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Notice) | 방 명 록 (GuestBoard)

2009년 10월 31일 토요일

[여행기]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출발

샌프란시스코 공항이 국제공항이죠.^^ 공항 청사 모습은 말발굽 모양입니다. 여행객들에게 기능적으로 매우 편리하게 설계되었다는 느낌을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갈 때마다 저는 항상 받습니다. 옆의 사진을 보시면 공항 주변에 대해서 감을 잡으실 수 있겠습니다. 활주로는 샌프란시스코 만에 붙어 있습니다. 오른쪽 밑에 보이는 고속도로가 미국 서부 끝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101번 공로입니다. 그 고속도로를 통해서 공항으로 들어갑니다.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청사는 몇 년 전에 리모델링해서 인천국제공항처럼 깨끗합니다.  10월 10일, 이번 귀국여행 출발 때 찍은 사진을 보시죠. 비행사 탑승수속 데스크가 있는 공간과 탑승구로 가는 통로입니다.

제가 탄 비행기가 대기 중입니다. 우리나라 아시아나 항공사이며 기종은 B777입니다. 좌석 공간도 괜찮은 편이며, 특히 음식이 좋더군요.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음은 샌프란시스코 공항 벽을 장식하는 멋진 그림들입니다. 우리 인천국제공항에도 이런 대형 그림들을 곳곳에 걸어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9년 10월 29일 목요일

[Dr. 홍] 위법이나 유효하다

오늘,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하지 않는다. 라는 논리보다 어쩌면 더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발효를 막을 수도 있는 법안에 헌재가 스스로 성공 도장을 찍어준 셈이니.

세 분의 재판관은 법안 통과 절차는 잘못 되었다고 판결했으나,
입법부의 자율과 권한을 존중하기 위해 법안통과가 유효하다고 하셨답니다.

삼권분립이란 한 쪽의 독주를 막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텐데,
이 분들의 생각은 저와는 크게 다른 것 같습니다.


p.s. 박사님, 내일 출국하시는군요. 평안한 비행길 되시기 바랍니다.

2009년 10월 28일 수요일

[Dr. 홍] 인플루엔자 잡담

0.
언제나 그렇듯 문외불출입니다.



1.
모임에 참석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한국에서 안 박사님을 뵙지 못 해 무척 서운하군요. 진료에, 학회 발표와 개인적인 일이 겹쳐서 도무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습니다. 학회 발표 준비를 위해 피같은 휴가를 썼을 정도였으니, 조금은 정상 참작을 부탁드립니다.

언젠가 제가 꽃 한 송이 꽃고 샌프란시스코에 가게 될 때를 기약하며, 속죄를 위해 또 한 번 글을 올립니다.



2.
어제 거점병원 의료진 용으로 배포된 신종 인플루엔자 백신을 맞았습니다. 좀 아프더군요. ; 그래도 아픈 내색 안 하고 씩씩하게 맞았습니다.

사실 저는 바이러스에 너무 많이 노출되었기 때문에 이미 앓고 지나갔을지 모른다는 의심도 듭니다. 평소에 감기를 달고 살아서 걸렸는지 잘 몰라서 그럴 뿐.. 앓고 지나갔더라도 맞으라니까 또 맞아야죠 뭐.

네트워크 이론을 전공하신 분이, 올 해 안으로 신종 인플루엔자로 100명 정도는 죽지 않을까? 라고 예측하신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의학을 전공하신 분은 물론 아니고, 단지 변수와 변수의 상호작용이라는 것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보신 것 같습니다. 대단히 rough한 시뮬레이션이었겠지만..

저는 그 분과 반대로 의학을 전공했고 네트워크 이론에는 무지합니다만, 그 예측이 설득력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초기의 사망자수는 exponential curve를 그리다가 (감염과 백신을 통해) 집단면역이 생기면서 plateu를 이루고 소멸되겠죠. 지금은 100명보다는 좀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1000명 단위까지 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100명의 죽음이 아니라 단 한 명의 죽음이라도, 죽음은 그 자체로 슬픈 것입니다만, 현장에 있는 의사로서 판단컨대, 적어도 저 정도의 사망은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3.
사망률에 대해 말들이 많습니다. 계절 독감보다 낮다, 비슷하다, 뭔 소리냐, 전 세계적으로 5000명이 넘게 죽었는데.. 등등.

사실 신종 인플루엔자의 병원균으로서의 장점(?)은 그 가공할만한 전파력에 있지, 치명률은 그냥 그렇습니다. 나라 별로 다르긴 하지만, WHO 사망률 통계 (http://www.who.int/csr/don/2009_10_23/en/index.html 하단의 table)를 보면, 남북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를 제외한 지역의 확진자 대 사망자 비율은 0.04~0.07%에 불과합니다.

사망률이 높다는 주장을 하는 쪽에서 흔히 간과하는 것은 물론 잠재 감염이지요. 잠재 감염을 고려하면 저 비율보다 분모의 숫자가 커지고 사망률은 낮아집니다.

일선에 있는 저의 경험으로도 확진되지 않은 감염자 수가 확진 환자의 최소한 2배는 넘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은 현재 많은 (특히 1차) 의료기관에서 확진을 위한 PCR을 의뢰하지 않은채 환자를 진료하고 있으며, 제가 경멸해마지 않는 신속항원검사도 거기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속항원검사에 대해서는 10월 7일에 올린 포스팅을 참조하시길.)

남북아메리카의 확진자 대 사망자 비율은 2.2%, 동남아시아는 1.4% 정도입니다. 왜 저 지역들에서 저런 높은 사망률을 보이는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균 자체의 특성이 다르다는 말은 아직 없고.. 이럴 때 늘상 거론되는 환자측 요인, 환경 요인 외에도, 잠재 감염의 과소 평가가 한 몫 하고 있기는 할 겁니다.



4.
아뭏든 SI가 인플루엔자 대재앙의 현재로서 가장 유력한 후보이긴 하지만, 백신이 이제 나오기 시작했을 뿐이고, 바이러스의 변이에 대한 것도 아직 확실한 것이 없어서,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조용히 물러나주면 좋겠지만요...

아직까지는 정부나, WHO가 잘 대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까놓고 말씀드리자면, 저는 지금 정부에 대해 출범 전부터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만, 신종 인플루엔자에 대한 대책을 크게 잘못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초창기에 좀더 융단폭격식 대응을 했으면 상황이 달라졌을 거라는 주장도 있지만, 다른 나라 상황을 보면, 크게 달라졌을 거 같지 않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 국가를 통째로 격리시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요.

감염 예방 수칙은 잘 지키시되, 너무 공포에 사로잡히시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2009년 10월 26일 월요일

[여행기] 울릉도와 독도를 다녀왔습니다.

지난주 금요일부터 어제까지 울릉도와 독도를 다녀왔습니다. 인터넷 친구가 울릉도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친구도 만나고 관광도 할 좋은 기회라서 결행했습니다. 정말 유익하고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미국에 돌아가서 사진을 재정리해서 다시 글을 올리겠지만, 일단 사진 몇 장을 공개합니다.
독도

독도

도동

도동

바다에서 바라본 경치

코끼리 바위

가위 바위

단풍 (성인봉 등산로에서)

성인봉에서 바라본 나리 분지

[링크] 독후감, <36.5℃ 인간의 경제학>

서울대 경제학부 이준구 교수님의 행태경제학 신간 <36.5℃ 인간의 경제학>을 읽은 감상문입니다. 재미있고, 쉽고, 다양한 인간을 만날 수 있고, 학문과 교육의 양수겸장인 역작입니다. 아래를 클릭하시면 감상문으로 갑니다.

http://ahnabc.blogspot.com/2009/09/blog-post_6713.html

2009년 10월 22일 목요일

[파란봄] 인사가 늦었습니다.

과분한 대접을 받고도 이제서야 인사 드리는 것을 용서해 주시길 구합니다.
깜짝 손님으로 이준구 교수님을 뵙게 된 것도 대단한 행운이었고 (식사와 악수까지 !_!)
맛있는 음식과 인터넷 식구들의 유쾌한 자리를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두 교수님을 뵈며
때로는 20세 청년보다 60세 된 사람에게
청춘이 있다는 싯구가 떠올랐네요.
(흘깃 듣기로 안교수님 최근 12일 일정을 소화하신 것만 보면 20대 체력 부럽지 않으실 듯 ^^)

약속 시간 전에 그 주변을 잠깐 배회 했는데
꽃을 살까 하다가 마땅한 꽃이 없어서
그만 두었습니다. 아쉬운대로 사진으로 대신 합니다. (꽃이 가득하지는 않지만 푸른 중에 피어있는 것이 교수님과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독도 즐겁게 다녀 오세요^^*

[자유] 남을 걱정하면서 혹은 척하면서 남의 신체를 비하할 때

자유주의에서는 남에게 조언할 때 조심하는 것이 좋겠죠. 특히, 남의 신체를 꼬집어서 무엇이라 말하는 것은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상대방에게 살이 쪘다든지, 비만이라고 이야기하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예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큰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다이어트를 권하는 식으로 에둘러서 조언할 수는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처음 하는 인사가 "살이 왜 그렇게 쪘느냐?" 혹은 "말라서 젓가락 같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말을 듣는 사람의 기분은 어떨까요? 같은 말이라도 간접적으로 하거나, 상대방 기분을 상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면 아예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자유주의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상대방의 기분이 어떻든, 비만은 절대적으로 나쁘다!, 그러니 나는 옳은 조언을 한다!, 고로 너는 살을 빼야 한다! 식으로 대놓고 말하는 것은 왠지 권위주의 분위기가 풍기는 것 같네요. 상대방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느낌을 순간적으로 내뱉는 것도 문제이죠. 아무튼 남의 신체에 대해서 말할 때는 표현을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9년 10월 21일 수요일

[여행기] 캘리포니아 쇼핑 몰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8/17)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는 밖에 나가서 사진만 찍으면 여행기를 올릴 수 있더군요. 그래서 항상 디카를 가지고 다니려고 하는데, 깜빡 잊을 때가 잦습니다. 오늘도 그랬습니다. 제가 사는 Palo Alto에서 15분 정도 북쪽으로, 샌프란시스코 방향으로 가면 Hillisdale Shopping Center라는 제법 큰 Mall이 있습니다. 거기 갈 일이 있었는데, 또 디카를 잊고 집을 나섰던 것이죠. 쇼핑 몰에 들어가서 그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성능은 많이 떨어지지만 핸드폰에 있는 사진기로 촬영한 것이 위 사진입니다. 화질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여행기! 입니다. ㅋ 천정을 완전히 막지 않고, 일부는 유리로 마감하여 자연광이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실내에 큰 열대수를 키울 수 있죠. 실내이지만 시원한 키 큰 나무가 있으니 갑갑한 느낌이 한층 적습니다. 두 번째 사진은 그릇 파는 곳인데요, 사진을 한 장만 올리면 무미건조할 것 같아서 함께 올립니다. ㅋ 싱겁죠?

[잡담] 패러디, 처사 준쿠샘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8/29)

때는 자유민주력 8년 봄, 한민국에는 중원의 새 패자가 등극하였다. 이름하야 박맨! 박맨은 7년 겨울에 벌어진 한민국 최고무공대회에서 나라파를 대표하여 주민파 대표 영동을 가볍게 물리치고, 중원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전 패자인 현무로부터 중원 연합의 권력을 물려받기 위해서 차린 인수박은 기대와는 달리 오왠지스런 뻘짓을 했다. 이에 강분한 강호의 여러 제현이 눈을 싯!퍼렇게 뜨고 박맨 나라파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게 되었다. 그중 관악산 밑에서 글 읽기 쓰기와 후학 가르치기에 열중하고 있었던 준쿠샘도 있었다.

준쿠샘의 성은 이, 자는 불광이고, 호는 자유민주이다. 원래 강호의 일에는 무관심했고, 대부분 시간을 책, 학동, 화초와 더불어서 보낸 처사이다. 시간이 나면 주유천하 하면서 자연이나 사람 사는 모습을 정밀하게 화폭에 담는 취미를 갖고 있다. "적당히 말랑한 공 넘기기"라는 서역에서 넘어온 무공을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체력 단련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호에서는 준쿠샘 내공을 초절정 수준으로 평가한다. 특히, 물자와 돈에 관한 미세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입신의 경지에 버금가는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준쿠샘이 일갈하여 등대지기 초식을 펼치면, 가히 앞에서 대적하려고 나서는 자는 거의 없고,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찌질한 무사들이 대부분이다. 안타까운 일이로세.

8년 봄에 박맨의 새 본산인 와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한 정보를 가진 강호의 무사는 별로 없었다. 와대의 새 호위무사 진용을 박맨이 발표했는데, 그것이 강호의 울분을 터뜨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본시 와대 호위무사는 지역, 성별, 사회적 지위, 재산 등을 차별하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실력 위주로 뽑아야 하거늘, 박맨은 강부자, 고소영 등의 편파 및 몰상식 인선을 선보였던 것이다. 결국, 수많은 강호 제현의 추상같은 격문에 덜컥 겁이 난 박맨은 일부 호위무사를 갈아치울 수밖에 없었다.

오호통재라! 많은 백성은 박맨이 등 따시고 배부르게 해준다는 장밋빛 약속에 혹하여 무공대회에서 박맨을 열씨미 응원했지만, 첫 단추 끼우기부터 이렇게 실망을 안겨줬던 것이다. (to be continued by another member, 대운하 편 & 종부세 편 포함^^)

2009년 10월 19일 월요일

[단상] 우리나라 남자의 가사 일 돕기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7/18)

저는 아버지께서 부엌에 들어가서 일하시는 것을 본 적이 한 번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유교적 가장으로서 여자는 부엌, 남자는 직장을 본거지로 하여서 벗어남이 없어야 된다는 것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신 분이었습니다. 아마 그것이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였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부재중이셨고, 도와주시기로 한 친척이 시골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시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등교하려고 옷을 차려입고 부엌에 들어가 보니, 그 엄하셨던 아버지께서 제 도시락을 만들고 계셨던 것이 아닙니까. 한 편으로는 충격이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아버지 모습이 약간 우스꽝스러웠습니다.

"아버지, 제가 하겠습니다."
"내가 하니까 이상하냐?"
그 도시락은 어머니께서 싸주신 것에 비하면 조금 어설픈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뿌듯하게 가져가서 맛있게, 그리고 조금은 서글픈 마음으로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께서 부엌에서 어정쩡하게 일하시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이건. 영 아니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아마도 시대, 장소, 사람에 따라서, 가사 일을 남자가 하는 것이 어색할 수도 있고 자연스러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유학 시절, 한국 유학생 부인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국 남자들은 중국 남자들이 부엌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던 것 같습니다. 같은 유학생인데도 중국 기혼남 유학생들은 대부분 부엌 일을 했지만, 부인이 있는 한국 남자 유학생들은 거의 부엌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는 분들의 상상에 맡기는 것이 재미있겠습니다. 이 선생님께서는? 쿠키를 잘 만드시고, 장 보시는 특기가 있으시다는 기존 정보가 있다는 정도는 제가 압니다.^^

[단상] 이기심과 이타심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9/06)

인터넷 동호회에서 다음과 같은 발제를 해봤습니다.

(발제 시작)
날 짜 (Date): 2009년 09월 03일 (목) 오후 08시 04분 54초
제 목(Title): 인간은?

이기적일까요, 이타적일까요? 아니면 이기적이기도 하고, 이타적이기도 할까요? 이기적 이타심이나 이타적 이기심도 있을까요?

아프리카에서 구호활동을 펼치는 일부 자원봉사자의 활동을 이기적 이타주의(Selfish Altruism)로 해석한 글을 인터넷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남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프리카의 못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우월한 처지에 자부심을 느끼는 이기주의가 작동한다는 것이죠. 마리아 테레사 수녀님은 그렇지 않았겠지만, 이런 이기적 이타심도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발제 끝)

댓글이 여러 개 달렸습니다. 그 중에서 다음 두 댓글이 재미있었습니다.

이공계 분들인 것 같습니다.

"이기적이지 않은 이타심은 그럼 다음과 같은 것일까요?
1) 자기와 대등한 사람들을 돕는 경우
2) 자기보다 우월한 처지의 사람들을 돕는 경우
(왠지 공돌이들은 이타적인 것 같다는...)"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주의, 가족 등 일부 집단을 위한 이기주의, 종족(인류) 전체의 이익을 위한 이기주의, 순수한 이기주의, 이타적 이기주의, 이기적 이타주의... 모두 이기주의의 다양한 형태일 뿐이죠.
진화생물학에서 내린 결론을 받아 들이니 더이상 다른 설명에는 별로 관심이 안가게 되는군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잡담] 고향 부산에 있습니다.

우리나라 일정이 팍팍해서 글을 못 올리고 있습니다. ㅜ.ㅜ
회원님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합니다.

조만간 글을 올리겠습니다. ^^

2009년 10월 16일 금요일

[단상] EHSA 동문과의 만남

제가 학부 때 서울대 동아리인 EHSA(English Hearing & Speaking Association)에서 활동했습니다. 영어 공부가 주 목표인 동아리였지만, 다른 동아리들과 마찬가지로 친목 활동도 큰 몫을 차지했죠. 그래서 愛社라고도 불렀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

어제 저녁에 그 동아리 몇몇 동문이 모여서 정말 유쾌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사회의 중진급이 되었지만 타임머신을 탄 듯이 옛날로 돌아가서 격의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바쁘신데도 지방에서 올라와 주신 선배님들의 정성이 매우 고마웠습니다.

친구와 선배님들의 오래된 진한 맛을 맛볼 수 있는 모임이었습니다.

[잡담] 늠름한 추신수 선수를 직접 봤습니다.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9/18)

지난달에 아들이 서프라이즈가 있다고 하면서 저녁 시간을 하루 비워두라고 하더군요. 그날이 이곳 시간으로 어제였습니다. 끌려갔습니다. 갔더니... Oakland A's 야구장이더군요. 디카를 못 가져갔습니다. 또 손전화 사진기로 찍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ㅜ.ㅜ



첫 번째 사진은 야구장 들어가는 길에서 찍었습니다.
두 번째 사진은 입구입니다.
세 번째는 아시겠죠?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우리의 추신수! 입니다.

어제 잘했는데, 팀은 졌습니다. 2타수 1안타, 볼넷 하나, 몸에 맞는 공 하나, 그리고 그림 같은 호수비를 보여줬습니다. 늠름한 추 선수를 보고 기분이 한껏 좋아졌습니다. 추 선수가 WBC 결승전에서 홈런 치는 장면입니다.

즐거운 주말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http://farm1.static.flickr.com/171/487425243_54cd9cceae.jpg

2009년 10월 15일 목요일

[잡담] 같이 놀면서 공부했던 학생 친구들 (2)

8월 29일에 올렸던 "[수필] 같이 놀면서 공부했던 학생 친구들"의 주인공들을 어제 만났습니다. 이제는 모두 "훌륭한" 교수님이 되신 모습이 아주 좋았습니다. 선생 같지도 않은 선생에게서 지도 같지도 않은 지도를 받았지만, 그래도 외면하지 않고 오랜만에 반갑게 대해준 옛 학생 친구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흥에 겨워서 쓸데없는 말을 주저리주저리 한 것 같아서 약간 걱정도 되기는 하지만, 매우 유쾌한 대접을 받았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모두 더 "훌륭하고" 탁월한 학자가 될 것을 기원합니다.

2009년 10월 14일 수요일

[수필] 한 제자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

(2003/04/28)

제자에게,

제자야,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옛 선생이 추진하는 일에 대해서 관심도 보여주고 의견도 보내줘서 고맙다. 여러번 강조했지만 나는 네가 하고 있는 일에 더 매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일에 도움을 주지 않아도 전혀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는단다. 무리하게 도우는 것은 오히려 바보같이 사는 것이라고 이미 가르쳐 주었다. 따라서 일전에 만나서 네 도움을 요청한 것도 네 생각이 나의 생각과 같고, 네가 나를 도와줄 여유가 있을 때 "착하게" 사는 한 방식으로 도와주고 행복하다면 도와주는 식으로 생각하기 바란다.

제자는 내가 정의한 식으로 착하게 살 생각이 여전히 없고, 다만 이기적으로 살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은 인간으로서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이기적으로 살면서 남에게 피해를 주면 나쁜 사람이 되며, 경우에 따라서 도덕적/사회적 비난을 받는다. 심한 경우에는 법적 제재를 받게 된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에서 이기적으로 살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성냥불 운동은 제자가 얘기한 삶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 보자는 취지의 개인주의적 운동이다. 그 취지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착하고 바르게 살면 장기적으로는 득이 된다는 계산법에 동의하며 스스로 실천하는 운동이다. 그 취지에 동의하지 않으면 제자의 말대로 이기적이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기본적인 삶에 충실하면 된다. 그것이 옳다든지 틀렸다든지 식으로 강변해서는 안된다. 다만 입장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적절하다.

착하게 살자는 취지에는 동감하면서, 개인적으로 착하게 살자고 약속할 수 없는 것은 표현에서 오는 견해 차이라고 제자가 설명했다. 그것은 성냥불 운동의 취지에는 찬성하지만, 성냥불 운동에는 동참할 수 없다는 뜻으로 나는 해석한다. 제자의 개인적 선택을 백분 존중한다. 나는 섭섭한 마음을 갖고 있지만, 또한 그것이 나의 기대와는 크게 어긋나는 것이지만 네 삶을 네가 선택하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생각한다면 성냥불 운동에 동참하지 말고 제자의 말대로 이기적이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살기 바란다.

제자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기적으로 살 수도 있고, 이타적으로 살 수도 있고, 혼합형으로 살 수도 있고, 착하게 살 수도 있다. 제자는 이기적으로 살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사회적으로도 유익하고 남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착하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것은 제자가 정의한 "착함"이 되겠다. 내가 정의한 "착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 주장은 궤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이기적이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은 남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고 인간 삶의 기본 원칙에 해당된다.

물론 남을 등쳐 먹고 사기를 치는 인간들이 많은 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그런 기본적인 삶이 남에게 베푸는 것이고 "착한" 것이라고 강변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이기적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남에게 베풀지 않는다. 남에게 베푸는 이기주의자라는 개념은 자기모순이다. 이기주의자는 다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정도가 될 것이다. 내 설명이 틀렸다면 언제든지 다시 제자가 나를 가르쳐주기 바란다. 물론 이기주의자가 일시적으로 이기주의자를 탈피하면서 남에게 베푸는 행동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제자가 착하게 살기를 여전히 원한다. 이기적이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기본적인 삶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능력이 되는 한 남에게 도움을 주면서 행복하게 생각할 수 있는 착한 삶을 추구하기 바란다. 그런 좋은 삶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나는 제자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능력 한도 내에서 남을 도와주었는데 제자가 괴로워진다던지, 불행한 생각이 든다면 착하게 살지 않으면 된다. 그 경우에는 그냥 기본형으로 살아야 될 것이다. 그래도 전혀 하자가 없다. 그런데 내 기대에는 크게 어긋날 것이다.

제자는 성선설에 동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답하고 싶다. 성선설이 옳은지 성악설이 옳은지 나는 모른다. 만약 제자가 성악설을 믿고 있다면 성냥불 운동에 동참할 가능성은 낮아질 것이다. 제자가 성선설에 동감하지 않는다고 해서 성악설에 동감하는 것으로 나는 해석하지 않는다. 인간은 어떤 때는 선하고, 어떤 때는 악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성선설에 동감하지 않더라도 성냥불 운동에는 동참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개인적인 선택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제자의 건강과 건승을 빈다. 착하게 살기 바란다.

옛 선생님

2009년 10월 13일 화요일

[자유] 교수님 뒷 담화 및 어느 자유주의자의 소통 노력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7/07)

며칠 전에 OOO님에게 약속한 글을 올립니다. Pacta sunt servanda.(Pacts should be served?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국제법의 제1 원칙이라고 볼 수 있음. @@씨 맞나요?^^)를 하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제 생각에 교수님께서 이번에도 저에게 중책을 맡기신 것은 무슨 배려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전적으로 제 추측입니다만, "안박이 뭔가 할 말이 있는가보다. 에라 잘 됐다, 나는 여행을 떠나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돌아와서 봐야지. 오버할 가능성이 있지만, 그 정도야 내가 똘레랑스를 베풀 수 있지."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을까 싶네요.^^ 죄송합니다. 제 마음대로 교수님의 양심의 자유를 추정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러나 저도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예 이 기회에 교수님 뒷 담화까지 감행하는 자유를 만끽하고자 합니다. 제 자유가 방종으로 판정되면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 판정은 여러분이 민주주의적으로 해주십시오. 1인 1표입니다. 댓글 중 반 이상이 방종으로 판정내리면, 그 뜻을 존중하고 교수님께서 내리시는 처벌을 받겠습니다. 제 댓글은 당연히 투표에서 제외됩니다.

1. 뒷 담화 전통 수립을 위하여!

쉿, 교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뒷 담화를 하는 전통을 만들어볼까 합니다. 작년에 교수님께서 부재중일 때 "불손"하게도 제가 뒷 담화 이벤트를 열었었죠. 그때 부산 분도 유치원 출신 ***님께서 영예의 대상을 차지했습니다. 유치원을 좋은 데를 나와야 합니다! 부상으로 고급 머스탱 자동차를 한 대 제공했습니다. 2등은? %%씨가 랜드로바를 받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번 방학 때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랜드로바가 비포장 도로를 달릴 때는 최고입니다. 그런데 연료를 제법 많이 먹는 점이 조금 맘에 걸리기는 합니다.^^ 올해에도 이벤트를 해볼까 했는데 요즘 경기가 좋지 않아서 제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그 비싼 자동차들을 살 여력이 되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저 혼자 교수님 뒷 담화를 하고 끝내려고 합니다.

2. 교수님과의 만남

사실 제가 교수님을 직접 뵌 것은, 제 기억으로는 최대한 네 번입니다. 서울대에 부임해서 첫 번째로 논문 발표를 한 곳이 경제학과 경제연구소 주최 세미나였습니다. 주제는 대통령 선거제도 개선방안이었죠. 결선투표 도입해야 된다고 신나게 떠들었죠. 공공선택 분야입니다. 그 세미나에 들어오셨다면 네 번이고, 아니면 세 번입니다. 두 번은 테니스장에서 뵈었고, 한 번은 회식자리였습니다. 제가 서울대에 부임한 이후에는 테니스를 그렇게 자주 하지는 않았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는 자주 쳤죠. 서울에서는 잡다한 일이 너무 많아서 테니스를 할 여유가 별로 생기지 않더군요. 그래도 가끔 사회대 테니스 모임이 있을 때는 끼어들어서 신세를 지곤 했습니다.

3. 권위주의형 식당 종업원

교수님을 뵌 것을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1997년 사회대 교수 테니스 대회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소속도 달랐지만, 주최 측에서 사회대 출신이라서 덤으로 붙어도 괜찮다고 하여 참가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제가 그날 상도 받았습니다! ㅎㅎㅎ 실력이 좋아서 받은 것이 아니고, 2부 리그에 출전했는데 거의 다 상을 받으시더군요. ㅋ

테니스 대회가 끝나고서 저녁 회식을 하러 갔었습니다. 그 자리에 교수님도 계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쟁쟁한 학자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부푼 가슴을 안고 약속장소로 갔습니다. 그런데 다른 회식 자리와 별 차이가 없더군요.^^ 고기를 시켰습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안심, 차돌박이, 꽃등심, 이런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보통은 식당을 찾는 손님들이 어떤 순서대로 고기를 먹을지 결정하는 자유를 갖고 있죠. 그런데 어떤 교수님이 이러저러한 순서대로 고기를 갖다 달라고 하니, 담당 종업원이 그렇게 먹으면 고기맛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냥 공손히 손님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정도가 아니라 제법 고집이 있더군요.^^

여러분은 이럴 때 어떻게 하십니까? 그 자리에 있었던 교수님 대부분은 조금 기분이 나쁜 눈치는 보였지만, 별말씀을 하지 않으시더군요. 그런데 제일 막내인 제가 꼭지가 돌아버렸습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교수님들께 결례한 것이더군요. 이 자리를 빌려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고기 순서뿐만 아니라, 어느 교수님이 참기름을 갖다 달라고 했는데, 쇠고기는 참기름을 발라 먹으면 제 맛을 알 수 없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정도였습니다. 권위주의형 식당 종업원이었습니다. 미국에서 그렇게 서빙을 하면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종업원에게 직접 얘기하면 서로 기분이 상할 수 있으니 일단 매니저를 불러달라고 요청해서 매니저에게 항의합니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담당 종업원을 교체해줍니다. 정중하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요.

저는 화가 나서 미국식으로 하지 않고, 종업원에게 "개인 선호 존중"의 중요성에 대해서 초스피드 강의를 해버렸습니다.^^ 어떤 교수님께서 우스개 말씀을 하시면서 그 일은 봉합되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낯 뜨거운 장면입니다. 그 자리에 교수님이 계셨던 것이 맞았다면 정중하게 사과드립니다. (무슨 뒷 담화가 이럴까요?^^)

4. 문화의 차이

그 일이 벌어졌던 시점을 기준으로, 시간강사를 했던 1994년 봄 학기를 제외한 10년 정도를 저는 미국에서 살다 귀국했었죠. 게다가 로체스터에서 혹독한 자유주의 훈련을 받았고 현지 실습도 장기간 했기 때문에, 1997년에 귀국해서 서울에서 살아보니,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이 불편할 정도였습니다. 지하철에서 제 몸을 밀치고 나가는 승객님, 싸울 듯한 어투로 정치에 대해서 한 강의를 해주시는 택시기사분(그럴 때는 저 대신 강의를 드릴까 고민을 했죠^^), 불친절한 식당 종업원, 에스컬레이트에서는 양쪽을 모두 차지해서 바쁜데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 기타 등등 참 불편하더군요.

엄한 집에 시집온 며느리에게 시어머니가 훈계하듯이 "입 다물고 3년" 이런 충고도 들었습니다.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교수라면 영혼이 가장 자유로워야 하는 직업인데,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 영혼은 어쩌라는 것인지 이해가 잘 안되더군요. 그래서 저는 일을 하면서도 입을 별로 다물지 않았습니다. 제가 옳다고 믿은 것은 적절하게 의사표현을 했습니다. 그래 봤자, 일 개 조교수라서 별수는 없었지만요.^^ 그 당시 제가 많이 들었던 충고는 "마, 편하게 살아라!"였습니다.

5. 구조적 폭력의 문제

저는 이런 것들이 권위주의형 문화의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에서는 각자의 스타일을 최대한 존중합니다. 남에게 객관적인 피해만 끼치지 않으면 대충 OK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 "피해"라는 것이 근거도 없고 매우 주관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런 다른 이유 없이, 기분 나쁘니까 토요일에는 노란색 옷을 입고 오지 마!라고 얘기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을 우리는 제법 마주칠 수 있습니다.

OOO님과 대화 중 그 점을 느꼈습니다. 저야 그 당시에 사회적 약자가 아닌 강자 쪽에 있었던 사람이라서, 그런 얼토당토않은 일을 당하면, 상대방에게 오히려 방종 아니냐고 제대로 항의를 했죠. 그런데 OOO님과 같이 사회적 약자로 간주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그런 일을 겪으면... 마음에 병이 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구조적 폭력"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학에서 구조적 폭력을 많이 다뤘습니다. 인간 소외의 문제가 그것과 직결되어 있죠. 마르크스의 경우, 사람이 생산양식으로 말미암아 일할 맛이 나지 않으면, 구조적 폭력을 당하는 경우이므로 모두 단결하여 갈아엎어버리자고 주장한 것과 같습니다. 요한 갈퉁의 경우, 잘 사는 나라가 못 사는 나라의 인적 물적 자원을 착취한다고 보고, 그것을 구조적 폭력이라고 파악한 것이죠. 지금은 유행이 지났습니다만 종속이론(Dependency Theory)이 그 계통이죠.

6. 인터넷상의 구조적 폭력

저는 우리나라에도 이런 구조적 폭력 문제가 제법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인터넷 문화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서는 몸과 몸이 직접 부닥치지 않습니다. 글과 미디어 자료, 그리고 기타 무형의 정보전달로 모든 교류가 이뤄집니다. 따라서 언어 문제가 매우 중요합니다. 예컨대, 토론 중에 욕설을 퍼붓는 사람이 있습니다. 욕설의 미학도 있기는 있습니다. 어떤 정책이나 사안에 대해서 시원하게 욕설을 해대면 공감을 얻기도 하죠. 그러나 저는 그것마저도 별로 공감하지 않습니다. 제 선호가 그렇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같은 공간에 있는 다른 네티즌을 향해서 욕설을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일정 수를 넘어서면 구조적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저같이 욕설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욕설이 가해졌다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인신공격도 있죠.

최근에 이외수 씨가 공권력까지 동원해서 자신을 공격한 네티즌을 혼을 내겠다고 했는데, 만약 그 공격 내용이 사실이라면 저는 찬성입니다. 이것을 두고, 이외수 씨도 입이 험했다, 그 정도 똘레랑스도 없느냐, 그렇게 되면 국가가 자유 공간에 개입하는 것이라서 바람직하지 않다, 기타 등등 별의별 이유를 갖다대서 이외수씨를 말리거나 나무라기도 하지만, 사안의 핵심은 폭력의 문제입니다. 만약 이외수 씨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것이 있다면, 그 사람이 자구책을 행사하면 됩니다.

이렇게 자유주의는 각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려는 상호 견제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폭력"을 용인하는 것은 별로입니다. 언어 폭력에 대해서 관용을 베푸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관용입니다. 이런 때에는 불관용이 더 맞는다고 생각해요. 국가와 국민, 혹은 시민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유주의에서는 억울하게 당하지 않을 자유와 권리가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욕설을 들어서 언어 폭력을 당했다는 객관적 사실을 입증할 수만 있으면, 헌법의 기본권을 방어할 자유가 있습니다. 인권이 침해된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가 무서운 것입니다. 되받아칠 때는 더 심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되받아 치는 쪽은 뚜렷한 명분이 있거든요. 그때는 똘레랑스의 수위 조절은 완전히 정당방위 자구책을 행사하는 쪽에 있습니다. 그 자유를 비난하는 자유도 있지만, 근거가 충분해야 되겠죠. 그렇지 않으면 권위주의형 소통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다, 즉, 욕설이 문화였다고 주장하는 경우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욕설을 해도 된다고 투표를 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욕설에 대해서 같은 선호를 하고 있겠습니까. 이런 경우는 자신이 생각하는 문화의 특성이라는 가상 설정에 도덕적 판단을 환원시키는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입니다.

욕설은 나쁘다는 것이 사회 통념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도 존중해야죠. 특정 사이버 공간에 욕설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고 해서 전체를 그런 "욕설 공동체"로 몰고 가는 것은 일종의 집체주의적(populism) 사고방식입니다. 그것을 빌미로 욕설을 마음껏 쓰는 사람을 정치학에서는 권위주의자, 심한 경우에는 독재자라고 부릅니다.

7. 최근의 제 경험

저도 최근에 이외수 씨와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제 경우는 이외수 씨 것보다 더합니다. 이외수 씨는 일종의 공인으로 볼 수 있지만, 저는 그 사이버 공간에서 필명만 존재했거든요. 저에 대한 나머지 정보는 사생활에 해당되는 것이었죠. 서로 평등한 상태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온갖 자구책을 다 생각해봤고, 힘들게 실행에 옮기던 중에... 2009년 6월 28일 14시 33분(한국 시각)에 제 인생에 큰 변화가 옵니다. 이 교수님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래에 증거도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주의가가 되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야. 자유와 권리가 조금이라도 침해된다면 목숨을 걸고 싸울 용기를 갖고 있어야 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뿐 아니라 남의 자유와 권리까지도."
저는 교수님께 이 뒷 담화로 제 인생을 바꾸신 책임?을 여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교수님의 말씀을 읽고 용기를 내서 힘껏 노력하여 문제가 잘 해결되었습니다. 교수님, 매우 고맙습니다.

8. 다시 생각해본 "사회개선의 조그만 성냥불"

아울러서 제가 오랫동안 갖고 있었던 문제의식의 미흡한 점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가 찾아왔습니다. 이것도 교수님 말씀 때문입니다. 책임?지셔야 합니다.^^

제 제자들에게 오래전에 제안한 사회개선 운동이 하나 있습니다. 이름하여 "조그만 성냥불" 운동입니다. 건전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장기적으로 계산하면,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므로 그렇게 살겠다고 결심하는 운동입니다. 도덕재무장 운동이 아니고, 제대로 된 건전한 이기주의자 되기 운동입니다.

그런데 심지어 제 제자들로부터도 큰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뭐,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게임이론을 가르치면서 용의자의 딜레마 반복게임에 따르는 상황일 때, 상호배신을 상호협력으로 바꾸는 유력한 방법으로 Tit-for-Tat이라는 것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려던 것이 원래 취지였으니까요. 그래도 그 개인주의 운동이 더 알려지면 좋겠다는 생각에 같은 내용으로 신문에 칼럼을 적기도 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성냥불 운동이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천학이라서 푸코가 본질과 현상에 대해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정확하게는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만, 제가 아무리 본질을 얘기해도 받아들이는 쪽에서 현상으로 해석하면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제 책임도 분명히 있는 것이죠. "착하고 바르게 살기"가 이기주의, 개인주의라고요? 잘 믿기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따라서 일단 구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다음에 성냥불 운동은 사회지도층을 향하는 외침입니다. 엘리트들이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에 대해서 각성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거든요. 그런데 힘이 있는 사람들은 남의 말을 잘 듣지도 않고,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현재 잘사는데, 복잡하게 자신의 마음을 바꿉니까. 자유주의 세상인데요. 결국, 성냥불 운동이 자유주의에 입각한 운동이지만, 그 자유주의 때문에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제가 발견한 것입니다.

9. 자유민주주의 제대로 알기

짙은 구름 사이에서 한 줄기 빛이 내리는 것을 본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그 빛의 힘으로 엔돌핀이 돌아서 많은 말들을 제가 쏟아 놓았습니다. 제 글을 격려해주신 분들께 대단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모두 교수님 덕분입니다. 이번에는 착하고 바르게 살기가 아니고, 자유민주주의 바로 알기를 시도해볼까 합니다. 대상도 사회지도층이 아니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해볼까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제가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 더 잘 알아야 하기 때문에, 열공을 한 다음에 적당한 시기가 되면 제 생각을 체계적으로 펼쳐 놓겠습니다. 물론 공부 중간에도 인터넷을 통해서 의견교환을 하겠습니다. 모두 지켜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수님께 책임?을 여쭙겠습니다. 저에게 이런 보람찬 길을 보여주신 교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면서, 이 행복한 사태를 어떻게 책임?지실 것인지 무척 궁금합니다. 이 우문에 대한 교수님의 현답을 학수고대합니다.^^

여러분, 제 뒷 담화가 방종입니까? 투표 부탁드립니다.^^
될 수 있으면 자유 쪽으로 해주시면 안될까요? 벌 받는 것, 싫거든요. ㅋ

2009년 10월 12일 월요일

[자유] 자유민주주의 참여의 문제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7/12, 원 제목: Culture of Negativism and Discouragement)

1. 부정(소극)적이고 좌절시키는 문화

잘 안 되는 영어이지만, 제목으로 한번 뽑아봤습니다. 제가 미국에 살고 있으니 영어도 어느 정도는 대접을 해줘야죠.^^ 제목을 번역하면 "부정(소극)적이며 좌절시키는 문화" 정도가 되겠습니다. 이 경우에 네가티브는 포지티브와 맞선 개념으로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반대편에는 "긍정(적극)적이며 격려하는 문화"가 있겠죠.

미국에서는 유턴금지 표지가 없으면 모두 유턴이 가능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유턴 표지가 있어야 유턴이 가능하더군요. 미국은 유턴이 위험한 지역이 그렇게 많지 않고, 도로 사정이 여유가 있는 편이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으므로 도로 안내판이 그렇다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유턴하는 것은 긍정의 개념이고, 유턴 안/못 하는 것은 부정의 개념이죠. 부정보다는 긍정이 좋은 것 같습니다...

(저는 성이 안씨라서 이런 불명예를 항상 달고 삽니다. 제가 "안 박사"인데요, 박사가 아니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죠.^^ 저, 박사 맞습니다.ㅜ.ㅜ 그러나, 괜찮습니다. 이임하신 국가인권위원장께서 같은 성씨이므로 완전 괜찮습니다. 조상님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안강최의 안!입니다.^^)

이 교수님께서 힘들게 사회비평 등대지기를 하실 때 좌절시키려는 사람들이 더 많을까요, 긍정적으로 격려해주는 사람들이 더 많을까요?

2. 인터넷 동호회의 가상 사례

한 인터넷 동호회에서 어떤 회원이 근거 없는 생욕과 인신공격을 받았을 때,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 상대방을 응징했다고 합시다. 그 와중에 동호회 회원들이 그 회원에게 보여준 반응은 세세하게 따지면 매우 복잡하겠죠. 사안에 관심이 없었던 회원들을 제외하면, 반응 행태는 대략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적극적 지지: 공개 글이나 사신으로 격려해준 분들입니다.
2) 소극적 지지: 마음으로는 그 회원의 뜻에 동의하나 그냥 지켜본 분들입니다.
3) 말림의 미학: 그 회원의 뜻에는 동의하지만, 그 회원 자신을 위해서 자제하라는 투로 글을 올리거나 사신을 보낸 회원들입니다.
4) 소극적 반대: 무슨 이유에서든 그 회원의 행보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침묵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5) 적극적 반대: 원래 그런 욕설이 횡행하던 곳인데 그 회원이 오버했다고 비난하든지, 아예 비슷한 욕설을 그 회원에게 해댄 인간들입니다.

그 회원이 무슨 도발을 한 것도 아니고,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아서 침해된 자신의 명예를 되찾겠다는 대의명분을 갖고 온 힘을 기울인 사람에게 이렇게 다양한 반응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3. 싫어할 자유와 좋아할 자유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사에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이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죠. 그 과정이 복잡했을 테니, 그 회원의 행보 중 일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발췌 잡공을 현란하게 뿌려서 그 회원을 탐탁지 않은 존재로 스스로 생각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 세상이니까요. 제 해석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5번은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회원을 일종의 말썽꾸러기로 본다고 간주해도 별 무리가 없죠. 1번의 경우는 그 회원에게는 가장 소중한 분들이고, 동지가 된 경우입니다. 만약 그 회원이 인터넷 소통에서 맞대응 전략(Tit-for-Tat)에 준하는 상호작용을 유지했다면, 그런 분들이 격려의 글/사신을 올리거나/보내왔을 때 반드시 화답했을 것입니다. 상호협력을 유지하자는 것이죠.

4. 귀차니즘, 점자니즘, 그리고 말림의 미학

2번, 3번, 4번 유형은 조금 분석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2번과 4번은 제법 줄여서 "귀차니즘" 혹은 "점자니즘"에 빠졌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남들이 알아서 해결하면 대충 따라가겠다는 회원들이죠. 귀찮게 생각하거나, 아래 것들이 까부는데 점잖은 자신들은 빠져 있겠다고 생각했을 수 있겠습니다.

3번이 상당히 재미있는 유형입니다. 건강을 염려해주시는 분, 취지는 맞는데 방법이 너무 세다는 분, 귀찮은데 그냥 대충 지나쳐주지(똘레랑스) 뭘 그렇게 혼을 내려고 하느냐는 분, 기타 등등 여러 표현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 회원으로서는 고맙죠. 대의는 바르다고 일단 동의를 해줬으니 얼마나 고마운 분들입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정중하게 감사를 드려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말리는지 그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것 같습니다. 진정으로 그 회원을 걱정해서 말리는 경우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고맙죠. 그 회원으로서는 감사해야 합니다. 예컨대,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단식을 오랫동안 했다면, 저라도 말리겠습니다. 일단 건강을 해치면 바람직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심한 경우가 아닐 때, 말리는 것이 그 회원을 행복하게 해줄지 아닐지는 똑 부르진 답이 없을 것 같습니다. 말리는 것 자체가 사실 그 회원을 별로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그 회원이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결국은 행복하기 위해서 고생하는 것인데, 관두라!라고 하면 그 회원은 맥이 팍 빠질 수도 있겠죠.

말리는 이유가 그들 자신을 위해서라든지, 게시판 전체라는 가공의 무엇을 위해서라든지면 오히려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회원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되고, 양보해서 그분들이 행복해진다면 전체 사회의 행복 총합으로서는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판단이 설 수도 있겠죠. 그 회원이 적어도 편협한 이기주의자가 아니면 가능한 얘기입니다.

5. 말리지 않을 자유

저는 이 말리는 문화에도 권위주의 유산이 일부 베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구요? 그 회원의 선호를 자신의 선호에 맞춰서 추정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 회원도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경우입니다. 상대방 타입이나 스타일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네 뜻은 옳다, 그러나 네 행복을 위해서 관두라는 식으로 얘기합니까? 그 회원의 행복을 그 회원이 더 잘 알지, 그분들이 더 잘 알겠습니까. 옛말에 야단치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는 말이 있죠. 이 예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길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말리는 미학이 아직도 팽배해 있습니다. 주위에서 살펴보십시오. 경험도 많이 해보셨을 것입니다. 말렸든지, 말림을 당했든지요. 옳다고 공감하면 그쪽에 힘을 보태는 것이 자유주의에 맞습니다. 괜히 남의 선호를 갖고 이렇게 저렇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권위주의적이죠. 만약 그런 말리는 행위가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라면, 깨끗하게 이런저런 점은 객관적으로 잘못이니 인정하라고 요청하는 것이 더 당당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올바르고 정당한 일을 하는 사람을 말리는 이들이 많은 사회에서 어떻게 제대로 된 자유민주주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올바른 방향을 그렇게 좌절시키려고 하면 힘들게 자유와 권리를 위해서 힘껏 노력하는 사람은 얼마나 실망이 클까요. 이런 식으로 말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침묵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만 있는 현상은 아닙니다. 미국의 킹 목사도 인권 운동을 할 때, 주위에서 말리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겠죠. 춘추도 그러한데, 건강을 생각하십쇼, 이런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숫자보다는, 맞다! 우리가 그것을 깜빡했다, 지금부터는 킹 목사 당신에게 힘을 보태겠다!, 이렇게 해서 링컨 기념관 앞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인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몽고메리에서 흑백차별 버스 안 타기 운동을 벌였을 때, 사람들이 동참해줬던 것이죠. 귀차니즘, 점자니즘, 말림의 미학 등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6. 말림이 비추가 될 때

자유주의에서는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거나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면, 간섭하지 말고 그냥 놔두는 것이 정답입니다. 이기적 개인주의이니까요. 그 이외는 기냐 아니냐로 입장을 분명히 정리해서 자기편이 이기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기려고 노력하는 전략은 다양합니다. 무시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방안이 될 수도 있죠. 스토커는 무시하는 것이 적절할 때도 있습니다.)

게다가 민주주의까지 그 문제에 들어오면 반드시 "참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쪽 수로 밀려서 소수파가 되고, 다수파의 입장이 전체 사회적 결정으로 확정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투표합시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독일의 정치이론가 칼 슈미트는 "정치적이라는 것(the political)"은 "적"과 "친구"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 속 뜻을 음미해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주위에 올곧은 일을 하신다는 믿음이 가는 분들이 있으면, 귀차니즘이나 점자니즘으로 소극적으로 대하는 것이나, 말림의 미학으로 좌절을 안겨주는 것이 그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줄지 한번 생각해보시죠. 제가 보기에 적어도 말림은 그분들에게는 별로 행복감을 안겨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자유주의에서 강요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화내면 자신이 또 손해거든요.^^ 남에게 무엇을 요구할 때는 권유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7. 자유민주주의적 참여: 선진국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해볼 만한 것은, 마냥 착한 바보같이 사는 것이 적절하냐는 문제입니다. 이타주의가 오히려 더 불행한 사태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나약한 이타주의는 그렇습니다. 예컨대, 최진실 사건 이후로 네티즌들이 선플달기 운동을 하죠. 아주 좋습니다. 선플이 흘러 넘치면 양화가 악화를 구축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동참하지 않는 자유인지 방종인지를 만끽하려는 사람들이 일정 수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냇물을 흐린다는 옛말이 있죠. 그런 미꾸라지는 미끄러워서 잡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노력해서 한 곳에 모여 있도록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밉다고 추어탕을 해 드시지는 마시길... 자유주의는 그런 미꾸라지도 존재 그 자체는 인정합니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그것은 간단한 모형을 사용하여 순차 게임으로 주어진 조건에서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 작년에 제가 관련 포스팅을 이미 올렸습니다. "주말, 전쟁 공부 (http://tinyurl.com/ahn-bdm)"라는 제목이었습니다. 클릭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물론 평화주의자들끼리 사는 세상에는 이타주의자도 착취당하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우습게 보이면 달려들어서 홀라당 등치려는 늑대들이 곳곳에 있는데 어쩌겠습니까. 겉으로라도 센(tough) 척해야죠. 그래야 응징이 두려워서라도 늑대들이 자제할 것 아닙니까.

자유민주주의가 발전하려면 제대로 된 "참여"가 필수적입니다. 그 참여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으면, 그 참여를 뒷받침하는 시민 정신과 문화가 성숙하지 않으면.......... 선진국, 가기 힘들걸요?

2009년 10월 10일 토요일

[수필] 한국이 아니야! 미국이 아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적인 사람인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도 한국 문화를 심기 위해서(실제로는 제가 한국식으로 놀고 싶어서), 미국 사람들을 꼬드긴 적도 있으니까요.

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처음 시작하니 참 무미건조하더군요. 우리나라에서는 가끔 직장 동료와 일과 후 맥주도 한 잔씩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재미가 있지 않습니까? 가끔 점심을 같이하자고 권하는 것을 제외하면 제 미국 직장 동료 교수들은 "노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지요. 물론 어떤 집에서 파티를 하려고 초청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가뭄에 콩 나는 정도였습니다.

미시간주립대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한참 지나고 나서 그곳에 있는 한국 대학원생들과 저녁때 맥주를 마시기로 약속했습니다. 생각해보니 같이 근무하는 미국 교수도 몇 명 초청하여 한국 학생들과 친목을 도모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S 교수는 흔쾌히 승낙했고, S 교수가 지도하는 몇몇 미국 학생도 같이 오기로 했습니다. D 교수는 처음에 난색을 표명했습니다. 저와 아주 친했기 때문에 저는 약을 조금 올렸죠.

"와? Tenure 땜시 그러냐? 그래도 놀 때는 놀아야 될 것 아냐?"
이렇게 꼬드겼죠. 그랬더니 연구를 조금 해놓고 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날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맥주가 몇 잔 들어간 다음 노래방으로 가자고 제가 제안을 했죠. (그 시골 대학촌에 한국식 노래방이 있었습니다. 한국 학생이 500 명 정도 되어서 유지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랬더니 미국 교수 두 사람이 웬 Karaoke냐고, 자기들은 한국 노래 못 부른다고 극구 사양하더군요. 미국 노래도 많다고 제가 설득했습니다. 그리하야 그날 밤, 미국 교수 두 명과 미국 학생, 한국 학생들이 저와 함께 노래방에서 아예 한국식으로 놀았죠. 조금 과장해서 말씀드리자면, 나중에는 미국 교수들이 마이크를 잘 놓지 않으려고 하더군요. ^^

아마 그 미국 교수들은 속으로 이렇게 얘기했을지도 모릅니다. :)

"안 교수, 여기는 한국이 아니야!"
199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에서 활동할 때 제가 가끔 들었던 얘기 중 하나가 "이곳은 미국이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는 대부분 어떤 충고를 받는 자리였지요. 미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미국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얘기였죠. 어떤 사람은 "3년 정도 입 다물고 살아라."라고 조언한 때도 있었고, "힘을 키운 다음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라."라고 걱정해주는 때도 있었답니다. 모두 좋은 충고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떡합니까? 저는 우리나라가 미국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고, 미국식으로 생각할 때도, 한국식으로 생각할 때도 있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입 다물고 살면 불행해지는 것 같았고, 힘을 키울 때까지 기다리면 제 자신이 기득권에 안주하게 될 것 같은 불안감이 생겼던 것을 말입니다.

제가 잘못 한 것일까요? 제 생각을 표현해서, 그 내용이 옳든 잘못된 것이든 주위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했다면 곤란하겠죠?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 제 생각을 펼칠 묘책을 찾아야겠다고 자신을 반성해봅니다.

2009년 10월 9일 금요일

[자유] 룻쏘 일병 구하기

(올해 7월 초에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이 부재중이셔서 제가 임시로 운영보조를 맡고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 제 활동에 대한 자평과 함께 게시판의 상황을 자유주의 꽃밭으로 평가했습니다. 룻쏘를 활용하여 게시판 개선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를 살펴보았지만,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평등을 보충하는 데 룻쏘를 활용했음을 설명했습니다. 또한, 집체주의에서는 정치적 조작으로 새로운 세상을 고안하는데 룻쏘를 원용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간략하게 설명했습니다. 2009/07/08, 원 제목: 게시판 평가 및 룻쏘 일병 구하기)

(1) 게시판 운영자의 권한은?

주어진 권한을 행사하지 않는 것도 어쩌면 “방종”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지금 임시 “대빵?”^^인 데요, 그렇다면 어떤 권한을 제가 갖고 있을까요? 무소불위의 권한일까요? 하루에 글을 10개나 올려서 도배해도 괜찮은 권한일까요? 이 점을 알아내려면 지금까지 교수님께서 어떻게 이 게시판을 운영하셨는지 참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제가 이 게시판에 처음 등장했던 작년 2월에는 회원제가 아니었죠. 실명이든, 필명이든 마음대로(자유) 골라서 써넣은 다음, 글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아주 이상적인 자유 세상의 틀이었습니다. 그렇게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회원 가입의 귀찮은 과정도 없이, 우연히 들렀다가 필이 팍 꽂혀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올리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좋은” 글은 많으면 많을수록 이 게시판의 효용이 올라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평화로운 세상이 어느 순간 깨어졌단 말씀입니다. 따라서 교수님께서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하시고, 전격적으로 회원제를 도입하셨습니다.

(2) 룻쏘 살리기 (병 주고 약 주기?)

룻쏘가 억울할 수도 있기 때문에 룻쏘를 약간 구명하고자 합니다.^^ 사상가들은 말을 많이 쏟아 놓기 때문에 발췌 신공을 적절히 활용하면 친구가 되었다, 적이 되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회원제 이전과 이후를 나눠보시죠. 보는 시각에 따라서 이전이 더 아름다워 보일 수 있고, 그 이후가 더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지금 상태가 좋지만, 자유주의자인지 방종주의자인지는 몰라도 과거가 더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회원제 이전으로 돌아가라!”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죠?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룻쏘의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현재 상황이 옛날 자연 상태보다 여러 면에서 열등하다면, 그렇게 주장할 수 있죠.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자연 상태로 돌아가면, 홉스가 등장합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될 가능성을 홉스가 제기할 것입니다. 그래서 홉스의 주장을 따라서 이번에는 사회 계약으로 국가를 만들면, 큰 칼을 든 괴물이 한 명 등장하는 것이죠. 그 괴물이 플라톤의 철인 왕이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네로나 히틀러라면, 어머나, 어머나, 어쩌나, 어쩌나가 됩니다.

(3) 룻쏘의 재해석 및 활용

따라서 룻쏘의 “돌아가라!”라는 이야기를 잘 해석해야 합니다. 룻쏘가 관찰하기에 자신이 살고 있었던 세상이 너무 불평등한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기분이 아주 안 좋아졌죠, 그래서 일종의 강조법을 사용합니다. 이럴 바에야 그 옛날 자연 상태가 더 좋으니 그 정신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입니다. 더욱 평등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었죠.

룻쏘의 이런 피맺힌 고언은 후대 사람의 입장에서는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사람이 냉정하고 (경제학적으로) 합리적이라서, 그 주장을 이기적으로, 자기 입맛대로 갖다 붙입니다. 크게 두 진영이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집체주의 진영입니다. 민주주의 진영에서는 자본주의를 수정, 보완하는 데 룻쏘를 끌어다 활용합니다. 복지도 강화하고, 부자들에게 세금도 더 때리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명시적 보호도 보충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이죠. 그 결과가 현재의 북유럽 나라들의 모습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것도 무슨 이타적인 행위의 결과가 아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수를 이루는 민중들이(1인 1표로) 갈아엎을 가능성이 농후하니까, 힘에 밀려서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룻쏘가 이 부분에서는 공을 크게 세웠습니다. 인정합니다. 고마워요, 룻쏘!

(4) 한편 다른 진영에서는...

집체주의 진영은 룻쏘를 활용하여 가공의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크게 보면 파시즘 쪽이 있고, 처음에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적으로 집체주의에 빠지게 된 사회주의/공산주의 쪽이 있습니다. 라이커 교수님이 룻쏘를 비판하는 것은 이 부분이라는 것은 금방 눈치채시겠죠?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의 끝을 단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그 정치 이념의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인간들에 의해서 정치 질서는 바뀔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반면에 공산주의는 역사의 끝을 상정합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완성되어서 인간 소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상태가 공산주의가 말하는 역사의 종착점입니다. 이 포인트가 바로 칼 포퍼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핵심입니다. 역사의 끝이 어디 있노?라고 되묻는 것입니다. 아주 적절한 문제제기입니다. 공산주의 비판을 하려면 포퍼식으로 하는 것이 제대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공산주의를 무슨 피 빨아 먹는 요괴로 그리면, 권위주의 때문에 생각이 굳은 상태에서는 머리에 쏙쏙 들어가지만, 나중에 자아를 다시 깨닫고, 자유를 제대로 고민하게 되면, “빨갱이?” 그것 조금 이상하네... 이렇게 됩니다. 실상을 알고 나서는 반작용으로 오히려 자발적 공산주의자가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그런 것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죠. 머릿속에서만 공산주의자라면, 태클을 걸 수도 없고, 걸 필요도 없죠.

(5) 그래도 지구는 돈다?

어떤 사람은 역사의 끝이 있다!라고 외칠 수도 있겠습니다. 핼리인지 섈리인지 혜성처럼 큰 덩어리가 지구를 꽝 치면, 그것이 역사의 끝이다!라고 그 증거를 갖다댑니다.^^ 누가 그것을 모릅니까?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죠.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정치 질서를 따지고 있죠. 이 말도 어디서 많이 들어봤네요.

(6) 히레스쎄티션과 정치적 조작

링컨이 말 하나는 참 잘했습니다. 그래서 라이커 교수님이 링컨을 Heresthetician 최고봉 중 한 명으로 칭찬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히레스쎄티션... 저도 이 괴이한 단어를 정학하게 발음할 자신이 없습니다. 라이커 교수님이 직접 발음하시는 것을 강의 시간에 들어봤지만, 들어서 모두 따라 할 수 있다면 세상에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의제 설정을 통하여 정치적 조작을 잘하는 사람을 히레스쎄티션(?)이라고 라이커 교수님이 정의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수사(설득)에 능한 사람이 아니고요, 무슨 말을 해서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는(유리한 전략적 상황을 도출) 일종의 전략가입니다. 영어 사전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교수님이 그리스 어를 참조하여 만드셨거든요. 히레스쎄티션이 보여주는 정치적 조작술을 Heresthetic이라고 합니다. 발음 한번 시도해보시길... 저는 싫네요. 이 단어 한번 발음하고 나면 제 영어실력에 대해서 회의가 왕창 듭니다.^^

마르크스는 나름대로 훌륭한 수사를 구사했지만, 정치 조작가는 아니었죠. 마르크스를 활용하여 정치 조작가로 성공한 대표적인 사람이 레닌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7) 원위치!

또 삼천포로 빠졌습니다. (저는 삼천포와 어떤 감정 관계도 없습니다. 사람이 쓰기에 그냥 따라서 썼습니다. 삼천포 출신들의 양해 바랍니다.^^) 제가 하려던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기억이 어렴풋해서 방금 스크롤 하여 위에 올라갔다 다시 왔습니다.^^

(8) 자유주의 꽃밭, 이 교수님 게시판

따라서 룻쏘를 이 교수님 게시판 개선에 긍정적으로 활용하려고 해도, 이전의 비회원제 상태로 돌아가서, 다시 홉스가 등장하는 순환을 거듭하면 당연히 안 되겠죠. 제가 보기에 별로 개선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 현재 상태가 이상형은 아니지만(현실에 이상형은 구현 불가능에 가깝죠), 매우 바람직한 상태로 운영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의 제도로 최대한의 자유주의적 자율이 이뤄지고 있다고 봅니다. 준 익명도 허용되고 있죠.

교수님께서 홈피 주인으로서 권한을 과하게, 아니죠, 보통 이상으로 행사하시는 것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일전에 방종의 느낌을 진하게 주는 어느 회원의 글을 삭제하실 때도 노심초사에 노심초사를 거듭하셨죠. 그리고 최종결정을 하시기 전에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이상적인 것은 아니지만(자진 삭제가 아니므로), 개인 홈피 주인으로서 당연히 그런 권한을 갖고 계시고, 그렇게 하셔야 되는 시점이라고 의견을 드렸습니다. 또 다른 분들의 의견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다음에 다른 수단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시고, 그 회원에게 제재를 가하신 것이죠. 결과는 평화였습니다.

자유주의, 어디 멀리서 찾으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있는 이 공간이 자유주의를 제대로 하는, 교수님께서 공들여 가꾸고 계시는 사회대 옆 화초 텃밭과 같은 곳입니다. 게시판 모든 분의 자율적인 “참여”와 교수님의 탁월한 감각으로 이런 행복을 이뤄냈다고 생각합니다.

(9) 스스로 평가

제가 운영자를 임시로 맡은 약 열흘 동안의 행보를 교수님의 평소 운영과 스스로 비교해볼 때, 약간의 방종 기미가 있다는 자책인지, 자학인지가 조금 들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열흘 동안 매일 이런 장문을 올리신 적은 없잖아요.^^ 교수님께서 일일이 댓글에 코멘트를 해주시는 것은 제가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들의 홍수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ㅜ.ㅜ 이 점에서 저는 약간의 방종을 저질렀다는 의혹을 스스로 생각해볼 수가 있겠습니다. 아직 어느 회원분도 명시적으로 제 행보를 방종끼(?)가 있는데...라고 제기하신 분이 없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격려를 많이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종 판정은 교수님께서 내려주실 것 같습니다.^^

(10) 드리고 싶은 질문

제가 서울에 들어가서(빨리 들어가고 싶어서 짬만 나면 열공 중입니다^^) OO 씨와 약속한 집담회에 서게 되면, 간단한 인사를 드리고 다음과 같은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저도 자유인이고, 여러분도 자유인입니다.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제가 커밍아웃하는 것으로, 보는 시각에 따라서 제 사생활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저에게 들으신 이야기는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제가 드린 말씀을 옮기는 자유를 만끽한다면, 그 사람의 행위는 방종인가요, 자유인가요? 그것이 오늘의 질문입니다. 정답이 없습니다. 각자 입장대로 주장하면 그것이 정답입니다. 자유민주주의에는 절대적 잣대는 없습니다. 상대적 줄자만 있습니다.^^ 단, 적절한 근거는 있어야겠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이틀 정도 이 문제를 갖고 고민을 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의견을 참조하면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기적인 마음에, 이렇게 장문의 글도 적고 끝에 부탁도 드리고 있습니다. 공짜는 없으니까요. 도와주세요. 꾸벅~ (부탁할 때는 비굴 모드라고 있습니다. 굴비 사촌이죠.^^) //

2009년 10월 8일 목요일

[잡담] 아기 난초의 새 보금자리


팔로알토 집 입구 모습입니다. 이 난초가 생명력이 아주 강합니다. 그리고 번식력도 매우 좋습니다. 자식들이 주렁주렁 달린 것을 보면 금방 아실 수 있을 겁니다. ^^ 저 아기들은, 탯줄을 자르고 흙이 있는 곳에 심은 다음 물만 주면 씩씩하게 자랍니다.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보시죠.

IKEA에서 떨이 처리하는 박스를 이전에 사둔 것이 있었습니다. 원래 화분대 용도가 아니고 가구와 가구 사이에 선반으로 쓰도록 디자인된 제품이었습니다. 박스에는 선반 2개와 연결용 쇠붙이가 있었죠. 사진에 보시면 선반이 모두 9개이므로, 박스 4개 반을 사용한 것입니다. 얼마 들었느냐고요? 박스 하나에 4달러였습니다. ㅋㅋㅋ 모두 18달러어치이네요. 2만 원으로 저 정도면 괜찮죠? 아기 난초의 새 보금자리로 작은 초록색/흰색 화분을 샀는데 각 2달러였습니다. 큰돈 들이지 않고 그럴듯한 미니 화원이 생긴 셈입니다. 

난초 아기들이 벌써 뿌리를 내렸습니다. 내년에는 그들에게도 자식들이 생길 겁니다. 생명이 참 신기하죠.

[자유] 링컨의 정치적 조작: 말의 향연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7/05, 원 제목: 링컨의 정치적 조작: 말의 향연 (3)]

(제가 링컨 이야기 제목을 잘못 붙였습니다. ㅜ.ㅜ 부제를 "말의 향연"으로 했더니 제 말만 많아지고 있습니다. 교수님 돌아오시면 말을 너무 많이 했다고 야단맞을 것 같습니다. 조금 겁납니다.^^ 부제를 붙이지 않았다면 벌써 끝났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아무튼 오늘은 기!필!코! 끝내겠습니다. 링컨 아니라 그 할아버님이 오셔도 끝내겠습니다. ㅋ)

(1) 마키아벨리(Nicolo Machiavelli)와 홉스(Thomas Hobbes)

마키아벨리가 정치와 도덕을 나눠서 근대 정치학의 팡파르를 울렸고, 그 바톤을 이어받은 사상가는 영국의 홉스입니다. 두 사람의 대중적 이미지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권모술수”(설명드렸듯이 마키아벨리를 나타내는 주제어로 부적절하지만, 대중의 뜻에 한번 따라봅니다.) 그리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왠지 으스스하시죠. 마키아벨리나 홉스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 그것도 어두운 쪽에 초점을 맞춰서 정치를 설명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국제정치학에서는 이런 부류를 현실주의(Realpolitik, Realism)라고 부릅니다.

(긴장되시죠? 제가 홉스 이야기로 또 옆으로 샐까 봐요. ㅎㅎㅎ 홉스는 이미 다뤘습니다. “국가와 사회적 약자”라는 제 졸 포스팅(http://tinyurl.com/hobbes-ahn)에서 데카르트(Rene Descartes)의 방법론과 연결하면서 홉스를 설명했습니다.)

(2) 국제정치의 현실주의와 자유주의

투키디데스(Thucydides)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적으면서 속에 몰래 용의자의 딜레마 게임을 그 오래전에 숨겨 놓았다는 강호의 전설이 있습니다. 존 내쉬(John Nash)가 태어나기 거의 2,500 년 전 일인데 말입니다. 대단한 예지력입니다. 하지만, 그 역사서에 균형분석은 없습니다.^^ 후대에 책을 읽다 보니 복잡해서, 요약하면 어떻게 될까? 궁리를 해보니,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군비경쟁의 용의자의 딜레마에 빠졌다는 초절정 요약판을 내놓은 것이죠. 용의자의 딜레마도 어두운 쪽이죠. 밝은 쪽의 파레토 최적 상호협력(군비경쟁 안 함)이 있음에도, 두 도시국가의 이기심과 전략적 상호작용 때문에 파레토 열등한 결과에 도달합니다. 그것이 딜레마라는 것이고요. 따라서 투키디데스도 현실주의 쪽으로 분류합니다.

국제정치가 전쟁과 평화에 관한 것인데, 전쟁과 분쟁에 관한 연구는 현실주의에 입각한 것이 많습니다. 궁합이 잘 맞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반면 칸트(Immanuel Kant) 선생을 대표주자로 하는, 현실주의에 분연히 맞서는 사조가 있으니, 이름하여 이상주의(Idealism) 혹은 자유주의(Liberalism)라고 합니다. 이쪽 동네는 평화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국제법의 아버지 그로티우스(Hugo Grotius), <영구평화론> 칸트, 이 교수님께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프린스턴대 총장을 역임한 윌슨(Woodrow Wilson, 국제연맹) 등이 대표주자가 되겠습니다. 현대에서는 현실주의의 대표 주자로 니버(Reinold Niebur), 모겐쏘(Hans J. Morgenthau, 교과서 저자로 유명), 왈츠(Kenneth Waltz, 신현실주의) 등이 있고, 자유주의의 대표 주자로 코헤인(Robert Keohane), 나이(Joseph Nye, Jr.) 같은 학자들이 있습니다. 국제정치학의 현실주의, 자유주의 이야기입니다. 혼동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현실주의와 자유주의를 구분하는 기준이 여럿 있는데, 그중에 국내정치와 국제정치의 연관관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견해 차이가 중요합니다. 현실주의는 역시 전쟁/분쟁 쪽이라서 ‘안’ 보다는 ‘밖’을 더 신경 쓰죠. 내부는 결속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를 당구공으로 본다는 의미에서 당구공 모형이라고도 합니다. 반면에 자유주의는 한 국가의 외교의 연원이 국내 메커니즘의 영향을 제법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평화와 경제 쪽에 관심이 더 많은 사조라서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속성상 국내가 하나로 뭉쳐 있을 가능성이 별로 크지 않죠. 그것을 활용하는 외교를 “양날 외교”라고 합니다. 푸트남(Robert Putnam)의 “Double-Edged Diplomacy”인데, 간단하게 설명드리면, 미국이 협상 테이블에 나와서 상대방에게, 나는 100을 주고 싶은데 우리 의회가 70만 주라고 그런다. 그러니까 깍아주어라, 이런 식입니다.

(3) 칸트 <영구평화론>과 쌍방 자유 명제

칸트 <영구평화론>은 일종의 희망사항 선언문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되면 영구평화가 올 수 있으니 그렇게 되면 좋겠다는 식입니다. 영구평화의 가장 중요한 조건을 왕창 요약하자면, 지구 상의 모든(어렵겠죠?) 나라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칸트는 공화국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가 되고, 자유로운 경제교역이 활성화되면 영구평화가 이뤄질 텐데...라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미국이 자유의 첨병을 자처하고 중동에서 생고생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칸트의 입장을 현대적인, 모던한 표현으로 바꾼 것이 "쌍방 자유 명제(Double-Freedom Proposition)”입니다.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전쟁이 1815년에 끝납니다. 나폴레옹 전쟁이 군사적인 측면에서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이정표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 이전은 중세 전쟁이라고 하고 그 이후를 근대 전쟁 시기라고 합니다. 중세에는 용병을 많이 썼죠. 전쟁을 해도 사람이 잘 죽지 않습니다. 이것도 합리적 선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용병이 프로들 아닙니까. 직업군인들이죠. 일단 살아남아야 다음 전장으로 가서 돈을 벌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서로 봐주는 것이죠. 마, 나도 그렇고 너희도 그렇고 집에 처자식 있는 몸들이니 서로 살살하자, 이렇게 되죠. 야심 많은 나폴레옹은 유럽을 통째로 삼키고 싶은데 중세 용병으로는 도저히 안될 것 같았나 봅니다. 그래서 국민개병제라는 통탄하고 가공할만한 군대 제도를 도입합니다. 그리고 알프스 산맥을 넘죠. 제도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성능 좋은 제도가 한번 선보이면 급속도로 퍼집니다. 프랑스가 그렇게 나오니 영국도 전 국민 동원력을 내릴 수밖에 없죠. 그런 식으로 폭력의 상승작용(escalation)이 일어나고, 급기야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게 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 아, 1815년! 국민개병제가 선을 보인 그 즈음에 자유민주주의도 확산됩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그전에 일어났죠. 그리고 1815년 이후의 전쟁 데이타는 제법 반듯하게 잘 수집되어 있습니다. 그 데이타가 미시간 대학교(U of M)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을 것입니다.^^ “소(COW)^^” 프로젝트라고 있습니다. 풀어쓰면 “전쟁 상관관계(Correlates of War^^)”라고 하는데, 국제정치학자들이 1815년 이후의 전쟁관련 데이타를 SPSS, STATA 등으로 열심히 돌려보니, 아! 칸트가 맞았잖아...라는 탄성을 내뱉습니다. 그것이 “쌍방 자유 명제”를 귀납적으로 확인한 것입니다. 두 자유민주주의 국가 사이에는 전쟁이 없었다!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 국가 수만 자꾸 늘려나가면 평화는 확산한다는 제법 그럴듯한 논리가 섭니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의 명분이 이쪽에도 걸치고 있죠. 속내야 어떻든, 겉으로는 그럴 듯하지 않습니까? 칸트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서 영구평화를 위하여 불철주야 미국이 이렇게 고생한다는 식이죠. 조금 위험한 발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원래 자유주의가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인데, 가상의 기준을 미리 세워놓고 그쪽에 맞춰서 상대방을 침략한다는 것이 어째 머쓱합니다. 그래서 미국으로서는 완전히 그것이다는 말도 못 합니다. 정치라는 것이 그렇게 애매모호한 측면이 많습니다.

(4) 자유주의와 폭력, 그리고 투쟁

쌍방이 자유주의면 괜찮은데 일방이 자유주의가 아니면 자유주의 국가도 폭력적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을 쌍방 자유 명제가 보여줍니다. 우리가 보통 자유라고 하면 좋은 것, 평화, 포근함, 이런 것들만 떠올리는데, 전혀 아닙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 알량한 자유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습니까. 미국도, 보스턴에서 일어난 차(Tea)세 반란을 그 당시 돈으로만 바라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영국 사람이 내는 세금보다도 훨씬 적은데, 그 정도야 내버리고 말지 왜 독립전쟁을 했느냐는 영특한 논리 전개가 가능하죠. 그때 사람이 많이 죽었습니다. 사람 목숨 값 계산하고, 차세 전부 합치면, 당연히 목숨 값이 더 많죠. 그러나 자유라는 것의 소중함 그 자체도 있고, 먼 훗날 후손들이 그 자유를 이용하여 돈을 벌어 들이는 것까지 계산해야 제대로 된 계산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즉, 합리성이라는 것이 시공에 갇혀 있기 마련인데, 그 시공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설명이 달라진다는 것이죠. 단기간으로는 비합리적인 것도 장기간으로는 합리적인 것으로 될 수 있죠.

자유민주주의는 전형적으로 장기 합리성을 추구합니다. 우리나라도 장기적으로는 잘 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잘 되려면 이 교수님께서 매우 적절하게 지적하셨듯이, 국민이 스스로 자유와 권리를 지키려는, 투쟁하는 정신자세를 갖춰야 합니다. 자신의 권리가 침해되면 그만두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여줘야 자유주의에서는 평화가 옵니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우리 국민은 쓸데없는 곳에서 너무 관용을 베풀고, 귀차니즘에 빠진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을 쓰레기통에 갖다 버려야 자유민주주의가 발전합니다.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자유는 포근한 엄마 가슴이라는 안일한 마음을 고쳐잡아야 합니다.

미국의 예를 한번 보시죠. 오바마(Barack Obama)가 최초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는데, 오바마 혼자 힘으로 그렇게 된 것은 분명히 아니죠. 아프리카에서 잘 지내고 있는데 노예 사냥꾼들에 의해서 잡혀와서 고생한 미국 흑인 조상의 자유와 권리를 위한 피땀 어린 투쟁의 토대 위에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물론 오바마의 어머니는 백인이고 아버지는 아프리카에서 유학 온 경우라서 전형적인 흑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미국 정치의 현주소를 살피면, 흑인으로 볼 수밖에 없고, 지난 대선에 당선된 것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죠. “I have a dream”을 외치다 적의 흉탄에 서거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의 자유민주주의 운동이 없었다면 오바마는 없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물론 미국의 흑인 노예와 같은 눈에 보이는 그런 폭압은 없지만, 자유민주주의 운동이 필요 없을 만큼 자유민주주의가 성숙하였습니까? 우리나라에도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같은 그런 큰 인물이 나온다면 우리 자유민주주의 발전이 한층 더 가속화될 것입니다. 그 토대는 이미 있습니다. 민주화 운동 때 산화된 생명이 그 기반입니다.

(제가 이거 분명히 오버죠??? 왜 이럴까요... 오늘은 약속을 했으니 계속 합니다.)

(5) 드디어 링컨

그리 하야, 마키아벨리가 정치와 도덕을 구분한 것을 참조해서 링컨을 바라보면 그 사람도 정치인이라는 데 착안하게 됩니다. 정치인의 합리성이 있죠. 자유민주주의에서 정치인은 표를 바라보고 삽니다. 링컨도 그 점에서 다른 정치인과 다를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씨 질문에 제가 예스도 되고 노도 된다고 일단 답했던 것입니다. 거시는 이창용 교수에게 잘 배우셨을 테니 제가 미시 부분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이준구 교수님이 계시면 미시를 저보다 훨씬 더 잘 가르쳐 주시겠지만, 지금 부재중이라서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성에 차지 않으시더라도, 사이비가 그 정도면 됐다는 평가를 해주시면 대단한 영광이겠습니다.

(6) 의제 설정

이곳에 법을 전공하시는 분들도 오시니까, 제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법을 다루는 곳입니까, 정치를 하는 곳입니까? 저는 그것이 알고 싶었습니다. 아래에 고정논객 OO씨가 정성껏 정보를 줘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링컨이 법률가 변호사 출신이죠.

위의 제 질문은 어설픈 의제 설정(agenda setting)입니다. 왜냐구요? 제가 정치학 쪽 아닙니까. 당연히 정치도 하는 곳이다는 답을 기대한다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죠. 우리 정치사에서 최근의 대표적인 의제 설정으로 저는 “잃어버린 10년”을 듭니다. 잃어 버렸는지, 아닌지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제법 많은 국민은 뭔가 상실했다고 느꼈죠. 마찬가지로 헌재의 관습헌법 논리 채택은 정치학으로 분석하면 일종의 의제 설정입니다. 저는 어설픈 의제 설정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헌재 결정 소수 의견으로 나온 전효숙 재판관의 의견서를 찾아서 한번 읽어 보십시오. 다수 의견보다 훨씬 논리적이고 이치에 맞습니다. 세상에 연성헌법도 아니고, 경성헌법을 채택하는 나라에서 공화국도 아닌 왕조 시대 서울을 갖고 헌법 운운하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느냐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정치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의제 설정이죠.

(7) 링컨의 의제 설정

링컨이 대통령이 된 것이 1860년인데, 그 언저리 링컨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의제 설정을 잘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공화당 쪽은 이합집산을 거듭합니다. 당명도 여러 번 바뀌었죠.

Federalist ==> National Republican ==> Whig ==> Republican

어떤 의제설정을 해야 선거에서 이길 것인지 공화당은 심각하게 고민을 했습니다. 노예해방이라는 좋은 쟁점이 있기는 한데 전국 이슈로 만들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 즈음에야 농업 위주였으니까 남부의 입김이 셌고, 그 여파로 공화당 쪽 일부도 표심을 잡기 위해서 갈대같이 흔들렸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때 링컨이 공화당의 구세주 역할을 합니다.

미국이 서부로 팽창하면서 주들이 늘어났죠. 땅을 확보하면 모두 곧바로 주가 되는 것이 아니고, 많은 경우 테러토리(Territory)라는 임시정부 형태를 거쳐서 주가 되었습니다. 그 테러토리에 노예제를 허용하느냐 마느냐가 그 당시 초미의 관심이었습니다. 그 문제를 일리노이주 연방 상원의원인 더글라스(Stephen A. Douglas)가 해결했습니다. 그것이 1854년 캔사스-네브래스카 법(Kansa-Nebraska Act)입니다. 내용은 테러토리 의회가 노예제를 허용하든 안 하든 알아서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당이 바라고 있었던 대로 노예해방 이슈를 로컬에 묶어놓는 데 성공했습니다. 민주당 상원의원 더글라스의 공으로 칩니다.

그런데 캔사스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캔사스는 해방구(Free Soils)가 되었는데, 연방 대법원의 판결에 의하여 흑인은 연방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지 못한다고 결정해버린 것입니다. 1857년 드레드 스캇(Dred Scott) 판례입니다. 그 당시 연방 대법원을 남부 출신 판사들이 장악하고 있었거든요. 모순이 생겼습니다. 해방구를 연방정부가 인정하지 않은 셈이니, 캔사스-네브래스카 법의 연원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 점을 링컨이 파고들어서 노예해방 이슈를 전국화시키죠.

그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858년에 연방 상원의원을 선출하는 선거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간선이라서 일리노이주 의회에서 선출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민주당 대표는 현역 더글라스, 공화당 대표에는 삐쩍 마른 링컨이 나왔습니다. 두 후보가 일리노이 전역을 돌면서 8차례 토론회를 했습니다. 그 중 프리포트(Freeport)라는 조그만 도시에서 열렸던 토론회에서 링컨은 더글라스에게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Can the people of a United States Territory, in any lawful way, against the wish of any citizen of the United States, exclude slavery from its limits prior to the formation of a state constitution?”
음... 영어가 조금 고풍스럽습니다. 요체는 더글라스 당신은 테러토리가 정식 주가 되기 전에, 연방정부가 반대해도, 노예제를 폐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정도가 되겠습니다. 정확하게 위에서 설명드린 모순을 지적한 것입니다. 2년 뒤인 1860년 대통령 선거에 대해서 더글라스는 관심이 많았습니다. 민주당 후보가 되려면 남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죠. 그런데 일리노이주는 북부에 있습니다.

그 당시 이미 민주당은 북부와 남부로 분열의 조짐이 있었습니다. 저 질문에 예스(Yes)로 대답하면 더글라스는 상원의원직을 쉽게 유지할 수 있지만, 남부 쪽의 외면을 받게 되는 것이었죠. 링컨이 설정한 의제는 상원의원을 쉽게 계속 유지할래, 아니면 대통령에 도전해볼래, 둘 중 하나만 골라 보라고 압박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더글라스 자신이 주도한 캔사스-네브래스카 법도 걸려 있죠. 결국, 더글라스는 쉽게 상원의원직을 유지하는 쪽으로 결정합니다. 링컨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2년 뒤를 기약합니다.


1860년에 민주당은 쪼개집니다. 북부민주당은 더글라스를 후보로 내고, 남부민주당은 자체로 다른 후보를 냅니다. 링컨의 의제 설정이 성공적으로 좋은 결과를 얻었죠.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노예해방을 이끌어 냈고, 그 이후로 미국 정치의 주도권은 당분간 공화당으로 기울게 됩니다. 링컨이 사용한 의제 설정은 의제 추가(Issue Addition)입니다. 공화당의 고민이 노예해방을 전국 이슈로 끌어들여야 하는데 여의치 않았죠. 그런데 링컨이 프리포트에서 토론 한번 잘해서 전국화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TV나 라디오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서, 정당이 유권자에게 정책을 호소할 때 종이 홍보에 의존했습니다. 링컨이 논리를 제공했고, 홍보는 공화당 조직이 맡았습니다. 프리포트 토론 내용의 핵심을 잘 요약해서 신문이나 당 홍보지를 통해서 열심히 뿌렸다고 합니다. 일반인은 링컨의 정치적 조작을 말 그대로 읽으면 무슨 뜻인지 모를 수 있기 때문에, 공화당 조직이 친절하게 해설을 해서, 시민이 드시기 좋게 메뉴를 개발한 것이죠. 대선까지 2년의 기한이 있었기 때문에 시간도 충분했습니다. 링컨은 1860년 대선 때 선거 유세도 별로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남부는 아예 포기했죠. 링컨이 아이디어 토스를 잘했고, 그것을 받아서 공화당 조직이 잘 움직여서 노예해방 쟁점을 전국화했습니다.

(8) 정치적 조작

라이커 교수님은 이것을 Political Manipulation(PM)의 대표적 사례로 꼽습니다. 그래서 그 책의 첫 번째 이야기가 된 것이죠. 이야기가 모두 12개입니다.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 많아서, 생각하면서 읽어야 문리가 들어옵니다. 작은 고추가 매운 셈이죠.^^ PM을 어떻게 번역할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정치공작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부정적 의미는 없고, 정당한 방법으로, 힘이 아닌 “말”로 자신에게 유리한 전략적 상황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공작은 힘이 조금 들어가죠. 조작도 우리에게는 조금 부정적 의미가 있어서, 정치공학이라고 한번 써봤습니다. 그러니까 이공계 일부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더러운 정치에 신성한 공학을 갖다 붙이지 말라는 이야기였죠.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치공학이 두 가지 의미로 쓰이더군요. 우리나라 정치학자들도 정치공학이란 용어를 많이 씁니다. 이때는 PM에 따라서 객관적 의미로 씁니다. 그런데 정치인들이 또 그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정치공작에 따라서 나쁜 의미로 쓰더군요. 이공계 사람이 정치학 논문을 읽을 필요는 없죠. 그래서 정치공학이라는 용어를 꺼리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냥 정치적 조작이라고 하겠습니다.^^ 원래 제목으로 돌아왔습니다. ㅋ

결론적으로, 노예해방과 관련하여 링컨의 도덕성은 부풀려졌지만, 거시적으로 남북통합을 이끌어낸 위대한 대통령이고, 미시적으로는 정치적 조작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능력 있는 정치인이었습니다. 미국 사람의 추앙을 받을 만 합니다.

여러분도 주위에 잘 보십시오. 정치는 공기와 같은 것이라서, 사람 사는 곳에는 정치가 있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사람이 어떤 정치적 조작을 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오려고 하는지 잘 관찰해보십시오. 재미있을 것입니다. 정치학자의 임무 중 하나로 정치인을 견제하는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문적으로 공부를 많이 했으니, 정치인들이 어떤 정치적 조작을 해서 (정당한 방법으로) 결과를 왜곡시킬 수 있는지 집어낼 수 있겠죠. 그런 것을 지적해야겠죠. 일반인들에게 알리기도 하고요.

긴 글 읽으시느라 너무 수고 많았습니다. 링컨 이야기 끝입니다. 만세!

2009년 10월 7일 수요일

[답변] 답변입니다.

- 회의 전이라 짧게 씁니다. 이전 글과 마찬 가지로 이 글의 외부 인용은 원치 않습니다.

- 좀 수정했습니다. (10/7 21:30)


1. 검체

- 상기도(코에서 인후까지의 호흡기) 검체를 채취해야 합니다. 코를 통해 면봉을 넣어 문질러 채취하는 비인두 검체(nasopharyngeal swab)가 가장 좋은 검체이며, 채취가 어려울 경우 입을 통해 면봉을 넣어 채취하는 인후 검체(throat swab)를 쓸 수 있습니다.

- 혈액검체를 채취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인플루엔자가 중증으로 진행하여 전신질환이 되면 바이러스가 혈액에서도 검출될 수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호흡기에 국한된 질환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감염 전파 방지를 위해서는, 혈액과 소변을 비롯한 환자에게서 나온 모든 검체를 감염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러나 진단을 위한 검체로서는 혈액은 부적절합니다.


2. 검사

(1) PCR

-신종 인플루엔자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바이러스 배양이나 PCR(polymerase chain reaction: 중합효소연쇄반응법)을 시행해야 하나, 바이러스 배양은 여러 가지 이유로 거의 시행되지 않고 있어 PCR이 사실상 유일한 확진법입니다.

- 신종 인플루엔자 PCR은 현재 한시적으로 보험이 인정되고 있으며, 가격은 10만원이 좀 넘습니다.

- 검사 자체는 하루 안에 결과가 나옵니다만, 대부분 검사가 밀려 있고, 하루에 할 수 있는 검사 수의 한계로 실제로는 2~3일 뒤에 결과가 나오는 곳이 많습니다.

(2) 신속항원검사

- PCR을 시행할 수 없는 의료기관에서 많이 이용하고 있는 것이, 인플루엔자 신속항원검사 (rapid antigen test)입니다.

- 이 검사는 원리상 소변 임신 검사와 같습니다. 다른 시설 없이 간편하게 시행할 수 있으며, 15분 안에 결과 판독이 가능하기 때문에, PCR을 시행할 수 없는 의료기관의 경우 환자를 선별하기 위해 많이 이용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 문제는 현재 시판되는 키트는 신종 인플루엔자가 아닌 계절 인플루엔자를 진단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신종 인플루엔자에 대한 예민도(환자가 그 질병을 갖고 있을 때 검사가 양성으로 나올 확률)는 9-51%에 불과합니다. 쉽게 말해 100명의 신종 인플루엔자 환자 중에 49명에서 91명(!)까지 놓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종 인플루엔자의 확진을 위해서도, 신종 인플루엔자 배제를 위해서도 권장되지 않습니다.

-신속항원검사로 신종 인플루엔자 의심 환자를 검사한 경우, 권장되는 검사가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 보험 인정을 못 받습니다. 처음부터 비보험으로 검사를 처방한 경우, 성형수술이나 치아 교정이 그렇듯이 의료기관마다 마음대로 가격을 매길 수 있습니다.

(3) 영상

-초음파 검사는 신종 플루 진단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폐렴으로 진행된 것이 의심될 경우 X-ray나 CT 촬영이 필요합니다.


3. 타미플루

- 현재 타미플루는 신종 인플루엔자 확진 판정을 받지 않아도, 임상적으로 의심되면 의사의 판단 하에 처방할 수 있습니다. PCR 결과를 확인하는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신속하게 처방할 수 있도록 규정이 바뀐 것입니다.

- 약값은 보험이 인정되었다면 무료입니다. 국가비축분을 거점 약국을 통해 지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보험으로 구입한다면 10알(통상 처방되는 양)에 3만원쯤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의사는 타미플루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지만 환자가 굳이 원해서 비보험으로 처방했다면, 저 가격으로 구입하게 되겠지만, 그런 경우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질문] 홍기호님, 신종플루에 대한 질문입니다.

신종플루에 걸린 것이 아닌가 의심이 생겨서 병원에 문의했더니 다음과 같은 다양한 안내가 있었다고 합니다.
출처: http://kids.kornet.net/cgi-bin/Boardlist?Article=garbages&Num=86326
왜 이런 다양한 답이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 건양대 병원: 피검사비 17만원 이구요. 휴일이라 2-3일 후에 결과 나와요.
  • 충남대 병원: 피검사로 안하구요. 코에 뭐 집어넣어 채취해요. 5만원, 근데 줄서있는 사람이 많아서 많이 기다려야 해요. 2-3일 후에 결과 나옴. 타미플루가 필요하면 그냥 줄수도 있어요. 20만원
  • 을지 병원: 피검사나 코에xxx 그걸로 확진을 못해요. 초음파도 해야하고 어쩌고 저쩌고, 비용은 잘 몰라요. -_-;;

[잡담] 디카를 갖고 갔습니다. ^^

일요일에 바닷가로 바람 쐬러 갔었습니다. 이번에는 디카를 챙겨서 갖고 갔습니다. ^^


할로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널려 있는 호박, 허수아비, 그리고 하늘의 뭉게구름이 잘 어울립니다.

J. V. Fitzgerald Marine Reserve라는 곳입니다. 저희 집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Half Moon Bay라는 제법 알려진 관광지가 있는데, 그 근처에 있습니다. 입구에 버킷을 지참하지 말라는 안내문이 있습니다. 구경만 허용되고, 해양 동식물은 채집해서는 안 된다는 안내입니다.

분위기는 사진과 같습니다.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저런 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살면 참 좋겠죠?
모래사장도 있고, 낮은 언덕도 있고, 그 위로 갈매기들이 날아다닙니다.
물 속의 말미잘을 찍었습니다.

허수아비와 호박들이 어울린 모습, 한 장 더 올립니다.

[자유] 마키아벨리와 링컨에 대한 평가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7/04, 원 제목: 링컨의 정치적 조작: 말의 향연 (2)]

(1) 어릴 때 읽었던 링컨 전기

링컨이라고 하면, 일단 저는 어릴 때 김동길 씨가 쓴 링컨 전기가 생각납니다. 서울에서 대학생 큰 형님(저와 10살 차이)이 방학 때 본가로 돌아오시면서, “길아, 자 봐라. 링컨 대통령 이야기다. 읽어봐라. 훌륭한 사람이다.” 하셔서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그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습니다. 노예해방을 성취한 훌륭한 대통령으로 칭송해놨던 이미지만 흐릿하게 남아 있습니다. 요즘 그 저자께서는 제가 옛날에 읽었던 링컨 대통령 전기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언변을 보여주고 계시더군요.

제가 보기에는 그분은 자유주의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자신이 들으면 펄쩍 뛰겠지만, (반공주의를 자유주의로 등치 하면 반응이 이럴 수 있습니다.), 특정인을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라는 충고를 했다는데, 이거 참. 무슨 신념이 그렇게 강하신지... 자유주의자는 극단적인 경우(예컨대,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는 경우)가 아니라면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그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편입니다.

절대적 선악의 구분도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못 됐다고 평가할 수는 있겠죠. 내가 존재할 자유는 있고, 남이 존재할 자유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반화시키기에는 논리적으로 무리가 있죠. 내가 있으면 다른 사람도 당연히 있어야 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습니다. 물론 권위주의 논리는 다르죠. 권위를 가진 쪽이 없는 쪽을 압박하는 것이니까, 심한 경우에는 너 없어져!라고 할 수도 있겠죠. 실제로 지난 권위주의 정권 때 사라진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삼가 명복을 빕니다. 또한, 생각의 자유는 그 자체 내에서는 신성불가침이기 때문에 자유주의에서는 남이 건드리지 못합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A를 악이라고 해도, 남은 최후의 한 명은 A를 선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애로우 교수의 불가능성 정리에서 “Universal Domain”: 어떤 선호도 허용된다.)

여기서 지적 상대주의가 도출됩니다. 그렇습니다. 자유주의는 지적 상대주의를 취합니다. 무엇인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있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종교가 아닌 세상에서 말입니다. 따라서 링컨 전기를 쓴 그분을 자유주의자로 평가하기는 조금 그렇죠. 아이러니입니다. 그런 분이 자유주의자 링컨 전기를 썼으니까요. 뭐, 그런 자유도 있습니다.^^

(2) 링컨에 대한 거시적, 미시적 평가

경제학을 미시와 거시로 나누는 것처럼, 링컨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나눠보면, 거시적으로는 우리가 상식으로 아는 그런 훌륭한 대통령, 큰 정치가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나라가 쪼개질 수 있는 위기에서 전쟁도 잘 치렀고, 그 이후 봉합 혹은 통합(이런 경우가 통합입니다.)도 잘 마무리 지었으니까요.

그러나 링컨이 우리가 그냥 귀로 들었던 것 만큼 최고 도덕적 노예해방론자는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노예해방론이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데(제가 나눈 것입니다. 제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노예해방 전문가는 아닙니다.), 더 해방하자는 쪽과 해방은 하되 백인과의 차별은 이전대로 존속시키자는 쪽이 있었습니다. 전자를 “노예제 철폐론자(Abolitionist)”라고 하고, 후자는 대충 부르십시오.^^ 링컨파로 부르셔도 좋습니다. 뭐, 세세한 역사지식까지 우리가 알 필요가 있겠습니까. 큰 줄거리만 맞으면 되죠.^^ 예컨대, 링컨은 명시적으로 흑백 결혼을 반대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아는 링컨 노예해방의 도덕성은 부풀려졌다고 보시면 됩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 링컨의 정치적 행보를 미시적으로 살펴보면 우리가 아는 그런 도덕군자와는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치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정치인을 도덕으로 평가하는 것은 영 궁합이 맞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3) 마키아벨리(Nicolo Machiavelli): 도덕과 정치의 분리

실제로 정치와 도덕은 마키아벨리 이후로 딱 구분해버립니다. 마키아벨리를 근대 정치사상의 시조로 부르기도 하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마키아벨리를 이해하려면 그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군사적 상황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였습니다. 여러 소국으로 갈가리 찢겨 있었죠. 따라서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언제 쥐도 새도 모르게 국가 전체가 없어질지도 모르는 그런 살벌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머리 좋은 마키아벨리는 양다리를 걸치게 됩니다. 어떤 다리냐고요? 한쪽은 군주 쪽에 걸치고, 다른 쪽은 공화국 쪽에 걸칩니다. 매우 안전한 처세술이죠.^^ 소국들이 그렇게 많으니 종류도 많을 것 아닙니까? 그 국가들을 크게 분류해보니 군주국 아니면 공화국이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책을 양쪽으로 써서 군주국에는 군주론을 갖다 바치고, 공화국에는 공화국론을 갖다 바치는 아주 용이 주도한 머리 돌림을 보여줍니다. 마키아벨리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의 분석으로는 마키아벨리는 오히려 공화국을 더 선호했다고 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군주론도 적었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죠.

기회가 왔습니다. 메디치가에서 “장자방”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그 유명한 군주론을 쓱 내밉니다. 군주론의 핵심은 "권모술수"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라고 하면 자동으로 권모술수를 떠올리는데, 마키아벨리로서는 많이 억울할 것입니다. 전형적인 부분 발췌 신공이 마키아벨리에게도 적용된 것입니다. 전체 맥락은 차치하고 극히 일정 부분의 표현을 따서 자신에게 덮어씌웠으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정치학계에서는 마키아벨리는 마키아벨리주의자가 아니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주장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국가가 망하면 군주고 백성이고 나발이고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안보론입니다. 더구나 그 이야기는 세습이 안정된 군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세습이 아직 확고하게 자리를 잡지 못한 신생 군주국에 대한 보신책이었습니다. 즉, 백성에게 조금 세게 대하더라도, 나약하여 남의 나라에 잡아먹히는 그런 경우보다는 훨씬 낫다는 이야기입니다. 맞는 말이죠. 전쟁에 져서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면, 그 전에 군주가 백성을 아무리 사랑했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기서 정치와 도덕이 구분되기 시작합니다. 도덕은 도덕대로, 정치는 정치대로 따로 분리해서 평가하는 것이 맞다!라는 근대적 주장이 도출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링컨은 근대 이후의 정치가이니 당연히 도덕적 잣대를 그의 정치적 행보에 갖다대면 안될 것입니다. 여러분, 정치인이 자신은 착합니다, 좋은 사람입니다, 기타 등등을 공적 자리에서 말하면 믿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배경음악으로 틀어 놓고, 피카소 게르니카 좋지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치인은 정치적 소양이나 이전에 무엇을 이루었는지를 보고 엄하게 다뤄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치가 공금을 만지는 작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국민이 세금을 거둬서 줍니다. 공금이죠. 그것을 권위라는 무형의 칼로 이렇게 나눠주고, 저렇게 나눠주는 것이 정치입니다. 따라서 국민이 눈을 싯(!)퍼렇게 뜨고 감시를 잘 하지 않으면, 언제 “in 정치인 포켓”이 될지 모릅니다. 조심해야 됩니다.

아, 이야기가 또 이렇게 되었네요. 휴~ 링컨 한번 만나기 너무 어렵네요. 하기야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니 배알하기가 쉽겠습니까. 우리가 참아야죠. 내일 계속 이야기합시다. 미안합니다~ ㅋㅋㅋ

후기 1. 제가 인터넷에 찾아보니 라이커 교수님의 그 책이 디지털 자료로 있군요. 관심 있으신 분은 예습하셔도 좋고요. 몇 페이지 안됩니다.^^ http://tinyurl.com/riker-ahn

후기 2. “관습헌법” 좀 가르쳐주세요. 특히 법 쪽에 계신 분들~ 부탁해요. //

2009년 10월 6일 화요일

[소민우] 스위스 헌법에서 'Gemeinschaft'를 발견했습니다.

독일어로 된 스위스 헌법 제15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1 Die Glaubens- und Gewissensfreiheit ist gewährleistet.
2 Jede Person hat das Recht, ihre Religion und ihre weltanschauliche Überzeugung frei zu wählen und allein oder in Gemeinschaft mit anderen zu bekennen.
3 Jede Person hat das Recht, einer Religionsgemeinschaft beizutreten oder anzugehören und religiösem Unterricht zu folgen.
4 Niemand darf gezwungen werden, einer Religionsgemeinschaft beizutreten oder anzugehören, eine religiöse Handlung vorzunehmen oder religiösem Unterricht zu folgen.

Art. 15 Freedom of religion and conscience
1 Freedom of religion and conscience is guaranteed.
2 Everyone has the right to choose freely their religion or their philosophical convictions,and to profess them alone or in community with others.
3 Everyone has the right to join or to belong to a religious community, and to followreligious teachings.
4 No one shall be forced to join or belong to a religious community, to participate ina religious act, or to follow religious teachings.

참고로 프랑스 말로 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La liberté de conscience et de croyance est garantie.
2 Toute personne a le droit de choisir librement sa religion ainsi que de se forger ses convictions philosophiques et de les professer individuellement ou en communauté.
3 Toute personne a le droit d’adhérer à une communauté religieuse ou d’y appartenir et de suivre un enseignement religieux.
4 Nul ne peut être contraint d’adhérer à une communauté religieuse ou d’y appartenir, d’accomplir un acte religieux ou de suivre un enseignement religieux.

스위스 입법자가 단체를 의미하는 또 다른 단어인 societé(불) Gesellschaft(독)를 쓰지 않고 communauté와 Gemeinschaft를 쓴 것은 나름대로 무엇인가의 의도한바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있다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자유] 라이커 교수님과 자유주의 전통

(2009년 7월 3일부터 5일까지 사흘에 걸쳐서 작성하여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에 올린 시리즈의 첫 글입니다. 게시판의 한 회원이 링컨을 평가해달라고 요청해서 준비했습니다. 정치학이나 국제정치학에 대해서 기본 지식이 없는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참조할만한 정치학 상식에 대해서도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원 제목: 링컨의 정치적 조작: 말의 향연 (1), 2009/07/03)

(1) 자유주의자 라이커(William H. Riker) 교수님

일전에 말씀드린 제 사부 중에 라이커 대 사부께서 합리적 선택을 정치학에 접목시킨 태두로 평가받는다는 이야기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또한 이 교수님과 같은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자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어설프게 자유라고 하면 폭주족과 같은 마음대로 하는 사람을 연상하기 쉬운데, 그 사람도 자유를 즐길 권리가 있기는 하죠.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렇습니다. 남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다른 사람의 태클이 들어와서, 혹시 방종은 아닐까?라는 경계선 문제가 제기됩니다. 심하면 경찰서에 잡혀가서 조사받고, 모종의 처벌을 받아서 방종으로 최종 판정을 받습니다. 그런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그들의 행위는 자유가 아닌 것으로 사후적으로 확인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와 방종의 구분은 어떤 경계선 이전에는(사전적으로는, ex ante) 뒤섞여 있고, 그 이후의 적절한 조치에 의해서(사후적으로는, ex post) 정확한 판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폭주족 같은 경우 애매모호할 때는 자유주의자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자유족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그런데 애매모호하지 않은 자유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라이커 교수님 같은 경우죠.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분 같았습니다. 조용히 연구와 강의만 하시고, 복도에서 마주 지나칠 때도 잔잔히 미소와 함께 목례를 나누는 분이셨죠. 저와 마주칠 정도가 되면 오히려 노교수님께서 먼저 벽 옆으로 서시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경우와는 좀 다르죠. 우리는 학생들이 벽에 착 붙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미국의 거리를 걸으면 서로 몸을 접촉하는 것을 심하게 꺼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반면에 우리는 너무 정이 많아서 그런지 접촉하는 것을 예사롭지 않게 생각하죠. 미국 사람이 왜 그렇게 조심하겠습니까? 자유가 방종으로 변할까 걱정해서 그러는 것이죠. 신체 접촉이 일어나면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항의하게 되죠. 혹시 너 방종 아냐?라고 문제 제기를 하는 것입니다. 옛날 유럽 같으면 결투를 벌여야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될 수 있죠. 그 사람이 조심하는 것은 착해서 그렇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문화적인 현상이지만 근저에 깔린 합리성은, 상호 간의 자유가 부딪힐 때 자신에게 큰 화가 닥칠까 봐 우려해서 그런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라이커 교수님이 학생들을 잘 챙겨주셨다는 것은 이미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이 교수님과 이미지가 비슷한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자유를 그냥 마음대로 하는 것으로 쉽게 생각해서 거친 사람을 자유주의자에 가까운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정반대의 분들이 자유주의자에 가깝습니다. 마음대로 하는 사람은 권위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크죠. 이것이 왜 그러냐면 내가 마음대로 하는 자유가 상대방에게 피해를 준다면, 상대방은 그것을 마음대로 응징할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런 보복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줄이려면 오히려 자신의 자유를 절제해야 합니다. 또한, 상대방에게 더 잘해주려고 해야 합니다. 교수님들이 무슨 행복을 최고로 치겠습니까? 교수님마다 다르겠지만 제자들이 잘되는 것을 보는 행복도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라이커 교수님도 그런 행복을 추구할 자유를 갖고 계셨죠. 제자들이 잘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교수님들이 제자들에게 잘해줘야죠...^^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이타적인 행위를 이기적인 자유행위로 설명하는 것이 로체스터 학파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경제학을 빼다 박았습니다.^^ 학생들에게 잘 대해주는 교수님들이 합리적이십니다.

그런데 저는 왜 만날 이 모양 이 꼴일까요? 하라는 링컨 이야기는 하지 않고 뜬금없이 다시 자유, 방종, 이타적, 이기적, 이런 잡설을 늘어놓는 것일까요? 그것은 링컨의 정치적 행보를 이기적인 자유주의자 관점에서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2) 라이커 교수님의 저서: Liberalism against Populism

라이커 교수님이 중요한 저서를 여러 권 남기셨는데, 그중에 저는 특히 두 권의 책을 사랑합니다. 한 권은 이미 아래에서 소개되었죠. Liberalism against Populism이라는 책인데 전통적인 정치학 관점에서 보면 이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주류 정치학의 일파로 인정받고 있죠. 처음 서론 몇 장을 제외하고는 전체가 투표 이야기입니다. 애로우(Kenneth Arrow) 교수님의 불가능성 정리를 정치학적으로 해석하고 확인한 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간단한 민주주의 원칙들을 제시하고, 그 원칙들을 여러 투표 방식들이 어떤 면에서 어기는지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례들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돌고 도는 세상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정치적 선택에서 절대적으로 옳은 것을 일반적으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또 다른 버전의 불가능성 주장이 제기되고, 애로우 교수님의 연구 결과가 더 확고해집니다. 콩도르세(Nicolas Marquis de Condorcet)의 “투표의 역설(Paradox of Voting)” 연장선에 있는 연구입니다. 공공선택에 관심이 있는 분은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책 제목에서 암시하는 것은 집체주의는 경계해야 하고, 자유주의를 잘 운영해야 된다는 그런 뜻이겠죠. 그러면 라이커 교수님이 말씀하신 자유주의의 요체는 무엇일까요? “돌고 도는 세상”이라는 말씀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에는 절대적인 정답이 없다.”로 저는 표현하겠습니다. 상대적으로 더 옳은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지 모든 잣대를 꿰뚫는 만병통치약 같은 정치 제도는 이 세상에 없고, 그런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엉터리”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주장하셨다고 저는 나름대로 해석합니다. 그런 “엉터리”가 좋아하는 이념이 집체주의(Populism)라는 것이죠.

(3) 룻쏘 (J. J. Rousseau)에 대한 해석

룻쏘가 라이커 교수님께 야단을 좀 맞습니다. 너는 왜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반의지(General Will, Volonté Générale)”라는 녀석을 제시하여 “혹세무민”했느냐고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룻쏘가 누구입니까?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그 룻쏘, 아닙니까? 룻쏘는 그러겠죠.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아니었는데라고요. 사상가들은 억울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후대에 어느 시각에서 들여다보느냐에 따라서 “엉터리”가 되었다, “황금 열쇠”가 되었다 하니까요.^^

그런데 적어도 경제학자들은 라이커 교수님의 룻쏘 해석에 동의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애로우 교수님의 주장도 라이커 교수님 주장과 같거든요. 노벨상 받으셨죠?^^ 정치학 쪽에서는 룻쏘에 대한 평가가 엇갈립니다. 자유주의 학자인 칼 포퍼(Karl Popper, <열린 사회와 그 적들>)나 라이커 교수님은 강하게 비판하죠. 포퍼는 룻쏘를 공산주의자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죠. 포퍼도 비판을 받기는 받습니다. 너무 자신의 프레임에 정치철학자들을 맞췄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포퍼에게 걸리면 플라톤도 별수 없는 유사 공산주의자가 되는 정도이니까요. 그 반면 정치 공동체를 선으로 보는 사조에서는 룻쏘가 제대로 된 사상가로 평가됩니다. 어느 쪽으로 가실 것인지는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저는 저에게 그렇게 친절하게 해주신 라이커 교수님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4) 공동체 자유주의?

최근에 어떤 학자께서 공동체 자유주의라는 개념을 설파하고 계신다는데, 저 같은 교육을 받은 사람은 그 말을 딱 듣자마자, 혹시 룻쏘? 이런 생각이 팍 듭니다. 자유와 공동체를 엮어 놓으면 매우 어색한 개념이 됩니다. 자유주의면 자유주의이고, 공동체면 공동체이지 그것을 묶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책을 읽어보니 비판을 할 수가 없더군요.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주장을 해놓으니 무엇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아, 예~하고 말았죠.^^

공동체라는 상위 개념을 두는 것 자체가 진정한 자유주의에 어긋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공동체에 의해서 자유가 구속된다면 그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유는 자유에 의해서 구속되는 것이 자유주의의 핵심입니다. 개인주의 사상이라는 것이죠. 사람을 공동체로 묶어서 한 덩어리로 만드는 순간, 개인의 자유는 적어도 조금이라도 더 훼손될 수밖에 없죠. 그럼 국가는? 국가가 어떻게 일반적인 정치 공동체입니까? 여러 이익이 상충하는 큰 정치 집단일 뿐이죠. 통일도 반대하는 사람이 있죠. 평화 시 국가를 정치 공동체로 간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무엇을 제시하여 하나로 모을 수 있는지 저에게 예를 보여주시면 경품을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경우가 월드컵 4강 신화의 축구 정도가 될 텐데, 그것은 정치 이벤트가 아니죠. 또한, 더 엄밀히 따지자면, 축구 때문에 열광하는 사람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 정도인데 정치에서 무슨 국가 공동체 타령인지 모르겠습니다. 종교에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국가 운명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지구가 멸망하면 모두 끝입니다. 그런 의미라면 공동체 아닌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유는 자유이지,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을 하고 자시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열심히 사는 것이 자유주의의 모습입니다. 이기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 조화를 이루는 것이 자유주의의 정답입니다. 만약 그것을 공동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언어의 유희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십시오. 그렇게 해도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정답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자유주의입니다. 어설프게 국가 공동체를 위한다든지,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든지, 국가이익을 위한다든지, 우리는 운명 공동체 등의 주장으로 무장하여 가스통을 들고 설치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긍정적이고 건설적입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정치사에서 국가 전체적으로 평화 시에 정치적 공동체에 근접한 사례가 딱 한 번 나옵니다. 1980년 광주에서 나왔다고 저는 봅니다. 그런 것이 유사 공동체입니다. 그 부분에서는 룻쏘가 일정 부분 맞는다고 제가 인정해줄 용의가 있습니다. 그 이외에는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물론 북한에서는 룻쏘를 아주 사랑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 전체가 주체사상에 입각한 유사 공동체 아닙니까? 주체사상을 일종의 일반의지로 간주해도 큰 무리는 없겠습니다.

서설이 끝이 나지 않네요. 자유주의 전통이 그렇습니다. 여기에다 홉스, 로크(John Locke), 밀(John Stuart Mill),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기타 등등까지 언급하자면 여러분이 저를 방종으로 밀어붙일 것 같아서 자제하렵니다. (사실은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빠져나갈 때 저는 이런 못된 수법을 씁니다. ㅋ)

(5) 라이커 교수님의 다른 저서: The Art of Political Manipulation

두 번째 책이 오늘 주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휴~ The Art of Political Manipulation이라는 쪽 수가 별로 많지 않은 명저입니다. 이 책의 첫 번째 장이 링컨 이야기입니다. 반가우시죠, 링컨 이름이 나오니까. 음, 책 제목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어떻게 번역할까요? 정치적 조작의 기술(혹은 술수)? 정치조작술? 정치적 조작의 예술? 정치공학? 정치공학술? 정치공작? 정치공작술? 골라 골라 골라서 댓글로 올려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부담은 가지지 마십시오. 그냥 재미로 해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글 제목은 정치적 조작으로 되어 있는데 구애받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후다닥~

(왜 여기서 멈추는지 궁금하시죠? 다음이 설명하기가 매우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시간 벌기 작전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그 책의 제 1장을 읽어 보시오.”라고 하면서 끝내고 싶지만, 너무 무성의하겠죠. 제가 쉽게 설명드리도록 짱구를 굴려 보겠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방학을 즐기십시오. 찜통더위에 시원한 수박을 찾으셔야지, 웬 링컨 컨티넨탈 자동차를 찾으십니까. 아, 8기통이니까 강력한 에어컨이 있겠군요. 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