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12/04/13, 15)
이번 총선 과정을 보면서 제 책 제목인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이 떠올랐습니다. 그 책에서 저는 약자가 강자를 이기려면, 1) 머리를 잘 굴려야 하고, 2) 약자 사이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두 사항에서 부족한 점이 제법 있었기 때문에 약자 야권이 이번 선거에서 이기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 어느 쪽이 약자였는가?
총선 기간 중 방송 3사 노조가 장기간 파업을 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방송 3사 노조가 주장한 공정 보도를 위한 사장 퇴임 요구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방송이 여권에 우호적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심하게 표현하면 정부/여당이 방송을 장악했다고도 할 수 있겠죠. 나꼼수의 등장으로 주요 방송의 정치적 영향력이 어느 정도 줄어들었지만, 많은 국민은 여전히 TV 뉴스나 프로그램을 통해서 정보를 전달받습니다. 더구나 발행 부수 1, 2, 3위를 차지하고 있는 신문사들의 논조까지 참작하면 언론 환경이 야권에 매우 불리했습니다. 야권은 분명히 약자였습니다.
그런데 야권은 부분적으로 강자라는 착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야권이 이겼고, 측근 비리와 민간인 사찰을 비롯한 이명박 정부의 여러 실정에 대한 심판이 총선에서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었죠. 반면에 여권은 스스로 약자임을 천명하고 총선에서 질 것이라는 위기감을 드러냈습니다.
여야가 약자인 측면도 있고 강자인 측면도 있었겠죠. 그런데 최근 우리 정치사를 보면 총선에서 현 야권이 이긴 것은 대통령 탄핵 발의라는 매우 특이한 의제가 작동했던 제17대 총선밖에 없습니다. 18대 총선에서는 전체 의석의 약 2/3가 친여 세력으로 채워졌었죠.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고 하죠.
2. 머리를 어떻게 굴렸는가?
선거는 전략적 상호작용을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대표적인 정치 행사입니다. 여기서 전략적 상호작용은 상대방이 어떻게 대응할지 미리 계산해서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5년 단임 대통령 임기 마지막 연도에 벌어진 이번 총선에서 야권이 들고 나올 유력한 카드가 정권 심판이 될 것임은 쉽게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야권이 정권 심판을 외치면 여권이 어떻게 대응할지도 고려해서 의제 선정을 전략적으로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약자 야권이 머리를 잘 굴려야 했던 것이죠.
여권과 박근혜 위원장이 준비한 대응책은 현 정권과 적당히 선을 긋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쉽게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박 위원장은 이미 이명박 대통령과 건곤일척의 혈투를 벌였고, 현 정권 기간 중에도 서로 밀당(밀고 당기기)을 했었죠. 박 위원장의 세종시 원안 고수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MB 심판론을 들고 나오면, 박 위원장은 “나는 MB와 다르다!”고 슬쩍 비켜설 여지를 갖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대응까지 고려해서 야권은 의제를 설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야권은 민간인 사찰과 더불어서 방송 3사 파업과 4대강 사업을 더욱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고 봅니다. 특히 4대강 사업은 명분도 뚜렷하고, 여권에 딜레마를 안겨줄 수 있는 쟁점이었습니다.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에 4대강 사업이라면 치를 뜨는 분도 있었죠.
박근혜를 모르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거의 없지만, 한명숙을 모르는 유권자는 많습니다. 바람직하든 아니든 그것이 우리 정치 현실입니다. 야권이 약자라는 또 다른 근거이죠. 그런데 총선 준비, 특히 공천 과정을 살펴보면 강자인 여당이 더 열심히 머리를 굴린 흔적이 여러 곳에서 보입니다.
이번 총선은 여야가 합의하여 완전개방형 예비선거를 시행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여당도 절박해서 그 카드를 만지작거렸죠. 그런데 민주당이 모바일 투표를 고수하여 그 기회를 날렸습니다. 예비선거는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명분을 챙기면서 야권의 흥행몰이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더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완전개방형 예비선거는 본 선거의 4대 원칙(보통, 평등, 직접, 비밀)을 적용하는 것이 적절하므로 모바일 투표를 도입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야권의 통합후보 경선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여론조사 방식의 모바일 투표는 투명성을 보장할 수 없는 근본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약점을 여권에서 잘 활용했죠.
정치적 지역주의는 여전히 우리 선거 행태를 설명하는 주요 잣대입니다. 이번 총선에서 젊고 경력이 짧은 새누리당 손수조 후보가 차기 야당 대권 주자인 문재인 후보와 붙어서 44%를 득표한 것은 정치적 지역주의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적 지역주의는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고질병 같은 것이지만 현실이 그렇습니다. 중장기적으로는 유권자의 선호도 바뀌고 제도 개선도 이뤄져서 약화되겠지만, 단기적 선거 전략을 짤 때는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상수와 같은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정치적 지역주의가 기여한 부분이 있습니다. 부산/경남 지역주의가 영남 지역주의를 일부 깬 것이죠. 이것은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의 영남 득표율을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야권이 다음 대선에서 이기려면 정치적 지역주의에 대한 머리 굴리기를 심각하게 해봐야 할 것입니다.
3. 힘을 제대로 모았는가?
이번 총선에서 민주통합당(민주당)과 통합진보당(진보당)이 단일후보를 내세우기 위해서 합의할 수 있었던 것은 야권으로서는 고무적이었습니다. 결선투표를 적용하지 않는 현 선거제도에서 두 정당이 따로 후보를 내면 여당에 유리한 것은 뻔한 것이죠. 따라서 약자 야당이 힘을 모으려고 노력했고 그 결실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협력의 기본 속성이 선거 연합이지, 정책 연합이 아님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념이나 정강정책으로 대충 나누면 민주당은 중도, 진보당은 진보로 볼 수 있으므로 전반적인 정책 연합을 이뤄낼 토대는 약합니다. 따라서 각 당은 상대방에게 무리한 정책 공조를 요구할 필요가 없고, 선거 연합의 실리 상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 이유는 정치경제학의 중위 투표자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민주당이 오른쪽으로 조금 움직이더라도 선거 연합을 지지하는 유권자가 여당을 찍을 확률은 낮습니다. 그러나 중도에 있는 부동층 유권자가 민주당을 찍을 확률은 상대적으로 올라가죠. 따라서 의회 권력 교체라는 대의명분에 걸맞게 여당 의석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은 이론적으로는 민주당이 왼쪽이 아니라 오히려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진보당으로서도 과도하지만 않다면 민주당의 우 클릭은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진보당의 지지율을 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죠.
이번 총선 과정에서 한미 FTA에 대하여 민주당과 진보당이 삐걱거렸죠. 진보당이 민주당에 더 왼쪽으로 오라고 요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참여정부가 한미 FTA에 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민주당은 한미 FTA 완전폐기를 주장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가 있습니다. 완전폐기가 과연 최선인지 논란거리이기도 하지요. 민주당과 진보당이 이런 정책 문제에서 필요 없는 불협화음을 보이면 중도 유권자의 지지가 줄어들 수 있습니다. 정책은 큰 틀에서 문제가 없다면 제 갈 길을 가는 것이 선거 연합의 힘을 더 올릴 수 있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분단국가입니다. 이 구조적 속성도 매우 중요합니다. 안보 영역에서는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유권자가 다수입니다. 안철수 원장도 안보에서는 보수에 가깝고 경제에서는 진보에 가깝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죠. 그 정도입니다. 따라서 민주당은 안보 영역에서는 특히 왼쪽으로 갈 것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표를 더 얻는 길입니다.
제주 해군기지 논란에서 진보당의 비례대표 후보가 기지 건설 작업을 강행하는 해군 인력을 해적으로 표현했을 때 새누리당이 야권을 싸잡아서 비난하는 호재로 활용했죠. 그 후보를 교체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그 쟁점을 민주적 절차나 환경 문제보다 안보 영역으로 간주하는 유권자들에게는 야권이 너무 왼쪽에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었습니다. 새누리당이 강원도를 석권했고 경기 북부 지역에서 선전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앞으로도 해군 기지 건설 반대가 안보 쟁점으로 주로 비춰지지 않도록 야권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번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과반인 152석을 차지했고, 민주당과 진보당이 140석을 얻었습니다. 집권 세력이 아니고, 언론 환경이 불리하며, 정치적 지역주의가 여전히 기승을 부린 것을 참작하면 야권이 오히려 선전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야권이 6석만 더 얻었다면 여당의 과반을 저지하면서 동률을 이뤘을 것입니다. 간발의 차이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머리 굴리기와 힘 모으기에서 조금만 더 전략적으로 움직였다면 야권이 이겼을 것입니다.
여당의 연말 대선 후보는 거의 결정된 것 같습니다. 야권에서 어떤 머리 굴리기와 힘 모으기를 해서 대선에 임할지 궁금합니다. 특히, 한나라(새누리)당의 정치적 확장에 반대한다고 분명히 말한 안철수 원장이 자신의 “역사적 소명”을 어떻게 펼칠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