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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4일 금요일

[정치] "예비 정치인" 정운찬 총리 내정자에 대해서

이 글은 학자나 항간의 좋은 이미지로서 정운찬 내정자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이 대통령의 총리 내정을 받아들인 "예비 정치인"에 대한 제 생각을 적은 것입니다. 저는 정 내정자의 경제원론 강의를 들은 적은 있으나 그와 아무런 직접적인 친분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정치를 계속 관찰하면서 정 내정자 같은 분이 정치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제법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예비 정치인"이란 표현은 제 주관이 강하게 들어간 것인데, 총리가 대표적인 정무직이라서, 또한 지난 대선에서 정 내정자의 민주당 후보 가능성이 제기되어서 그 표현을 썼습니다. 저는 정 내정자가 학문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얼마나 훌륭한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 것을 잣대로 정 내정자의 행보를 평가하지는 않겠습니다.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자로서 정 내정자를 나름대로 바라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 내정자가 정치적 이익만 추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총리직 제안을 받아들인 계기는 복합적이겠죠.

몫(stakes)이 크게 걸렸을 때 인간은 합리적으로 판단할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서 합리적이란 경제학에서 정의하는 그 합리성입니다. 이번 정운찬 내정자의 입각도 저는 인간의 합리적 행위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합리성과 정 내정자의 합리성이 일단 박자가 맞았다고 보는 것이죠.

들은풍월로는 이 대통령은 정치판에서 박근혜 씨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황으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 서로 험악하게 치고받는 사이였죠. 한나라당에 계파는 없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친이계와 친박계가 서로 아옹다옹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죠. 또한, 지금부터 1년 정도만 지나면 레임덕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레임덕을 최소화하려면 대권 후보를 두고 복수의 승부사가 용호상박 하는 모양새가 현직 대통령에게는 유리합니다. 한 명이 독주하면 사람들이 그쪽으로 쏠리고 레임덕은 그만큼 일찍 찾아오게 되죠. 제가 보기에 이 대통령이 정 내정자를 그런 상황에 끌어들이려는 고려도 했던 것 같습니다. 정 내정자에게 총리라는 날개를 달아주면 자연히 그쪽으로 사태가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정 내정자는 명망 있는 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정치 경력이 없어서 상대적으로 깨끗한 이미지를 갖고 있고, 지역도 중립이라고 볼 수 있죠. 따라서 정운찬 카드는 이 대통령에게는 호재 중의 호재입니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면 서로 핀트가 잘 맞지 않는 지난 언행이 있겠습니다. 이 대통령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저는 봅니다.

한쪽만 노력한다고 해서 거사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죠. 어떤 예비 정치인이 권력 근처에 갈 가능성을 보았다면, 권력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접기까지 기회를 노리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강금실 전 장관의 예를 보시죠. 강 전 장관은 제가 보기에는 정치와 어울리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서울 시장에 출마했죠. 그만큼 권력은 매력적입니다. 돈이 매력적인 것과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이런저런 수사가 난무하지만, 정치에서는 권력을 차지하는 단계적 목표를 세울 수도 있습니다. 권력이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바를 펼치기가 더 수월하니까요.

정운찬 내정자가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대선후보 타진을 받았지만, 그 길로 가지 않은 것도 합리적 판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몫이 크더라도 확률이 매우 낮으면 아무 소용이 없죠. 이번에 총리직을 수락한 것은 정치적 합리성이라는 측면에서 시의적절했다고 저는 평가합니다. 초대 총리가 약 1년 반을 재임했습니다. 지금부터 1년 반이 지나면 제18대 대선 국면에 본격적으로 들어갑니다. 박근혜 씨의 대항마가 이 대통령으로서 필요한데, 친이계의 면면을 살펴보면 상대가 될 만한 인사가 보이지 않았겠죠. 다크호스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런 정황을 참조하면 정 내정자가 이 대통령의 지원을 받을 최적 시기에 총리직 제안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대통령과 정 내정자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떨어진 행보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것에 대한 선악 잣대 갖다대기는 하지 않습니다. 정치는 상대주의 세계라서 선악 잣대보다는 좋고 싫음의 잣대가 더 중요하게 작동하는 사례가 많으며, 이번 경우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 협력관계의 결과를 섣불리 예단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역사가 단선으로 흐른다고 믿으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너무 불쌍하니까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저는 그 협력관계가 저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가면 좋겠습니다. 저는 박근혜 씨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독재자의 딸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유신 독재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정치인이라서 그렇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특정 정치적 행위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충 넘어가는 문화가 있지만, 앞으로 그 문화가 바뀌면 좋겠습니다. 수평적 정권교체가 다시 일어나면 더 좋겠지만, 박근혜 씨가 아닌 정운찬 내정자가 한나라당의 차기 대선후보가 되는 것도 저에게는 좋은 것입니다. 정 내정자가 처신을 잘해서 적어도 박근혜 씨를 한나라당 대선후보에서 밀어내면 좋겠습니다.

정 내정자에게는 앞으로 좋은 참모가 필요합니다. 제자 중에서 실력 있고 현실 감각이 뛰어난 인재들을 자주 만나서 훌륭한 아이디어와 전략을 많이 얻기를 바랍니다. 언론 인터뷰에서 4대 강 사업을 긍정적으로 언급한 것과 이 대통령과 경제를 보는 시각이 비슷하다고 설명한 것은 초기 립서비스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서 너무 구체적으로 들어간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겠습니다. 총리라는 지위와 차기 대권도전 가능성을 고려하면 이 대통령과 불가근불가원에 유사한 포지션을 잡는 것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정 내정자에게도 득이 되고, 저에게도 득이 되고, 우리나라에도 득이 되는 좋은 사례를 기대합니다. 매우 어려운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희망을 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