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Notice) | 방 명 록 (GuestBoard)

2009년 9월 24일 목요일

[정치] 참여정부 단상: 다윗과 골리앗

(2003년 3월 10일에 작성한 글입니다.)

아마 1998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인터넷 동호회 이화여대 게시판에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짧은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기록을 찾아보면 정확한 내용을 옮길 수 있겠습니다만 귀찮으니 제 기억 속을 더듬어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성들은 여성문제의 해법을 스스로 찾는 노력을 열심히 해야 한다. 여성은 사회적 약자이므로 그 노력은 비상한 것이 되어야 한다. 약자가 강자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을 때와 마찬가지로 머리를 잘 써야 한다..."

이런 내용의 글을 여성이 많이 볼 것이라고 예상한 이화여대 게시판에 올려서 여성문제 해법에 대한 전략회의를 한번 해볼까 했는데, 안타깝게도 처음에 많은 돌을 제가 맞았습니다. 제 의도가 의심스럽다는 내용의 댓글들이 많았습니다. 그 와중에 제가 느낀 것은 발제를 너무 간결하게 함으로써 토론 시작에 장애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토론은, 소통은 정말 힘든 것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중에는 제 뜻을 제대로 이해해주고 적당한 토론이 되었습니다만, 시작이 그랬으니 심층적인 의견교환은 잘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자라는 것도 토론에 지장이 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유사한 예로, "교수, 괴수 논쟁"이 있습니다. 같은 동호회 서울대 게시판에서 있었던 토론입니다. 그 토론 중에 제가 "허심탄회" 하게 서울대 교수가 선생인지 "괴수"인지 의견교환을 해보자고 제의했는데, 제가 많은 돌을 맞았지요. 교수와 학생 사이에는 "허심탄회"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구조적 문제를 우리 대학교는 갖고 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즉, 교수-학생 사이에는 권력관계가 개입되어 있는데 어떻게 허심탄회하게 의견교환을 할 수 있느냐는, 의사 진행에 대한 반박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곳이 국제지역원 게시판이 아니지 않으냐, 익명으로도 의견을 올릴 수 있지 않으냐 등으로 설명하고 열띤 토론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토론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토론에 참여하는 이들이 어떻게 대등한 입장에서 자유분방하게, 허심탄회하게, 솔직하게 각자가 가진 뜻이 왜곡되지 않게 의견교환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터넷 토론은 그런 대등한 입장이라는 측면에서는 면대 면 토론보다 큰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과거 국제지역원의 자유게시판에서 익명을 허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토론에서 제가 익명 허용 입장을 취했던 것은 인터넷의 그런 장점을 살려보자는 의도였습니다.

어제(2003년 3월 9일) 대통령과 검사들과의 면대 면 토론을 보면서 대통령과 검사들이 대등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드는 때도 있었고,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강자 대통령과 인사 대상인 약자 검사들과의 토론이라고 느낀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는 대통령이 약자, 검사들이 강자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검사의 모두 발언에서 "토론을 통하여 제압하지 마시라."라는 주문을 대통령에게 했습니다. 이것은 대등하게 토론할 수 있도록 인사권자가 권위주의적인 입장을 취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검사가 약자입니다. 그렇다면 머리를 잘 써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말을 듣자마자 제가 받은 느낌은 "헉" 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대통령은 "그럼 내가 잔재주를 부려서 너희를 굴복시키려는 야바위꾼으로 보이느냐?"라는 식으로 대응하여 검사가 주문한 핵심 내용보다는 검사의 표현이 가진 뜻이 이슈가 되어 버렸습니다.

대통령은 정치인입니다. TV 공개토론은 국민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검사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정치인은 반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솔직하고 건설적인 의견개진을 하는, 평검사들이 인사권자에게 개혁에 대한 나름의 고심을 토로할 수 있는 열린 토론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정도면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검사들이 모여서 8시간의 마라톤 회의를 했다고 하는데 아마 그런 미세한 전략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검토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약자는 머리를 열심히 돌려야 합니다. 그 머리로 할 수 없는 일들은 남의 머리를 빌려와야 합니다. 토론전문가에게서 토론에서 유의할 점들에 대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토론이 끝날 때까지 이 문제는 검사들에게 악령과 같이 따라다닙니다. 노건평 씨 언급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검찰 스스로 뼈를 깎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주위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특히 고위 공직자나 정치인, 대통령 친인척들이 검찰에 청탁하면 불이익을 받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임기 중 지도자로서 이 문제에 대해서 변함없는 관심을 보여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정도로 표현하면 되었을 것을 대통령 형님을 끌어들여서 쓸데없는 신경전을 유발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악의적으로 대통령 주위의 흠집을 다시 상기시키려고 했다고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부산지검에 대통령이 취임 전에 전화를 한 것을 언급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이 "이제 막 가자는 거지요?"라고 크게 반발한 것도 실수지만, 그 원인 제공을 한 검사의 발언은 사실확인도 되지 않은 사례를 대통령을 흠집 내기 위해서 이용하려 했다는 해석도 충분히 가능한 것입니다. 그 검사도 머리를 잘못 돌렸습니다.

대통령 형님, 대통령이 취임 전에 검사에게 한 전화 등의 언급이 있었을 때는 적어도 외양상으로는 대통령이 약자이고 검사들이 강자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면 대통령도 지혜롭게 대응해야 했는데 감정적인 대응이 없지 않았습니다. 진상에 대한 설명을 차분하게 한 다음, "그런 사례들을 잘못 해석하면, 국정 최고책임자이면서 직속 상관인 대통령을 여러분이 음해하려 한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정도로 한 차원 위에서 설명하는 것이 옳았습니다.

저로서는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대화가 그 정도면 상당히 대등한 입장에서 의견교환이 있었다고 봅니다. 국민에게 공개된 대화라서 인사상 불이익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는지, 잘못되면 옷 벗을 각오가 되어 있었는지, 이것저것 생각 없이 나오는 대로 막 말했는지 그 진실은 제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인사권자이면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 대통령 앞에서 평검사들이 그 정도로 얘기했다면 상대적으로 대등한 입장이라고 평가해주는 것이 적절하다고 봅니다. 이 점에서는 토론에 큰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잘 진행된 토론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정제되지 않은 언변, 대통령에 대한 지엽적인 공격, 같은 내용의 반복, 대안에 대한 제시 부족 등에 대해서는 검사 측이 준엄하게 비판받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최고 엘리트 집단 중 하나인 검사들을 토론회에서 보면서 저는 한숨이 몇 번씩이나 저절로 났습니다. 나중에는 "대통령과 국민 여러분, 저희도 사랑해주세요."라는 식으로 몇 명이 언급하는 것을 듣고 한 편으로는 측은하게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는 유아적인 발상을 보는 것 같아서 참담했습니다. "이제는 학교 가기가 싫어졌습니다."라는 발언은 어떻게 들으면 협박성 발언인 것 같기도 하고, 투정부리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원인 제공을 한 검사 측의 잘못이 크기는 하지만, 대통령의 간헌절인 감정적 대응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감정적 대응을 한 다음 좋은 방향으로 하자고 단락 단락 마무리 지으려고 노력한 것은 고무적이나, 감정적 대응 자체가 토론의 핵심 내용을 가려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대통령 측에서는 대통령도 인간이라고 강변할 수 있겠지만, 이 경우 대통령은 대통령입니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습니다. 토론공화국으로 가는 첫 토론회라는 역사적 의미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토론 자체가 매우 힘든 과제이며 우리는 건설적인 토론문화를 정착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초기 단계라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평검사들이 검찰총장과 함께 그런 내용의 토론을 해본 일이 있었을 까요? 있었다면 몇 번 있었을까요? 앞으로 검찰도 자체적으로 그런 토론회를 여러 번 가져서 다음에 있을 대통령과의 토론을 준비하는 것도 괜찮은 아이디어입니다. 대통령도 시간을 내서 어제 했던 토론을 다시 한번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중간에는 서면 질의와 서면 답변 형식으로 의견교환을 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언로는 열려 있어야 하니까요.

토론에도 전략적 상호작용이 들어 있기 마련입니다. 어제 토론을 보면서 대통령은 전략적 사고를 했는데, 검사 측은 전략적 사고가 모자랐다는 점도 느꼈습니다. 전략적 사고는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를 살펴서 나의 언행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검사들이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를 고려하여 답변을 준비해온 것 같았지만, 검사들은 대통령이 어떻게 설명하고 반박할 것인지에 대한 대비가 소홀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8시간 동안 무엇을 했을까요? 검사들이 가진 정보의 부재에서 기인할 것일까요? 그렇다면 타협이든 비타협이든, 가능한 몇몇 시나리오에 대한 검토는 과연 했을까요?

국제지역원에 있을 때 학생들에게 했던 얘기를 되뇌면서 이 글을 마칩니다.

"나는 예의도 깍듯이 지키면서, 선생에 대한 비판일지라도 하고 싶은 말은 당당하게 또박또박 개진하는 그런 제자들이 많으면 좋겠다."

댓글 2개:

  1. 나는 그 검사와의 모임 그 자체를 만든 게 잘못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특혜를 주었으면 그걸 현명하게 활용해야 하는데, 거기 나온 검사들은 그런 현명함을 갖지 못한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때 느낌은 마치 '야자타임'하는 것을 보는듯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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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저도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법정 공방을 보면 법조인들이 말을 참 잘하는데, 우리나라 검사들은 그렇지 않더군요. 우리 문화나 사법 시스템 자체가 효과적인 토론을 조장하지는 못해왔던 것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매우 특이한 상황이라서, 강금실 장관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실기할 수 있다는 절박한 판단을 노 대통령이 했던 것 같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필요 없는 토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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