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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5일 일요일

[단상] 고등학생의 진로 선택에 대해서

(서울대 이준구 교수님 게시판, 2010/09/01)

우리나라 대입제도가 복잡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학생을 선발하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이곳에 글을 올리는 고등학생이 가진 문제의식이나 고민도 제가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때에는 그냥 담담하게 제 경험을 풀어놓아서 읽는 분이 뭔가 얻어가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고등학생일 때 막연히 외교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새로운 것을 구경하는 것을 그때도 매우 좋아했습니다. 외교관이 되면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가서 우리나라에서 겪어보지 못하는 것을 많이 접할 수 있겠다는 소박한 생각이었죠. 그래서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고, 학부 2학년 때는 초지일관하여 외교학과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외교학과가 외무고시 준비를 시켜주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외교관이 되려면 따로 시험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1980년대 초반의 학교 분위기는 관료가 되는 것이 과연 잘하는 짓’인가를 고민할 정도였습니다. 외무고시를 준비하는 과정이 ‘무서워’ 보이기도 하고, 군부 권위주의 정권의 관료가 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합리화도 하는 등, 이런저런 이유를 생각하면서 외무고시는 포기했습니다. 어영부영하다 외교학과 석사과정에 진학했고, 미국 대학교 박사과정에 유학도 갔습니다. 학문의 길을 걸었던 것이죠.

외교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있느냐 없느냐는 논란이 있을 정도로 그 범위가 좁습니다. 외교 혹은 외교술이라는 표현은 흔히 쓰죠. 그런데 외국에서도 외교학과 혹은 외교학에 준하는 표현은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외교학과 학생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외교학과’에서 ‘국제관계’(외교학과 영문 이름: Department of International Relations)를 다루는 ‘국제정치학’을 공부한다고 했죠.^^

최근에 정치학과와 외교학과가 합쳤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말 잘 결정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제정치학은 정치학의 한 분과입니다. 국제정치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특히 정치학 전반을 더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회과학 분야도 기본 지식을 더 많이 갖추면 좋죠. 심지어 자연과학적/공학적 지식이 국제정치학을 크게 도울 수도 있습니다. 핵무기의 국제정치학을 상상해 보시면 금방 감이 올 겁니다.

학부에서 3년, 석사과정에서 2년 반을 외교학 혹은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다 미국 대학교의 정치학 박사과정에 들어가니 좁혀져 있던 범위가 거꾸로 넓어졌습니다. 좁게 시작한 것이 별로 바람직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나라에서 공부할 기회가 없었던 ‘합리적 선택이론’이라는 새로운 분야도 소개받았습니다. 오히려 그 분야가 제 흥미를 더 끌었습니다. 그래서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국제정치이지만, 방법론은 경제학의 게임이론을 썼습니다.

세상에는 제가 모르는 것이 매우 많다는 것을 제 공부 경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재미있는지, 무엇이 제 취향과 맞지 않는지도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특히, 접해보지 않으면 거의 모른다고 봐야겠죠. 사람이 잘 바뀌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바뀔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공부의 선호와 취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선택 영역을 좁히면 좁힐수록 모르는 부분이 넓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효율도 고려하고, 현실의 벽도 참작하면 A부터 Z까지 모두 경험할 수는 없겠죠.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잣대를 활용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선생님께서 항상 강조하시듯이 학문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고등학생일 때부터 경제학의 세부 분야를 파고들어서 더 훌륭한 학생이나 학자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선진 교육계의 관행을 참조하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대학도 교양 교육(Liberal Education)을 매우 중시하죠. 여기서 Liberal은 결국 다양한 세계를 만남을 뜻합니다.

지금까지 드린 말씀은 제 경험에 따른 기본에 대한 것입니다. 그 기본을 바탕에 두면서 현실 입시제도의 (별로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는) 요구 사항에 적절히 대처하면 될 것 같습니다. 주어진 입시 환경이 일시에 바뀌지는 않을 테니까요.

(참조)

스탠포드 대학교의 학부 일반 전형에서 요구하는 에세이 문항을 보면 특정 학문의 세부 분야에 대한 지식이나 구체적 진로 계획을 전혀 요구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 대입 전형이 그런 것을 필수 요건으로 따진다면 저로서는 매우 엉뚱하다고 생각합니다.
http://www.stanford.edu/dept/uga/application/freshman/essays.html

댓글 1개:

  1. 이준구 2010/09/01 16:58)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리들이 말하는 게 모두 비슷한 톤인 것 같군요.

    그런데 고등학생들 글 쓴 거 보면 우리 말을 100% 받아들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나름대로의 자기방어 논리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 글 쓴 친구들 정도면 또래 중에서 특히 생각이 깊은 친구들일 것이 분명하지만요.

    윤준현
    (2010/09/01 17:14) 오오 박사님께서 ㅜ.ㅜ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ㅠ.ㅠ

    임형찬
    (2010/09/01 18:01) 교수님 원래 고3 쯤 되는 나이에는 자기 세계가 강하잖아요? 그래서 쉽게 마음으로 받아들이진 못 하는거 같습니다. ^^

    윤준현
    (2010/09/01 18:19) 선생님 위에 썼던 글 선생님 리플 보고서 지웠습니다 ^^

    김우성
    (2010/09/01 18:23)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아마 여기 저를 비롯한 글 올린 학생들의 공통된 생각은 이런 것 같습니다.

    우선 이준구 교수님과 안병길 교수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충고해 주셨던 넓은 세상을 보는 기회를 가지라는 말씀에 그 누구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편협한 교육과정 속에서 순응하도록 길러지는 우리나라의 모든 학생들이 가슴속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다만, 대학 입시에 관련된 부분에서 많은 분들의 오해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저는 물론 경제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고등학교 때 정말 다양한 책을 읽고 싶어서 서울대학교 권장도서 100권 중 최대한 많은 분량을 한 번 이라도 읽어보겠다고 다짐했고, 2년 반 정도의 시간 동안 많은 책들을 읽으면서 새로운 세상과 넓은 세계에 대해 조금이나마 간접적으로 알게 되어서 매우 기뻤던 학생입니다. 물론 제 경험과 지식이 부족하여 그 책들을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제 나름대로 그 내용들을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저의 견문을 넓혀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나 일부 세부 분야에 대한 관심이 약해진 것은 아닙니다. 즉, 특정 분야에 대해 많이 알고 싶은 호기심은 가득하지만, 이를 입시에 '이용'하는 것은 저도 옳지 않다고 봅니다. 다만 '요구' 하기에 '보여주는 것' 뿐입니다.

    김우성
    (2010/09/01 18:25) 게다가 저희 세대는 인터넷이라는 강력한 소통과 정보 유통 도구를 적절히 활용해 옛날보다 본인이 윈하는 특정 분야의 지식을 빨리 받아들일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과거보다 해외의 전문 자료들도 더 빨리 받아들일 수 있고요. 해리포터 번역본이 나오기 이전에, 아마존에서 직수입한 원문을 구매하여, 3일만 읽으면, 결말을 알 수 있는 그런 세대입니다. 아마 이런 정보의 접근성 확대가 좀 더 세부적인 정보들에 대한 요구와 맞물려서 부쩍 이 게시판에 질문이 증가하는 것 같습니다.

    김우성
    (2010/09/01 18:27) 한 말씀 더 드리자면 이 게시판에 행태 경제학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것은 교수님께서 책의 서문을 통해 행태 경제학에대한 관심을 말씀하신 반면에, 아직 우리나라에서 이 분야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를 찾기 힘든 와중에, 이 게시판의 모든 분들이 열린 마음으로 진심어린 조언을 해 주시니까 많은 학생들이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이라고 너그럽게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우성
    (2010/09/01 18:29) 하지만 세상은 넓고 아직 저희들은 보고 배운 것이 좁기 때문에, 인생을 먼저 사시고, 먼저 학문의 길을 걸으신 여러 분들의 말씀은 꼭 새겨들어야 할 것들입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저도 최선을 다 해서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열린 사람이 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purejungs
    (2010/09/02 01:27) 늦게 다시 공부를 하려고 하는 저는 아래 글들을 읽으며 반성도 하고 위안도 얻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자기 분야를 찾겠다고 이렇게들 노력하는데 저는 이 나이 되도록 아직 구체적인 목표가 없어서...(해보지 않아 모른다는 것이 더 맞지만;;)

    다시 공부 하겠다고 선언했으나 '하고 싶어서 한다'는 동기로 하는 것이지 구체적인 목표는 없어 고민이었는데, 윤준현님, 교수님, 박사님 글을 통해 나름?의 위안도 얻고 학생분들 보며 반성하는 기회도 갖습니다.

    이제 겨우 하나를 찾았으니 조금씩 쌓아가면 되겠지요. ^^;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메이데이
    (2010/09/02 08:42) 입시를 앞둔 분들께!

    조상님들이 (대)학교 안 다니고 독학 하신 뒤에 경륜을 펼치셨던 것을 자주 생각합니다. 지금이야 다 다니니까 안 가기도 어렵겠지만, 학교와 전공에 얽매이지 말고 두루 읽고 두루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신체 단련도 빼 놓지 마시구요.

    김우성님/틀림없이 훌륭한 어른이 되실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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