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 제 책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 - 대통령도 모르는 자유민주주의 바로 알기》가 출판될 예정입니다. 책 4장 첫 절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인가?>의 밑그림이 되었던 1997년의 한 인터넷 동호회 토론을 소개합니다. 그 절 초고의 일부분이기도 합니다.
(인터넷 동호회, 1997/07/06 ~ 7/17)
[익명 2] 필자가 이야기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지금까지 우리나라 기득권층이 사용한 자유민주주의가 어떻게 다른지 필자가 설명해야 한다. 지금까지 사용된 자유민주주의는 우리의 민주화에 이바지한 바가 없다.
[필자] (며칠 동안 관망하겠다는 뜻이 와전된 측면이 있어서 제 견해를 밝힙니다. “자유민주주의” 논쟁에서 빠져나가겠다는 뜻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 논쟁은 자연히 소멸하겠지요.)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 저 자신이 오해를 받는 소지가 제법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걸었음에도, 자유민주주의에 반하는 요소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제 견해를 이미 밝혔습니다. 그래도 이쪽이냐 저쪽이냐 견책성 질문들을 일부 받았습니다. 대부분 의견이 무엇인가 토의해보겠다는 열의에 가득 차 있어서(물론 오해도 쌍방 있었겠지만), 스스로 신이 나서 그 많은 글을 제가 올렸던가 봅니다. 결국, 제가 올릴 댓글인 (자유민주주의 = 자유주의 + 민주주의)에서 뜻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글을 준비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어떤 글이 올라와서 관련 의견을 던졌고, 저는 표현방식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용자와는 일대일 대응방식 토론은 큰 변화가 있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토론은 쌍방이 합의해야 되고, 어느 한 쪽에서 합당한 이유를 대고 회피할 수도 있어야 됩니다. 저 자신은 새로운 논쟁에 들어가지 않아도 준비하는 글에서 궁금증을 밝혀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견해는 그렇습니다. 저에게 “핵심”을 밝히라고 요구한(혹은 부탁한) 분은 어떤 때는 제 주장의 “핵심”을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어떤 때는 전혀 모르는 식으로 이야기해서 저 자신이 혼란스러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어떤 사용자는 처음부터 잘 모르겠다고 질문한 예도 있습니다.) 제 주장의 “핵심”은 그분들이 추측하는 그것과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제 주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현재 우리나라가 전체주의나 독재국가가 아닌 자유민주주의국가 형태인 것은 분명하나, 자유민주주의 제 원칙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분야가 적지 않다. 하지만, 발전 양상을 볼 때, 앞으로는 상대적으로 더 자유민주주의적 국가가 될 가능성이 크며, 이미 그 징후는 보이고 있다. 따라서 지금 현재는 과도기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이 과도기에는 전체주의적 요소, 봉건적 요소, 전근대적 요소, 전통적 요소, 현대적 요소, 자유민주주의적 요소 등등이 뒤섞여서 나타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적 요소가 점차 우월해질 가능성이 크다. 그 과정에서 사회제도만 자유민주주의화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개인행동도 자유민주주의로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봉건제 국가는 당연히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전체주의 국가로 볼 수도 없습니다. 영국이나 미국과 같이 제법 정비된 자유민주주의 국가도 아닙니다. 그러나 분류를 하자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분류해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에 어긋나는 요소만 부각하면 한이 없습니다. 며칠 전 어떤 미국인을 만났는데, 미국 정치자금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미국 정치가 부패해서 이제 더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고 강변하더군요. 저는 그래도 자유민주주의라고 웃으면서 이야기하면서 잘못된 것은 당연히 고쳐야 한다고 담소했답니다.
상대적으로 더 나은 자유민주주의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성미가 급한 시민은 “이것은 말도 안 된다. 없애버려야 한다. 모두 바꿔버려야 해!”라고 말하는 분도 있고, “중요한 부분부터 개혁해서 바꾸는 것이 좋아.”라고 말하는 분도 있을 것이고, “조그만 곳에서, 가능성이 큰 것부터 시작해서 더욱 큰 부문으로 옮겨가는 방식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시민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세 번째 처지에 서 있습니다. 사회과학 방법론으로서 데카르트가 주장한 뜻과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저는 효율성도 중시하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첫 번째나 두 번째 방법이 틀렸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좋은 방향으로 간다는 보장이 있고, 또 현실성이 높다면 첫 번째가 제일 바람직하겠지요. (중간 생략)
제가 생각하는 자유민주주의 몇몇 측면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상호존중, 개인 이익 중시, 다양성 인정, 상대주의, 정치적 선택에서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는 인식론(절대주의 부정) 등등이었습니다. 이런 측면을 드러내는 이론적 해석을 현실에 결부시켜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또, 가능하면 예도 들려고 합니다. (중간 생략)
먼저, 자유주의는 국가와 개인의 관계만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 관계, 집단과 집단 관계, 집단과 개인 관계, 국가와 국가 관계까지 설정하는 이념입니다. 국가와 국가 관계에 있어서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자유무역이 자유주의 이념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보호무역도 때로는 자유주의 이념에서 나온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저라면 “자유주의가 국가의 권한과 기능에 대한 하나의 견해를 밝힌다. 그 뜻은 국가가 개인 기본권과 자유를 가능한 한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라고 표현하겠습니다. 국가를 필요악으로 보는 자유주의 한 부류가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자유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물론 “자유”입니다. 만약, 어떤 동떨어진 섬에 한 명만 산다면(로빈슨 크루소), 그 사람은 완벽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이 두 명만 되어도 완벽한 자유를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A 의 자유가 B 의 자유와 상충) 따라서 어떤 사회라도 각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자유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그 자유를 보장한다면 전체 구성원이 불안에 떨게 됩니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그런 자유는 제한해야 하고, 사회 구성원이 각자 가진 그 부분의 자유를 일시적으로 (급하면 다시 찾아올 수도 있으므로 “일시적”이라고 표현) “내어 놓는” 혹은 “양도하는” 일종의 “포기 각서”를 쓰게 됩니다. 그것을 누구에게 어떤 내용으로 쓰느냐에 따라서 자유주의 견해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홉스(Thomas Hobbes)는 궁극적으로 국가라는 괴물(리바이어던, Leviathan)에게 양도계약서를 쓰는 것으로, 로크(John Locke)는 양도를 서약하지 않고 자유권 행사의 대리인으로 국가를 지정하는 것으로(위임 계약) 봅니다. 위임이나 양도 대상이 되는 자유를 죽이거나 남을 해치는 등 신변보장에 관한 것에만 국한하자고 주장하면 야경국가론이 됩니다. 만약, 어떤 사회 구성원이 정말 착해서 남을 전혀 해치지 않는다면, 또 외적이 침입해서 그를 해칠 염려가 없다면 야경국가는 필요없는 존재가 되겠습니다. 따라서 국가를 필요악으로 보는 자유주의의 극단적인 부류는(양도나 위임을 매우 억울하게 느끼는 부류) 국가가 없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외적도 있고, 내부에서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그 소중한 자유 일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어서 국가를 필요악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밖에 적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한참 전에... 적다 보니 글이 길어지고 구질구질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도 들고, 또 개인적으로 바빠서 내팽개쳤는데, 다시 읽어 보아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간결하고 구체적으로 적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원색적인 욕은 정말 곤란합니다. 저에게 그런 욕을 퍼부은 익명손님은 스스로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
[토론 소감]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건설적 토론이 될 수 있었는데, 일부 회원의 과도한 표현과 필자에 대한 공격으로 용두사미가 된 격이다. 특히 회원 6 은 소통 방식이 전혀 자유주의적이지 않고, 자신의 뜻을 강요한다든지, 토론 상대방을 압박하는 그릇된 방식을 보여주었다. 필자는 맞대응으로 회원 6 과 토론을 거부하였다. 많은 회원이 회원 6, 회원 7, 그리고 공격에 가담한 다른 토론자를 비판했다. 자유민주주의 개념에 대한 토론이 소통과 관련된 의제로 변한 셈이다. 적절하지 않은 표현 때문에 토론 의제가 변경된 사례로 평가한다. 인터넷에서 언어폭력은 자유주의 정신을 훼손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며, 여러 명이 한 명을 토론 주제와 상관없이 몰아세우는 것도 일종의 폭력이라고 볼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권위주의적 언행이다.
토론 내용에 있어서, 그 당시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한 주요 근거는 진보정당이 없다는 것인데, 그 원인을 집권층에서 찾느냐, 아니면 여러 다양한 요인을 고려해야 하느냐가 관건이다. 필자는 후자 견해였고, 전자를 지지한 토론자들은 과거 권위주의 체제로부터 물려받은 집권층의 행태에 거의 분노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현 시점에서 평가해보면, 필자와 상대방 사이에 토론의 초점이 맞지 않았던 것 같다. 필자는 국가, 시민 집단, 시민 등 모든 상관관계를 포괄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총체적 모습을 제시하려고 했으나, 반대편은 당시 집권층이 과거 권위주의와 별다를 것이 없다는 데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결국, 이 토론은 필자가 후속편을 내놓지 못하여 자연 종결되었으며, 12 년 뒤 발간하는 책이 필자의 답변인 셈이다. 이 토론에서 필자가 예측했던 우리 정치의 진행상은 맞아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공고화는 노무현 정권까지 점진적으로 상당히 이뤄졌다. 문제는 시민 사회의 자유민주주의화가 앞으로 한층 더 발전적으로 전개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어야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을 것으로 필자는 전망한다. //
메이데이 2010/03/03 20:42
답글삭제1997년이면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해네요. 그래도 토론하기엔 정말 힘든 때였죠. 지금은 더 힘들어 보입니다만. 토론도 자꾸 해봐야 될 텐데, 저 자랄 때 생각하면 그 재미 없던 학급 회의 정도가 생각날 뿐 일방적인 지시 전달밖에 없었으니까 저도 토론 문화에 아직도 익숙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안병길 청해 2010/03/04 12:27
97년 여름이니까 김영삼 대통령 임기 말 무렵이었죠.
토론이 어렵기는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