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리주저리 가볍게 제 유학 초창기 공부와 관련하여 여담 한마디 할게요. 저는 이전에 정치학을 공부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이 교수님 후배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면 게임이론을 배울 기회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 정치학계가 전통적인 역사/기술적(記述的) 연구나 정치사상 등에 치중하고, 행태주의적인 통계기법을 원용하는 연구 등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정치외교학과 학생은 개인적인 관심이 있어서 게임이론을 공부했다면 모를까, 일반적인 정치학과 커리큘럼을 따라간다면 게임이론을 공부할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죠.
유학을 와서 첫 학기 수강신청을 하려고 하니 필수과목 중에 수학적 모형화(Mathematical Modeling)라는 과목이 눈에 띄더군요. 음, 어렵소, 이것 봐라. 정치학과에서 수학이라? 정치학과 수학이 무슨 상관이 있나? 그리고 모형이라고라 고라? 무슨 집 지을 일 있나? 이런 기타 등등의 생각이 드는 것은 자연스런 반응이었습니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그 과목을 들었더니 중학교에서 배웠던 인수분해, 고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미분 등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그것도 헤매는 동기생들이 있다는 것이었죠. 저로서야 우리나라의 대입에 단련된 몸이라 그 정도는 날로 먹는 것이었으니, 매주 내어주는 숙제는 채점되어서 받아볼 때마다 100점. 동기들이 저를 수학의 귀재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간단한 인수분해 같은 것은 그냥 눈으로 봐도 할 수 있었으니, 그들이 보면 마냥 신기할 따름이었죠. 미국 고등학교 교육이 우리와 같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동기생들의 배경을 알고 보니 놀랍더군요. 동기생 한 명은 알래스카에서 변호사 하다 무슨 해괴망측한 신이 들렸던지 때려치우고 정치학과에 왔던 것입니다. 법과 정치는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 이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학과 출신 동기생도 있었고요, 생물학과 출신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재미있죠? 정치학과 대학원 과정에 수학과 출신, 생물학과 출신이 들어온 것, 저는 너무 신기했습니다. 그런 자연계 출신들이 거뜬히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그 정치학과가 전통적인 정치학 방법론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합리적 선택 방법론을 위주로 학생들을 훈련하는 박사과정이었습니다.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세뇌되었던 머리를 갖고 그 커리큘럼을 따라가자고 하니 적응이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전통적 방법론으로 정치학을 5년 넘게 공부한 사람이 인수분해나 미분을 하고 있었으니, 이게 제대로 온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죠. 행정학 쪽 강의를 들어갔더니, 내주는 문제가 고속도로 제한속도를 올리는 것의 손익을 계산하라는 것입니다. 그것까지는 괜찮죠. 그런데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가르쳐주는 것 중 하나가 사람의 생명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입니다. 대 정치학을 공부하는데 인간의 존엄성을 논해야지, 그깟 고속도로 제한속도 문제를 풀려고 사람 생명을 돈으로 치환해? 이건 모야?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죠.
교수님들 영어도 잘 들리지 않았죠, 기타 등등으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처음에는 동기생들이 강의 시간에 샬라샬라 떠드는 것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영어가 잘되지 않아서 교수님 강의내용 확인하는 것도 버거운데 토론은 꿈도 못 꾸는 제가 너무 위태위태해 보였습니다. (6개월 정도 지나니 조금씩 들리더군요. 한참 뒤에 동기생들 이야기하는 것도 들리더군요. 좋은 내용도 많았지만, 헛소리도 많았습니다. ^^) 때려치워? 이런 생각도 많이 들었죠.
1년 정도 지나니 우리나라에서 세뇌되었던 머리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들었던 두 강의가 제 머리를 반대 방향으로 세뇌시켰습니다. 그 중 한 강의는 정치학의 합리적 선택 방법론의 태두이신 라이커(William H. Riker) 교수님의 강의였습니다. 그 강의를 들으면서 저는 정치적 조작(Political Manipulation)이 어떤 것인지 공부하게 됩니다. 또한, 스탠포드 경제학과 애로우(Kenneth Arrow) 교수의 불가능성 정리(The Impossibility Theorem)를 배우면서 “자유민주주의에는 정답이 있나, 없나?”를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강의가 뱅스(Jeffrey Banks) 교수님의 게임이론이었습니다. 첫 시간에 들어갔더니 청바지 입은 형님뻘 되는, 조교 정도로 보이는 사람이 분필 하나만 들고 달랑달랑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때는 뱅스 교수님이 실력이 있는지, 유명한지 어떤지를 몰랐으니, 그냥 덤덤하게 제자리에 앉아서 “자, 이 과목 학점은 어떻게 잘 받아야 되나?”라는 잔머리만 굴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가르치시느냐면요, 게임을 강의하시고 게임 푸는 숙제를 매주 내주는 식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쉬(John Nash) 균형을 설명하고 게임 푸는 논리를 가르쳐주신 다음, 간단한 2x2 게임들을 여러 개 주시면서 집에 가서 풀어봐, 이런 식이죠.
그 간단하게 보이던 매트릭스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용의자의 딜레마 게임에서 둘 다 침묵을 지키면 더 좋은데, 둘 다 자백하는 상호배반이 균형이 되는 것입니다. 고민 고민하다 한국에서 먼저 공부하러 온 선배형 댁으로 창피를 무릅쓰고 찾아갔습니다. 그 선배는 제가 청운의 꿈을 안고 미국에 도착하여 처음에 인사드리러 갔더니 껄껄 웃으시면서, “첫 학기는 저하고 고스톱만 치면 됩니다.”라고 해서 저를 깜짝 놀라게 했었죠.
숙제를 보여주면서 도움을 요청하니, 저보고 먼저 어떻게 머리를 굴렸는지 설명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차여차 이렇게 저렇게 하면 요게 균형 아닙니까? 라고 말했죠. 그랬더니, 그랬더니, “허허, 상대방의 대안 선택을 딱 잡아 놓고 보수(payoff)를 비교해야지, 그렇게 양쪽 선택을 한꺼번에 움직이면 어떡하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딱 들으니 제가 내쉬 균형의 정의에 벗어나는 머리 굴리기를 했다는 것이 팍 들어왔습니다.
그다음부터는 게임 공부가 재미있어졌습니다. 그래서 동시 게임(simultaneous game)도 배우고, 순차 게임(sequential game)도 배우고, 급기야는 시그널링 게임(signaling game)의 순차 균형(sequential equilibrium)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게임이론 공부는 무척 어렵습니다. 어떤 때는 머리가 지끈지끈하죠. 균형은 있다는 것을 약 50년 전 내쉬가 알려줬으니, 분명히 있는데 계산을 틀리지 않고, 균형 정의에 딱 맞춰서 찾아내는 것이 헷갈릴 때가 잦습니다. 그래서 재미를 못 붙이면 견뎌내기가 좀 어렵습니다.
게임이론을 가르쳐주신 뱅스 교수님께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분은 왕성한 활약을 보일 수 있는 젊은 시기인 여러 해 전에 하느님께서 데려가셨습니다. (뱅스 교수님의 명복을 빕니다...)
저는 게임이론을 포함하는 경제학이 참 부럽습니다. 이곳에 이 교수님 제자분들을 비롯한 경제학을 공부하고 계신 분들이 많이 오시는 것 같습니다. 아래 이 교수님 글에서 우리 경제학계 수준이 미국과 비교하면 한참 떨어진다고 한탄하시는데, 안타깝지만 현재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제가 보기에 우리 사회과학계에서 조금이라도 국제경쟁력을 갖춘 분야는 경제학밖에 없습니다. (미국에 계신 한국 경제학자들까지 포함해서요) 자부심을 느끼시고 열심히 하셔서 이 교수님을 행복하게 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조금 주제넘었습니다. 미안해요.)
게임 이론 하니까 생각나는데, 얼마 전에 죄수의 딜레마를 다룬 액설로드의 '협력의 진화'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답글삭제그 책이 매우 훌륭한 연구 결과를 보여줍니다. 용의자의 딜레마 반복게임에서 맞대응(Tit-for-Tat) 전략이 왜 유용한 것인지를 자세하게 분석하죠. 좋은 책을 Dr. 홍께서 읽으셨습니다. 반갑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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