원리로 차용되기도 했다.
첫판에서는 항상 배신하는 전략이 이득을 얻거나 최소한 동점을 챙길 수 있겠지만, 게임이 반복되면서 협력하는 전략끼리 만나게 되면 전세는 역전된다. 악셀로드는 “반복되는 게임에서 팃포탯 전략이 확인되면 상대방은 배신으로 단기적인 이익을 챙기기보다는 협력을 통해 장기적인 이익을 추구하게 된다”며 “대화가 없는 이기주의자들 사이에서 상호 협력과 신뢰를 이끌어낼 수 있는 유용한 전략”이라고 설명한다.
안병길 서울대 교수(국제지역원)는 팃포탯 전략을 차용해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우선, 선거와 같이 한 차례의 승부로 마감된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는 ‘무조건 배신’ 전략을 택할 것이므로, 반칙행위에 대해 분명하고도 엄한 처벌을 정착시키는 것이다. <정치개혁 이렇게 한다>는 책을 펴낸 박태석 법무부 법무과장 등 현직 검사 4명은 “제도를 좀더 세밀히 규정하고 이를 정확히 집행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부정부패 방치책이라고 말한다.
또 “개별 행위자들이 사회개선의 장기적인 이익을 제대로 인식해 팃포탯 전략을 택해 나가야 한다”는 게 안 교수의 지적이다. 이를 위해 “촌지 관행을 거부하는 등 사회개선을 향한 ‘돈키호테’와 같은 행위를 최소한 좌절시키지 말고 격려해줄 수 있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학생들이 뒷날 사회에 진출해 팃포탯 전략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성냥불이 된다면 몇십년 뒤에는 들불처럼 그들이 충분히 보상받는 제도적 개선이 뒤따를 것”이라고 전망한다. 한경구 교수도 위기 인성을 극복하기 위한 기성세대의 자기 단련 필요성과 함께 제3차 위기 인성이 형성되지 않도록 자라나는 세대에 대한 교육에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전국교직원노조가 수도권 중·고교생 12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학생들은 2000년대 사회에 대해 환경이 파괴되고(79.7%) 경쟁은 치열해지는(78.3%) 각박한 세상을 예상하고 있다. 소외받는 사람의 권리가 신장된다(40.7%)거나 인간성이 좋아진다(16.2%)는 전망은 소수에게 나타났다. 하지만 학생들은 △돈을 더 많이 벌면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72.8%) △사회에서 특별한 권익을 누리는 사람은 그만큼 더 많은 사회적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83.3%) △모든 계층은 평등한 사회적 대우를 받아야 한다(88.9%) 등 건전한 사회의식을 보여줬다. 조사를 담당한 현원일 면목중 교사는 “미래 사회에 대한 전망에는 어른 사회에 대한 절망감이 내포돼 있다”며 “정의감 있는 사람으로 자랄 가능성을 되레 거세하는 교육이 돼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최봉영 교수는 “이제 남을 해쳐서라도 잘살겠다는 강박증으로부터 벗어나 삶의 여유를 지닌 세대가 자라나고 있고 지역감정 등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반칙을 극복하려는 시민운동이 시작됐다”며 “반칙 사회의 대표적 폐단인 ‘연줄’을 놓고 ‘연대’로 나아가자”고 제안한다.
무자비한 정글에 통쾌한 반칙을
고아원 출신인 황아무개(41)씨는 지난 2월29일 교도소를 나온 뒤 갈 곳이 없어 나흘 만에 일부러 폭력을 저질렀다. 경찰이 불구속 입건하자 다시 사흘 뒤 슈퍼마켓에서 돈없이 술을 마시고 주인과 싸움을 벌였다. 전과 12범인 그는 이 시대 반칙왕의 반열에 오를 만하다. 어쩌면 평생 반칙만 해야 하는 반칙전문 선수일지도 모른다. 그는 정글의 법칙에 따르면 도태돼야 할 존재다. 그런 이들에게도 협력의 손을 내밀 수 있는 존재는 사람뿐일 것이다. 사람이야말로 무자비한 정글의 법칙에 통쾌한 반칙을 걸 수 있는 최후의 반칙왕이 아닐까.
박용현 기자
piao@hani.co.kr
한겨레21 2000년 03월 30일 제301호
http://www.hani.co.kr/h21/data/L000320/1paq3k33.html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