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1/31)
제가 박사학위 최종심사를 받던 날 벌벌 떨면서 논문 발표를 마치자 심사위원들께서 저에게 밖에 나가 있으라고 하시더군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심사해서 당락을 결정하셨습니다. 다행히도 합격 통보를 잠시 뒤 받았습니다. 학과 라운지로 올라갔더니 지도교수님이 샴페인을 준비하셨더군요. 제 미국 사부님은 제자가 박사학위 최종심사를 통과하면 샴페인 한 잔씩을 학과 교수님과 학생들에게 제공하면서 축하해주는 전통을 갖고 계십니다. 샴페인을 잔에 부어주시면서, "Congratulations, Dr. Ahn!" 하시더군요.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우리나라로 돌아가는 저에게 BDM 사부님은 한국 정치/국제정치학계에서도 합리적 선택이론을 더 받아들이면 좋겠다는 희망을 말씀하시면서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저는 감히 낙관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합리적 선택이론이 정치학에서 방법론적으로 유용하다는 확신이 박사과정 공부 중에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정치학계에서는 규범적, 역사적, 記述的 방법론이 대세였습니다. 그 즈음에 경제학의 합리적 행위자 가정을 정치학에 접목시키는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도되면서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정치학계의 큰 지각변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래 허 교수님의 논문에서 언급되는 연구들이 큰 몫을 했죠. 그중에서 로체스터 정치학과를 현재의 모습(합리적 선택이론, 즉 Positive Political Theory를 주종목으로 함)으로 만드신 故 W. H. Riker 교수님의 공헌은 지대했습니다.
요즘은 미국 정치학회지인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미국 정치학계 랭킹 1위 학술지)를 보면 경제학 논문인지, 정치학 논문인지 애매한 논문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치학이 Political Science("과학"에 밑줄^^)이니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변방의 소수파가 중심부의 "정상 과학"이 되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었죠.
이런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첫째, 학문적/방법론적 경쟁력이 있어야 되고, 둘째, 그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연구를 수행하는 학자 군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 두 가지를 함께 보여주신 분이 Riker 교수님입니다. 첫 번째에 대해서는 허 교수님이 논문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에 대해서 Riker 교수님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박사과정 4년 차일 때 하루는 교수님이 제 공부방에 들어오셨습니다.
"싱가폴 대학에서 사람을 찾고 있는데 자네가 응모해볼 생각 없느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연로하신 지존 Riker 교수님이 미천한 제 일자리까지 걱정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걸음걸이가 불편할 정도의 연세가 될 때까지 후학 양성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셨던 것은 물론이고, Job Market에 나가는 학생들의 인터뷰 리허설에 교수님은 반드시 참석하셔서 코멘트를 해주셨습니다. 심지어 돌아가시던 날 병상에서 한 학생의 논문에 대한 구체적인 코멘트를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내용은 좋았다고 전해달라는 말씀을 남기셨다고 합니다. 합리적 선택이론으로 무장한 제자들을 학계에 더 많이 진출시키려는 Riker 교수님의 "합리적 선택"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아, 그렇다고 해서 교수님의 자상한 보살핌을 평가절하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합리적 선택이 benevolent 할 수 있다는 예가 되겠습니다.
(웬 떡이냐면서 싱가폴 대학으로 밀어주십사 부탁을 드렸어야 정상인데, 그때는 싱가폴이 너무나도 먼 이국으로 느껴지더군요.^^)
아래 허 교수님 논문을 읽으면서 만감이 교차하여 두서없이 주저리주저리 해봤습니다. 법학, 경제학, 정치학을 연결하는 허 교수님의 법학 연구가 Riker 교수님이 하셨던 것 같이 빛을 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법학에서 공공선택이론을 활용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꼭 필요한 것인데요...라는 말씀을 드리면서 미력하나마 허 교수님을 응원해봅니다.
p.s. 1. S.M. Amadae and Bruce Bueno de Mesquita, 1999, "THE ROCHESTER SCHOOL: The Origins of Positive Political Theory" Annual Review of Political Science Vol. 2: 269-295는 정치학에서 경제학이, 합리적 선택이론이 어떻게 자리를 잡았는지를 보여주는 글입니다.
p.s. 2. 법학이 사회과학이냐 아니냐의 문제에 대한 단견을 말씀드리자면, 사회과학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또한 법학의 어떤 세부 분야를 고려하느냐에 따라서 그 답은 달라질 것이라는 하나마나? 한 얘기를 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