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안병길 편
이 선생님 게시판 이벤트에 제가 참여하지 않으면 왠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 같은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 것 같아서 이렇게 졸고를 제출합니다. 이 선생님의 화려한 회고록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먼지 같은 기억이지만 어여삐 여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어릴 때 복숭아 나무 과수원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유치원 때인지 국민학교 1학년 때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느 날 스케치북을 들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복숭아 밭에 갔던 기억이 아직 납니다. 어머니께서는 예쁜 한복을 입으신 채 점심 도시락을 차리셨고, 아버지는 열심히 복숭아 밭을 메셨습니다. 저는 옆에서 복숭아 나무를 그렸죠.
아버지는 벼농사가 주업인 어느 가난한 농촌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 형제가 셋이었는데 큰할아버지는 그 마을의 유지로서 훈장까지 하셨지만, 막내이셨던 할아버지는 어릴 때 서당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시골 농부로 일생을 사셨죠. 어릴 때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서 후회가 되셨는지, 그 농촌 시골 출신인 아버지를 도회지에 유학 보내셨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이야기이죠.
그 당시 가장 선망하는 학교는 사범학교였다고 합니다. 대구 사범에 응시했지만, 낙방하고 방향을 틀어서 한강 이남 상업학교로서는 가장 좋았다는 부산 상업학교로 진학하셨답니다. 대구 사범에 합격했다면, 박정희 씨의 후배가 되셨겠죠. ㅋ 장남만 아니라면 군인이 되고 싶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랬다면 별 하나 정도는 거뜬히 되었을 것이라고, 별로 농담을 즐기지 않으시는 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6남매 장남이신 아버지는 9남매 장녀이신 어머니와 일찍 결혼하셨고, 부산 상업학교를 졸업하신 다음 손아래 형제들의 뒷바라지를 위해서 바로 은행에 취직하셨습니다. 이후 저희 집을 거쳐 간 친인척이 10여 명 된다고 하시더군요. 아버지는 돈을 버시고, 어머니는 반 무료 하숙을 치는 식이었던 모양입니다. 어릴 때 제 기억에도 거의 항상 친척 한두 명은 우리 형제와 함께 지냈습니다. 요즘 세태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모습이죠.
제 책 감사의 말씀에 아버지 이야기를 가장 길게 적었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자유민주주의자이셨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든지 권위주의적으로 자식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을 내릴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자식 교육에 무관심해서 귀찮아서 그러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원래 스타일이 잔소리하는 것을 싫어하셨던 것 같습니다.
1981년 학부 2학년 때 저는 외교학과로 진학했죠. 학부 4학년이 되어서 유학을 준비할 때 하루는 아버지께서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시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길이는 법대로 갔어도 잘했을 텐데….”
이런… 아버지는 제가 법대로 진학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좀 일찍 말씀하셨어야지요… ^^ 그런데 중고등학교 때 신나게 성적을 받아오던 저에게 한 번도 법대 진학을 권하지 않으셨습니다. 신기한 일이죠. 형들과 의논해서 알아서 결정하라는, 대학에 가보지 않은 당신보다는 대학 경험이 있는 형들 자문을 더 존중해주신 것이었습니다.
“내가 대학에 대해서 뭐 아는 게 있나.”
이런 식이었습니다. 개발 독재 시대를 사시면서도 독재나 권위주의와는 전혀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이셨죠.
대입 준비 때문에 암울한 고등학생 시절을 끝내고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많이 놀았습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80년대 초반 대학생들이 학부 저학년 때는 고시준비 하는 학생 외에는 공부보다는 놀거나 데모하는 것이 주였다고 조금 과장해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저는 데모 10%, 공부 30%, 노는 것 60% 정도였다고 대충 말씀 드릴 수 있겠네요. ㅋ
학부 1학년 때는 5.17 쿠데타가 일어나서 일찍 휴교를 했죠. 그래서 그때부터 9월 초에 개학할 때까지 신나게 놀았습니다. 클래식 음악다방에 가서 놀았고, 미팅은 가끔 했고, 친구들과 술도 자주 마셨고, 심지어는 프랑스 어를 배우러 간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도 놀았죠. 고향집이 바닷가라서 해변에서도 많이 놀았습니다. 하루는 바닷가에서 장발로 잡혀서 자칫 잘못 됐으면 삼청교육대에 끌려 갈 뻔 했습니다. ㅎㅎㅎ 삼청교육대라고 하면 요즘은 삼청동에 있는 교육대학으로 알아듣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군요.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안병길 학생 정말로 참하게 생겼네요.
답글삭제지금의 모습이 약간 있기는 하지만.
선생님, 옛 모습이 참하다고 하시니 제 기분이 좋습니다. ^^
답글삭제아무래도 나이 든 모습보다는 어릴 때 모습이 더 나아 보이는 것 같습니다.