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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8일 목요일

[수필]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안병길 편 (2)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에서 이벤트가 진행 중입니다. 이 선생님께서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라는 회고 시리즈를 마치신 기념으로 한 회원이 제안한 이벤트인데, 경품으로 제 책을 협찬할 예정입니다. 저는 참가 자격이 되지 않지만, 이벤트를 응원하는 뜻에서 추억담을 적었습니다.)

<번외>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안병길 편 (2)

대학교 1학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일전에 말씀 드렸던 지리산 종주 도전이었습니다. 경제학과 80학번인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김영산 교수와 친구 한 명과 함께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종주를 해보겠다고 배낭을 짊어지고 구례 화엄사로 갔습니다. 라면을 끓여 먹고 화엄사에서 출발한 것이 큰 착각이었습니다.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만만하게 봤는데, 그것이 아니더군요. ㅜ.ㅜ 계속 오르막이라서 깔딱고개와 코재를 넘어 노고단에 도착했을 때 세 명 모두 체력이 바닥이 났습니다. 그래서 대충 텐트를 치고 저녁도 간이식으로 겨우 해결한 다음 뻗었는데… 밤에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텐트 안으로 물이 들어와 도저히 산행을 계속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눈물을 머금고 화엄사로 하산했습니다. 억울했죠. 돈도 남았습니다. 방향을 바꿔서 바다로 가기로 했습니다. 충무로 가서 비진도에서 며칠 놀았는데, 비진도에서도 비를 흠뻑 맞았습니다. ㅜ.ㅜ 지리산은 그 다음 해에 김 교수와 아주대 에너지학과 김수덕 교수와 함께 역종주(천왕봉 => 노고단)를 하여 제대로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세 명이 쿵짝이 잘 맞아서 역종주를 마친 다음 더 놀았습니다. ㅋ

홍도로 가자! 목포에 도착하니 밤이더군요. 저는 목포가 제법 큰 도시라서 도심지는 번화할 줄 알았는데, 1981년 목포는 전혀 아니더군요. 도심의 한 여인숙에 들어가서 자려고 방을 보니, 돈을 내고 잘 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텐트를 치기로 했습니다. ㅋ

어둠을 뚫고 목포 해양대학교 앞의 야산으로 올라가서 텐트를 치려고 보니… 공동묘지였습니다. ㅜ.ㅜ 야심한 시간이라서 어떻게 할 수도 없었죠. 소주 한 잔을 올리고, 텐트를 쳤습니다. 많이 으스스하더군요. 김수덕 군이 귀신 나온다고 분위기도 잡아서 더 쫄았습니다. 다행히 귀신님들이 저희 수면을 방해하지 않았고, 그 다음 날 홍도로 가서 며칠 잘 놀다 집으로 돌아 갔습니다.

세 명이 쿵짝이 잘 맞아서 그 다음 해에 함께 한라산에 올랐고, 한양대 김 교수와는 4학년 때 설악산도 함께 올랐습니다. 최근에 두 김 교수를 만나니 그때가 좋았다고 하더군요. 저도 동감입니다. ^^

메이데이님이 제 어릴 때 이야기도 궁금하다고 하셔서 조금 해보겠습니다. 김영산 교수가 제 중학교 동창입니다. 부산진 역 앞에 있었던 동아중학교를 같이 다녔습니다. 중학교에 올라와서 첫 시험을 쳤는데 제가 운 좋게도 공동 전교 1등을 했습니다. 겸손이 아니고, 운이 좋았던 것은 확실합니다. 셋째 형이 사회 참고서를 한 권 사줬는데, 사회 문제가 모두 그 참고서 연습문제를 그대로 옮겨서 출제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일도 있더군요.

이 선생님께서도 공부에서 계기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는데, 제 경험에 비춰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서 전교 1등을 하니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그 다음부터는 전교 1등 성적표를 자주 받았습니다. 집과 학교에서 귀여움을 많이 받았죠. 공부 잘한다고 교생 선생님이 제 이름을 새긴 멋진 만년필을 선물해줬던 기억이 납니다. (교생 선생님, 이 글 보시면 연락해주세요. 제가 다음에 귀국하면 찾아 뵙고 인사 드릴게요. ㅋ)

저는 수재형은 아니었습니다. 한양대 김 교수가 수재형이었습니다. 슬슬 놀면서 공부해도 전교 1등을 한 번씩 했습니다. ^^ 중학교 2학년 때까지 1등을 유지했는데, 3학년에 올라와서 제가 조금 난조에 빠지고, 다크호스도 등장하여 3학년은 2등으로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추첨을 하니 동성고등학교에 배정되더군요. 울 뻔했습니다. 큰형과 작은형은 경남고, 셋째 형은 부산고, 그러면 저는 부산고로 가면 균형이 잡힌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서 속상했죠. 어릴 때 마음이 그랬습니다. 평준화가 되었다 해도 이전 명문고에 가고 싶었던 것은 인지상정이었으니까요.

고등학교에서도 범생이로 착실하게 살면서 서울대만 바라봤죠. 3학년 때 약간 주춤했지만 수석으로 졸업하기는 했습니다. 이 선생님께서 하신 수석과는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인정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생일 때는 몸이 조금 약해서 열공하는 친구들에 비해서 공부하는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대신 방학 때를 포함해서 꾸준히 공부했습니다. 공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항상 있어서 방에 불을 켜놓고 잘 때가 잦았죠. 뒷집 여학생이 하루는 제가 잘 때까지 공부해보겠다고 결심하고 제 방을 살폈는데, 결국 조명등이 꺼지지 않아서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더군요. 저는 불 켜놓고 쿨쿨 자고 있었는데 말이죠. ㅎ

초등학교는 두 군데를 다녔습니다. 2학년 때 이사를 해서 바닷가 학교로 옮겼죠. 제 기억에 1, 2학년 때까지는 여학생 친구를 좋아한다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했던 것 같습니다. (당연한가요? ㅋ) 제가 주동하여 친구들과 여학생 집에 쳐들어 갔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담임 선생님께서 남학생은 여학생과, 여학생은 남학생과 짝을 하고 싶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하신 사건이 큰 변화를 불러 왔습니다. 눈을 감고 손을 들라고 했으면, 눈을 감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저만 끝까지 눈을 감았고, 저만 손을 들었더군요. 그리고 모두 저를 비웃는 것이었습니다. “아! 좋아도 좋다고 표현하면 안 되는구나!” 이런 바람직하지 않은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초딩, 중딩, 고딩의 무미건조한 범생이 인생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ㅜ.ㅜ 그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은 책임져야 합니다. ㅋ

음…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이 선생님께 폐가 되지 않도록 이 정도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시 궁금한 점을 물어보시면 댓글로 답할게요.

여러분,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이벤트에 많이 많이 참가해주세요~

2009년 10월 1일 목요일

[단상] 지리산 노고단에 대한 추억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9/05/06, 사진: 노고단 도로, http://www.youth.co.kr/road/images/road007.jpg)

제가 지리산 노고단에 두 번 올랐었습니다. 처음은 학부 2학년 여름방학에 친구 두 명과 함께 구례 화엄사를 거쳐서 올라갔는데 무척 힘들더군요. 등산 코스 자체는 그렇게 길지 않아서 소박한 마음으로 간단하게 라면을 끓여 먹고 도전했는데, 큰 착각이었습니다. 라면 정도로는 충분한 에너지를 낼 수 없어서 거의 계속 올라가는 오르막을 거쳐 노고단에 도착했을 때는 세 명 모두 기진맥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밤에 비까지 내려서 원래 계획했던 종주를 포기하고 산에서 내려와서 홍도로 향했던 가슴 아픈 기억이 첫 번째 노고단 등정이었습니다.

그다음 해에 지리산 종주를 다시 도전하려고 했는데 노고단 등정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잔꾀"를 부려서 역종주를 선택했습니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을 먼저 오르고 노고단 방향으로 가는 것을 지리산 역종주라고 하죠. 천왕봉이 노고단보다 훨씬 높지만, 등산 코스 시작 지점이 더 높은 곳에 있어서 더 쉬웠습니다. 일단 천왕봉에 오르니 그다음부터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수려한 능선길을 따라서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며칠 동안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라면이 아니라 밥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천왕봉 등정에 나섰던 것은 물론입니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지리산 능선길을 즐기고 나서 제가 느낀 것은 노고단 지역이 그 중 개발이 가장 많이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유명세를 탔던 노고단은 옛날 선교사들이 휴양시설을 짓기도 했고 군사시설도 있어서 개발의 흔적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숨을 깔딱거리면서 깔딱고개를 지나면 마주치게 되는 자동차 도로를 보면 허탈해지기도 하죠.

그 노고단 지역을 이 대통령이 대선 후보시절에 답사하고 "아직 개발이 덜 됐어."라는 말을 남겼다는 기사를 읽고 왠지 스스로 밝힌 녹색 환경운동가라는 꿈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모르죠. 2 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에 환경을 열심히 공부해서 생각을 많이 바꿨을 수도 있겠죠.

4대 강 사업을 하면 콘크리트벽들이 많이 생길 텐데 그 회색을 녹색으로 어떻게 바꿀지도 걱정입니다. 혹시 녹색 페인트를 칠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겠죠? ㅋ 농담입니다.

2009년 8월 7일 금요일

[수필] 농촌 활동의 추억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08/07/22)

학부 3학년 때 뒤늦게 농촌 활동을 갔었습니다. 저희 때는 보통 학부 1, 2학년 때 주로 농촌 활동을 갔었는데 저는 3학년이 되어서야 참여했습니다. 정치학과와 외교학과가 합동으로 약 20명의 인원이 전라남도 구례군 신촌에 갔는데, 계단식 논과 밭, 그리고 산자락에 있는 밤나무 밭이 그곳 농민들의 생업 무대였습니다. 지리산이 멀리 보이는 조용하면서도 개발이 잘되지 않은 외진 마을이었습니다.

80년대 초반 그 당시 농활은 농촌의 모자란 일손 돕기, 현실 공부, 그리고 소위 농민 계몽활동 측면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양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지에서 금방 알 수 있었던 것은 농민들을 계몽할 것은 별로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학생들이 농민들로부터 농업과 관련된 여러 정책적 쟁점들을 배워야 할 정도였습니다.

저는 현실 공부는 별 관심이 없었고, 맨몸으로 노력 봉사하는 데 주안점을 뒀습니다. 낮에는 논과 밤나무 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준비해간 자료들을 읽고 토론했는데, 저는 낮에 너무 "열심히" 일해서 밤 공부 시간에는 꾸벅꾸벅 조는 식이었죠. 가뭄이라서 논에 물을 대지 못해 모내기를 한여름까지 못 하고 있었는데, 저희가 갔을 때 더 미룰 수 없어서 양수기로 냇가의 물을 여러 번 퍼올린 다음 모내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가을에 밤이 떨어지면 수확하기 쉽게 밤나무 밑의 잡초를 베는 일에 많이 동원되었는데, 제가 낫질 시범조교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왠지 낫으로 키 큰 잡초들을 팍팍 베어나가는 것이 재미있더군요. 종일 일해서 조그만 언덕 고지를 점령하고 나면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에 기분이 뿌듯했습니다.

농활이 끝날 무렵에 주민들께서 막걸리 잔치를 열어 주셨는데, 몇몇 후배들은 피곤한 몸에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어른들 앞에서 그냥 드러눕더군요. 제가 고학년이라서 폼 잡고 그런 후배들의 군기를 잡았던 쑥스런 기억도 납니다. 제가 워낙 엄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동네 어른들은 나이 차가 많이 났음에도, 서울 학생들에게 깍듯이 대해 주셨습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술을 주실 때, 일단 술잔에 술을 채운 다음 두 손으로 공손히 상대방에게 건네는 예법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방식이 예법에 더 맞는 것 같더군요. (술잔을 상대방에게 먼저 주고 술을 따르는 것과 비교해 보시길...)

동네 어르신들의 일하시면서 주고받는 고차원의 해학 등 농촌활동의 여러 모습이 젊은 날의 좋은 추억으로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K 본부의 3일 농활 취재를 보고 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사진: 경남 창원시 대산면 벌판. 아버님 고향입니다. 2004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