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Notice) | 방 명 록 (GuestBoard)

2010년 4월 29일 목요일

[여행기] 새 짖는 소리에 잠을 깨다

(사진을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아이슬란드 화산이 폭발해서 유럽의 주요 공항이 마비되었었죠. 제 출장 일정표에는 4월 19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하여 다음 날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거쳐서 에센 지역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예약한 비행기가 예정대로 출발하는 것을 당일 아침에 확인하고 공항에 갔습니다. 걱정은 조금 되었지만, 항공사가 잘 판단했을 것으로 믿고 독일로 향했습니다.

출발이 1시간 반 정도 지연되어서 도착이 늦어졌고, 미리 예약한 기차 편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기차표를 바꾸기 위해서 줄을 섰는데요... 안내를 정말 침착하게 하더군요. ㅜ.ㅜ 제 앞에 서 있었던 고객 그룹은 약 7~8개, 담당 안내원은 3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안내원 앞에 설 때까지 걸린 시간은 약 45분이었습니다.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저로서는 정말 갑갑하더군요. 제가 기가 차서 가끔 빙긋이 웃으니 앞에 서 있던 독일인이 저에게 말을 걸더군요. 자신이 봐도 너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살아봐서 제 심정을 더 잘 알겠다고 하더군요. ^^


다행히 추가 요금을 내지 않고 다음 기차를 탈 수 있었습니다. ICE가 독일 고속열차입니다. 우리 KTX와 거의 같더군요. 좌석은 ICE가 조금 더 넓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Duisburg까지 ICE로 약 1시간 45분이 걸리는데, 출발은 정시에 했지만 10분 연착하더군요.


그래서 호텔이 있는 Mülheim까지 갈 기차에 겨우 탔는데...  출발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참 있으니 안내방송이 나오고 승객들이 우루루 내리더군요. 독일어를 모르는 제가 어리둥절하고 있으니, 어떤 청년이 저에게 영어로 설명하더군요. 환자가 생겨서 치료하고 있는 중이어서 그 열차가 운행하지 못한다는 친절한 안내였습니다. 바로 옆 플랫폼에서 다음 열차를 타고 Mülheim에 도착했습니다. 같은 역에 있는 전기차로 다시 갈아타기 전에 근처를 구경했습니다. 독일 택시는 모두 벤즈더군요. ^^


고즈넉한 전기차를 타고 종착역에 도착하여 호텔로 걸어서 들어갔습니다. Duisburg 역에서 택시를 타지 않고, 두 번이나 환승하면서 호텔을 찾아간 것은 ICE 요금만 내면 행선지까지 기차를 무료로 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독일 풍경도 더 구경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화산재?'를 뚫고 도착한 호텔은 조용한 시골 장원 느낌을 주었습니다. 독일에 사는 분이 예약했는데, 우연히 제 취향에 딱 맞더군요. 호텔 안에 제법 긴 산책로가 있었고, 새들이 많았습니다. 아침에 새 짖는 소리에 잠을 깨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도착한 날 저녁에 먹은 피자와 독일 맥주가 맛있었고, 다음 날 아침에 먹은 뷔페도 훌륭했습니다. 즐거운 기분으로 독일 출장을 시작했습니다.


독일에서 찍은 사진을 네이버 블로그에 올리고 있습니다.

2010년 4월 8일 목요일

[수필]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안병길 편 (2)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에서 이벤트가 진행 중입니다. 이 선생님께서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라는 회고 시리즈를 마치신 기념으로 한 회원이 제안한 이벤트인데, 경품으로 제 책을 협찬할 예정입니다. 저는 참가 자격이 되지 않지만, 이벤트를 응원하는 뜻에서 추억담을 적었습니다.)

<번외>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안병길 편 (2)

대학교 1학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일전에 말씀 드렸던 지리산 종주 도전이었습니다. 경제학과 80학번인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김영산 교수와 친구 한 명과 함께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종주를 해보겠다고 배낭을 짊어지고 구례 화엄사로 갔습니다. 라면을 끓여 먹고 화엄사에서 출발한 것이 큰 착각이었습니다.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만만하게 봤는데, 그것이 아니더군요. ㅜ.ㅜ 계속 오르막이라서 깔딱고개와 코재를 넘어 노고단에 도착했을 때 세 명 모두 체력이 바닥이 났습니다. 그래서 대충 텐트를 치고 저녁도 간이식으로 겨우 해결한 다음 뻗었는데… 밤에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텐트 안으로 물이 들어와 도저히 산행을 계속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눈물을 머금고 화엄사로 하산했습니다. 억울했죠. 돈도 남았습니다. 방향을 바꿔서 바다로 가기로 했습니다. 충무로 가서 비진도에서 며칠 놀았는데, 비진도에서도 비를 흠뻑 맞았습니다. ㅜ.ㅜ 지리산은 그 다음 해에 김 교수와 아주대 에너지학과 김수덕 교수와 함께 역종주(천왕봉 => 노고단)를 하여 제대로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세 명이 쿵짝이 잘 맞아서 역종주를 마친 다음 더 놀았습니다. ㅋ

홍도로 가자! 목포에 도착하니 밤이더군요. 저는 목포가 제법 큰 도시라서 도심지는 번화할 줄 알았는데, 1981년 목포는 전혀 아니더군요. 도심의 한 여인숙에 들어가서 자려고 방을 보니, 돈을 내고 잘 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텐트를 치기로 했습니다. ㅋ

어둠을 뚫고 목포 해양대학교 앞의 야산으로 올라가서 텐트를 치려고 보니… 공동묘지였습니다. ㅜ.ㅜ 야심한 시간이라서 어떻게 할 수도 없었죠. 소주 한 잔을 올리고, 텐트를 쳤습니다. 많이 으스스하더군요. 김수덕 군이 귀신 나온다고 분위기도 잡아서 더 쫄았습니다. 다행히 귀신님들이 저희 수면을 방해하지 않았고, 그 다음 날 홍도로 가서 며칠 잘 놀다 집으로 돌아 갔습니다.

세 명이 쿵짝이 잘 맞아서 그 다음 해에 함께 한라산에 올랐고, 한양대 김 교수와는 4학년 때 설악산도 함께 올랐습니다. 최근에 두 김 교수를 만나니 그때가 좋았다고 하더군요. 저도 동감입니다. ^^

메이데이님이 제 어릴 때 이야기도 궁금하다고 하셔서 조금 해보겠습니다. 김영산 교수가 제 중학교 동창입니다. 부산진 역 앞에 있었던 동아중학교를 같이 다녔습니다. 중학교에 올라와서 첫 시험을 쳤는데 제가 운 좋게도 공동 전교 1등을 했습니다. 겸손이 아니고, 운이 좋았던 것은 확실합니다. 셋째 형이 사회 참고서를 한 권 사줬는데, 사회 문제가 모두 그 참고서 연습문제를 그대로 옮겨서 출제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일도 있더군요.

이 선생님께서도 공부에서 계기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는데, 제 경험에 비춰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서 전교 1등을 하니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그 다음부터는 전교 1등 성적표를 자주 받았습니다. 집과 학교에서 귀여움을 많이 받았죠. 공부 잘한다고 교생 선생님이 제 이름을 새긴 멋진 만년필을 선물해줬던 기억이 납니다. (교생 선생님, 이 글 보시면 연락해주세요. 제가 다음에 귀국하면 찾아 뵙고 인사 드릴게요. ㅋ)

저는 수재형은 아니었습니다. 한양대 김 교수가 수재형이었습니다. 슬슬 놀면서 공부해도 전교 1등을 한 번씩 했습니다. ^^ 중학교 2학년 때까지 1등을 유지했는데, 3학년에 올라와서 제가 조금 난조에 빠지고, 다크호스도 등장하여 3학년은 2등으로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추첨을 하니 동성고등학교에 배정되더군요. 울 뻔했습니다. 큰형과 작은형은 경남고, 셋째 형은 부산고, 그러면 저는 부산고로 가면 균형이 잡힌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서 속상했죠. 어릴 때 마음이 그랬습니다. 평준화가 되었다 해도 이전 명문고에 가고 싶었던 것은 인지상정이었으니까요.

고등학교에서도 범생이로 착실하게 살면서 서울대만 바라봤죠. 3학년 때 약간 주춤했지만 수석으로 졸업하기는 했습니다. 이 선생님께서 하신 수석과는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인정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생일 때는 몸이 조금 약해서 열공하는 친구들에 비해서 공부하는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대신 방학 때를 포함해서 꾸준히 공부했습니다. 공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항상 있어서 방에 불을 켜놓고 잘 때가 잦았죠. 뒷집 여학생이 하루는 제가 잘 때까지 공부해보겠다고 결심하고 제 방을 살폈는데, 결국 조명등이 꺼지지 않아서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더군요. 저는 불 켜놓고 쿨쿨 자고 있었는데 말이죠. ㅎ

초등학교는 두 군데를 다녔습니다. 2학년 때 이사를 해서 바닷가 학교로 옮겼죠. 제 기억에 1, 2학년 때까지는 여학생 친구를 좋아한다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했던 것 같습니다. (당연한가요? ㅋ) 제가 주동하여 친구들과 여학생 집에 쳐들어 갔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담임 선생님께서 남학생은 여학생과, 여학생은 남학생과 짝을 하고 싶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하신 사건이 큰 변화를 불러 왔습니다. 눈을 감고 손을 들라고 했으면, 눈을 감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저만 끝까지 눈을 감았고, 저만 손을 들었더군요. 그리고 모두 저를 비웃는 것이었습니다. “아! 좋아도 좋다고 표현하면 안 되는구나!” 이런 바람직하지 않은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초딩, 중딩, 고딩의 무미건조한 범생이 인생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ㅜ.ㅜ 그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은 책임져야 합니다. ㅋ

음…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이 선생님께 폐가 되지 않도록 이 정도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시 궁금한 점을 물어보시면 댓글로 답할게요.

여러분,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이벤트에 많이 많이 참가해주세요~

2010년 4월 7일 수요일

[수필]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안병길 편 (1)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에서 이벤트가 진행 중입니다. 이 선생님께서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라는 회고 시리즈를 마치신 기념으로 한 회원이 제안한 이벤트인데, 경품으로 제 책을 협찬할 예정입니다. 저는 참가 자격이 되지 않지만, 이벤트를 응원하는 뜻에서 추억담을 적었습니다.)

<번외>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안병길 편

이 선생님 게시판 이벤트에 제가 참여하지 않으면 왠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 같은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 것 같아서 이렇게 졸고를 제출합니다. 이 선생님의 화려한 회고록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먼지 같은 기억이지만 어여삐 여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어릴 때 복숭아 나무 과수원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유치원 때인지 국민학교 1학년 때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느 날 스케치북을 들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복숭아 밭에 갔던 기억이 아직 납니다. 어머니께서는 예쁜 한복을 입으신 채 점심 도시락을 차리셨고, 아버지는 열심히 복숭아 밭을 메셨습니다. 저는 옆에서 복숭아 나무를 그렸죠.

아버지는 벼농사가 주업인 어느 가난한 농촌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 형제가 셋이었는데 큰할아버지는 그 마을의 유지로서 훈장까지 하셨지만, 막내이셨던 할아버지는 어릴 때 서당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시골 농부로 일생을 사셨죠. 어릴 때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서 후회가 되셨는지, 그 농촌 시골 출신인 아버지를 도회지에 유학 보내셨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이야기이죠.

그 당시 가장 선망하는 학교는 사범학교였다고 합니다. 대구 사범에 응시했지만, 낙방하고 방향을 틀어서 한강 이남 상업학교로서는 가장 좋았다는 부산 상업학교로 진학하셨답니다. 대구 사범에 합격했다면, 박정희 씨의 후배가 되셨겠죠. ㅋ 장남만 아니라면 군인이 되고 싶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랬다면 별 하나 정도는 거뜬히 되었을 것이라고, 별로 농담을 즐기지 않으시는 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6남매 장남이신 아버지는 9남매 장녀이신 어머니와 일찍 결혼하셨고, 부산 상업학교를 졸업하신 다음 손아래 형제들의 뒷바라지를 위해서 바로 은행에 취직하셨습니다. 이후 저희 집을 거쳐 간 친인척이 10여 명 된다고 하시더군요. 아버지는 돈을 버시고, 어머니는 반 무료 하숙을 치는 식이었던 모양입니다. 어릴 때 제 기억에도 거의 항상 친척 한두 명은 우리 형제와 함께 지냈습니다. 요즘 세태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모습이죠.

제 책 감사의 말씀에 아버지 이야기를 가장 길게 적었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자유민주주의자이셨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든지 권위주의적으로 자식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을 내릴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자식 교육에 무관심해서 귀찮아서 그러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원래 스타일이 잔소리하는 것을 싫어하셨던 것 같습니다.

1981년 학부 2학년 때 저는 외교학과로 진학했죠. 학부 4학년이 되어서 유학을 준비할 때 하루는 아버지께서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시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길이는 법대로 갔어도 잘했을 텐데….”

이런… 아버지는 제가 법대로 진학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좀 일찍 말씀하셨어야지요… ^^ 그런데 중고등학교 때 신나게 성적을 받아오던 저에게 한 번도 법대 진학을 권하지 않으셨습니다. 신기한 일이죠. 형들과 의논해서 알아서 결정하라는, 대학에 가보지 않은 당신보다는 대학 경험이 있는 형들 자문을 더 존중해주신 것이었습니다.

“내가 대학에 대해서 뭐 아는 게 있나.”

이런 식이었습니다. 개발 독재 시대를 사시면서도 독재나 권위주의와는 전혀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이셨죠.

대입 준비 때문에 암울한 고등학생 시절을 끝내고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많이 놀았습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80년대 초반 대학생들이 학부 저학년 때는 고시준비 하는 학생 외에는 공부보다는 놀거나 데모하는 것이 주였다고 조금 과장해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저는 데모 10%, 공부 30%, 노는 것 60% 정도였다고 대충 말씀 드릴 수 있겠네요. ㅋ

학부 1학년 때는 5.17 쿠데타가 일어나서 일찍 휴교를 했죠. 그래서 그때부터 9월 초에 개학할 때까지 신나게 놀았습니다. 클래식 음악다방에 가서 놀았고, 미팅은 가끔 했고, 친구들과 술도 자주 마셨고, 심지어는 프랑스 어를 배우러 간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도 놀았죠. 고향집이 바닷가라서 해변에서도 많이 놀았습니다. 하루는 바닷가에서 장발로 잡혀서 자칫 잘못 됐으면 삼청교육대에 끌려 갈 뻔 했습니다. ㅎㅎㅎ 삼청교육대라고 하면 요즘은 삼청동에 있는 교육대학으로 알아듣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군요.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2010년 4월 4일 일요일

[칼럼-중앙SUNDAY] 권위주의자 남편을 이기는 지혜

원 제목: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 - 맞대응 전략과 가정 자유민주주의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16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