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Notice) | 방 명 록 (GuestBoard)

2009년 9월 1일 화요일

[단상] 미국에 살면 우리나라를 잘 모른다?

제가 아주 가끔 듣는 말 중에 "미국에 오래 사셔서 우리 사정에 어둡군요."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싫어하는 표현입니다. 미국에 살든, 일본에 살든, 우리나라에 살든, 말한 내용이 적절치 않으면 그것을 그대로 지적하면 그만이지, 굳이 어디에 사는가를 논의에 끌어들이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상대방 스타일 태클 걸기로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가벼운 의제 설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한 내용에 별 잘못이 없으면 상황이 매우 어색해질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몇 년 전 한국프랑스정치학회에서 주최한 학술회의에서 제가 겪었던 일화가 있습니다. 저는 그 회의에 토론자로 참석하였습니다. 제가 토론한 논문은 권력구조 개편에 대한 논문이었는데, 발표 요지는 권력구조 개편 논의보다는 정치개혁에 대한 논의가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논문이 우리 정치 현안에 대한 핵심을 잘 파악했고, 안목이 있는 논문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또한, 정치개혁에 대한 기존 연구 중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보이는 구체적 방안들을 보충 설명하였습니다. 그 논문을 비판하자면 별로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겠지만, 정치개혁의 공론화라는 취지가 저에게는 더 중요했기 때문에 그렇게 토론했습니다.

그런데 그 논문의 발표자가 답할 차례가 되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저에게 태클을 걸었습니다.

"안 교수님이 미국에서 들어오신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의 사정을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우리 학계와 시민단체의 선거제도 개혁에 대한 중지는 독일식을 채택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네가 한국을 아느냐?" 식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 나왔던 것입니다. 저는 그 발표자의 적절치 못한 토론에 대해서 반박하기 위해서 사회자에게 1분만 설명하겠다고 요청하였습니다.

"저는 지난 2월에 선거제도를 집중적으로 연구했습니다. 우리 학계와 시민단체 일부가 독일식 선거제도를 지지하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식은 전체 의석수가 고정되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 유동적으로 되는 문제가 있어서, 현실 정치인들이 합의를 보기가 어렵다는 판단 하에 합의가 더 쉬운 한국형을 제시하는 연구가 있다는 것을 설명드렸던 것입니다. 제가 한국을 압니다. 저는 한국을 제법 압니다."

아마 그 발표자는 제가 인수위원회 정치개혁연구실에서 상근 자문위원으로 한 달 동안 연구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 패널이 끝나자 발표자는 저에게 금방 악수를 건네면서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미안하다고 인사했습니다. 저는 "네, 네" 하면서 "토론이 별로라서 좋은 논문 발표를 망친 것 같다."라고 인사치레를 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저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가능한 한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고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내공이 별로 높지 않아서 저를 부당하게 긁는 사람이 있으면 저 자신이 참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기분이 별로 좋지 않게 되었습니다. 유화적으로 미소 지으면서 대처하는 편이지만, 결국 그 미소도 뼈가 있는 미소가 될 수밖에 없으니 남과 부대끼게 되었다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토론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지, 토론자가 어디에 사느냐는 척도가 아닙니다. 미국에 앉아서도 우리나라 사정을 더 잘 알 가능성이 있고, 우리나라에 살고 있어도 우리 선거제도 개선책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며칠 전에 들어온 것이 선거제도 개선방안 논의와 무슨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겠습니까?

댓글 5개:

  1. 저도 십분 공감할 수 있는 에피소드인 것 같습니다. 원래 태풍의 눈 안에서는 그 거대한 태풍을 오히려 느끼지 못한다고들 합니다. 떨어져서, 아무 이해관계 없이 (물론, 다소 이상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더 객관적일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경험상의 지식의 양이나 정보량이 그에 합당한 질적 내용을 보증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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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luenote님도 비슷한 경험을 겪은 적이 있는가 봅니다. 그런 일을 당하면 좀! 황당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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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고백할 게 있습니다.
    미국에서 갓 돌아온 제자들에게 그런 표현 많이 썼는데, 이제 좀 자제해야 하겠군요.
    그런데 안 박사가 토론한 그 발표자의 경우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건설적이지 못한 표현으로 반박한 게 문제가 아닐까요?
    예컨대 한국 실정을 잘 모른다는 표현 이외의 표현으로도 nasty한 반박을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해 미국에서 갓 돌아온 친구들 중 banana를 연상하게 만드는 친구가 많다고 느끼긴 합니다.
    banana가 무슨 뜻인 줄 아시겠지요?
    얼굴은 노란데 속은 하얗다는 뜻 말입니다.
    미국 사람처럼 행동하는 친구들 생각 밖으로 많습니다.
    이런 친구들 한테는 그런 말로 쏘아 주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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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사례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미 여러번 그 문제를 제기하셔서 제가 동감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바나나를 바나나로 지적하고 충고하시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발표자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토론(독일식 선거구제를 지지하는데 저는 다른 방안을 제시)을 제가 했다고 판단해서 딴지를 건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발표자는 다행히 그것을 알아채고 회의가 끝나자 저에게 정중하게 사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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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최근에 우리 대학입시에 대해서 한 친지에게 문의한 적이 있습니다. 솔직한 의견을 줘서 고맙기는 했지만, 서두에 저에게 한 말이 원 글과 비슷한 느낌을 줬습니다. 자식 교육을 미국에서 시켰는데 우리 교육에 웬 관심이냐는 코멘트였습니다.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서 그런지 몸은 캘리포니아에 있어도 고국의 현안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는 평범한 변명을 했습니다. 지구에 살고 있으면서 목성에 관심을 두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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