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에서 이벤트가 진행 중입니다. 이 선생님께서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라는 회고 시리즈를 마치신 기념으로 한 회원이 제안한 이벤트인데, 경품으로 제 책을 협찬할 예정입니다. 저는 참가 자격이 되지 않지만, 이벤트를 응원하는 뜻에서 추억담을 적었습니다.)
<번외>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안병길 편 (2)
대학교 1학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일전에 말씀 드렸던
지리산 종주 도전이었습니다. 경제학과 80학번인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김영산 교수와 친구 한 명과 함께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종주를 해보겠다고 배낭을 짊어지고 구례 화엄사로 갔습니다. 라면을 끓여 먹고 화엄사에서 출발한 것이 큰 착각이었습니다.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만만하게 봤는데, 그것이 아니더군요. ㅜ.ㅜ 계속 오르막이라서 깔딱고개와 코재를 넘어 노고단에 도착했을 때 세 명 모두 체력이 바닥이 났습니다. 그래서 대충 텐트를 치고 저녁도 간이식으로 겨우 해결한 다음 뻗었는데… 밤에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텐트 안으로 물이 들어와 도저히 산행을 계속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눈물을 머금고 화엄사로 하산했습니다. 억울했죠. 돈도 남았습니다. 방향을 바꿔서 바다로 가기로 했습니다. 충무로 가서 비진도에서 며칠 놀았는데, 비진도에서도 비를 흠뻑 맞았습니다. ㅜ.ㅜ 지리산은 그 다음 해에 김 교수와 아주대 에너지학과 김수덕 교수와 함께 역종주(천왕봉 => 노고단)를 하여 제대로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세 명이 쿵짝이 잘 맞아서 역종주를 마친 다음 더 놀았습니다. ㅋ
홍도로 가자!
목포에 도착하니 밤이더군요. 저는 목포가 제법 큰 도시라서 도심지는 번화할 줄 알았는데, 1981년 목포는 전혀 아니더군요. 도심의 한 여인숙에 들어가서 자려고 방을 보니, 돈을 내고 잘 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텐트를 치기로 했습니다. ㅋ
어둠을 뚫고 목포 해양대학교 앞의 야산으로 올라가서 텐트를 치려고 보니… 공동묘지였습니다. ㅜ.ㅜ 야심한 시간이라서 어떻게 할 수도 없었죠. 소주 한 잔을 올리고, 텐트를 쳤습니다. 많이 으스스하더군요. 김수덕 군이 귀신 나온다고 분위기도 잡아서 더 쫄았습니다. 다행히 귀신님들이 저희 수면을 방해하지 않았고, 그 다음 날
홍도로 가서 며칠 잘 놀다 집으로 돌아 갔습니다.
세 명이 쿵짝이 잘 맞아서 그 다음 해에 함께 한라산에 올랐고, 한양대 김 교수와는 4학년 때 설악산도 함께 올랐습니다. 최근에 두 김 교수를 만나니 그때가 좋았다고 하더군요. 저도 동감입니다. ^^
메이데이님이 제 어릴 때 이야기도 궁금하다고 하셔서 조금 해보겠습니다. 김영산 교수가 제 중학교 동창입니다. 부산진 역 앞에 있었던
동아중학교를 같이 다녔습니다. 중학교에 올라와서 첫 시험을 쳤는데 제가 운 좋게도 공동 전교 1등을 했습니다. 겸손이 아니고, 운이 좋았던 것은 확실합니다. 셋째 형이 사회 참고서를 한 권 사줬는데, 사회 문제가 모두 그 참고서 연습문제를 그대로 옮겨서 출제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일도 있더군요.
이 선생님께서도 공부에서 계기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는데, 제 경험에 비춰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서 전교 1등을 하니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그 다음부터는 전교 1등 성적표를 자주 받았습니다. 집과 학교에서 귀여움을 많이 받았죠. 공부 잘한다고 교생 선생님이 제 이름을 새긴 멋진 만년필을 선물해줬던 기억이 납니다. (교생 선생님, 이 글 보시면 연락해주세요. 제가 다음에 귀국하면 찾아 뵙고 인사 드릴게요. ㅋ)
저는 수재형은 아니었습니다. 한양대 김 교수가 수재형이었습니다. 슬슬 놀면서 공부해도 전교 1등을 한 번씩 했습니다. ^^ 중학교 2학년 때까지 1등을 유지했는데, 3학년에 올라와서 제가 조금 난조에 빠지고, 다크호스도 등장하여 3학년은 2등으로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추첨을 하니
동성고등학교에 배정되더군요. 울 뻔했습니다. 큰형과 작은형은 경남고, 셋째 형은 부산고, 그러면 저는 부산고로 가면 균형이 잡힌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서 속상했죠. 어릴 때 마음이 그랬습니다. 평준화가 되었다 해도 이전 명문고에 가고 싶었던 것은 인지상정이었으니까요.
고등학교에서도 범생이로 착실하게 살면서 서울대만 바라봤죠. 3학년 때 약간 주춤했지만 수석으로 졸업하기는 했습니다. 이 선생님께서 하신 수석과는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인정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생일 때는 몸이 조금 약해서 열공하는 친구들에 비해서 공부하는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대신 방학 때를 포함해서 꾸준히 공부했습니다. 공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항상 있어서 방에 불을 켜놓고 잘 때가 잦았죠. 뒷집 여학생이 하루는 제가 잘 때까지 공부해보겠다고 결심하고 제 방을 살폈는데, 결국 조명등이 꺼지지 않아서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더군요. 저는 불 켜놓고 쿨쿨 자고 있었는데 말이죠. ㅎ
초등학교는 두 군데를 다녔습니다. 2학년 때 이사를 해서 바닷가 학교로 옮겼죠. 제 기억에 1, 2학년 때까지는 여학생 친구를 좋아한다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했던 것 같습니다. (당연한가요? ㅋ) 제가 주동하여 친구들과 여학생 집에 쳐들어 갔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담임 선생님께서 남학생은 여학생과, 여학생은 남학생과 짝을 하고 싶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하신 사건이 큰 변화를 불러 왔습니다. 눈을 감고 손을 들라고 했으면, 눈을 감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저만 끝까지 눈을 감았고, 저만 손을 들었더군요. 그리고 모두 저를 비웃는 것이었습니다. “아! 좋아도 좋다고 표현하면 안 되는구나!” 이런 바람직하지 않은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초딩, 중딩, 고딩의 무미건조한 범생이 인생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ㅜ.ㅜ 그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은 책임져야 합니다. ㅋ
음…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이 선생님께 폐가 되지 않도록 이 정도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시 궁금한 점을 물어보시면 댓글로 답할게요.
여러분,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이벤트에 많이 많이 참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