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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11일 금요일

[수필] 합리적 선택이론에 대한 추억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1/31)

제가 박사학위 최종심사를 받던 날 벌벌 떨면서 논문 발표를 마치자 심사위원들께서 저에게 밖에 나가 있으라고 하시더군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심사해서 당락을 결정하셨습니다. 다행히도 합격 통보를 잠시 뒤 받았습니다. 학과 라운지로 올라갔더니 지도교수님이 샴페인을 준비하셨더군요. 제 미국 사부님은 제자가 박사학위 최종심사를 통과하면 샴페인 한 잔씩을 학과 교수님과 학생들에게 제공하면서 축하해주는 전통을 갖고 계십니다. 샴페인을 잔에 부어주시면서, "Congratulations, Dr. Ahn!" 하시더군요.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우리나라로 돌아가는 저에게 BDM 사부님은 한국 정치/국제정치학계에서도 합리적 선택이론을 더 받아들이면 좋겠다는 희망을 말씀하시면서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저는 감히 낙관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합리적 선택이론이 정치학에서 방법론적으로 유용하다는 확신이 박사과정 공부 중에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정치학계에서는 규범적, 역사적, 記述的 방법론이 대세였습니다. 그 즈음에 경제학의 합리적 행위자 가정을 정치학에 접목시키는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도되면서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정치학계의 큰 지각변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래 허 교수님의 논문에서 언급되는 연구들이 큰 몫을 했죠. 그중에서 로체스터 정치학과를 현재의 모습(합리적 선택이론, 즉 Positive Political Theory를 주종목으로 함)으로 만드신 故 W. H. Riker 교수님의 공헌은 지대했습니다.

요즘은 미국 정치학회지인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미국 정치학계 랭킹 1위 학술지)를 보면 경제학 논문인지, 정치학 논문인지 애매한 논문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치학이 Political Science("과학"에 밑줄^^)이니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변방의 소수파가 중심부의 "정상 과학"이 되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었죠.

이런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첫째, 학문적/방법론적 경쟁력이 있어야 되고, 둘째, 그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연구를 수행하는 학자 군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 두 가지를 함께 보여주신 분이 Riker 교수님입니다. 첫 번째에 대해서는 허 교수님이 논문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에 대해서 Riker 교수님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박사과정 4년 차일 때 하루는 교수님이 제 공부방에 들어오셨습니다.

"싱가폴 대학에서 사람을 찾고 있는데 자네가 응모해볼 생각 없느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연로하신 지존 Riker 교수님이 미천한 제 일자리까지 걱정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걸음걸이가 불편할 정도의 연세가 될 때까지 후학 양성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셨던 것은 물론이고, Job Market에 나가는 학생들의 인터뷰 리허설에 교수님은 반드시 참석하셔서 코멘트를 해주셨습니다. 심지어 돌아가시던 날 병상에서 한 학생의 논문에 대한 구체적인 코멘트를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내용은 좋았다고 전해달라는 말씀을 남기셨다고 합니다. 합리적 선택이론으로 무장한 제자들을 학계에 더 많이 진출시키려는 Riker 교수님의 "합리적 선택"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아, 그렇다고 해서 교수님의 자상한 보살핌을 평가절하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합리적 선택이 benevolent 할 수 있다는 예가 되겠습니다.

(웬 떡이냐면서 싱가폴 대학으로 밀어주십사 부탁을 드렸어야 정상인데, 그때는 싱가폴이 너무나도 먼 이국으로 느껴지더군요.^^)

아래 허 교수님 논문을 읽으면서 만감이 교차하여 두서없이 주저리주저리 해봤습니다. 법학, 경제학, 정치학을 연결하는 허 교수님의 법학 연구가 Riker 교수님이 하셨던 것 같이 빛을 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법학에서 공공선택이론을 활용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꼭 필요한 것인데요...라는 말씀을 드리면서 미력하나마 허 교수님을 응원해봅니다.

p.s. 1. S.M. Amadae and Bruce Bueno de Mesquita, 1999, "THE ROCHESTER SCHOOL: The Origins of Positive Political Theory" Annual Review of Political Science Vol. 2: 269-295는 정치학에서 경제학이, 합리적 선택이론이 어떻게 자리를 잡았는지를 보여주는 글입니다.

p.s. 2. 법학이 사회과학이냐 아니냐의 문제에 대한 단견을 말씀드리자면, 사회과학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또한 법학의 어떤 세부 분야를 고려하느냐에 따라서 그 답은 달라질 것이라는 하나마나? 한 얘기를 해봅니다.

댓글 1개:

  1. 김선영
    (2009/01/31 12:47) 행정학 뿐 아니라 정치학에서도 공공선택이론이 적용된다는 걸 박사님 덕분에 알게되었습니다~ 첨부파일 잘 읽겠습니다~

    안병길
    (2009/01/31 13:04) 다음은 하바드 정치학과의 어떤 과목 소개입니다. 경제학과 과목같죠?^^

    [Government 2005. Formal Political Theory I]
    John W. Patty
    A graduate seminar on microeconomic modeling, covering price theory, decision theory, social choice theory, and game theory.

    신영기
    (2009/01/31 14:54) 로체스터 대학에서 라이커 교수님 성함을 딴 세미나 시리즈를 본 것 같습니다. 업적도 대단하시지만 일화에 묻어나는 인자한 성품이 정말 멋지십니다.

    안병길
    (2009/01/31 15:47) 신 교수님이 나오신 경제학과에 McKenzie Lectures가 있듯이 정치학과에 Riker Lecture가 있습니다. McKenzie Lectures는 경제학과 대학원 학생들이 매년 초청 학자를 결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Riker Lecture는 The Riker Prize를 수상한 학자가 공개강좌를 합니다.

    McKenzie 교수님이 경제학과 학과장으로 부임하셔서 Riker 교수님을 많이 도와주셨다고 합니다. 두 저명한 학자가 협력하여 상승작용이 일어났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gemeinsam
    (2009/01/31 17:43) 정치학 공부를 어렵게 만드신 장본인이 바로 riker교수님이시군요-_-;; 요즘 한국의 일부 정치학과 학부에서는 '계량정치분석'과 같은 수업이 열리고 있는데 예전에는 통계학과에서나 다룰 것 같은 내용을 정치학과 교수님께서 가르치시니 정치학 전공 학생들에게는 따라가기 어려운 수업입니다.

    안 박사님! 최근 한국에서는 외교사적 연구 방법을 채택하고 계시는 교수님들을 점점 찾기 어려워 지는데 미국 학계에서는 어떠한가요? 외교사적 연구 방법은 거의 묻혀지는 추세인가요? 아니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나요?

    개인적으로는 게임이론, 통계학 공부하는 것보다는 역사공부하는게 더 흥미롭고 외교사적 연구방법을 통해서 통찰력 같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라 외교사적 연구방법이 쇠퇴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미시족
    (2009/01/31 17:56) ㅎㅎ 아 안박사님이 그 무시무시한 경제학의 합리적 선택이론을 정치학에 접목시킨 걸 전공하신 분이군요 ㅠㅠ

    정말 끝이 없는 논쟁이지요. 사실 저는 전통적인 연구방법에 더 정이갑니다만...(새로운 방법론은 '방법'그 자체게 천착하게 되기 쉬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실 아직 서울대 외교학과에는 확실히 영향이 적습니다.

    그래도 요즘 서서히 젊은 대학원생들과 신임 교수님을 중심으로 계량적 방법론을 연구하는 사람도 늘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잘 조화가 이루어지겠지요^^ 결국 사회과학의 목적은 같으니깐요.

    일개 학부생이지만, 흥미롭게 그리고 한번쯤은 고민해볼 방법론적 고민입니다..

    이준구
    (2009/01/31 22:01) 어쩐지 안박사가 경제이론에 밝더라 싶었는데, 거기 다 이유가 있었군요. 그런데 개인의 합리적 선택행위를 정치이론에 도입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같은데요.
    개인의 행위가 모여 시장에서의 경제현상으로 나타나듯, 개인의 행위가 모여 정치현상으로 나타날 테니까요.

    그런데 Rochester의 재정상태가 예전만 못한 것 같은데, 정치학과는 어떤가요? 경제학과는 어려움이 많은 것 같던데요.

    안병길
    (2009/01/31 23:00)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당연성 때문에 지금은 Positive Political Theory가 주류 정치학의 한 분야로 자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제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경제학과가 어려울 정도면 정치학과에도 영향이 있을 것 같습니다.

    미시족님, gemeinsam님, 로체스터 정치학과는 주전공 한 개와 보조 전공 두 개를 선택하게 합니다. 제 경우에는 국제정치가 주전공이었고 실증정치이론과 방법론(계량)이 보조 전공이었습니다. 따라서 엄밀하게 얘기하면 합리적 선택이론이 제 전공은 아니었습니다. 게임 이론을 국제정치에 응용했다는 표현이 적합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방법론으로 티격태격하기도 하지만 미국에서는 방법론 논쟁 시절은 이미 지났습니다. 지금은 전통적 방법론이든 합리적 선택이론이든 실제 연구 내용이 더 유용하면 되는 것이지요. 역사기술적 방법론도 정치학에서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갖고 있기 때문에 꾸준히 활용될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합리적 선택이론이 정치학 지식을 축적하는 데 상당한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 방법론이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전통적 방법론은 일상 언어를 채택하는 반면, 합리적 선택이론은 "특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정한 훈련과정(힘들겠지만 자습도 가능)을 거쳐야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있죠.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의 숫자가 하나 더 늘면 더 좋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미시족
    (2009/02/01 14:30) 안 박사님의 말씀이 정답입니다! 결국 목표는 같지요. 단지 사용하는 언어의 문제에만 천착해서는 안되겠지요^^

    J.Paul
    (2009/02/03 15:03) 통계자료보다 이런 경험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매력적이고 설득력있는 이유는 뭘까요?

    첨부파일은 인쇄해 두었다가 집에가는 길에 읽어봐야겠습니다.

    J.Paul
    (2009/02/03 15:19) 아 혹시, 읽어보고 질문 있으면 올려도 답변달아주실 수 있나요?

    안병길
    (2009/02/03 16:24) 질문하신다면 어려운 것 말구요, 제가 알만한 쉬운 것을 던져주시길 빌께요.^^

    김규식
    (2009/02/04 17:48) 아, 이제 기억났습니다. 박사님께서 예전에 대학원 수업 때 인수분해 일화를 말씀하셨던 이유가 여기 있었군요.ㅎㅎㅎㅎ

    안병길
    (2009/02/04 22:13) 규식씨, 기억력 좋네요.^^

    김규식
    (2009/02/05 18:38) 어쩌다 보니 기억하고 있는 것 뿐 입니다.ㅎㅎ (하지만 공부한 것은 공부한 순간 증발.)

    그러고보니 국제정치학에서도 게임이론을 썼군요.ㅎㅎㅎ

    이렇게 다른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경제학적 방법론을 수용해가는 상황에서는 경제학 공부를 착실하게 해놓으면 다른 사회과학 분야로 진로를 변경할 수도 있는 건가요?? (뭐, 그렇게 되면 진로를 바꾼 의미는 없게 되겠지만요.)

    안병길
    (2009/02/05 22:35) 예컨대 경제학에서 정치학으로 가는 것과 정치학에서 경제학으로 가는 것을 비교하면, 전자가 더 용이하겠죠? 경제학은 그 용도가 무궁무진하답니다.^^

    김규식
    (2009/02/05 23:31) 경제학 만세 만세 만만세입니다.ㅎㅎㅎ 이렇게 멋진 전공을 가지고 있는데 그냥 복수전공 취소할까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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