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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10일 화요일

[자유민주] 친구여, 그 답은 바람 속에 있다네.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11/10/24)

안철수 원장이 박원순 후보에게 전달한 편지에 미국 인권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남부 앨러바마 주 몽고메리 시에서 1955년 12월부터 약 1년 동안 지속하였던 "버스 승차거부 운동"입니다. 

안 원장이 편지에서 언급한 로자 파크스의 저항으로 그 운동이 촉발되었습니다. 몽고메리 버스 탑승 규칙은 백인은 앞자리부터 착석하고 흑인(그때는 Negro라는 표현을 사용)은 뒷자리부터 앉도록 했습니다. 백인이 승차하여 앉을 자리가 없으면 흑인이 차지한 좌석 중 맨 앞줄의 모든 승객이 그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습니다. 흑백이 섞여 앉지 않았으므로 그 줄에 빈자리가 있어도 흑인은 앉지 못했던 것이죠. 로자 파크스는 그런 상황에서 버스 기사가 백인에게 자리를 내주라고 요청하자 거절했고, 체포되어서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로자 파크스의 저항은 흑백차별 철폐 운동가들에 의해서 집단 버스 승차거부로 이어졌고, 후일 미국 인권운동의 대명사가 된 킹 목사가 그 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했습니다. 몽고메리 시의 흑백차별이 위헌이라는 연방 대법원 확정판결이 날 때까지 버스 승차거부 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안 원장이 지적한 "참여"의 힘이었습니다. 몽고메리 시의 대다수 흑인이 걷기, 승용차 함께 타기, 자전거/동물 같은 대체수단 이용하기에 동참했습니다. 흑인 택시기사는 버스 요금과 같은 비용을 받고 택시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성금을 보내와서 몽고메리 버스 승차거부를 지지했다고 합니다. 

몽고메리 버스 승차거부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킹 목사는 계속 인권운동에 헌신하였고, 1963년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있었던 대규모 인권운동 집회(The March on Washington)에서 "I have a dream." 연설을 했습니다. 그 집회에서 밥 딜런이 작사 작곡한 "Blowing in the Wind"를 Peter, Paul and Mary가 불렀습니다. 


얼마나 많은 길을 걷고 나서야 
진정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을까. 
얼나나 많은 바다 위를 날아야 
흰 비둘기는 백사장에서 편안히 잠들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포탄이 휩쓸고 나서야 
그것들이 영원히 금지될까. 
친구여, 그 답은 바람 속에 있다네. 
그건 바람만이 대답할 수 있다네. 

이 노래에 따르면 이번 선거의 답은 바람 속에 불고 있을 것 같군요. 
4대강 사업의 답도 바람만이 대답할 수 있을지 모르죠. 

(밥 딜런의 노래를 첨부합니다.)




(댓글)
홍기호
(2011/10/24 16:25) 
박사님 별일 없으시죠? 안철수씨의 편지는 아직 못 봤습니다만, 주말에 피트 시거가 월가 시위에 참석했던게 생각나네요. 
 
김형균
(2011/10/24 16:52) 
그러게.... 이번 선거의 답은 바람속에 불고 있겠지요. 개인적으로 비관적으로 예상합니다만... 쩝 
 
메이데이
(2011/10/24 17:24) 
羅 쪽이 비관적이라는 예상이기를 바랍니다. 
 
김형균
(2011/10/24 17:34) 
죄송합니다만 朴후보의 낙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습니다. 제가 희망하는 바는 아니구요. 
 
메이데이
(2011/10/24 17:57) 
그렇다면 우리의 희망이 실현되기를 빌 따름입니다. 
 
Narkiss
(2011/10/24 21:08) 
전 낙승하리라 예상하는데... 음... (여론조사가 박빙 우세이니 실제론 더욱 우세일꺼라.. 과거의 경험으로 미뤄짐작해봅니다) 
 
이준구
(2011/10/24 21:28) 
대학시절 이 노래를 정말로 많이 불렀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이런 노래들이 힘을 불어준 것 같습니다.
미국 젊은이들은 이유를 모르는 전쟁 통에, 그리고 우리의 젊은이들은 숨조차 쉬기 힘든 독재와 폭력 아래 신음하고 있던 암울한 시절이었지요.
 
 
butterfly
(2011/10/25 01:11) 
전잘모르겠네요 우리학교 교수님들중에 어떤분들은 예찬하는걸 보면 ㅈㅅㅈㅅ 교수님 ㄷㄷ
그래도 저도 이곳과 비슷한 선택을 ㄷㄷ 웬만하면 이젠 바뀌기를 바라는데 왜 다들 이런지 ㅠㅠ
 
 
butterfly
(2011/10/25 01:13) 
저도 맘놓고 이 분위기에 참여했으면 ㅋ 
 
안병길
(2011/10/25 10:50) 
Dr. 홍, 저는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고마워요.

형균 씨 예상은 저와 다르네요. ^^

선생님 대학시절과 이 노래가 잘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1971년 베트남전 반대 워싱턴 집회에서도 Peter, Paul and Mary가 같은 곡을 불렀습니다.
 
 
김형균
(2011/10/25 11:15) 
안박사님의 예상은 저의 희망과 일치합니다 ^^

뭐 요즘도 이 노래는 잘 어울리는거 같습니다. 특히 한국의 상황이... ㅠㅜ
 
 
제자*오
(2011/10/26 18:31) 
박사님, 잘 지내시죠? 덕분에 잘 몰랐던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제가 준비하던 자격시험에 합격했는데요. 이걸 캘리포니아에서 써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해봤습니다.^^
 
 
안병길
(2011/10/27 09:13) 
제자*오 씨, 무슨 자격증인지 궁금하네요.^^
늦었지만 생일 축하합니다. 소띠 만세!
  
 
제자*오
(2011/10/27 10:15) 
박사님, 감사합니다. 박사님도 소띠이시니 제가 12년 후배가 되겠군요. 자격증은 게시판에서 말하긴 그렇고...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예전에 관악산 오르면서 말씀드렸습니다. 말씀드리니 박사님 사시는 곳의 주변 분들 중에도 준비하는 분들이 있다고 하셨죠. 제가 메일 드리겠습니다.

2010년 3월 17일 수요일

[서평-메이데이님] 저항하라! 참여하라!

(인터넷 친구인 메이데이님이 과분한 서평을 적어 주셨습니다. 매우 감사합니다.)

어떻게 된 심판인지 개나 소나 자유와 민주를 말하고 있다. 예컨대 ‘자유민주 수호연합’이라든가 ‘자유 총연맹’에서 하는 일을 듣고 있으면 다시는 자유와 민주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조차 싫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비자유, 비민주적 행위들을 보면 더 그렇다. 자유와 민주가 한국에선 정말 고생이 많다.

그리하여 점점 자유와 민주가 재미없어 보이고 있었는데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이란 책이 세상에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목만 봤을 때 민중이 권력자와 대결하는 법에 대한 설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조금은 식상한 주제다. 멀리로는 노동자여 대동단결하여 혁명을 완수하자는 방법도 있었고, 가까이에는 정당 활동을 활성화하여 말 안되는 무리들을 때려잡자는 방법도 있었다. 그런데 약자라면, 여자이면서 가난하고 미래도 불투명하며 한창 늙어가느라 힘이 많이 빠져 있는, 약자 중의 약자인 내가 있지 않은가? 나는 최근 들어 강자에 대항하여 이길 생각을 잘 못해봤다. 스파르타쿠스가 결국 로마제국을 이기지 못했고 동학 농민군이 조선 왕조를 뒤집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는 일이 힘들다는 핑계로, 귀찮은 일은 될 수 있는 대로 미루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잘못 걸려 감옥에 가는 게 무섭기 때문이기도 하다. 왕창 재수가 없으면 촛불 들었다가도 재판받고 감옥에 갈 수 있는 세상이니까.

그런데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 이 책이 내 아픈 데를 꼭 찔러 주었다. 저항하라! 참여하라! 이 두 마디는 이 책의 핵심이자 이미 깊이 시들 대로 시든 내 고질병의 처방이다. 저항하고 참여하되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고 전략적으로 안정적인 액셀로드-안병길 식의 ‘맞대응 전략’을 쓰라고 가르친다. 더불어 아주 구체적인 실천 방안도 들어있다. ‘맞대응 전략’은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저항하고 참여하는 방법이자 안전한 방법임으로 감옥은커녕 재미있게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일 것 같다.

무엇보다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은 ‘자유’와 ‘민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선한 정의로 내 머리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자유’가 무엇인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물어보는 시험 문제를 받는다면 한 자도 제대로 써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동안 그런 시험지를 받은 적이 없다는 게 더 큰 문제다. 한 번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국정 교과서는 아예 개념이 없었고 선생님들도 스리슬쩍 넘어갔기 때문이다.(사실 그 분들도 잘 몰랐을 거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자유’와 ‘민주’에 대해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 충분한 답안을 얻었다. 개인이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삶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세력에 용감하게 저항하는 것이 ‘자유’와 ‘민주’를 누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외운다. 정치학자가 ‘약자’의 편에 서서 ‘강자’를 이기는 방법에 대해 쉽고 자세하며 재미나게 일러주는 것을 첨 봤다. 그런 세상을 열어주신 안병길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이 책이 여러 사람들에게 ‘자유’와 ‘민주’, ‘자유민주주의’의 교과서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제대로 공부해서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신나는 일이 되겠는가 말이다.

2009년 12월 8일 화요일

[자유] 자유, 민주, 그리고 참여 성냥불을 켭시다!


(2010년 초 도서출판 동녘에서 발간 예정인 제 책 <성냥불 자유민주주의(가제)> 원고 마지막에 나오는 글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유”라고 하면  포근하고 아름다운, 좋은 것이라는 이미지를 주로 갖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자유는 우리의 기본을 규정하는 매우 중요하고 소중하면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갖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때로는 결단과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역사를 훑어보면 자명한 것입니다. 자유와 인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은 멀리는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 독립전쟁/남북전쟁이 있고, 가까이는 우리의 한국전쟁이 있습니다. 모두 수 많은 목숨이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스러져 갔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박정희 독재 시절과 전두환 군부정권 시절에 민주화를 위해서 엄청난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런 분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이 정도의 자유민주주의를 누리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역사에는 그 끝이 없습니다. 칼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공산주의가 역사의 끝을 단정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열린 사회에서는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적인 끝이 있는 것이 아니고, 더 발전하거나, 정체하거나, 퇴보하거나 셋 중 하나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는 우리나라 자유민주주의가 계속 발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 닫힌 생각을 하는 분을 흔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충분한 근거 없이 나만 옳다고 막무가내로 주장하는 분은 닫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은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닙니다. 특히 사회지도층에서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더욱 충실하게 자유와 평등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사회지도층은 자유와 평등의 열린 마음으로 사회를 쳐다보는 새로운 눈을 떠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이기심에 의해서도 사회적 약자를 배려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사회적 강자가 장기적으로도 잘 살려면 그 방법이 더 유력한 길입니다.

자유와 권리 지키기에 대한 귀차니즘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모두를 위해서 더 좋은 길입니다. 길거리를 지나다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방종으로 의심할 만한 일을 당하면, 자유인지 방종인지 따져보는 용기를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그냥 귀찮아서 봐준다는 식으로 방종을 내버려두면 “엉터리” 자유가 우리를 억압하게 됩니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잘 압니다. 단기적으로는 힘드실 것입니다. 귀차니즘과 점자니즘의 향수도 느끼실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노력하면 장기적으로는 더 많은 자유와 권리를 누리실 것이고, 우리의 자손들은 더 자유롭고 평등한 자유민주주의를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쾌적한 환경에서 이 금수강산을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조금만 신경 쓰는 것은 그렇게 큰 비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보수든 진보든 자유민주주의 근본 정신에 투철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심지어 진보가 보수의 가면을 써도 좋고, 보수가 진보의 가면을 써도 괜찮습니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인 자유, 평등, 참여에 대해서 제대로 된 뜻만 가지고 있으면 괜찮습니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민주주의의 공적은 권위주의이지, 진보나 보수가 아닙니다.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건전한 이기심과 개인주의를 담금질하셔서, 여러분의 자유와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신경 쓰고 노력하시면 좋겠습니다.

자유민주주의자 여러분, 힘내시기 바랍니다!


2009년 10월 12일 월요일

[자유] 자유민주주의 참여의 문제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7/12, 원 제목: Culture of Negativism and Discouragement)

1. 부정(소극)적이고 좌절시키는 문화

잘 안 되는 영어이지만, 제목으로 한번 뽑아봤습니다. 제가 미국에 살고 있으니 영어도 어느 정도는 대접을 해줘야죠.^^ 제목을 번역하면 "부정(소극)적이며 좌절시키는 문화" 정도가 되겠습니다. 이 경우에 네가티브는 포지티브와 맞선 개념으로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반대편에는 "긍정(적극)적이며 격려하는 문화"가 있겠죠.

미국에서는 유턴금지 표지가 없으면 모두 유턴이 가능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유턴 표지가 있어야 유턴이 가능하더군요. 미국은 유턴이 위험한 지역이 그렇게 많지 않고, 도로 사정이 여유가 있는 편이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으므로 도로 안내판이 그렇다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유턴하는 것은 긍정의 개념이고, 유턴 안/못 하는 것은 부정의 개념이죠. 부정보다는 긍정이 좋은 것 같습니다...

(저는 성이 안씨라서 이런 불명예를 항상 달고 삽니다. 제가 "안 박사"인데요, 박사가 아니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죠.^^ 저, 박사 맞습니다.ㅜ.ㅜ 그러나, 괜찮습니다. 이임하신 국가인권위원장께서 같은 성씨이므로 완전 괜찮습니다. 조상님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안강최의 안!입니다.^^)

이 교수님께서 힘들게 사회비평 등대지기를 하실 때 좌절시키려는 사람들이 더 많을까요, 긍정적으로 격려해주는 사람들이 더 많을까요?

2. 인터넷 동호회의 가상 사례

한 인터넷 동호회에서 어떤 회원이 근거 없는 생욕과 인신공격을 받았을 때,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 상대방을 응징했다고 합시다. 그 와중에 동호회 회원들이 그 회원에게 보여준 반응은 세세하게 따지면 매우 복잡하겠죠. 사안에 관심이 없었던 회원들을 제외하면, 반응 행태는 대략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적극적 지지: 공개 글이나 사신으로 격려해준 분들입니다.
2) 소극적 지지: 마음으로는 그 회원의 뜻에 동의하나 그냥 지켜본 분들입니다.
3) 말림의 미학: 그 회원의 뜻에는 동의하지만, 그 회원 자신을 위해서 자제하라는 투로 글을 올리거나 사신을 보낸 회원들입니다.
4) 소극적 반대: 무슨 이유에서든 그 회원의 행보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침묵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5) 적극적 반대: 원래 그런 욕설이 횡행하던 곳인데 그 회원이 오버했다고 비난하든지, 아예 비슷한 욕설을 그 회원에게 해댄 인간들입니다.

그 회원이 무슨 도발을 한 것도 아니고,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아서 침해된 자신의 명예를 되찾겠다는 대의명분을 갖고 온 힘을 기울인 사람에게 이렇게 다양한 반응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3. 싫어할 자유와 좋아할 자유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사에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이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죠. 그 과정이 복잡했을 테니, 그 회원의 행보 중 일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발췌 잡공을 현란하게 뿌려서 그 회원을 탐탁지 않은 존재로 스스로 생각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 세상이니까요. 제 해석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5번은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회원을 일종의 말썽꾸러기로 본다고 간주해도 별 무리가 없죠. 1번의 경우는 그 회원에게는 가장 소중한 분들이고, 동지가 된 경우입니다. 만약 그 회원이 인터넷 소통에서 맞대응 전략(Tit-for-Tat)에 준하는 상호작용을 유지했다면, 그런 분들이 격려의 글/사신을 올리거나/보내왔을 때 반드시 화답했을 것입니다. 상호협력을 유지하자는 것이죠.

4. 귀차니즘, 점자니즘, 그리고 말림의 미학

2번, 3번, 4번 유형은 조금 분석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2번과 4번은 제법 줄여서 "귀차니즘" 혹은 "점자니즘"에 빠졌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남들이 알아서 해결하면 대충 따라가겠다는 회원들이죠. 귀찮게 생각하거나, 아래 것들이 까부는데 점잖은 자신들은 빠져 있겠다고 생각했을 수 있겠습니다.

3번이 상당히 재미있는 유형입니다. 건강을 염려해주시는 분, 취지는 맞는데 방법이 너무 세다는 분, 귀찮은데 그냥 대충 지나쳐주지(똘레랑스) 뭘 그렇게 혼을 내려고 하느냐는 분, 기타 등등 여러 표현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 회원으로서는 고맙죠. 대의는 바르다고 일단 동의를 해줬으니 얼마나 고마운 분들입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정중하게 감사를 드려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말리는지 그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것 같습니다. 진정으로 그 회원을 걱정해서 말리는 경우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고맙죠. 그 회원으로서는 감사해야 합니다. 예컨대,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단식을 오랫동안 했다면, 저라도 말리겠습니다. 일단 건강을 해치면 바람직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심한 경우가 아닐 때, 말리는 것이 그 회원을 행복하게 해줄지 아닐지는 똑 부르진 답이 없을 것 같습니다. 말리는 것 자체가 사실 그 회원을 별로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그 회원이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결국은 행복하기 위해서 고생하는 것인데, 관두라!라고 하면 그 회원은 맥이 팍 빠질 수도 있겠죠.

말리는 이유가 그들 자신을 위해서라든지, 게시판 전체라는 가공의 무엇을 위해서라든지면 오히려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회원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되고, 양보해서 그분들이 행복해진다면 전체 사회의 행복 총합으로서는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판단이 설 수도 있겠죠. 그 회원이 적어도 편협한 이기주의자가 아니면 가능한 얘기입니다.

5. 말리지 않을 자유

저는 이 말리는 문화에도 권위주의 유산이 일부 베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구요? 그 회원의 선호를 자신의 선호에 맞춰서 추정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 회원도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경우입니다. 상대방 타입이나 스타일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네 뜻은 옳다, 그러나 네 행복을 위해서 관두라는 식으로 얘기합니까? 그 회원의 행복을 그 회원이 더 잘 알지, 그분들이 더 잘 알겠습니까. 옛말에 야단치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는 말이 있죠. 이 예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길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말리는 미학이 아직도 팽배해 있습니다. 주위에서 살펴보십시오. 경험도 많이 해보셨을 것입니다. 말렸든지, 말림을 당했든지요. 옳다고 공감하면 그쪽에 힘을 보태는 것이 자유주의에 맞습니다. 괜히 남의 선호를 갖고 이렇게 저렇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권위주의적이죠. 만약 그런 말리는 행위가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라면, 깨끗하게 이런저런 점은 객관적으로 잘못이니 인정하라고 요청하는 것이 더 당당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올바르고 정당한 일을 하는 사람을 말리는 이들이 많은 사회에서 어떻게 제대로 된 자유민주주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올바른 방향을 그렇게 좌절시키려고 하면 힘들게 자유와 권리를 위해서 힘껏 노력하는 사람은 얼마나 실망이 클까요. 이런 식으로 말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침묵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만 있는 현상은 아닙니다. 미국의 킹 목사도 인권 운동을 할 때, 주위에서 말리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겠죠. 춘추도 그러한데, 건강을 생각하십쇼, 이런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숫자보다는, 맞다! 우리가 그것을 깜빡했다, 지금부터는 킹 목사 당신에게 힘을 보태겠다!, 이렇게 해서 링컨 기념관 앞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인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몽고메리에서 흑백차별 버스 안 타기 운동을 벌였을 때, 사람들이 동참해줬던 것이죠. 귀차니즘, 점자니즘, 말림의 미학 등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6. 말림이 비추가 될 때

자유주의에서는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거나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면, 간섭하지 말고 그냥 놔두는 것이 정답입니다. 이기적 개인주의이니까요. 그 이외는 기냐 아니냐로 입장을 분명히 정리해서 자기편이 이기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기려고 노력하는 전략은 다양합니다. 무시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방안이 될 수도 있죠. 스토커는 무시하는 것이 적절할 때도 있습니다.)

게다가 민주주의까지 그 문제에 들어오면 반드시 "참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쪽 수로 밀려서 소수파가 되고, 다수파의 입장이 전체 사회적 결정으로 확정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투표합시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독일의 정치이론가 칼 슈미트는 "정치적이라는 것(the political)"은 "적"과 "친구"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 속 뜻을 음미해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주위에 올곧은 일을 하신다는 믿음이 가는 분들이 있으면, 귀차니즘이나 점자니즘으로 소극적으로 대하는 것이나, 말림의 미학으로 좌절을 안겨주는 것이 그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줄지 한번 생각해보시죠. 제가 보기에 적어도 말림은 그분들에게는 별로 행복감을 안겨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자유주의에서 강요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화내면 자신이 또 손해거든요.^^ 남에게 무엇을 요구할 때는 권유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7. 자유민주주의적 참여: 선진국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해볼 만한 것은, 마냥 착한 바보같이 사는 것이 적절하냐는 문제입니다. 이타주의가 오히려 더 불행한 사태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나약한 이타주의는 그렇습니다. 예컨대, 최진실 사건 이후로 네티즌들이 선플달기 운동을 하죠. 아주 좋습니다. 선플이 흘러 넘치면 양화가 악화를 구축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동참하지 않는 자유인지 방종인지를 만끽하려는 사람들이 일정 수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냇물을 흐린다는 옛말이 있죠. 그런 미꾸라지는 미끄러워서 잡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노력해서 한 곳에 모여 있도록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밉다고 추어탕을 해 드시지는 마시길... 자유주의는 그런 미꾸라지도 존재 그 자체는 인정합니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그것은 간단한 모형을 사용하여 순차 게임으로 주어진 조건에서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 작년에 제가 관련 포스팅을 이미 올렸습니다. "주말, 전쟁 공부 (http://tinyurl.com/ahn-bdm)"라는 제목이었습니다. 클릭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물론 평화주의자들끼리 사는 세상에는 이타주의자도 착취당하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우습게 보이면 달려들어서 홀라당 등치려는 늑대들이 곳곳에 있는데 어쩌겠습니까. 겉으로라도 센(tough) 척해야죠. 그래야 응징이 두려워서라도 늑대들이 자제할 것 아닙니까.

자유민주주의가 발전하려면 제대로 된 "참여"가 필수적입니다. 그 참여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으면, 그 참여를 뒷받침하는 시민 정신과 문화가 성숙하지 않으면.......... 선진국, 가기 힘들걸요?

2009년 9월 28일 월요일

[정치] 참여정부: 국민참여에 대해서

(2003년 3월 23일에 작성한 글입니다.)

새로 개편된 청와대의 직제를 보면 국민참여수석실(국참)이라는 생경한 부서가 있다. 노무현 정부가 참여정부이므로 국민참여를 청와대 부서로 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국참은 무엇을 하는 부서인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국민이 국정을 감시하고 민원을 제기하는 것을 들 수 있겠다. 그렇다면 국정감시와 민원이라는 것은 오히려 청와대보다는 행정부에 더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든다. 그러면 청와대 국참은 국정감시와 민원처리에 있어서 국민이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 문제가 해결되도록 도와주는 곳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국민고충처리위원회도 있고 부패방지위원회도 있는데 옥상옥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따라서 국참은 국정감시와 민원처리도 맡겠지만, 그것들을 뛰어넘는 고유 영역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그 고유영역은 두말할 것도 없이 "국민참여"이다. 이렇게 얘기가 되면 동어반복이 되는데, 구체적으로 참여정부의 청와대가 국민참여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국민참여는 국민이 하는 것이지 청와대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냐는 의문이 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국참은 국민참여에 직접적으로 개입해서는 안된다. 국민참여는 사회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정부나 청와대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국참을 매우 한시적인 부서로 보고 있다. 그러면 국참은 필요없는 군더더기 같은 부서인가? 그것도 아니다. 참여정부이므로 국민참여를 간접적으로 돕는 역할을 한시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3대 원칙을 들라고 하면 자유, 평등, 참여를 들 수 있다. 그 중 참여는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참여가 없으면 민주주의는 없다. 참여는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다.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가 얼마 되지않아 참여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낮고, 참여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의 지각도는 더 낮다. 따라서 청와대 국참은 민주주의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 건설적인 국민참여로 가게끔 돕는 바람직한 역할을 하도록 지혜를 짜내어야 한다.

국참이 주의해야 할 것은 과거의 잘못된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깝게는 "제2 건국위원회"부터 "국풍", 멀리는 "국민교육헌장" 식의 국민참여로 유도하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정부나 청와대가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했기 때문이다. 국참은 국민참여가 "자발적"으로 그리고 "흥겹게" 일어나는 기반을 닦는 것에서 반드시 그쳐야 한다. 그 이상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면 제2의 "제2 건국위원회", "국풍", "국민교육헌장"의 아류가 될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음을 한 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국참이 제공한 기반 위에서 국민참여가 정부나 청와대가 바라는 반대 방향으로 가더라도 절대로 개입해서는 안되고 그대로 두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장기적으로 민중의 "합리성"을 믿는 토대 위에 서 있음을 국참은 명심하고 그 활동 범위를 구체적으로 제한해야 할 것이다.

"자발적" 참여, 그리고 "즐거운" 참여의 기반에 대해서는 국참이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하여 잘 수렴해야 할 것이다.

2009년 7월 29일 수요일

[자유] 인터넷 소통 자유민주주의 선언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6/29)

(패러디 한번 해봤습니다.^^ 인터넷 자율정화에 대한 일반론입니다.
우리 게시판의 특정 사안을 염두에 두고 작성된 것이 아닙니다.)

인터넷 소통 자유민주주의 선언

인터넷 소통에 귀신들이 떠돌고 있다. 인터넷의 하늘에는 인신공격, 심한 욕설, 사생활 공개, 중상모략(인욕공모)의 귀신들이 아직 떠돌고 있다. 지금 네티즌은 자유와 평등을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이에 인터넷 소통 자유민주주의 선언을 하여 우리들의 자유와 평등 권리를 귀신들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을 전 네티즌에게 호소한다.

1. 자유

어떤 네티즌도 표현의 자유를 갖는다. 그러나 이 자유는 어떤 표현도 용납하는 방종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기본 가치와 권리를 부정하는 어떤 표현도 네티즌은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인욕공모로 중무장한 귀신들은 우리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면서 요술을 부리고 있다. 우리는 그 귀신들이 훼손하려는 인터넷 자유 정신을 온 몸으로 지켜야 한다.

네티즌은 준익명의 자유를 갖고 있다. 준익명 정신은 자유를 진작시키는 도구로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준익명 정신을 악용하려는 귀신들의 준동은 단호히 처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 진작의 준익명 정신이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다. 귀신들은 준익명을 악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하고 괴롭히고 있다. 이들의 준동을 막아야 인터넷 자유는 온전히 보전될 수 있다.

2. 평등

네티즌은 인터넷 서비스에 가입하면서 평등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평등은 어떤 특권도 용납하지 않는다. 귀신들은 사이비 자유를 달콤하게 속삭이면서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려고 한다. 우리가 이 귀신들을 처단하지 않으면 국가라는 괴물이 개입할 수도 있다. 그 괴물은 인터넷 밖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귀신들의 몰지각한 이기주의와 인욕공모 신공이 괴물이 쳐들어 올 빌미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귀신들이 그런 신공을 사용할 자유가 있다면 우리는 그 신공을 비판할 자유 묘법이 있다. 평등하기 때문이다.

3. 참여

"자유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본래 자유와 평등은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들에게 부여된 선물이다. 그것을 진작하려는 노력을 펼치지 않으면 귀신들의 요술 신공에 현혹되어 국개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사람이지 개가 아니다.

자유와 방종의 차이는 인터넷에서 어떻게 구분되는 것이 바람직한가? 관리자가 구분하는 것인가, 국가가 구분하는 것인가?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려는 네티즌들의 노력은 얼마나 있었는가? 방치되는 방종은 자유가 되어버린다. 방종을 비판하고 적절히 제어해야 그 때 방종과 자유가 확연히 구분된다. 그렇지 않으면 방종이 자유의 가면을 쓰고 인터넷 거리를 활보할 수 밖에 없다.

자유와 평등을 지키려는 참여가 없이 인터넷을 지키려는 것은 공짜 점심을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세상에 공짜가 없듯이, 인터넷에도 공짜는 없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네티즌의 자발적인 참여는 필수조건이다.

귀신들에게 묻는다.

너희들의 귀신 가면은 영원히 특권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귀신 너희들은 인터넷의 자유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국가라는 괴물로부터 인터넷 소통을 온전히 보존할 비책이 있는가?

전 네티즌에게 온 몸으로 호소한다.

- 인터넷 자유민주주의 깃발 아래 모두 모이자!
- 귀신들의 준동이 자유가 아니고 방종임을 온 몸으로 보여주자!
- 귀신들은 가면을 벗고 원래 모습인 인간으로 돌아오라!

인터넷의 진정한 자유인들이여 대동단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