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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2일 수요일

[수필] 서울대 경제학과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8/02/19)

제가 이곳(이 교수님 게시판)에 글을 적는 이유가 여럿 있습니다만 세 개만 꼽으라면 첫째, 제 행복 추구이고(한글 글짓기를 잊지 않으려는 것 포함), 둘째, 이 선배님(가치관+인품+테니스)을 좋아하는 것이고, 그리고 셋째, 서울대 경제학과가 매력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단편적으로 저와 서울대 경제학과의 인연에 대해서 주저리주저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서울대에 입학할 때 사회계열에서 법대와 경영대는 별도로 학생을 모집했고, 사회과학대는 학과별이 아닌 계열별 모집이었습니다. 1학년 때 성적을 갖고 2학년 진학할 때, 1지망, 2지망, 3지망으로 희망 학과를 적어내면 학과를 배정받는 식이었습니다. 제 기억에 매년 90명 정도가 경제학과로 진입했었던 것 같습니다. 매년 커트라인은 95 등에서 100 등 사이였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상위 5명 내지 10명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경제학과를 희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정도면 묻지 마 지원이었죠. 법과 경영을 제외한 인문사회계에서 대한민국의 인재는 거의 싹쓸이하는 식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런 엄청난 선배들을 둔 현재 경제학부 학생들은 뿌듯하게 생각하셔도 매우 괜찮습니다. ^^ 물론 현재 학생들도 우리나라 최고의 엘리트 집단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1학년 성적은 정확한 등위를 알려주는 방식이 아니라 일종의 세분화된 등급제였습니다. 즉, 너는 몇 등에서 몇 등 사이에 속한다는 식이었죠. 제가 성적을 받아보니 20 등에서 25 등 사이였습니다. (제 자랑 아님^^)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외교관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형들이 이미 경제학과 사회학을 전공한 영향도 일부 있음) 주저 없이 외교학과를 1지망으로 선택했는데, 이것이 소문이 나면서 해프닝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95 등 근처에 있는 학생들이 경제학과를 희망하는 경우, 중간에 몇 명이 빠져나가는지를 정확하게 셀 수 있으면 자신의 경제학과 합격 여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생은 저에게 와서 마음 바꾸면 자기가 떨어지니까 반드시 외교학과로 가라고 재차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1학년 때 김두희 교수님께 경제학 개론을 들었고, 2학년 때 정운찬 교수님께 경제학 원론을, 그리고 나중에 송병락 교수님께 한국경제론을 수강했습니다. 학점은 썩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김두희 교수님이 답안지에 한자를 많이 적으면 성적을 잘 주신다고 해서 가능한 한 한자를 많이 적어서 답안을 제출했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경제학과의 본격적인 인연은 유학을 가서 생겼습니다. 제가 공부했던 정치학과가 거의 경제학 식으로 학생들을 훈련했기 때문에 그때 게임이론도 공부했고, 정치학을 경제학적 방법론으로 공부하는 쪽으로 세뇌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모교에 교직을 받고 처음 연구 발표를 한 곳도 경제학과였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제도가 민주주의의 단순 과반수 원칙을 잘 지키지 못하므로 대통령 결선투표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요지의 발표를 그때 했습니다. 벌써 10년이 넘었네요. 정치학의 선거제도 분야는 공공선택(Public Choice, 혹은 Social Choice)에 속하는 것으로, 경제학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경제학자인 Arrow 교수의 Impossibility Theorem입니다. Collective rationality, Universal domain, Pareto efficiency, Independence of irrelevant alternatives, Non-Dictatorship이었던가요. 미국의 은사께서 C.U.P.I.D.의 화살(Arrow)로 외우면 된다고 가르쳐 주셨어요.

미국에서 한창 공부를 하고 있는데, 어느 날 동기생 한 명이 경제학과 교수로 지원해서 인터뷰하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호텔에 가서 그 동기생 모 교수를 오랜만에 반갑게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결국 제가 공부하던 학교에 교수로 부임했습니다. 그 동기생 연구실은 제 방 바로 위 층에 있었습니다. 같은 학과면 더 쪽 팔렸을 텐데, 그래도 학과가 달라서 다행이었습니다.

현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하는 그 친구 교수의 연구 스타일은 야행성이었습니다. 그래서 밤늦게 제 방에 와서 밤참을 먹자고, 어떤 때는 볼링 한 판 어떻겠냐고 꾀는 적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총각 친구 교수의 꼬임에 넘어가서 한동안 밤에 잘 놀러다니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원래 야행성인 그 친구는 연구 활동에 전혀 문제가 없는데, 학생인 저는 오히려 학업에 쬐끔 지장이 생긴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 친구에게 밤에는 너하고 안 논다고 공언했죠. ㅎㅎㅎ (유학 가셔서 남들 노는 페이스에 맞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못하면 학위 못 받습니다. 스스로 노는 리듬을 찾으세요.^^) 미국 학교에서 모 교수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한 해는 그 대학 전체에서 가장 강의 잘하는 교수 최종 후보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국인 교수로서 아마 전무후무할 것입니다.

그 학교에 있을 때 그 친구 교수와 테니스도 가끔 했습니다. 모 교수가 테니스도 잘 합니다. 힘이 대단합니다. 게임을 하면 제가 가끔 이기기도 했는데, 힘도 없고 폼은 엉망인데 게임은 그럭저럭 한다고 저를 놀리기도 했습니다. (모 교수 허락받지 않고 이런 얘기 해도 괜찮은지 모르겠네요. 욕하는 얘기가 아니니까 양해하겠죠. 뭐. 양해 안 하면 어떡하겠습니까? 그래도 제가 이런 얘기 했다는 것을 언짢아할 수 있으니 비밀 지켜주시길 부탁해요.^^ 특히 조교분들, 아시죠?) 그런데 어떤 여름 방학인가를 지나고 나서는 게임을 해도 제가 도저히 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를 완전히 꺾어 놓기 위해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더군요.

지금도 이 게시판을 기웃거리고 있지만, 제가 국제지역원(국제대학원)에 있을 때도 경제학과를 기웃거렸습니다. 그것은 테니스 때문이었습니다. 사회대 테니스 모임의 주축이 경제학과였죠. 소속이 달라서, 또 제가 다른 일로 바빠서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가끔 참가해서 이준구 교수님과 이지순 교수님의 날렵한 모습을 보고 감탄하곤 했습니다. 사회대 교수 테니스 대회에서 제가 하부 리그이긴 하지만 상도 받고 그랬습니다. 따로 떨어져 있는 제가 불쌍해서 그냥 끼워주셨던 것 같습니다. 제 기억에 이 선배님 테니스 실력은 굉장했습니다. 폼도 그렇고, 순발력, 정확성 등에서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아부 아닙니다. 요즘도 그 실력을 유지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미국 대학의 교직에 있을 때 모교의 교수로 활약하고 있던 앞의 친구 교수가 그렇게 부러웠습니다. 한번은 중간에 귀국해서 모 교수를 억지로 밀어붙여 경제학 원론 강의 시간에 잠깐 특강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영어로 강의하다 우리말을 아주 잘 구사하는 후배들을 상대로 우리말로 강의하니 그동안의 체증이 싹 내려가는 시원한 기분이었습니다... 그 기회를 제공한 그 친구 교수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제가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전공을 정해도 사회과학에서는 정치학이 될 테지만(이공계냐 문과냐로 질문하면 이공계가 될 것 같습니다.), 서울대 경제학과는 여러모로 저에게 즐거운 추억을 남겨준 매력적인 곳입니다. 그런 매력적인 학과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계신 학생 여러분의 건승을 빕니다. 홧팅!

댓글 4개:

  1. 이 글은 언제 읽어도 재미있네요.
    이젠 그 모 교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겠네요.

    그 친구 골려주려면 돼지고기를 쇠고기로 속여서 먹이세요.
    촌스런 인간이 쇠고기 이외의 어떤 고기도 먹지 못한답니다.
    중국집 가서 쓸모없이 값만 비싼 쇠고기 탕수육 시킬 때가 제일 밉답니다.
    음식값은 당연히 내가 내니까요.

    그런데 내 테니스 실력을 너무 미화해 주신 것 같습니다.
    오랜 구력 덕분에 게임은 좀 하지만 폼은 정말 엉망입니다.
    요즈음 테니스를 반 달 가량 못쳐 근질근질 하네요.
    내일 가서 언제 테니스 쳐도 되냐고 물어 보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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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ㅎㅎㅎ 앞으로 모 교수를 만나면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방법을 활용해보겠습니다.

    원 글을 선생님 게시판에 올렸을 때 재미있는 댓글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볼 수 없어서 아쉽습니다. 제 백업 파일에도 없더군요. ㅜ.ㅜ 제 기억에는 선생님 테니스 폼이 좋았던 것 같았는데, 착각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테니스를 매우 잘 하셔서 그런 이미지가 남았을 수도 있습니다. 즐기시는 "적당히 말랑말랑한 공 넘기기"를 반 달 동안이나 못하셨으니 정말 힘드셨겠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경쾌한 손맛을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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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서울대 경제학부 이준구 교수님의 홈페이지로 인해 두분을 뵙게되고, 많은 좋은분들을 만나고,

    또 덕분에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경제에 관한 책하나 글하나, 두분께서 올려주시는 다양한 여려방면의 훌륭한 글들을 읽으며,

    그동안 무료하고 크게 의미없어했던 제 삶에 대한 새로운 자극을 얻고,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혔다고 말씀드리면.....


    너무 티(??)나는 아부일까요?? ^^;;

    하지만, 제 성격상 근거없는 아부를 못하는지라, 사실입니다. ㅎㅎ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박사님.

    주말 잘 보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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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영환 씨, 어서 오세요. 제 글보다는 이 선생님 글이 영환 씨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응원에 감사합니다.
    영환 씨도 검푸른 바다와 함께 즐거운 주말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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